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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카톨릭 교회(천주교)의 실체
마태복음 16:13-20
1. 들어가는 말
지난달 마지막 주일은 종교개혁 507주년 기념 주일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에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 문 앞에 95개 조의 반박문을 붙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루터 이전에도 종교개혁의 밑거름이 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후스는 교황의 권위를 주장하는 로마카톨릭에 대항하여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였고, 로마카톨릭 교회의 면죄부 파는 것을 반대하다가 순교하게 됩니다.
후스 이후 한 세대가 지난 뒤에 루터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 루터로부터 종교개혁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루터를 종교개혁 1세대라고 부릅니다. 이후 루터의 종교개혁을 이어받은 사람이 칼빈입니다. 우리는 칼빈을 종교개혁 2세대라고 부릅니다. 우리 장로교회는 칼빈의 종교개혁 정신을 이어받아 세워진 교회입니다.
종교개혁 1세대와 2세대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종교개혁 1세대는 예배 의식이 로마 교회와 유사합니다. 그러나 그 고백하는 믿음은 다릅니다. 루터교회에 가 보면 로마카톨릭 교회와 예배 의식이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2세대는 다릅니다.
종교개혁 2세대 교회는 성례를 중요시하는 로마 교회와는 달리 믿음을 중요시합니다. 요한복음 4:24절 말씀과 같이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현재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신자가 많은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물론 이 기독교의 범주 안에는 로마카톨릭과 동방정교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신자 숫자를 보면 로마카톨릭이 가장 많고, 개신교, 동방정교회 순입니다. 이렇게 보면 세계 인구 중에서 개신교도들의 숫자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나라 종교인들 중에는 개신교가 가장 많고, 불교, 천주교 순입니다. 그런데 종교인구의 변화를 보면, 기독교와 불교는 점점 그 숫자가 줄어들고 있고, 천주교만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기독교인은 줄어들고 천주교인은 늘어나는 것은 우리 교회에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에서 성장하고 있는 3대 종교 세력이 있는데, 이단과 천주교와 이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 종교집단의 성장은 한국교회의 최대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 주일을 지나 보내면서, 한국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3대 종교 세력 중의 하나인 천주교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2. 하나의 교회
교회는 본래 천주교 하나였습니다.
이 천주교에서 유래되어 나온 것이 개신교회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약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성육신하셔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해 주시는 구속 사역을 성취하신 후에, 이 땅 위에 세워진 첫 번째 교회가 바로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신약의 교회는 이후 사마리아, 안디옥, 에베소, 빌립보, 등등의 지역으로 확장되어 나갔습니다.
그 당시 교회는 로마 정부가 인정해 주는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당국으로부터 불법적인 종교 취급을 받아서 종교적인 박해를 받게 됩니다. 교회는 이후 로마의 10대 박해기를 지내오면서, 숨어서 은밀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신앙을 전파하고, 신앙을 지켜 왔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려면, 로마 당국자들로부터 고난과 박해는 물론이고, 심지어 순교까지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받아들이고, 신앙고백을 하였던 성도들은 어떤 사람이었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신앙을 위해서라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나의 생명까지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각오와 결단이 없이는 박해기 동안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질 수도 없었고, 고백할 수도 없었습니다.
당시 신앙환경은 오늘날과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가졌다고 정부나 사회로부터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고 신앙을 가지고 신앙을 고백하며 살 수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좋은 환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더 진실하게 더 열심을 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우리와 같은 민족이지만 전혀 다릅니다.
지금 북한에도 예수님을 믿고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공산당들이 신앙을 가졌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숨어서, 은밀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이 발각되게 되면 곧바로 잡혀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지금 북한에는 정치범 수용소에 약 20만 명이 갇혀 있다고 합니다.
그중 절반이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갇혀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평생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살게 될 것입니다. 그중에 교회 지도자급 인사들이 붙잡히면 본보기로 인민 재판을 받고 순교 당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북한의 교회는 지하교회 형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남침을 해서 한국교회가 북한의 지배 아래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유물론적인 가치관과 인본주의적인 사상을 가진 북한,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북한 당국자들에 의한 종교적인 박해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려고 그 가진 신앙을 부인하고 교회를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물론 더 많은 사람들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믿음 때문에 당하는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가진 신앙이 확고한 사람들입니다.
