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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맹꽁이 운동화,
검은 몽블랑 만년필
김정숙 / 역사학과
긴 세월(1964-2006년)을 선생님 손잡고 걸었는데, 선생님 사진이 내게 없다. 웃는 모습, 내 이름을 부르는 톤까지 생생한데 ...... 그저 내 고등학교 졸업식에 오셨기에 그때의 사진 한 장뿐. 선생님의 외모는 그것으로 고정된다.
담임으로 오신 교육대학 갓 졸업생
난 어렸을 때 무척 학교에 가고 싶었다. 집안에 이상한 사정이 있어서 나는 친구들보다 1년 늦게 학교에 들어갔다. 함께 놀던 친구들은 다 학교에 갔는데, 나만 혼자 동네 골목에 있었다. 떼를 쓰고 울어서 그다음 해 입학했다. 그때 너무 심하게 울었는지, 철나고 지금까지 학교만 다녔다. 그러나 아무리 울었다 하더라도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학교는 거기서 끝이었을지 모른다.
1964년 국민학교 3학년 때 조종성 선생님이 담임으로 오셨다. 당시 그분은 광주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첫 발령 받은 길이었다. 첫날, 실내화 준비를 못 하셨던지 양말 발로 교실에 들어오셔서 인사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선생님이 양말 발로 교실에 들어오는 것이 낯설었다. 처음 보았기도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들은 잠시 구두를 신고 들어올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선생님은 그런 분이셨나 보다. 선생님은 그때 몇 살이셨을까? 선생님도 나이가 있다던가 그런 걸 생각하지 못하던 때이기에 생각도 안해 보았지만, 아마도 23, 4살이시지 않았을까? 많아야 25살.
담임이 되시고 한 달이 지난 후 가정방문이 시작되었다. 그 무렵 골목 입구에서 ‘교무수첩’을 뒤적이고 있는 사람은 학교 선생이구나 여길 정도로 모든 교사가 가정방문을 했다. 그럼에도 앞의 담임들은 우리 집에 온 적이 없었다. 열외였다.
4월 2일,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하셨다. 내가 방과 후에 도망쳐 집으로 왔는데, 전교에서 단 한 명 우리 집을 아는 아이를 찾아서 앞세우고 오셨다. 우리 집은 종암동 개천가 둑에 지은 무허가 판자촌이었다. 판자촌이 있는 둑 건너에는 가죽을 이용하여 아교阿膠를 만드는 공장이 있었다. 아교는 짐승의 가죽, 힘줄 등을 석회수 용액에 담근 후, 끓이면서 추출한 용액을 냉각시켜 얻어낸다. 공장이 하나였는지, 여러 개가 모여 있었는지 모르지만, 개천은 늘 푸른 찌꺼기를 두껍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냄새도 지독했다.
개천의 이쪽 편은 둑이 있고, 그 둑 아래로는 넓은 밭이 펼쳐져 있었다. 집들은 둑과 밭이 이어지는 쪽에 둑을 따라 길게 한 줄로 지어졌다. 개천가 쪽에는 마을 공동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었다. 길게 늘어선 골목 한가운데쯤에 큰 전기 변압기 철탑이 있었는데, 그 밑에 펌프가 박혀 있었다. 마을 공동 우물인 셈이다. 비나 눈이라도 내리면 물을 퍼 올리는 동안 첨탑에 물이 닿아 ‘지익 지익’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집은 개천가가 아닌 밭과 이어진 쪽에 있었다. 그래서 우리 집은 길로 사용되는 둑보다 낮았다. 집에는 방과 부엌만 있었기 때문에 부엌문이 바로 대문이었다. 그 부엌문조차 철거하는 사람들이 부수고 간 뒤로 부엌에는 문이 없었다. 그래도 방문은 있었다. 방에는 사과 궤짝을 놓고 그 위에 침구를 쌓아놓았다. 옷은 벽에 걸면 끝이었다. 그리고 부엌에는 찬장 대용의 사과 궤짝이 있었다. 예전 사과 상자는 나무 널빤지로 되어 있었는데, 그 상자를 옆으로 놓으면 삼면이 막히고 앞이 뚫려서 장이 되었다. 그릇의 개수도 단 세 식구의 두 배쯤 되었을까? 그때가 이윤복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영화가 나왔을 때다. 그는 내 또래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은 비가 왔다. 대문으로 쓰는 가마니가 젖어서 ‘하늘같은’ 선생님 양복으로 빗물이 떨어졌다. 그날 선생님은 비닐우산을 이른바 우리집 대문 밖인 가마니 앞에 놓고 들어오셨는데, 동생이 그 우산을 들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사과 궤짝 위에 이불 두 채 얹어 놓은 방에 들어오시더니, “정숙이가 이번에 전교 일등을 했습니다”라고 하셨다. “그까짓 계집애가 공부는 잘해서 뭐 해요.” 엄마의 대답이었다.
