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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익산향토문화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귀희
제133차 완주군 답사 (청명하고 푸른 가을날. 10월 9일 토요일)
아침 9시 시청 앞에 9명의 향토회원님들이 10월의 답사를 떠났다. 덕담과 따뜻한 커피한잔을 나누고 우린 두 대의 승용차로 불명산 화암사로 출발하였다. 우리보다 먼저 전주에서 출발하신 최옥환원장님을 그곳 주차장에서 만났다. 오늘의 해설은 최옥환원장님과 전창기선생님께서 수고하여 주시기로 하였다. 일정 : 불명산화암사, 고산향교, 점심, 위봉사, 위봉산성, 종남산송광사. 참석인원 : 김광태고문님, 김이화, 김영자. 송호종교수님, 이귀희, 전창기선생님, 채승묵선생님, 최옥님, 최옥환원장님, 이번답사에 회장님께서 이병기시조문화행사로 인해 참석하지 못하셨다.
화암사[花巖寺]
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庚川面) 가천리(佳川里) 불명산 기슭에 있는 사찰. 694년(신라 진성여왕 3) 일교국사가 창건하였으며, 부분적인 중건 중수를 거쳐 1425년(세종 7) 해총(海聰)이 중창하였다. 불명산의 원시림이 병풍처럼 둘러 있으며, 이곳에서 원효, 의상대사가 수도하였고, 설총이 공부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국내 유일의 하앙식 건축양식인 화암사 극락전(보물 제663호), 한국 고대 건축양식을 대표하는 화암사 우화루(보물 제662호)를 비롯해 화암사 동종(전북유형문화재 제40호), 화암사 중창비(전북유형문화재 제94호) 등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극락전은 1425년에 세워진 불전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식(多包式) 맞배집으로 잡석 기단 위에 자연석 덤벙 주추를 놓고 그 위에 민흘림기둥을 세웠다.극락전 안에는 관세음보살상을 모셨고, 전통적인 탱화 기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고승들의 영정 7폭을 보존하고 있다. 우화루는 사찰 전방에 일반적으로 놓이는 누각 형식의 건물이다. 지층에는 기둥을 세워 외부와 통하게 하고, 뒤쪽에는 축대에 맞추어 2층 마룻바닥이 내정의 지반과 거의 같게 만들어 앞에서 보면 2층이지만 내정에서는 단층으로 보인다.
우린 멋진 선생님들과 푸르고 높은 가을하늘 하이얀 구름을 바라보며 불명산을 구비 구비 휘돌아 내려와 잔디에 자리를 펴고 삶아온 고소한 밤과 달콤한 고구마, 따뜻한 커피한잔에 담소를 나누고 다시 답사길 고산향교로 떠난다.
고산향교[高山鄕校] 전북유형문화재 제116호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읍내리 143번지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방 백성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국가에서 세운 지방 교육기관이다. 이 향교는 태조 7년(1397)에 건립을 하였으나 정종 2년(1399)에 원인모를 화재로 불에 타 없어진 것을 다음해에 다시 세웠다. 그러나 이때 세운 건물 또한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때 왜구들의 손에 불타 없어졌다. 현재 있는 대성전과 명륜당은 선조 34년(1601)과 37년(1604)에 각각 세운 건물로 여러 차례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의 건물로 되어 있고 이 명륜당을 중심으로 뒤쪽에 있는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역시 지붕은 옆면이 사람(人)자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안에는 ‘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 쓴 공자의 위패를 중심으로 중국의 사성(四聖)과 중국 송나라의 사현(四賢)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동쪽에는 우리나라의 설총, 조광조, 이황, 이이 서쪽에는 최치원, 정몽주, 조헌, 송시열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문묘에 제사 지내는 것을 석전제라고 하는데, 향교에서는 봄과 가을 2차례에 걸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우린 고산향교에서 12시 40분, 최원장님의 해설을 듣고 나와 오늘이 장날인 고산시장 부근에서 유명한 구수하고 맛있는 소머리국밥으로 행복한 점심을 나누고 위봉사로 출발한다.