로마의 10대 박해가 있을 때 교회는 이렇게 신앙이 확고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박해라는 극한 상황 속에 살면서도 그 가진 신앙의 지켜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AD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밀라노에서 칙령을 공표하였는데, 그 칙령은 ‘기독교를 위시한 모든 종교에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더 이상 로마 당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후 교회는 공개적으로 신앙을 표현하며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반세기쯤 지나게 되자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AD 380년에 테오도시우스 대제는 아예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언하게 됩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로마 황제와 그 가족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기독교가 이전에는 로마가 배척하는 종교였지만, 이제는 기독교 신앙이 출세하고 성공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황제와 신분이 높은 관료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 교회로 몰려 들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으면서도 성공을 위해 출세를 위해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교회는 급격하게 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출세를 위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태로 시간이 지나가면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소수가 되고, 신앙도 없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다수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상을 보면서 많은 역사학자들이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교회는 세속화의 길을 걸어갔다.’라고 평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대 현상을 보는 또 다른 견해도 있습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게 된 배후에는 교회를 보존하고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로마의 10대 박해 이후에도 계속 해서 박해를 받았더라면, 마치 지금의 북한 교회와 같이 교회는 위축되고, 그 신앙을 보전해 나가는 것이 심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게 하심으로, 교회가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보존되고 성장해 가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이 좋은 기회를 잘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교회는 이 좋은 기회를 전도의 기회로 삼고, 신앙을 굳건하게 세워 나가는 기회로 삼지 못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우호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급격하게 성장해 갔으나, 이 수적 성장에 안주하여서 교회가 세속화되어 가는 것을 막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교회의 경험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한국교회는 교회 성장기인 1960년대 이후에 급격한 성장을 이루어 왔습니다. 이때 한국교회는 이 좋은 기회를 교회의 규모를 늘리는 기회로 삼아 왔습니다. 그래서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교회 성장이 한국에서 일어났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교회 성장에 안주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대형 교회들이 많이 세워지고, 신자의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났지만, 그 반대급부로 교회가 세속화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세속화의 길을 걸어온 결과 오늘날에는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저래도 괜찮은가?’라고 하며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염려해 주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지금은 별 희한한 교회들이 다 세워지고 있습니다. 동성애를 지지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정치인들이 모여 세운 정치단체와 같은 교회도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은 완전히 다른 공동체입니다.
이 차이가 확실한 교회가 참 교회입니다. 교회가 전하고 있는 메시지와 세상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달라야 합니다. 교회의 가치관과 이 세상의 가치관은 달라야 합니다. 교회 성도들의 생활 방식과 세상 사람들의 생활 방식은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세속화된 오늘날에는 교회나 세상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과거 로마 교회가 그랬습니다.
로마 교회는 세상과 전혀 구분이 되지 않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로마 교회는 세상 권세 자들과 똑같이 교권과 신적 권위를 내세우며 각종 악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한 부작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중세 로마카톨릭은 더 이상 교회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세상 속에 세워두신 교회는, 마치 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사단의 왕국과 같이 되어 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중세 로마카톨릭의 모습이었습니다.
3. 종교개혁 – 개신교와 로마카톨릭의 분리
이런 상황 속에서 일어난 것이 바로 종교개혁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던 16세기만큼 그 외형적인 모습으로 볼 때에는 더 종교적인 시대는 없었습니다. 당시 인구 3만 명이 살던 독일 콜론이라는 자그마한 도시에, 100여 개 이상의 교회와, 100여 개 이상의 기도처가 있었고, 수도원의 숫자도 100여 개가 넘었다고 합니다. 도시 전체가 교회, 기도처, 수도원이 널려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이 상황을 지금 우리 입장에서 정리해 보면 이렇게 됩니다.
