인류 구원의 푸른 숲
- 김월준의 시조세계
김우연(시인·문학평론가)
1. 인간적인 길
김월준 시인은 1937년 경주 황남동에서 출생하였다. 19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조「항아리」및《자유문학》에 시「제삼무대」가 당선되었으며, 1966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나무」가 당선되었다.
첫 시조집『꽃과 바람과』(1996), 제3시조집『푸른 말 내닫다』(2016), 제4시조집『푸른 숲』(2020)을 살펴볼 때 약 60년 동안 그가 일관되게 추구한 시 정신은 한 마디로 ‘푸른’으로 상징되는 구원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시집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푸른’ 색채로 가득한 것이다. 그것은 유한한 존재인 사람이 지구에서 살아가면서 걸어가야 할 가장 바람직한 길을 상징한 것이다. 그래서 대긍정, 사랑, 비움, 나누기, 무위자연, 순리, 이치 등의 고결한 정신세계를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고결한 정신세계는 환경 파괴로 생명마저 위태로운 현시대를 진단하고 고결한 정신과 생명의 합일사상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어떤 종교나 이념을 초월한 것이며 가장 인간적인 길이기도 하다.
세 권에 시조집에 나타난 몇 작품을 통하여 ‘푸른 길’을 거쳐서 마침내 도달한 ‘푸른 숲’의 세계를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2. 『꽃과 바람과』
한량없이/ 담고 싶은/ 부풀은 가슴결에// 주름진/ 시름/ 여울져 번져 가도// 비취빛/ 그리움 속에/ 웃음짓고 싶어라// 살결은/ 곱게 익어/ 상감청 돋아나고// 말 없는 입술에도/ 사려 담은 푸른 사연// 영원을 향한/ 그 울음/ 나래치는 저 靑鶴! -「항아리」전문
19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첫째 수에서는 ‘주름진 시름’도 ‘그리움 속에 웃음짓고 싶어’하는 내면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둘째 수에서는 항아리 외면을 묘사하면서 ‘푸른 사연’을 사려 담고 ‘영원을 향한’고 있다. 김월준 시인이 평생 추구한 ‘푸른’으로 상징되는 시 정신은 등단작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꽃은 언제나/ 꽃으로/ 피어 있길 원하지만// 바람은/ 꽃을/ 그냥 두질 않는다// 쓸어내/ 싹 쓸어 버려/ 소리 소리 치는구나 -「꽃과 바람과」전문
‘꽃’과 ‘바람’을 대립적으로 보고 있다. 사회의 강자와 약자의 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잘 돌아가는 거지」에서는 “시간은/ 앞선이를 밀치기에/ 안간힘을 쓴다// 염치 같은 거/ 아랑곳 없이 밀어내고 보는 걸까// 모두가 재미 있다고 환장들이다”라며 치열한 투쟁의 삶의 현장을 그리고 있다.
하늬 바람/ 거센 속을/ 한사코 비상하며// 넘나 본// 조국 산하/ 푸른 하늘 열릴 곳에// 내일은/ 노을과 같이/ 화사롭게 피여라 -「오늘」셋째 수
남북분단의 아픔과 통일을 염원하고 있다. 통일과 민족의 화합을 ‘푸른 하늘’로 상징하고 있다. 이밖에도「꽃소식」에서도 “잃은 땅/ 저 빙하 속에는/ 남풍마저 없는가”,「대답하라」에서는 “겨레의 빙하에도/ 봄은 언제 오려는가”,「눈 오는 날」에서는 “해묵은/ 마음을 풀고/ 긴 얘기를 나누리라”라며 다수의 작품에서 통일을 염원하고 있다.
한편 김월준 시인은 탄광노동자의 삶을 가장 가까이서 경험하고 목격한 바를 「광부일기」연작시를 통하여 진규폐증을 고발하기도 하고, 섭씨 35도의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들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약한 자에 대한 애정이리라. 그리하여「풀꽃」을 노래하면서 ‘아름다움’, ‘향기’, ‘사랑’, ‘기쁨’, ‘꿈’, ‘내일’이 있다고 격려하고 있다. 풀꽃이란 바로 이 땅의 민초들이 아닌가.
겨울은/ 낙엽으로/ 가을을 밀어내고 있다// 가는 이에겐/ 아무 것도/ 묻지 말라// 언젠가/ 너 나 없이 모두/ 떠나야 할 길인데 -「버리고 떠나기」전문
‘푸른’ 꿈을 품고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하는 시인은 자연에서 공(空)의 깨달음을 얻는다. 낙엽처럼 때가 되면 떠나야 하는 삶이라면 헛된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淸福」에서는 “삶은/ 사랑으로/ 참빛을 뿌리며// 여기 심을/ 아이들 위해/ 땀흘려 일하느라면// 이것이/ 행복이라네/ 이것이 구원이라네”(「청복」둘째 수)라며 성실한 삶이 행복이며 구원이라고 한다.