위봉사[威(圍)鳳寺]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所陽面) 추줄산 중턱에 있는 사찰이다. 604년(백제 무왕 5)에 서암(瑞巖)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확실한 증거는 없고, 극락전중수기(極樂殿重修記)에 전설적인 설화가 실려 있을 뿐이다. 이에 따르면 신라 말기, 최용각(崔龍角)이 말을 타고 전국 산천을 유람할 때, 봉산(鳳山) 남쪽에 이르러 등나무 덩굴을 잡고 겨우 산꼭대기에 올라가니 어떤 풀섶에서 상서로운 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 빛을 따라가 보니 거기에는 세 마리 봉황새가 날고 있어 그는 여기에 절을 짓고 위봉사(圍鳳寺)라고 하였다고 한다.
위봉사 보광명전[威鳳寺 普光明殿] 보물 제608호
1977년 8월 22일 보물 제608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지어진 사찰건축이다. ‘보광명전(普光明殿)’이라는 현판 옆에 도광(道光) 18년(1835:조선 헌종 1)에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건축 연대는 그 이전일 것이 분명하다. 자연석으로 기단을 쌓고 가운데에 돌계단을 만들었으며 정면 3칸은 모두 각각 세 짝의 문을 달았다. 이들 문짝 아래 부분에 궁판이 있고 문살 형식은 넉살무늬로 되어 있으며, 세 짝의 문은 처마 밑에 달아매게 만들어졌다. 가구(架構)는 높은 기둥을 사용한 고주(高柱)집 건축의 기본적인 7가량(架樑)이며 대들보는 우직한 느낌을 주나 자연 그대로의 형태를 살리려 한 것 같다.
위봉산성[威鳳山城] 사적 제471호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所陽面) 대흥리(大興里)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 1675년(숙종 1)에 축성하고, 1808년(순종 8)에 관찰사 이상황(李相璜)이 중수하였다. 유사시에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있는 태조의 영정과 시조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한 것으로 동학농민운동 때 전주부성(全州府城)이 동학군에 의해 함락되자 태조의 영정과 시조의 위패를 피난시킨 일이 있다. 당시의 규모는 너비 3m, 높이 4~5m, 길이 16㎞이며, 서·동·북 3개소의 성문과 8개의 암문이 있었고, 성 안에는 4~5개의 우물과 9개의 못을 팠다. 지금은 성벽 일부와 전주로 통하는 서문만이 남아 있는데, 문 위에 있던 3칸의 문루(門樓)는 붕괴되어 없어지고 높이 3m, 너비 3m의 아치형 석문만 남아 있다. 전주 8경의 하나로 성 안에는 위봉사가 있고, 북방수구처에는 위봉폭포가 있다. 성벽에 올라 소나무 그늘아래에서 내려다보는 가을 경치는 말 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가을 풍경을 뒤로 하고 우린 유서 깊은 송광사로 발길을 옮겨본다.
완주송광사[完州松廣寺]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에 있는 전통사찰인데 작년부터 시작한 보강공사가 아직도 끝나지 않고 계속 공사 중이였다. 예전에 없던 미륵불과 달마대사 석상이 놓여있고 세심정은 보전을 위하여 오르지 못하게 해놓았다. 종남산 아래에 자리한 사찰로, 신라 경문왕(景文王) 때 도의선사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당시 이름은 백련사(白蓮寺)였는데, 규모가 매우 커서 일주문이 3㎞나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임진왜란 때 황폐해 폐찰이 되었다가 1622년(광해군 14)부터 승려 응호·운쟁·덕림·득정·홍신 등이 다시 세우기 시작해 14년 만인 1636년(인조 14) 완공되었다는 기록이 전주부 송광사 개창지비(사적비)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절 이름도 송광사로 바꾸어 불렀는데,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승보사찰 송광사와 한자(漢字)까지 같다. 순천 송광사보다 규모는 작지만 분위기가 아늑하고, 봄이면 진입로부터 약 2㎞에 걸쳐 펼쳐지는 벚꽃이 장관을 이루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일주문(一柱門)을 들어서면 금강문(金剛門)·천왕문(天王門)·종루(鐘樓)가 차례로 나오고, 종루 옆의 대웅전을 지나면 뒤쪽에 나한전을 비롯한 건물들이 있다.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는 일자(一字)로 배치되어 있고, 공간 배치가 자연스러워 한국의 전통적인 정원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 대웅전 안에 있는 소조삼불좌상(塑造三佛坐像) 가운데 오른쪽에 있는 아미타여래좌상은 국가에 나쁜 일이 생길 때마다 땀을 흘리는 불상으로 유명한데,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인 1997년 12월에도 땀을 흘렸다고 한다.
