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가. 믿음은 대상을 믿는 나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가 가지고 온 그 생명의 그 빛(진리)이다.
나. 예수의 이름은 단지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오노마(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다. 예수와 아버지는 하나로서 근본(베레쉬트)으로서 그 이치에서 말씀하는 지혜의 믿음이다.
2. 본론
가. 믿음은 대상을 믿는 나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가 가지고 온 그 생명의 그 빛(진리)이다.
요한복음 1:12에 ‘믿는’으로 번역한 ‘피스튜우신’은 현재 여격(간접 목적) 복수다. 현재형으로서 여격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믿음은 항상 현재형으로서 믿음은 내가 대상을 믿는 것이 아니며, 나의 믿음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지고 온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다. 여격의 형태다.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로 있는 아버지를 이야기한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실상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있는 믿음이다.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있는 똑같은 믿음을 요구한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으로 잘못 번역한 ‘에이스 투 오노마 아우투’는 “그의 이름 안으로 들어와서 믿어서, ~으로 들어와서 하나 된 자들”이다.
한글 번역은 원문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예수 이름(목적어)을 대상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은 성경에 없는 거짓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천당 불신 지옥도 성경에 없는 말이다. 여기 나오는 ‘오노마(이름)’는 부르는 이름이 아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번역하여서 모두 기도를 마칠 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한다. 오해한 것이다. 이래서 종교의식이 생기는 것이다.
나. 예수의 이름은 단지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오노마(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이름’으로 번역한 ‘오노마’는 비유(파라볼레)다. 그리스도 예수(생명의 빛) 자신이 ‘오노마’다. 단지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이 ‘오노마’안으로 들어와서 하나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선 조건은 현재 ‘믿어서’ 현재형이다. 과거나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며, 대상을 믿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해체하여 그 실상을 체험하여 근본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 되어 계신 아버지가 주체다. 과거 상이나 미래상이 없다. 내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하여 정확히 알아야 한다. 나의 마음 밭을 해체해서 과거와 미래에 가 있는 마음 밭을 모두 뒤집어 놓아야 한다. 번역의 잘못으로 큰 오해가 발생한 것이다. 여기 등장하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온 아버지(생명의 빛)다.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로 있는 아버지다.
다. 예수와 아버지는 하나로서 근본(베레쉬트)으로서 그 이치에서 말씀하는 지혜의 믿음이다.
근본을 요한복음 1:1에 ‘엔 아르케와 톤 데온’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와 아버지는 하나 됨이 근본이다. 마음으로 어떤 대상을 믿고 의지하는 내용이 아니다. 마음으로 어떤 대상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은 항상 과거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과거 상이나 미래상이 전혀 없으며, 지성소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의식 무의식 잠재의식을 온전히 초월하신 분으로서 언어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각자 안에서 체험할 문제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