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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실상주 테마여행 / 18차 /부여 여행 후기
1. 일 시 : 2011. 07. 10(일) / 6시 출발 - 6시10분 도착 /12시간10분
2. 장 소 : 부여
3. 참여인원 : 45명
4. 이동코스 : 상주-남상주ic-청원고속도로-서천고속도-부여-서천고속도로-청원고속도로-남상주-
상주
5. 테마여행 일정
◇문화탐방 : 백제왕릉 / 부소산성 / 부여박물관 / 궁남지
◇별미탐방 : 백제관광회관 / 오리백숙
백제의 수도 부여! 가까운 거리인데도 너무나 멀리 느껴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특히 별미도 없는 그냥 어느도시나 있을 법한 음식들, 장마로 인해 갑자기 코스를 변경하여 먹거리가 걱정이였는데, 마침 버스사장님이 알려준 식당에 오리백숙으로 별미를 정하고 부여에서의 점심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6. 테마여행 후기
며칠째 내리는 비가 일요일날도 많은 비가 내린다는 기상청의 날씨 예보로 삼척의 덕항산 산행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7월의 테마여행을 잊혀진 도시, 하지만 아직도 백제의 숨결이 남아있는 부여로 정하고 계획을 세웠다
123년이란 기간동안 한 국가의 수도인 부여, 백제시대중 가장 국가의 문화가 발달된 시기이고 또한 멸망을 맞이한 비운의 도시 부여에는 하루 종일 장대비가 하염없이 내렸다
부여의 넓은 들판에는 백제인의 숨결이 남아있는 것 같았고,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은 역사의 아픈 흔적들을 황토물로 토해내는 것 같았다
우중여행, 즐거웠지만 가슴한편에는 천년의 아픔이 전해오는 느낌을 느꼈다.
오늘의 테마여행 코스입니다. 부여를 하루만에 가슴속에 담을수는 없지만 열심히 하루를 소화해 냈습니다.
능산리에 있는 고분의 총 갯수는 16개이고, 능산리의 고분들은 중앙 및 좌, 우의 세 무리 고분군으로 나눌 수 있다. 중앙의 고분은 121미터의 능산의 남쪽 경사면에 주치한다. 7기의 무덤이 복원되어 있는데, 앞줄에 3기, 뒷줄에 3기 그리고 뒷줄 뒤 가장 높은 곳에 1기가 있다.
앞줄 가운데에 있는 중하총은 널방 천장이 터널형으로 축조되어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과 유사하다. 축조한 재료는 다르지만 형식적인 유사성이 발견되어 왕릉으로 추정하는데, 사비로 천도한 성왕의 묘일 가능성이 있다. 벽그림이 있는 동하총은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1993년 나성과 고분군 사이에서 능사터가 발굴되었는데, 이 절터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되었다. 1995년에는 창왕 즉 위덕왕 (백제)의 명복을 비는 사리감이 나왔다.
백제금동대향로
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백제의 향로이다. 높이 61.8㎝,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로,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다.
뚜껑 꼭대기에는 별도로 부착된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 특징이라 하겠다. 봉황 앞 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에서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
몸체는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시킨다. 연잎의 표면에는 불사조와 물고기, 사슴, 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받침대는 몸체의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 듯 고개를 쳐들어 떠받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되어 있다.
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중국과 달리 산들이 독립적·입체적이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나고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적 복합성까지 보이고 있어 백제시대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조기술까지도 파악하게 해 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부소산성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부소산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 둘레 2,200m, 사적 제5호. 지정면적 98만3900㎡.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을 축조하고 다시 그 주위에 포곡식(包谷式)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으로, 성내에는 사비루(泗?樓)·영일루(迎日樓)·반월루(半月樓)·고란사(皐蘭寺)·낙화암(落花巖)과 사방의 문지(門址), 그리고 군창지(軍倉址) 등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사비성(泗?城)’·‘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이 산성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泗?)를 수호하기 위하여 538년(성왕 16) 수도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나, 이보다 먼저 500년(동성왕 22)경 이미 산봉우리에 테뫼형 산성이 축조되었다가 천도할 시기를 전후하여 개축되었고, 605년(무왕 6)경에 현재의 규모로 확장,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축성의 구체적 방법을 보면 성벽 안쪽의 흙을 파서 호(壕)를 만든 한편, 그 파낸 흙을 내벽에 보축(補築)하였다. 성의 바깥 벽면은 기반토(基盤土)를 마치 판축(板築)하듯이 황색사질토와 적색점질토를 겹겹이 다져놓았고, 그 위에 돌을 3∼5단으로 쌓고 흙을 덮었다.
이런 방식으로 축조된 산성의 입지는 경사면이어서 원래의 경사도보다도 더욱 가파른 경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이 산성의 아래 너비는 7m 가량이며 높이는 대략 4∼5m에 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창지와 영일루가 있는 부근의 표고는 전면 70m, 후면 90m의 등고선을 따라 둘레 1,500m의 성벽을 거의 토축으로 축조하였다.
1981년의 사비성 복원 때 토성의 단면을 자른 결과 대개 아래로부터 A·B·C·D의 4층을 확인하였다. 맨 아래층인 A층은 붉은색의 진흙으로 판축하여 하부를 축조하였는데 층의 높이는 1.9m이며, 토루 바깥면에는 토루를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4단의 석축이 남아 있다.
B층은 황갈색토층으로 북반부는 A층 위에 퇴적되었고, 남반부는 A층과 같이 아래서부터 쌓아올렸는데, 이는 A층을 고쳐쌓기 위해 B층이 축조되었음을 알려주며, 생토층으로부터 B층까지의 높이는 3.2m이다. 이곳에서는 연질의 백제시대 기와조각이 출토되었다.