2024년 2월 현재 노원구 인구가 497,097명이라고 합니다. 당시 독일 콜론의 상황을 노원구에 적용해 보면 이렇게 됩니다. 노원구에 교회가 1,660개 이상이 있고, 기도처가 1,660개 이상이 있고, 수도원이 1,660개 이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약 5,000개 가까이 되는 종교시설들을 이 좁은 노원구에 흩어놓으면 아마 노원구 어느 골목길을 가나 거기에는 교회와 기도처와 수도원이 여러 개씩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성도들은 매주 돌아가면서, 금주에는 이 성자, 다음 주에는 저 성자를 기념하는 예배에 참석하였다고 합니다. 종교개혁 당시에는 종교가 생활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역사상 이처럼 종교적인 시대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사회 전체가 종교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신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은 거의 이교 신앙에 가까웠습니다. 교리적으로도 아주 잘못되어 있었고, 도덕성 또한 심각하게 타락해 있었습니다.
당시 종교지도들이었던 교황과 신부들과 수도사들은 돈과 여자와 권력을 탐닉하였습니다.
또 부당하게 세금을 많이 거둬들이고, 첩을 여러 명 두는 축첩제도까지 시행하였다고 합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1520년 독일 귀족에게 고함이라는 작은 책자를 통해 로마카톨릭의 부패상을 이렇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자칭하면서,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뽐내고 있는 기독교의 우두머리라고 하는 자가(교황) 어떤 왕이나 황제도 따라갈 수 없는 극치의 세속적 영화 속에 사는 것을 볼 때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황제가 1층 왕관을 쓰고 있는데 교황은 3층 왕관을 쓰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 또 교황청의 부패상은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다. ’성직 매매, 술주정, 사기, 도적질, 강도질, 사치, 매춘 행위, 협잡질‘ 등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들로 가득 차 있다. 적그리스도가 와서 다스린다고 해도 이보다 더 부패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보나롤라는 이런 교황청의 부패상을 지적하면서 ‘네 자식을 못 쓰게 만들려면 성직자를 만들어라.’라고 하며 당시 교황청의 타락상을 통렬하게 비판하였습니다. 1538년에는 로마의 추기경들이 바울 3세에게 보낸 개혁의 제안에서도 당시 로마 교회의 타락상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병폐는 성직자의 임명 문제입니다. 어떻게 철없는 아이들이 성직자로 임명되고, 심지어는 자격이 없는 무뢰한과 타락한 자들이 성직자로 임명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성직을 돈을 주고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돈만 주면 성직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성직자가 되니 어떤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또 로마시 안에 있는 창녀들이 귀부인들처럼 옷을 입고 왕래하는데 그들의 뒤를 성직자들이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부끄러운 병폐가 중단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이 추기경들의 개혁 제안은 로마 교회가 얼마나 극심하게 타락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루터 당시 레오 10세가 교황이었는데 그의 부패상도 대단했었습니다.
그는 면죄부를 팔아서 성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는 기금을 마련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교황의 명령을 받고 면죄부 판매에 앞장섰던 사람은 테젤입니다. 테젤은 이렇게 선동했습니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과 성 베드로가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 그리고 여러분이 사랑하는 죽은 친척들과 죽은 친구들이 여러분을 향해 애원하며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는 무서운 고통 중에 빠져 있는데 당신들의 적은 돈으로 우리를 건져 낼 수 있지 않소.’ 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헌금하는 그 동전이 여러분의 부모들을 구원해 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헌금하는 그 동전이 헌금 궤 속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금화 한 폴로틴의 1/4을 지불하고 이 면죄부 증서를 사서 그들의 영혼을 낙원으로 인도하시기를 윈치 않으십니까?’
당시 사제들은 거대한 성 베드로 성당 건축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서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사제들은 면죄부를 사기만 하면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낙원으로 올라간다고 전하고 외쳤습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입니까? 그런데도 당시 사제들은 면죄부에 무슨 효력이 있는 것 같이 가르치고 팔았습니다. 당시 신자들은 사제들이 전해주고 있는 그 말을 믿고 죽은 부모, 죽은 형제들을 위해 면죄부를 샀습니다. 이것은 당시 로마카톨릭 교회가 얼마나 비성경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간파한 인물이 바로 마틴 루터였습니다.