1, 2학년 때 선생님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으셨고 나도 그저 학교만 다닐 뿐이었다. 조 선생님을 통해서 나는 내가 공부를 잘하고 재능있다고 들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서울 미아리고개 너머 의정부 나가는 길가에 있다. ‘숭인국민학교’였다. 우리는 3학년까지 3부제 수업을 했다. 3부제 수업이란 수업을 하고 있는 동안 다음 교실에 들어갈 학생들이 밖에서 떠들고 있는 것을 말한다. 즉 한 교실을 세 반이 공동으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고학년(4, 5, 6학년)이 되면 2부제 수업을 했다. 학생 수는 학급당 90명을 넘었다. 100명을 넘는 학급도 있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학교, 즉 학생 수가 가장 많은 초등학교가 우리나라에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숭인국민학교였지 않을까? 그 많은 학생 중에 제일 잘난 학생이라고 하셨다. 물론, 내가 똑똑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1년 늦게 학교에 들어갔으니까 나이에서 오는 이득이었을게다. 아무튼 내 생애에 대한 기억은 초등학교 3학년 이후부터 선명하다.
빨간 맹꽁이 운동화
선생님은 가정방문 날, 내가 우리 집을 창피해하는 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 충격을 받으신 것 같다. 지방에서 고학으로 교육대학을 마친 선생님이 서울에서 상상하기 힘든 첫 제자를 보셨나 보다. 이후 선생님이 어렸을 때 학교를 못 다니고 나무하러 다녀야 했는데, 산에 앉아서 책 읽다 내려왔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부모님이 안 계셨는지는 모르겠는데, 형님이 살림을 맡아 하셨던 것 같다. 광주일고를 나왔고, 교육대학으로 진학했다고 하신 것 같다. 지금 보니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을 다 벌로 들었는지 제대로 기억할 수가 없다.
가정방문 이튿날부터 선생님은 나를 매일 교무실로 부르셔서, “내가 깡통을 차는 한이 있어도 너는 중학교에 간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교무실에 가는 것이 싫었고, 그때로서는 선생님같이 높은 분이 왜 깡통을 차는지 모르겠었다. 커서 보니 선생님은 당시 국민학교에 근무하면서 성균관대학교 법대에서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계셨다. 그분은 학비와 생활비가 빠듯했던 것 같다. 밤에 선생님 방에 과외하러 다니는 그룹이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리고 선생님은 정부에서 나오는 옥수수빵을 나한테는 매일 두 개씩 주셨는데, -특별 대우였다- 그것을 받으러 나가는 순간이 부끄러웠다. 동생은 누나가 빵 가져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4학년이 되면서, 담임 선생님이 바뀌었다. 그때 헤어진다고 슬퍼하거나 그런 기억은 없다. 내가 둔했던가? 아니면 선생님이 떠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걸까?
학년이 새로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당시 우리는 월요일마다 조회를 했는데, 조회에서 들어오니 책상 속에 종이봉투가 한 개 있었다. 속에는 빨간 맹꽁이 운동화가 한 켤레 들어있었다. 빨간색 바탕에 신발 앞 정면에 손가락 세 개쯤 되는 넓이의 흰색 고무줄 면이 있는 운동화였다. 지금처럼 끈을 매는 운동화가 아닌, 그걸 우리는 맹꽁이 운동화라고 했다.