문화재로는 대웅전(보물 1243), 종루(보물 1244), 소조사천왕상(塑造四天王像:보물 1255), 소조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1274), 일주문(전북유형문화재 4), 사적비(전북유형문화재 5), 동종(銅鐘:전북유형문화재 138), 나한전(전북유형문화재 172), 금강문(전북유형문화재 173), 벽암당부도(碧巖堂浮屠:전북문화재자료 144) 등이 있다.
송광사 일주문[松廣寺一株門] 전북유형문화재 제4호
원기둥 2개에 보조기둥 2개를 세웠으며, 다포집 구조의 맞배지붕 형식을 취한다. 조선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균형이 잘 이루어져 있다. 원기둥은 민흘림기둥이며, 보조기둥에는 연화무늬가 조각되었으며, 외목도리(外目道里)를 받치고 있다. 주초는 덤벙 주초이며, 기둥 위에는 창방(昌枋:대청 위 장여 밑에 대는 넓적한 도리)과 평방(平枋) 위에 공포를 두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기둥 앞뒤 면의 3출목과 앙설(仰舌)이 매우 화려하다. 원래의 위치는 현재의 위치에서 약 3㎞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1814년(순조 14) 송광사 앞 조계교(曹溪橋)가 있던 자리로 옮겼다. 이후 1944년 해광(海光)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현재의 현판은 1953년 주지 서암(瑞岩)이 세운 것이다. 현판에 적힌 사찰 이름을 ‘종남산 송광사(終南山松廣寺)’라 부르는 이유는 도의(道義)가 절터를 구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이곳에서 영천수(靈泉水)를 발견하고 큰 절을 세울 것을 결정한 후 더이상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았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영천수를 받아둔 돌구유는 지금도 관음전 뒤편의 논 귀퉁이에 있다.
송광사 금강문[松廣寺金剛門] 전북유형문화재 제173호
각성(覺性)이 중창시 건립된 것으로 전해오나 상량문이 없어 정확한 건립 연도는 알 수 없고, 정면 3칸(930㎝), 측면 2칸(565㎝), 기둥 높이 293㎝, 주심간 375㎝의 팔작지붕으로 자연석을 이용하여 기단과 기둥의 주춧돌을 구축하였다. 각 공포의 벽화는 보상화무늬로 장식하였다. 건립 당시에 조성된 것은 아니지만 금강문 안에는 금강역사상 2구(軀)와 오른쪽과 왼쪽에 동자상을 배치하였는데, 왼쪽 동자상은 사자, 오른쪽 동자상은 코끼리를 타고 있다. 송광사 대웅전[松廣寺 大雄殿] 보물 제1243호
. 대웅전은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이다. 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을 사용하지 않고 갑석(돌 위에 올려놓는 납작한 돌)만으로 구성하였다. 기초는 덤벙주초이고, 기둥은 민흘림기둥이며, 추녀마루를 지지하는 활주(추녀뿌리를 받친 가는 기둥)는 두리기둥이다. 정면 5칸에는 2분합문을 달았는데 띠살문과 빗살문을 교대로 달아 변화를 주었고, 측면과 뒷면에는 판벽으로 구성한 것이 특이하다. 앞쪽의 포간에는 탱화가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공포는 내·외삼출목의 다포식 양식으로 주간포는 1조를 설치하였다. 제공(공포에서 첨차와 살미가 층층으로 짜여진 것)의 각 끝은 가늘고 긴 앙설(끝이 위로 올라간 쇠서받침)을 조각하였으며, 내부의 공포는 초화문과 운공형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처마는 겹처마로 팔작지붕의 처마선이 아름답다.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20여 점의 무희도가 그려져 있어 당시 민화풍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완주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 [松廣寺塑造釋迦如來三佛坐像─腹藏遺物] 보물 제1247호