루터는 1502년 비텐베르그 대학 교수로 있을 때, 로마서 1:16-17절 말씀 즉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이 말씀을 붙잡고 종교개혁을 시작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 복음을 루터가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닙니다.
이 복음은 이미 아브라함이 발견하였던 복음이었습니다. 창세기 15: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하박국이 이미 고백하였던 복음이었습니다. 하박국 2:4절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복음은 바울이 재확인하였던 복음이었습니다. 로마서 1: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복음은 후에 어거스틴이 발견하였고, 또 루터가 발견하였습니다.
루터는 그가 깨닫게 된 복음에 대해 이렇게 전합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은혜와 순전한 자비를 통해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의임을 나는 파악하게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부 하나님께는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신적인 의가 있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도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의, 신적인 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는 또 한 가지 의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통해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주시고, 부활하셔서 이뤄주신 복음의 의입니다.
다시 설명하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는 예수님 자체가 가지신 신적인 의가 있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메시야 사역을 통해 성취하고 완성하신 또 한 가지 의가 더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의를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 의가 바로 이 복음의 의입니다. 아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는 이 하나님의 의를 깨닫기 전의 루터는, 비텐베르그 신학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도 늘 신앙 안에서 갈등하고 고민하였습니다. 이런 루터가 로마서 1:17절 말씀을 통해, 복음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예수님의 의를 깨닫고 난 후에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나는 마치 새롭게 다시 태어나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해 낙원으로 들어간 듯한 느낌이었다.’ ‘바울이 전하여준 이 구절이 나에게는 하늘로 가는 대문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이후에 성경을 다시 보니 ‘성경 전체가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되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한 깨달음은, 이후 루터의 신앙과 삶에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루터는 복음의 진리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확신과 힘을 받아가지고, 당시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 교황과 그 교권주의를 대항하여 홀로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게 되었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깨닫게 된 이후 루터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 당시 로마 교회를 조명해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당시 로마 교회가 너무도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로마 교회가 가르치고 있었던 잘못된 교리적인 문제와 그 살아가는 삶을 통해 나타나는 부패상을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서, 1517년 10월 31일에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앙에 따라,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그 성당 문에 내 걸었던 것입니다.
루터가 내 걸었던 95개 조항의 반박문은 요원의 불길처럼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 내용을 몇 가지만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1조에서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회개는 일생동안 계속되는 회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루터는 무엇보다 회개가 중요함을 강조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전파했던 첫 메시지에서도, 세례자 요한이 전파하였던 첫 메시지에서도 공히 회개였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같습니다.
우리들도 가장 먼저 전해야 하는 것은 회개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평양 대부흥이나, 인류 역사 속에 있었던 세계적인 대부흥의 역사들은 언제나 회개한 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3조에서는, ‘참 회개는 내적으로는 참회로, 외적으로는 육욕의 죽임으로 나타나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참 회개는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먼저는 마음으로 회개하고, 그다음에는 회개의 구체적인 열매가 그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고 합니다. 내적 참회와 외적 육욕의 죽임이 동반되지 않은 회개는 참 회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8조에서는, ‘고해와 참회는 산 자에게만 적용되지 죽은 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면죄부를 팔았던 로마교회 어떻게 가르쳤습니까? ‘당신의 헌금이 연보 궤에 들어가는 소리가 땡그랑 하고 들릴 때, 죽은 자들의 영혼이 연옥에서 낙원으로 옮겨진다.’라고 하며 죽은 부모와 형제를 위해 헌금하기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이것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입니다. 고해와 참회는 산 자에게만 적용되지 죽은 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8조에서는 루터는 당시 면죄부를 팔기 위해 했던 설교들은, 이교적인 설교이고, 잘못된 설교라고 비판하면서, ‘이렇게 가르치는 자들이나 이것을 참이라고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행위들은 전혀 신앙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36조에서는, ‘진정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람이 누구든지 형벌과 죄로부터 완전한 사함을 누리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구원은 면죄부를 사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진심을 담은 회개를 통해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95개 조항까지 있으니까요.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 모든 것을 다 살펴보는 것은 한 시간의 예배 시간으로는 무리입니다.