주번이 조 선생님이 다녀가셨다고 했다. 운동화라니! 그것도 빨간색 운동화- 언감생심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는 신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고무신을 신고 다녔었다. 나는 운동화를 선물해 주셔서 고맙다는 말씀은 드리지 못했다. 그것을 신은 나를 보고 싶어 하셨을텐데, 너무 부끄러워서 선생님 앞에 신고 나타나기를 꺼렸던 것 같다. 직접 주시지 않으신 선생님도 그 운동화에 대해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그런데, 운동화는 내 발에는 좀 작았다. 아마 선생님은 초등학교 4학년짜리 운동화를 사셨을 것이다. 나는 발이 큰 편인데, 거기다가 이미 1년 늦게 학교에 들어갔으니, 초등학교 4학년 평균 싸이즈하고는 달랐나 보다. 아프지만 발가락을 구부려서 신고 다녔다. 나는 그 물건을 교환해서 신는다는 생각은 못했다. 아니 지금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 운동화를 가지고 시장에 가서 맞는 싸이즈로 바꾸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이 골랐고, 싸 오신 그 신을 신었을 것이다. 그 후 나는 자라고 운동화는 어떻게 되었을까? 내 성격 같아서는 오늘날까지 가지고 있었을 게다. 아마도 마당에 흙 하나도 없이 쓸어내리는 우리 엄마가 청산하셨을 거다.
빨간 운동화는 세상을 이고 나갈만한 신발이 되었나 보다. 초등학교 때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한지 몰랐다. 단지 배가 고팠고, 무언가 없어서 불편했다. 다시 말하면 내 주변에는 다 같은 사람들만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데 공부를 잘한다는 소리를 듣기 시작한 다음부터 남과 비교하게 되었나 보다. 일년내내 무릎이 허옇게 된 골덴 바지에 감청색 바탕에 목부분에 흰깃이 달린 국민학생들 쟈켓을 입던 나를 보게 되었다. 남에게 해진 옷을 보이기가 부끄러웠다. 속옷은 떨어졌어도 겉옷만은 말끔했으면 하고 바랐다. 그 마을을 벗어나면서 환경은 좀 나아졌지만 내 눈은 점점 뜨여 갔다.
나는 어느새 선생님이 친구 만나러 가시는 자리에 따라가기에는 내가 초라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서울대학교 병원에 선생님 지인을 병문안 가시며 나를 데려간 일이 있었다. 같이 들어가자고 몇 번이나 말씀하셔도 나는 복도에 버티고 서있었다. 선생님께서 좀 오래 마음놓고 이야기하고 싶으셨을텐데 ...... 철 없는 나는 여러 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병실에 들어가서 인사하지 않았다. “정숙이는 고집이 세구나”라고 하셨다. 지금도 나는 그때 나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날 초라한 내가 선생님에게 흠이 될 거라고 느꼈었는지 모르겠다. 선생님은 나를 어디든 데리고 다니고 싶으셨을지도 모르는데 ...... 그 이후로 선생님의 사적인 만남에 따라가 본 적이 없다. 선생님의 판단을 믿었으면 간단했을텐데 ......
학년이 위로 올라갈수록 나는 ‘나의 범주’에 들지 않은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학급 임원을 하면서 내게 없는 것이 많음을 알았다. 중학교 때 반장네 집에 놀러 가겠다고 온 친구가 사이다를 먹고 싶다고 해서, 가게에서 찬물에 담가놓은 사이다를 사다 주었는데, 냉장고에 있는 것을 찾았다. 우리 집에 냉장고가 어디 있는가?
고등학교 때는 시험기간이 되면 자기 집에 와서 공부하라고 요청하는 학부모들이 있었다. 그런 집에서는 먹고사는 것이 달랐다. 친구들 집에서는 커피를 주었다. 나도 체면으로 친구들에게 커피를 내놓고 싶기도 했다. 당시에는 커피잔을 한두 개씩 팔지 않고 6개 세트로 팔았다. 게다가 우리 집에서는 그 쓴 물을 먹지 않으므로 한두번 쓰자고 비싼 커피잔을 없는 돈 들여서 사자는 나를 엄마는 무척 철없이 보셨다. “너는 어떻게 학교에서 그렇게 나쁜 것만 배우냐”라고 하셨다. 클래식 음악도 생소하고, 또 명화도 생소했다. 명작에는 갭이 적었지만 ......
그렇지만, 조 선생님 말씀은 엄마가 내가 성장해 가는 것에 의지해 사셨다고 하셨다. 어쨌든 내가 대학 들어가면서 엄마는 완전히 달라지셨다. 모든 것을 희생하고 내 학교 일이 엄마의 최대 스케쥴이 되었다. 1981년 7월 유학 떠나던 날 공항에 나오신 선생님께 엄마는, “고등학교만 나와서 시집갔으면 벌써 손주 데리고 올텐데 ...... 선생님 때문에 ..... 우리 딸 인생 책임지셔야 해요.”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책임지지요. 크게 성장할 겁니다”라고 하셨다.