송광사 대웅전에는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왼쪽에 약사여래좌상, 오른쪽에 아미타여래좌상을 봉안하고 있다. 석가여래좌상은 높이 550㎝, 무릎 너비 405㎝, 무릎 높이 72㎝, 약사여래좌상은 높이 520㎝, 무릎 너비 363㎝·무릎 높이 71㎝, 아미타여래좌상은 높이 520㎝, 무릎 너비 356㎝, 무릎 높이 71㎝이다. 삼존불 모두 나발의 머리 위에 육계가 있고 이마에는 백호가 있다. 얼굴 모습은 원만하며 법의는 양쪽 팔에 걸쳐 흘러내리면서 무릎을 덮고 있다. 석가여래좌상은 항마촉지인을 짓고 있고, 약사여래좌상은 오른손을 어깨높이 가까이 들고 엄지와 중지를 잡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에 놓아 약합(藥盒)을 들고 있다. 아미타여래좌상은 오른손을 어깨 가까이 들어 엄지와 중지를 잡고 있으며 , 왼손은 무릎에 놓아 엄지와 중지를 잡고 있다.
삼존불에서 복장 유물이 수습되었는데 석가여래좌상에서는 은으로 만든 원통형 사리함이, 약사여래좌상과 아미타여래좌상에서는 놋쇠로 만든 사리함이 발견되었으며, 길이 286㎝, 너비 43.5㎝의 조성기 1매씩이 발견되었다. 조성기 첫머리에 ‘숭정14년 숭덕6년 세차신사 6월 29일 불상조성시주목록(崇禎十四年 崇德六年 歲次辛巳六月二十九日 彿像造成施主目錄)’이라 하여 1641년(인조 19)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존불로는 가장 크고 조각이 우수하며, 역사적 배경과 함께 승장인 각성(覺性)의 지휘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이다.
송광사 나한전[松廣寺羅漢殿] 전북유형문화재 제172호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집 건물로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각 지주의 주춧돌은 자연석을 사용하였다. 내부에는 목조 석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오른쪽과 왼쪽에 16나한상과 오백나한상, 인왕상, 동자상, 사자상이 배치되어 있으며, 송광사 오백나한전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권속상일괄(전북유형문화재 제169호)이 있다.
공포(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같은 데 짜맞추어 댄 나무 부재)는 주심포집 형식이나 쇠서 아래쪽의 초각으로 보아 18세기에 한 차례 중수되었으며, 귀공포의 쇠서(전각의 기둥 위에 덧붙이는 소의 혀 모양의 장식)에 연꽃 봉오리가 첨가되었고, 곧게 꺾인 첨차(도리 방향에 평행하고 촛가지에 직각으로 짜이는 나무)로 보아 20세기 초에 다시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에 걸친 중수로 서까래와 천장 등이 많이 변형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656년 각성(覺性:1575~1660)이 송광사를 중창할 때 건립한 것이며, 1934년 혜광이 중수하였다. 송광사는 867년(경문왕 7) 도의(道義)가 창건하였으며, 고려시대 지눌(知訥:1158~1210)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오늘 답사에 수고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정말 행복하셨죠? 저 또한 지식이 풍부하시고 멋지고 정이 가득하신 선생님, 회원님들과 같이 답사 할 수 있어 무척 행복했습니다. 다음 답사에도 이렇게 따뜻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다시 뵙겠습니다.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한 일만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모두 나마스테! 회원님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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