이상의 사실들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시 로마 교회는 교회도 아니었습니다. 로마 교회가 전하고 있었던 복음은 참 복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루터가 깨닫고 확신했던 이 복음의 확신은, 이후 필립 멜랑톤, 존 칼빈, 쯔빙글리, 부처 등 수많은 개혁 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이후 거대한 개혁의 물결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러자 로마 교회는 그 권력과 힘을 가지고 종교개혁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루터의 가르침에 목숨을 걸고 따랐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독일 슈피레스에 살던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개혁자들이 주장하였던 성경적인 신앙을 천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 외에 확실한 가르침이나 교리는 없다.’고 우리는 선언하는 바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교리도 전파되어서는 안 된다. 거룩하고 신성한 성경의 각 본문은 다른 성경 본문에 의해 밝혀지고 설명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에 의하여 오직 하나님의 말씀 즉 신구약 성경에 들어 있는 거룩한 복음만을 지키기로 결심하는 바이다. 오직 복음의 말씀만 전파되어야 하지 다른 어떤 것도 전파되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오직 성경만 유일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성경만 기독교 교리와 행위의 확실한 규범이다.’ 수피레스 사람들은 당시 부패하였던 로마 교회와 맞서서 하나님의 말씀에 최고의 권위를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신앙과 행위의 규범으로 삼았습니다.
4. 로마카톨릭의 잘못된 가르침
종교개혁은 로마카톨릭의 교리적, 도덕적 부패를 개혁하고자 시작된 운동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런 로마카톨릭이 성장하고 있고, 심지어 기독교 신자들 중에서 로마카톨릭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신부는 교회들에게 ‘교회에서 성당으로 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우리는 감당할 수가 없으니, 교회가 그런 사람들이 성당으로 오지 않도록 잘 단속해 달라.’라는 말까지 했다고 합니다. 만약 교회가 이런 사람들에게 로마카톨릭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가르쳤더라면, 이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 카톨릭으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는 로마카톨릭이 어떤 교회인지 잘 알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러면 로마카톨릭의 잘못된 점은 무엇입니까?
첫째, 로마카톨릭은 교황 중심의 교회입니다.
천주교는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마태복음 16장에 근거하여 교황을 베드로의 후계자, 교회의 머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이것 하나만 봐도 로마카톨릭이 얼마나 반기독교적이고 반 신앙적인 곳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로마교회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바요나 시몬에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분은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라고 칭찬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천국 열쇠를 받은 특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베드로가 로마의 초대 감독이었고, 로마에서 순교하였다고 하면서, 로마카톨릭에서는 이후 로마 교황이 바로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1439년 프로렌스 공의회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규정한다. 거룩한 사도 적 교황 청과 로마 교황은, 전 세계 위에서 최고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 로마 교황은 사도 중의 왕자인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그리스도의 진정한 대리자이고, 전교회의 머리로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와 교사다. 이것은 예수님에 의해 주어진 권세이다.’
나중에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황 무오설까지 천명하였습니다.
‘로마 교황이 교황석에서 발언할 때에는 그 모든 발언은 무오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교황이 그 직위에서 행한 모든 것은 오류가 없으며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로마교회는 예수님 중심의 교회가 아니고, 교황 중심의 교회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로마카톨릭의 잘못된 점은 무엇입니까?
둘째, 마리아 숭배 사상입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하며 존경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 마리아가 갑자기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불리면서 마리아 숭배 사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서 나중에는 ‘마리아는 원죄가 없다.’라는 무죄 교리가 나왔고, 여기서 마리아가 죄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무염 잉태 교리가 나왔습니다.
1950년 11월 1일 교황 피오 12세는 ‘마리아가 부활하고 승천했다.’라는 마리아 승천 교서를 발표합니다. 그리고 또 마리아가 우리의 중보자라는 마리아 중보 교리와 마리아가 승천하여 하늘 황후가 되었다는 마리아 황후 교리로 이어집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입니까?
로마카톨릭은 이런 말들을 통해, 마리아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서 중보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로마카톨릭은 이런 시도를 통해 마리아를 하나님 반열에 올려 두었습니다. 이런 사상들을 1954년에 실질적 율례로 정하고 있는 것이 로마카톨릭입니다.