3.『푸른 말 내닫다』
「시인의 말」에서 “이번 시조집을 나의 스승이신 청마 유치환 선생님과 정운 이영도 선생님께 바친다. 청마靑馬 선생님에게는 시를, 정운丁芸 선생님에게는 시조를 배웠다고.”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시조에 대해서 “시조를 모르고 시를 쓴다는 것은 시의 바탕을 모르고 시를 쓰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시에는 품격과 율격이 있는데 품격은 시조 격조와 정서를 말하는 것이고 율격은 시의 내재율과 외재율을 말하는 것이다./ 시조는 시의 품격과 율격을 대단히 중요시하는 시의 형식이다.”라며 자유시를 쓰는 시인들도 시조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문덕수 선생은 비롯한 성춘복, 허영자, 유안진, 오세영, 정민호, 정일남, 김창완 등 시인들과 구중서 문학평론가의 시조집을 내어 시단의 화제가 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갈 곳을 아는 이는 그래도 행복하다// 꽃샘바람 몰아치는 스산한 날씨에도// 아무도 가지 않는 길, 홀로 찾아 나선다 -「푸른 길」셋째 수
나무가 모인다고 숲이 되질 않는다// 가까운 거리에서 정답게 얘기하며// 서로가 살갑게 굴어야 울창한 숲이 된다 -「나무가 모인다고 숲이 되질 않는다」첫째 수
스멀대던 는개가/ 이제 물러가나 보다// 풀지 못한 매듭들이/ 하나 둘 풀리면서// 말없이, 묵상과 함께// 찾아오는 이 기쁨.// 한순간 지나가는/ 바람인 줄 알았더니// 맑디맑은 마음 하늘/ 수심水深처럼 깊어갈 때// 세상의 깊이와 너비를/ 뚫고 가는 빛이여!
-「개안開眼」전문
위의 세 편 모두 ‘푸른’의 심상을 이루고 있다. ‘푸른 길’, ‘숲’, ‘마음 하늘’이 그것이다.「푸른 길」에서는 “아무도 가지 않는 길, 홀로 찾아 나선다”라는 것은 ‘꽃샘추위’라는 현실적 역경을 넘어서 꽃을 피우겠다는 것이다. 이기심을 넘어선 고결한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나무가 모인다고 숲이 되질 않는다」에서는 “서로가 살갑게 굴어야 울창한 숲이 된다”라고 하여 혈육이든 직장이든 사회인들이든 이기심을 버리고 서로가 이해하고 사랑할 때 숲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생각들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깨달음을 얻었음을「개안開眼」에서 알 수 있다. ‘묵상’을 하면서 찾아온 이 마음은 바람처럼 잠깐 일어난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맑디맑은 마음 하늘 수심水深처럼 길어갈 때// 세상의 길이와 너비를 뚫고 가는 빛이여!”라고 하고 있다.「개안開眼」김월준 시인의 오도송(悟道頌)인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깨달음을 이루면서 살아간다. 그 중에서도 평생의 지침이 되기도 할 깨달음은 자신의 오도송이라 할 것이다. 불가의 선사(禪師)들의 확철대오(廓徹大悟)의 오도송만이 오도송은 아닐 것이다. 김월준 시인은 이 깨달음을 한마디로 “세상을 깊이와 너비를/ 뚫고 가는 빛”이라고 하고 있다. 그것은「가을 길」에서 “사랑과 헌신”이라고 밝히고 있다.「꽃처럼 사람처럼」에서 “모든 걸 버리는 것이 모두 얻는 길이다!”라고 하는 것이「개안(開眼)」의 ‘빛’인 것이다.「빈몸」에서 “가진 것/ 다 내려놓고/ 달마처럼 살다 가리”라고 하는 것이 ‘빛’의 길이다.