C층은 황갈색사질토로 판축기법을 사용하여 두께 3∼6㎝로 축조되었는데, B층의 바깥쪽 경사면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수축된 것으로 보인다. 석재는 6합식(合式) 5단으로 쌓여 있는데 높이는 103㎝로 이 층에서도 B층과 같이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출토되었다.
맨 위층인 D층은 조선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부소산성이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수축·개축을 거치며 사용된 이용편년을 증명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전체성벽의 높이는 내면의 높이가 7.6m, 외면 높이가 3.4m, 너비는 8.6m이다.
한편,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표고 106m의 사비루 부근의 산봉우리 중심으로 약 700m의 테뫼형 산성이 있는데 50×50㎝, 70×60㎝의 백제시대 초석이 많이 흩어져 있다. 이 산성은 위의 두 산성이 연결되어 백제시대의 독특한 복합식 산성양식을 하고 있다.
성안에는 동·서·남문지가 있으며, 북쪽의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북문과 수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문지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대형철제 자물쇠가 발견되어 문지였음을 입증해주고 있으며, 남문지에는 아직도 문주(門柱)를 받쳤던 초석 2개가 동서로 나란히 있다.
1978년 금강상수도사업 공사로 인하여 성벽의 단면이 드러났는데 성벽 내부는 잡석으로 적심석(積心石)을 넣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목책지(木柵址)와 수혈상(竪穴狀)의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이 산성은 성안에 군창지와 건물지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단 유사시에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려 한 것으로 보이나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는 비원으로서의 구실을 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한편, 사비천도 이후 백제 멸망시까지 국도의 중심산성으로서, 인근의 청산성(靑山城)·청마산성(靑馬山城) 등의 보조산성으로 왕도의 방어를 강화한 성곽발달사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삼충사
백제의 충신이었던 성충·흥수·계백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충신으로, 좌평으로 있으면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 옥중에서 단식을 하다 죽었다.
흥수는 백제 의자왕 20년(660)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탄현을 지키다 대신들의 반대로 지키지 못하고 결국은 멸망하였다.
계백은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결사대 5,000여명을 뽑아 지금의 연산인 황산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1957년 지은 이 사당은 1981년 다시 지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해마다 10월 백제문화재 때 삼충제를 지내고 있다.
백제의 충신인 성충((成忠), ?∼656), 흥수((興首), ?∼?), 계백((階伯), ?∼660)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57년에 세운 사당(祠堂)이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 때 좌평(佐平)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가 투옥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충신이다.
흥수는 나당 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탄현(炭峴)을 지키라고 의자왕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계백은 신라 김유신 장군의 5만군이 황산벌로 쳐들어 오자 5천 결사대로 싸우다 황산벌에서 장렬히 전사한 장군이다.
낙화암
충남 부여 백마강변의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진 곳이라 한다. 『삼국유사』, 『백제고기』에 의하면 이곳의 원래 이름은 타사암이었다고 하는데, 뒷날에 와서 궁녀들을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고 고쳐 불렀다.
낙화암 꼭대기에는 백화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서 1929년에 세운 것이다.
고란사
고란사는 백제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뿐,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절 뒤 바위틈에 고란정이 있으며, 그 위쪽 바위틈에 고란초가 나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절은 원래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하며, 또 궁중의 내불전이었다고도 전하며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에서 사라져간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위하여 1028년이 지은 사찰이라고도 합니다.
고란초
잎은 홀잎으로 대개 타원형태의 피침 모양이나 몇갈래로 갈라지기도 한다. 잎이 3갈래로 갈라지는 것은 중앙부의 것이 제일크고 표면은 녹색이고 뒷면에는 연한 녹색으로 주맥과 측맥이 뚜렷하다. 가장 자리에는 검은빛이 돌고 측열편은 짧고 작다.
잎자루는 길고 가늘며 갈색이다. 황색의 포자낭군은 측맥 사이에 두 줄로 원 모양으로 달린다. 산림청 선정 희귀 및 멸종위기 식물이다. 그늘진 바위틈이나 고목, 바위에 붙어서 자라는 다년생 상록착생식물이다
궁남지
부여 남쪽에 위치한 백제의 별궁 연못이다.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20여 리나 되는 긴 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들였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연못 가운데에 방장선산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로와 물가·연못 속의 섬이 어떤 모양으로 꾸며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못의 중앙부에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있어 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주변에서 백제 토기와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연못의 규모 또한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당시에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크기를 짐작할 뿐이다.
고대 중국사람들은 동해바다 한가운데에 일종의 이상향인 신선이 사는 3개의 섬으로 삼신산이 있다고 생각하여, 정원의 연못 안에 삼신산을 꾸미고 불로장수를 희망했다고 한다. 궁남지는 이것을 본떠 만든 것으로 신선정원이라 불린다.
연못 동쪽에 당시의 별궁으로 보이는 궁궐터가 남아 있다. 현재 연못 주변에는 별궁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우물과 주춧돌이 남아있고, 연못 안에는 정자와 목조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점심 타임 / 부여공주는 밤이 유명한 고장이다. 그래서 그런지 백숙에도 밤 넣어서 요리를 하는게 특징이다. 맛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였다
장마로 인해 갑자기 여행지를 변경하였는데도 회원여러분이 잘 따라주어서 즐겁고 유익한 부여 나들이를 무사히 마칠수 있었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합니다. 잊혀진 백제의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한 부여의 땅을 직접 보고 느낄수 있어 행복한 하루 였습니다.
보지 못한 백제의 역사는 다음 기회에 볼 것을 약속하면서 아쉬운 작별을 하고 상주로 무사히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