이 마리아 숭배 사상은 천주교의 성인 숭배 사상과 같이 갑니다.
로마 교회가 처음에는 성인들을 존경하다가, 나중에는 성인들에게 기도하면 성인들이 그 기도를 중재해 준다는 성인 중보 사상이 나왔습니다. 이런 로마카톨릭 교회는 이제 더 이상 기독교 신앙을 가진 교회라고 할 수 없을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로마카톨릭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로마카톨릭의 잘못된 점은 무엇입니까?
셋째, 로마카톨릭은 교황을 머리로 하는 지상 교회의 가시적 통일을 꿈꾸고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회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믿음으로 영생에 참여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로마 교회에서는 성례를 아주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로마 교회는 ‘성례가 없이는 구원도 없고 영생도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로마 교회 예배는 성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로마 교회는 이 성례를 교회를 일치시키는 수단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로마 교회는 하나의 교회를 주장하며, 교황을 머리로 하는 지상 교회의 가시적인 통일을 꿈꾸고 있습니다. 여기서 발전되어 나온 것이 바로 신앙과 직제 일치운동입니다. WCC는 신앙과 직제 일치운동을 통해 개신교와 기독교 계열의 모든 종교와 천주교의 종교통합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더 발전되어 나온 것이 바로 종교다원주의입니다.
이 종교다원주의는 교회의 통합과 일치를 넘어서서, 이방 종교들까지 모든 종교를 하나로 일치시키려고 하는 시도입니다. 이 종교다원주의의 선언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천명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였던 김수환 추기경은 철저한 종교다원주의의 신봉자입니다.
종교다원주의는 산 정상에 올라가는 길이 여럿이 있듯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도 여럿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종교를 구원의 방편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중욜한 것은??? 종말 시대가 되면 이 종교다원주의 신봉자들이 나중에는 거짓 선지자가 되어서, 적 그리스도의 등에 올라타고 사람들이 적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도록 하고, 사람들이 적 그리스도를 믿고 신봉하게 할 것입니다. 종말 시대의 배교는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한 종교다원주의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로마카톨릭 교회를 기독교 교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5.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가르침
진리에서 벗어난 로마카톨릭 교회를 개혁하고자 일어난 사람들이 바로 종교개혁 자들입니다.
종교개혁은 여러 나라에서 일어났고, 그 결과 다양한 개신교 교파를 이루어 왔습니다. 그 모든 종교개혁 자들을 하나로 아울러서 부르는 호칭이 바로 개신교입니다. 그러면 교파마다 조금씩 교리가 다른 개신교 종파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는 핵심적인 신앙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첫째, 오직 성경입니다.
교회가 가진 가장 핵심적인 신앙은 오직 성경에 있습니다.
개신교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받아들이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오직 성경은 개신교 종파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는 끈입니다. 여기서 벗어나면 개신교 종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벗어난 몰몬교를, 전도관을, 통일교를 이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리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잘못되어 있던 로마카톨릭에 맞서서 오직 성경을 강조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으로 돌아가고, 초대교회로 돌아가서, 성경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초대교회의 신앙을 그대로 계승하려고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직 성경은 신구약 성경 66권을 우리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으로 삼는 신앙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가 고백하고 있는 신앙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보에 보면 이렇게 우리 교회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참빛교회는 대한예수교 장로회총회(합동)에 소속되어 있는 복음적인 교회로서 오직 성경만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원리요 규범이요 질서로 믿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이 고백을 통해 우리 교회가 종교개혁 신앙 위에 서 있는 교회라는 것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경 중심의 신앙을 가졌던 종교개혁자들은, 이 성경을 로마 교회와 같이 사제들만 독점하지 않고, 각국의 언어로 번역하여 성도들에게 보급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말씀 중심의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또 개신교 종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핵심적인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둘째, 오직 믿음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이신칭의 신앙을 말합니다.
로마 교회와 개신교회의 가장 다른 점은 바로 이 칭의 교리에 있습니다.
