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어긋남과 소멸, 그리고 재생
김 금용
최근 『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라는 시집을 내서 화제가 된 최문자 시인의 신작이 마침 『서정시학』에 소 시집으로 묶여 나와서 다시 한 번 마음을 두고 읽게 됐다. 딸과 엄마의 엇갈린 관계를 주제로 하고 있는 「입이 큰 모녀」는 최근 모일간지에 연재되고 있는 공지영의 “즐거운 나의 집”의 주인공인 딸과 이혼을 세 번이나 한 엄마와의 관계를 보는 것 같아 더 관심이 생겼다.
강경호시인의 작품은 마침 가족 간의 단절이 눈에 띄게 증가하는 현대인들의 삶을 통해 <가족>이라는 그 주름진 관계를 되짚어 새겨 볼 좋은 기회로 받아들여졌으며, 신병은 시인의 작품은 위 두 시인의 작품에서 제기하는 단절, 혹은 관계의 문제를 <썩는다는 것에 대한 명상>으로 수렴시켜 디지털화된 세계 속에서 무력해지는 아날로그적 관계, 즉 시간상의 인간간의 단절에 대한 일종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아서 선택했다.
우선 최문자 시인의 시 「입이 큰 모녀」를 읽어보자.
시간을 달라고 하던 어린 딸에게
돈을 주었다
천 원짜리 한 장 들고
울려고 하다말고 학교로 가던 딸
시간을 달라고 하면
돈을 주는 딸
만 원짜리 한 장 들고
울려고 하다말고 마트로 간다
우리는 입이 컸었는데
꿀꺽거리며 패트병으로 하나쯤
서로를 단숨에 들이켜고 싶었는데
너무 뻣뻣한 종이
너무 목마른 지폐로
목을 축이고
눈물 어린 눈을 가리고
둘 다 학교로 갔었다
시간은 참지 못하고
우리를 들이마시고
우리는 시간의 뱃속에 들어가
그 뒤틀린 내장을 지나는 동안
커피 한 잔을 타서 반씩 나누고
마들렌 과자봉지를 뜯어놔도
잠깐만, 잠깐만 딸은 외출하고
모래밭에 혼자 남는다
우리는 입이 컸었는데
큰 입에서 슬슬 나오던 타액처럼
하고 싶은 말이 혀 밑에 그렇게 고였었는데
그래서 죽어라고 목말랐었는데
시간의 生木 자른 자리
모래만 수북하게 남아 있다
-최문자, 「입이 큰 모녀」전문(『서정시학』2007년 봄호)
첫 연은 엄마가 딸에게 돈 천 원을 쥐어주며 학교로 보내고 있다. 둘째 연은 딸이 반대로 엄마에게 돈 만 원을 쥐어주며 마트로 가게 한다. 왜? 그들은 “울려고 하다말고” 학교로 혹은 마트로 가야만 하는 것일까? 그것은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입이 큰 모녀’는 서로에게 말을 하고 싶은데, 두 사람은 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시간을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시의 제목인 ‘입이 큰 모녀’는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핵가족화 속에서 오히려 더 벌어지고 커지는 사랑의 결핍은 “너무 뻣뻣한 종이”와 “너무 목마른 지폐”로 “목을 축이고/눈물어린 눈을 가리고/ 둘 다 학교로”가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입이 컸었는데”라는 시인의 탄식은 대화의 단절이 현 시대에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가를 암시해준다. 따라서 딸과 대화를 하고 싶어서 “마들렌 과자봉지를 뜯어놔도/잠깐만, 잠깐만 딸은 외출하고” 결국 시인은 마른 바람만 서걱거리는 “모래밭에 혼자 남는” 것이다. 그리하여 “큰 입에서 술술 나오던 타액처럼/하고 싶은 말이 혀 밑에 그렇게 고였었는데”, 서로 몇 마디 대화도 나누지 못한 채 “시간의 生木 자른 자리/모래만 수북하게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관계는 가장 근본적인 사랑의 관계가 시작되는 곳이지만, 어쩌면 이 시의 상황처럼 ”시간의 生木 자른 자리“에서 우리는 단지 “입이 큰 모녀”가 되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그런 면에서 강경호 시인의 <세 살 아버지>는 관계의 단절이 아닌,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는 근본적인 가족관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부지런하고 셈을 잘 하던 아버지
늘 엄하고 잘 웃지 않던 아버지
지팡이 짚고 세 발로 걸으시네
어머니 말씀 잘 안듣고
말썽만 부리시네
대꾸는 안하고
히죽히죽 웃기만 하시네
팔십 년 전 세 살 적 아이 되어버렸네
맛난 것만 골라 잡수는 아버지께
생선가시 발라 숟가락에 얹어드리면
내 막내딸 세 살처럼 잘도 받아 잡수시네
길을 가다 힘에 부치면
업어 달라 조르는 철없는 우리 아버지
장성한 자식들 바라보며
아침 나팔꽃처럼 환해지네
점점 나이를 까잡수는 아버지
팔십년 기억 방전되고 있네