평론가 황치복은 시집 해설에서 “푸른 빛의 색채 이미지는 김월준 시조 미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범상치 않는 이미지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푸른 빛의 색채 이미지는 주로 삶의 어떤 신성한 가치나 높은 정신적 가치를 표상하고 있으며, 바람직한 삶의 자세나 태도 또한 함축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4.『푸른 숲』
한 쌍의 원앙처럼 다정스레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짝을 잃어버리면// 저절로 뭉그러지며 어쩔 줄을 몰라라//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보지마는//연민의 정 때문에 잊지 못할 그대여,// “모든 게 내 탓”이라고 통한의 가슴 친다// 잘 가오, 나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소// 울며불며 한 평생을 알뜰살뜰 거뒀지요// 다음에 하늘에서 다시 만나 영원토록 살리라
-「아내를 보내며」전문
시조집『푸른 숲』은 한 쌍의 원앙이었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이며 그 내용이 애절하다. 시조집마다 아내와의 다정한 사랑의 노래를 불러왔는데, 아내를 암으로 갑자기 하늘나라로 떠나보내야 하는 충격과 절망에 통한의 가슴을 치기도 한다. 그러나 ‘하늘에서 다시 만나 영원토록 살리라’라고 자신에게 다짐한다. 소원이란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그때까지는「시인의 말」에서 “살아 있는 날까지 계속 쓸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도시든, 강가든, 어디든, 숲을 가꾸자// 황사먼지, 미세먼지 하늘을 뒤덮는 오늘// 사람이 살 만한 곳은 저 숲밖에 없어라// 숲은 찌든 대기 빨아먹고 산소를 내뿜는// 푸르디푸른 분수, 인류의 생명나무// 신선한 공기 마음껏, 마실 수 있는 터에// 숲 나라, 숲 천국을 만들어 보자구나// 자손들이 이어받아 영영 살아갈 이 땅에……// 수풀은 영혼의 쉼터, 태초의 고향이다! -「푸른 숲」전문
눈을 감고/ 있으면/ 세상 길이 보인다// 강물처럼/ 흐르는/ 푸른 길이 다가서고// 상큼한 발걸음으로/ 함박노을 안고 간다 -「길」전문
집집마다/ 데워주고/ 나라에 힘을 싣던// 함백을 빛낸 이들이/ 여기 모여 있느니// 그 이름 향기로워라/ 영원토록 빛나리 -「함백이여, 영원하라」 전문
「푸른 숲」에서는 생태계가 오염된 요즘에 숲을 가꾸는 것만이 사람이 대대로 살 수 있는 길이라고 하고 있다. 그래서 “푸르디푸른 분수”, “인류의 생명나무”라고 말하고 있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재앙이 지구를 덮고 있음을 느끼는 시대이다. 지금은 거창한 형이상학보다도 가장 시급한 문제가 숲의 복원이라는 것이다. 저 유명한 방거사는 많은 사람들이 ‘신통묘용’을 아주 특별한 초능력적인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을 때 그것을 ‘운수급반시運水及搬柴’라고 하였다. 즉 신통묘용이란 초능력이 아니라 ‘물 길어오고 땔나무 해오는 것’이라며 일상생활 자체가 신통묘용이라고 하였다. ‘숲’은 우리들에게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이젠 우리가 마음을 모아서 가꾸어야 할 때임을 경고하고 깨달음을 주는 시이다.
「길」에서는 ‘푸른 길’이 다가선다고 하여 세상의 중요한 일이 훤하게 보인다고 하고 있다. 이런 길은「빛과 소금」에서는 “사랑과 나눔밖에는/ 더도 덜도 없어라”라고 하고 있다.「원숙」에서는 “사람도/ 날이 갈수록/ 푸르름/ 곱게 익어”라고 노래하고 있다.
「함백이여, 영원하라」는 ‘함백탄광 기념탑 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김월준 시조시인들 중에서 탄광을 가장 잘 알고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다. 대한석탄공사에 30년간 근무하면서 보고 들은 생생한 증언이 바탕이 되어 있다. 석탄은 한 때 이 나라 경제를 살린 원동력이었으며 많은 사상자와 진규폐증 환자가 있기도 했다. 오늘날의 부의 영광에는 이들의 땀과 눈물과 목숨이 있었음을 기억하게 한다. 영월에는 김월준 시인의 시비를 세웠으나 가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5. 구원의 길
이상으로 김월준 선생의 시조세계에서 두드러진 ‘푸른’ 심상을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보았다. 26세에 등단한 후 약 60년을 한결같이 ‘푸른’ 색으로 상징되는 고결한 정신세계를 추구하여 왔다. 지금의 현실은 전 인류가 직면한 생태계의 파괴로 인류의 생명이 위태로움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푸른 숲」에서 숲은 영혼의 쉼터이며 태초의 고향이기 때문에 숲 천국을 이루자고 한다. 숲은 인류의 생명의 나무이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김월준 시인이 끊임없이 추구한 ‘푸른’ 심상은 사랑과 헌신, 순리, 사랑, 비움 등의 바람직한 삶의 길을 제시한 높은 정신세계는 인류의 생명을 지켜주는 ‘숲’과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불가에서 육신은 공(空)이라고 하지만, 이타행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육신이 바로 불신(佛身)이라고 하듯이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위대한 것이라는 진리의 바다에 도달한 것이다. 인류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따뜻한/ 눈빛으로 사물을 꿰뚫으며” 오늘도 세상을 멋지게 가꾸시는데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