로마 교회의 칭의 교리는 사람이 죽는 그 순간까지 이루어지는 점진적인 칭의를 가르쳤습니다. 이런 칭의 교리를 가진 로마 교회 성도들은 그 누구에게도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끝까지 가서 죽어봐야 구원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교회에서는 누구라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면 이단이 됩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달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는 단회적 칭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을 이신칭의 교리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5: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로마서 1:16-17절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에베소서 2:8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런 말씀들에서 보듯이, 개신교 성도들은 내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개신교 종파들을 하나의 교회로 묶어주는 또 하나의 끈입니다.
또 개신교 종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핵심적인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셋째, 만인 제사장의 원리입니다.
이 신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이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당시 로마카톨릭의 중요한 가르침인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사제들이 있다는 가르침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혁명적인 주장이었습니다. 이 만인 제사장의 원리는 오직 그리스도만 인류의 구원자이시고, 대속자이시고, 중보자이시라는 신앙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더 있지만 이 세 가지가 개신교 종파들을 하나의 교회로 묶어주는 핵심적인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6. 종교개혁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째, 교회는 종교개혁 정신을 회복하여 계속해서 개혁 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흐르는 물이 멈추면 썩게 되듯이 교회가 자기 개혁을 멈추면 그때부터 교회는 병들기 시작합니다. 교회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회복하여서 계속 자기 개혁을 해나가야 합니다.
둘째, 종교개혁의 신앙을 가르쳐서 성도들이 종교개혁 신앙을 가진 것에 자긍심을 갖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교회의 부패를 바로잡아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참 교회로 세워 나가는 것에 자긍심을 가졌듯이, 오늘날 성도들도 종교개혁 신앙의 자긍심을 가지고, 세상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동기 부여를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종교개혁의 신앙과 정신이 들어가는 곳마다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막스 베버는 칼빈주의가 들어가는 곳마다 자본주의가 꽃이 피어나고 민주화가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의 근대화도 종교개혁 신앙을 가진 선교사들이 와서 우리 민족에게 종교개혁 정신을 심어준 결과의 산물입니다.
이렇게 볼 때 종교개혁의 정신이 한국의 근대화를 이끌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였으며, 세계관의 변화를 가져다주었으며, 각종 미신과 구습의 제거 해 주었습니다.
또 우리 민족이 일본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영향을 주었으며, 그 후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발달에 너무도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왔습니다. 이렇게 종교개혁의 신앙과 정신은 우리 민족의 문화를 변혁시키는 중요한 사명을 감당해 왔습니다.
1919년 3월 1일 3.1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그 당시 기독교 인구는 전체 국민의 약 2%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삼일운동을 주도했던 33인 중에 기독교인은 16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외에는 천도교 인이 15명이고, 불교 신자가 2명이었습니다.
기독교인 참여자 16명 중에 7명이 장로교 인이고, 5명이 평양신학교 출신이었습니다.
또 전국에 흩어져 있었던 교회들을 중심으로 해서 3.1 만세운동이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변화하고 발전되어 온 오늘날 대한민국과 기독교 신앙과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 속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들이 믿음으로 각성하고 다시 일어서게 되면, 한국교회는 앞으로도 이 민족을 선도해 나가는 중요한 주체 세력이 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주일을 맞이하며 믿음으로 다시 이 민족을 변화시켜 나가는 교회로의 각성이 일어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오늘 종교개혁 시대를 되돌아보면서 얻게 되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첫째,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 교회와 같이 자기 개혁을 게을리하면 교회는 세속화되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종교개혁이 왜 일어났는지를 이해하고 널리 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성도들이 천주교와 이단에 빠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셋째, 신앙은 삶으로 실천하며 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지 않는 교회는 사이비 이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믿음의 대가를 지불할 각오를 하고 살아가는 실천적인 신앙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넷째, 우리의 개인 구원은 반드시 사회 구원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교회와 사회와 국가를 별개로 보지 않고 유기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국가의 아픔과 사회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보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깨어 있는 삶이 우리들이 가지고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금 년은 종교개혁 507주년, 평양대 부흥 운동 117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후예들입니다. 우리는 이 종말이 임박한 시대 속에서, 내가 감당 해나가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인식하고, 그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종교개혁의 후예로서, 21세기 이 한국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을 감당해 나가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