덧셈 뺄셈 구구단 모두 잊고
오늘은 배부른 젖먹이처럼
곤하게 낮잠을 주무시네
-강경호,「세살 아버지」전문(『창작21』 2007년 봄호)
이 시에서 시인은 나이를 거꾸로 먹는, 치매에 걸리신 아버님이 “막내딸 세 살처럼” 되어서 “팔십년 기억을 방전” 시키고 계시는 것을 연민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필자 역시 치매 걸리신 시아버님을 6년간이나 시어머님과 함께 수발을 들어 드리면서 많이 힘들었었다. 가족들이 짊어져야 하는 고충은 정신적인 것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무척 힘든 과정이었기 때문에 잘못하면 가족 간의 충돌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었다. 그럼에도 어려운 과정을 잘 견뎌냈던 것은 시어머님이 몸소 감내하셨던 사랑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는 그간의 어려운 사정은 생략하고 “부지런하고 셈을 잘 하시던 아버지”가 “팔십년 전 세 살적 아이”되어버렸음을 이야기 하고 있을 뿐이다. “늘 엄하고 잘 웃지 않던 아버지”가 이제는 어머님 말씀도 잘 듣지 않고 말썽만 부리거나, 길을 가다가 힘에 부치면 업어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배부른 젖먹이처럼 곤하게 낮잠을 주무시는 철없는 아버지가 된 현실은 시인에게 아련한 슬픔을 안겨준다. “장성한 자식들 바라보며/아침 나팔꽃처럼 환해지”는 아버지는 그동안의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고 머지않아 자연으로 돌아갈, 자연을 닮은 아버지인 것이다. 가정의 달, 어버이날이 있는 오월, 나에게 “점점 나이를 까잡수는 아버지”라도 계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끝으로, 신병은 시인의 시 「썩는다는 것에 대한 명상」은, 같은 지면에 발표한 시 「놓아버리다」와함께 소멸과 재생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두엄을 져내면 거기 속 썩인 흔적 환하다
팽개쳐진 것들의 잃어버린 꿈과 상처 난 말들이 오랫동안 서로의 눈빛을 껴안고 견뎌낸 시간, 맑게 발효된 생의 따뜻한 소리가 있다
곁이 되지 못한 시간의 퇴적 속에서 헐어진 채로 낯선 외출을 준비하는 겨울 묵시록, 아직 할 말이 많은 세상의 행방불명된 말들이 다시 한 번 뜨거워지기 위한 기다림이라고 염치도 없이 환하게 닿아오는 맑은 생각,
썩는다는 것은 사라짐이 아니라 뭔가로 다시 태어나고픈 것들이 젖은 기억 껴안고 산란한 눈부신 겨울 우화羽化, 맑게 썩어 향기된 함성들이 하얗게 겨울들녘의 혈맥을 세운다
꽃이, 노란 봄꽃이 되고 싶다고
-신병은,「썩는다는 것에 대한 명상」(『정신과 표현』 2007년 3,4월호)
잠깐 두 작품 간의 상관관계를 돕기 위해서 시 「놓아버리다」를 함께 소개한다.
제자리를 쉬 물러나지 못했던 것들
뼈마디 풀어져 뿌리째 흔들려도 놓지 못한 생의 한 켠이 한순간에 버려진다
이제 그만,
할 일을 다 하지 못한 채 툭툭 세상 밖으로 저를 놓아버린 해쓱한 빛
건어처럼 몸을 말리던 아버지의 병상에서 하얗게 몰려나오던 바람의 사리들, 맑다
놓아버린다
비로소 어둔 꽃들 환해진다
-신병은,「놓아버리다」전문(『정신과 표현』 2007년 3,4월호)
신병은의 시「썩는다는 것에 대한 명상」은 썩는다는 것은 사라짐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것임을, 썩은 두엄을 통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시인은 “두엄을 져내면 거기 속 썩인 흔적 환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팽개쳐진 것들의 잃어버린 꿈과 상처 난 말들이 오랫동안 서로의 눈빛을 껴안고 견뎌낸 시간”이 마침내 “맑게 발효된 생의 따뜻한 소리”를 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시「놓아버리다」 역시 끊어지지 않는, 끈끈한 가족관계를 시인의 뼈아픈 경험을 통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에게 피와 살을 내주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야 비로소 아버지를 “ 놓아버린다”. 그리고 “비로소 어둔 꽃들 환해”지는 것을 깨닫는다. 이 시들은 인간 역시 생성에서 소멸로 이어지는 자연의 순환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러므로 놓아버리는 일이야말로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일이며, 다시 ‘어둔 꽃’들이 환해지는 일이다.