모든 스승의 사랑을 모은 선생님
선생님은 학년이 바뀌어도, 그리고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신 뒤에도 나를 챙기셨다. 공립학교 선생님은 3년마다 전근을 하시는지, 내가 6학년 되던 해 선생님은 이웃한 숭례국민학교로 전근 가셨다. 선생님은 새로 오시는 담임에게 조카라고 소개하면서 특별히 부탁하기도 하셨다. 중고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성적표가 나오면 으레 선생님을 찾아갔다.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는 물론이고. 선생님은 내가 대학 졸업할 때도 오셨다. 박용운 교수님, 이현희 교수님을 만나셨다. 물론 대학원 지도교수인 신형식 교수도 만나러 오셨다. 다른 선생님들이 나를 칭찬하지 않으면 언짢아하셨다.
1978년 사범대학을 졸업하면서, 신설학교인 영동여자고등학교에 역사교사가 되었다. 조 선생님은 내가 영동여자고등학교 교사가 되었을 때는 내 담임반에 오셨다. 부장 선생님들과 교장 선생님께 인사도 하셨다. 담임인 내가 뒤에 급훈을 써 붙인 것을 보셨다. “서로 사랑하여라”였다. 내 반 학생들도 만나셨다. 또, 초등학교로 선생님을 찾아뵈었을 때는 나보고 어린이들에게 이야기 하나 해주라고도 하셨다. 어렸을 때 동화구연을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었지만, 정말 작은 아이들 앞에서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선생님은 내가 선생님들은 화장실도 가지 않는 줄 알았던 초등학교 시절에 만났기 때문에 내게는 언제나 선생님이시기만 했다. 대학 시절에도 길을 같이 갈 때면 초등학교 선생님이 학생들 손을 잡고 가듯이 그렇게 걸어가셨다. 청바지를 입고 인사드리러 가면 대학교수 옷차림이 그게 무어냐고 꾸지람하셨다.
조 선생님께서 중고등학교 대학 선생님을 다 찾아다니셔서 그런지 내게는 중고등학교 선생님과 대학 선생님이 다 합쳐진다. 무엇보다도 선생님 덕분에 하늘같은 모든 선생님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시는 선생님들이 많다. 학교 엄마로 불리기를 자처하셨던 정광순 교장 선생님, 그리고 문예반 담당 남을우 선생님, 또 거의 친구처럼 인생을 멘토하신 이효범 생활지도부 선생님, 또 정숙이는 영어가 부족하다며, 집으로 공부하러 오라고 일요일 오전을 특별히 할애해 주셨던 김태수 교감 선생님....., 대학, 대학원 지도교수까지. 그 모든 싹은 조 선생님에게서 온 것 같다. 하긴, 박사학위 논문지도 교수인 Micher Cartier 교수가 학회 초청으로 한국에 오셨을 때는 학교엄마인 정교장 선생님이 대접하셨었다.
한말숙의 『하양도정』 마지막 장에서,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한 사람, 즉 진정한 사랑을 안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게 된다며, “예수는 얼마나 한 사람을 깊이 사랑했기에 모든 인류를 사랑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조 선생님을 만나고 이후 나는 모든 선생님을 깊이 믿고 매우 친하게 생각해 왔다. 내 선생님들은 육신은 딸을 낳지만, 정신은 제자를 낳는다고 하셨다.
학창시절, 나는 반장과 전교회장을, 그리고 고등학교 때는 신설학교였던 모교 중학교 동창회장을 겸했다. 그런데 교직에 몸담고 학교운영을 이해하게 되면서 내 모교에, 은사들께 빚지고 있었음을 알았다. 학교 임원은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고, 형편이 넉넉한 집의 자녀가 하면서 다른 학부모들로부터 협조를 얻어 학교를 크게 도우면 좋다. 그렇지만, 내 선생님들은 그런 불편을 다 감내하셨다. 중고등, 대학, 대학원까지의 모든 은사들은 신설학교의 첫 학생인 우리들에게 오십년, 백년을 이어나갈 열정을 한꺼번에 쏟으셨던 분들이다. 조 선생님은 평생 담임이 되어 모든 스승의 사랑을 모아주셨다. 내게는 모든 선생님이 한 분 같다. 그리고 나는 ‘선생’이란 단어 자체를 무척 친숙하게 느낀다.
사회적 갭도 함께 견뎌주시고
선생님은 일기에 진짜 진심이셨다. 우리는 매일 일기장 검사를 받았다. 선생님께서도 늘 일기를 쓰셨던 것 같다. 어느 날 우리에게 한 도막을 읽어주시기도 하셨다. 머리가 아팠다는 구절이었다. 저녁잠이 많은 나는 늘 새벽에 써갔다. 전날을 기록한 일기를 쓴 것이다. 해마다 일기장을 마련하는 것을 보면 그때의 습관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나는 선생님 덕분에 책을 많이 읽었다. 선생님은 ‘학급문고’를 만들었다. 기본책 몇권을 선생님께서 마련하셨다. 그리고 책은 일주일 빌려주는데, 1원인가 받았던 것 같다. 그 돈이 모이면 중고 책방에 가서 다시 책을 구입했다. 선생님은 돈을 관리하며 책을 구입하는 일을 내게 맡기셨다. 책을 사면 다음 날 아침까지 교실문고에 갖다 놓으면 되기 때문에 나는 새로 구입한 책을 밤을 새워 읽었다. 중고 책방에도 단골로 드나들었다.
책을 많이 읽은 덕인지 글을 잘 쓴다고 했었다. 잘 쓰는지는 모르지만 글 쓰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는 말은 맞다. 신설학교여서 중2 때에야 문예반이 조직되고, 문예반 반장이 되었다. 그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죄와 벌』, 『좁은 문』 이런 명작들을 읽었는데, 내가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난, 선생님의 기대를 다 충족시킨 학생은 못되었다. 내 또래는 중, 고, 대학교를 모두 시험치고 진학한 세대이다. 언제나 시험을 거쳤기 때문에 실력이 좋다고 후배 교수들에게 농담하기도 하는 그룹이다. 내가 경기여중을 떨어졌을 때 선생님은 나보다 더 언짢으셨을텐데, 이렇게만 말씀하셨다. “네가 합격할까 봐 걱정하기도 했다. 환경이 다른 학생들이 많은 곳에서 네가 상처입지 않아도 되어 기쁘다.” 그렇게 나는 신설되는 성신여자사범대학 부속여자중학교로 진학했다. 나는 중학교 1회이며, 동계진학을 해서 고등학교 3회 졸업생이다. 고등학교는 내가 중2 때 개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선생님은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다. 아마 그때쯤 선생님께서 사법고시를 포기하신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입시에 실패했다. 중고등학교에서 긍지를 너무 높여놓았었는지 내가 받은 타격은 컸다.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중고시절 받았던 5·16 장학금도 포기했다. 연계되는 장학금이었지만, 자격이 못 된다고 스스로 판단했다. 그러나 여러 갈등 끝에 결국 재수를 하면, 형편상 내가 더이상 학교를 다닐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에 설득되어, 어른들이 권하시는 대로 모교로 진학했다. 입학 당시 성신은 사범대학만 있었다. 성신사대 원서에 1지망은 불어, 2지망은 한문을 적었다. 그때 교장 선생님께서 “너는 사회활동을 할텐데 국사를 해야지”라고 하시면서 당신이 직접 ‘국사교육과’라고 써넣으셨다. 1974년, 그렇게 국사학도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보다 더 죄송한 일이 있다. 선생님은 아들 둘, 딸 하나 삼남매를 두셨다. 지현이는 선생님의 외동딸이다. 그런데 지방대학에 진학했던 딸이 2학년일 때, 주말을 집에서 쉬고 월요일 등교를 위해 내려갔다가 자취방에서 연탄까스 중독으로 숨졌다. “정숙아, 지현이가 갔구나”라고 전화하셨다. 나는 선생님 마음을 다 헤아려드리지 못했다. 선생님은 나를 데리고 지현이를 보러 가셨다. 딸의 무덤 곁에 자신의 무덤을 만들어놓으셨던 선생님께, 그 딸의 공간을 채워드렸더라면 좋았을텐데 ...... 그때 무슨 일에 그렇게 신경이 팔렸었을까? 아니면 죽은 이의 공간을 이해하기에 너무 어렸었던가? 선생님은 지현이가 남겨놓은 신앙으로 위로받고 천주교인이 되었다.