나도 요즘 매일 설거지를 하면서, 음식 찌꺼기를 모아 재활용 쓰레기통에 모으면서 “곁이 되지 못한 시간의 퇴적 속에서 헐어진 채로” 제 형체를 찾아볼 수 없게 마지막 자존심마저 뭉개져가는 모습을 대하게 된다. 나는 그때마다 이 쓰레기들은 언제 “맑게 발효된 생의 따뜻한 소리”를 낼까를 생각한다. 그리하여 내 시들은 이 음식물쓰레기처럼 “할 말이 많은 세상의 행방불명된 말들이 다시 한 번 뜨거워지기 위해”서 또 얼마의 “기다림”이 필요할 것인가, “겨울들녘의 혈맥을 세”우며 “맑게 썩어 향기된 함성들”로 자라서 마침내 “노란 봄꽃이 되고 싶다고 ” 언제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를 읽어보면, 석가는 강가에 가서 사공의 보조가 되어 배 젓는 일을 배우면서 비로소 깨달은 자(覺者), 즉 성불이 되는데, 이는 석가가 흘러가는 강물 속에서 온갖 만상이 함께 하나가 되어 흘러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만물은 죽어 흙이 되고 재가 되어 마침내 물이 되어 다시 우주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고서는 새 봄에 다시 새 싹을 틔우지 못한다는 말씀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자연의 진실은 이렇게 어리석은 우리의 어둔 현실을 깨우쳐준다.
이런 맥락에서 “썩는다는 것은 사라짐이 아니라 뭔가로 다시 태어나고픈 것들”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며 받아들여야 할 것인데, 그러나 실제 우리들은 얼마나 삶을 긍정적으로 비워내며, 미련이니 정이니 일체의 소유로부터 벗어나 모든 욕망을 <놓아버리>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세상이 모가 나고 여기저기 발가벗겨져 피를 흘릴 때일수록 시인들은 눈을 감고 그냥 지나치지 말고 거대한 맘모스 빌딩에 가려진 좁은 뒷골목, 눈여겨보지 않으면 짓밟히고 마는 작고 초라한 사물들에 애정의 눈길을 주어 그들만의 존재의 이유를 밝혀줘야 할 것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대립구조 안에서도 사랑으로 그 모순과 부조리를 뛰어넘으며 긍정적인 시각으로 삶의 가치를 찾아 끌어올리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우리 시인들이 가야할 시의 세계일 것이다.
최근 발표되는 시편들은 점점 <탈중심주의적>존재방식을 지향하고 있는 것 같다. 즉, 시=서정시라는 고정관념을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는 없어도 <은유>보다는 <환유>에 <서정성>보다는 <서사성>에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음을 본다. 즉 이런 시들은 다양성을 지향하는 디지털리즘과 무관하지 않아서, 나무의 중심인 뿌리 외에 곁가지로 나온 뿌리줄기(Rhizom: 리좀)로도 얼마든지 고구마나 감자 따위 열매를 달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시에서 이미 장르의 구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요즘 클래식과 대중가요가 접목되는 것처럼 형식면에서의 일탈이나 낯선 파격은 신선함과 흥미를 유발시켜 읽을거리를 줄 뿐만 아니라 그 실험성으로 하여금 전반적으로 시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다고 믿는다. 토인비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늘 역사는 이러한 반전과 융합 속에서 새롭게 발전되어 왔으며, 그런 혁명 같은 변화를 통해 현대로까지 이른 것이다. 근본적으로 창의성이 우선이어야 할 시인에게 있어 안주하지 않는 변화모색은 반드시 필요하리라고 본다. 따라서 나무와 리좀, 두 개념이 서로 대립과 융합을 통해 길항하며 그 안에서 각자의 삶의 경험과 오랜 사색에서 우러나오는 감동과 진실을 표현해낼 때, 시는 목적한 바를 찾아 물꼬를 열며 세상과 함께 독자에게로 다가갈 것이다. 그리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 시가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이 세 편을 굳이 읽어내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