내가 교생이 되었을 때..... 나는 선생님께 왜 저를 주목하셨냐고 여쭈어 보았다. 3학년 그 시절 우리 반에는 김정숙이라는 애가 있었다. 백합같은 아이였다. 아버지가 감사라던가 검사라던가 어쨌든 굉장히 높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사립학교를 보내지 않고, 이렇게 피난민이 잔뜩 있는 학교에 보내는 것이 대단하다고들 했던 것 같다. 그 아이를 짚어 여쭙지는 않았지만. 물론 그 외에도 허다한 학생들이 있었다. 내가 특별히 예뻤던 것도 아니고 특별히 무엇을 잘했던 것도 아니다. 특히 선생님을 처음 만날 땐 더욱 그랬다. 나는 나날이 예뻐져서 그나마 오늘의 얼굴이 된 것 같다. 나는 어린아이였지만 표정이 없고, 어두운 아이였다.
“네가 반응이 제일 빨랐어”라고 하셨다. “너는 내가 준 수련장에서 나오는 문제는 한번도 틀린 적이 없어.” 선생님께서는 출판사에서 자기 회사 수련장을 써달라고 견본으로 교사들에게 보내는 수련장을 다 내게 주셨다. 동아수련장 등 회사가 여러 개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교직에 있으면서 나는 가끔 반응이 빠른 학생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반응하는 제자가 하는 역할을-.
“아직도 국민학교 은사를 뵈러 다니세요?”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내가 늘 선생님을 찾아다녔다고 해서 언제나 선생님과 호흡이 맞은 것은 아니다. 가난한 학생을 돕는 것만이 아니라, 그 학생이 생활하면서 넘어야하는 사회적 갭도 함께 견뎌주시려 했던 선생님은 내가 대학에 진학하면서, 전공의 세계에 들어가면서 서로 다른 의견이 전개되기도 했다. 내가 대학생활을 이야기하면 좀 더 델리킷하고 이상한 것은 차치하고 원칙만을 말씀하셨었다. 1987년 영남대학교에 취직이 되면서는 더욱 거리와 시간이 멀어졌다. 민주화 등등 이념 논쟁이 심할 때 너무나 원론적인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잘 못 알아듣거나 미리 꾸지람 하셨다. 그때는 답답하기도 했다. 뜸해지게도 되었다. ...... 이제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것들을 다시 새겨듣는다.
선생님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 교육 현장에서의 성공 사례를 써내라는 경우가 많았는데 선생님은 나의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것은 내가 성장해 온 보람에 대한 배반 같다고 느끼셨던 것 같다. 오늘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을 선생님이 보시면 뭐라고 하실지. 나 또한 선생님이 살아계실 동안에 선생님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없다.
검은 몽블랑 만년필
미국으로 해외연수를 갔다가 2006년 8월 말에 귀국했다. 그리고 짐을 정리하고 나니 추석이 다가왔다. 선생님께 인사 가려고 전화 드렸다. 그런데 꼬마 여자애가 전화를 받았다. “할아버지 돌아가셨어요.”라고 했다. 돌아가시다니? 자기는 손녀라고 했다. 사모님을 바꾸어달라고 했다. 그해 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정확히 5월 5일에 돌아가셨는데, 사모님은 그때까지 매일 미사를 드리고, 오후에는 묘소에 가시고 계셨다.
분명히 출국하기 전에 인사드리러 갔었는데, 그때는 몰랐다. 대장암이셨단다. 선생님은 내가 그냥 외국에 갔다 온다고 생각하셨는지, 정숙이만 못 보았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단다. 연락이 안 된다고 ......
사모님을 모시고 묘소에 가서 인사드렸다. 딸 지현이 곁에 누워계셨다. 묘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모님이 내게 작은 보따리를 내미셨다. 선생님께서 사용하시던 만년필과 잉크병이었다. 몽블랑 만년필이었다. 교수 된 지 20여 년, 몽블랑 만년필은 처음이었다. 나는 몽블랑이 프랑스 상표인 줄 알았는데 다행히 독일 상표였다. 프랑스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을 내가 사다 드린 것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는 선물이란 걸 준비할 생각을 못했다. 학생이 유학 끝내고 돌아오면서 무엇을 사 오겠는가? 이후에 연구년으로 다시 공부한 학교에 갔었는데, 그때는 왜 사다 드릴 수 없었을까? 내가 교수로 임용될 때, 은사님 가운데 한 분이, “교수는 책상과 만년필만 있으면 되는 것이니, 다른 욕심 내지 말고, 다른데 신경 팔지 말고 공부하라”고 하셨다. 국민학교 당시 신식이던 빨간 맹꽁이 운동화를 그냥 정숙이 책상 속에 넣고 가셨던 선생님은 만년필 중에 가장 클래식하다는 만년필을 사모님을 통해 두고 가셨다.
정년하기 직전, 새로 잉크를 사야 할 때 나는 그 만년필을 잘 포장해서 새 잉크병을 넣어서 선생님 큰 아드님에게 주었다. 아버님 것을 사용하고 싶어할 것 같아서 ...... 또 그래야 더 오래 보존될 것 같아서.
선생님은 나를 두고 가까운 동료들에게 이런 제자 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큰소리를 치셨단다. 아마도 술 드시는 때였을까? 그리고 일곱 명이 항상 함께 찾아뵙는 남자 제자팀이 있는데 그 제자들을 두고, “이런 제자들 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며 자랑하셨단다. 그래서 그런지 장례식날 선생님의 친구분들이 그 김 박사 왔느냐고 사모님께 물으셨단다.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어서 그런다고. 그러나 정작 그 김 박사는 선생님 장례식 때에는 미국에 있었다.
사모님이 선생님의 사랑을 잇고
선생님이 대장암으로 돌아가시고 나서 2년 후에 나는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받으면서는 사모님께서 나를 챙기셨다.
“김 박사, 힘들지는 않았어?”
선생님과 사모님, 두 분은 고향 분들이라 그런지, 평생을 같이 살아서 그런지, 아니면 선생님께서 살아생전에 하도 나를 불러서 그런지 사모님이 김 박사라고 발음하는 소리는 선생님이 부르시는 소리와 정말로 같다. 음성 색깔이라든지 그 길이, 높낮이까지 똑같다.
내가 암 조직 검사를 받은 다음다음날이 선생님 제삿날이었다. 사모님께 전화로 그 전날 조직을 떼어 암 검사를 신청해 놓았는 데다, 서울 가기에는 사정이 여의치 않아 전화드린다고 했었다. 그래서 사모님은 내가 암조직 검사를 받는 중임을 알린 첫 사람이 되었다.
조직검사 결과를 보고 온 날 사모님이 전화를 하셨다. 내가 조 선생님을 만난 지 42년 만에 사모님이 전화하시기는 처음이었다. 그리고는 수술 날짜 잡히는 날, 병원을 옮기는 날, 한 번도 미처 내가 먼저 연락드리지 못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사모님은 병자성사를 준비해 주셨고, 퇴원한 뒤에는 집에서 입을 편한 옷, 음식을 해가지고 집으로 찾아오셨다. 2년전 선생님을 간호하셨던 사모님은 그 경험을 고스란히 내게 살리셨다.
내가 중학생이 된 어느 때, 선생님은 고향에서 결혼을 하고 사모님과 올라오셨다. 중학교 시절에는 매월 성적표가 나오면 그것을 들고 선생님을 찾아뵈었기 때문에 그날 나는 댁에서 새댁인 사모님을 뵐 수 있었다. 사모님은 그날 나에게 이렇게 인사하셨다.
“결혼식을 마치고 서울로 온 날 선생님이 느닷없이, ‘내게는 크으은 딸이 하나 있다.’고 하셔서 놀랐는데, 그 아이가 너로구나.” 그렇게 선생님 말씀대로 사모님은 나를 딸로 생각하셨다.
사모님을 통하여 나는 아주 조금씩 선생님의 투병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선생님이 사람으로 산 일상을 보게 되었다. 전라도에 사시는 친척 길흉사에 두 분이 가시면 차비가 두 배로 드니, 한 분씩만 다녀야 했다는 생활 ...... 당신 자신은 단 한 번도 내게 보이지 않으셨던 부분이다. 선생님도 한 명의 생활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내야 했다는 사실을 사모님과 이야기 나누면서 알아듣게 되었다.
선생님은 장학사를 거쳐서 초등학교 교감으로 정년하셨다. 그리고는 칠십도 못 채우시고 가셨다. 무슨 주사인가 한 대에 백만원 가까이하는 주사도 있었는데, 맞을 수 없었다고 하셨다. 내가 한두대 놓아드렸더라면 ...... 선생님이 투병하실 때는 내가 미국에 있어서 변명이 된다고 하더라도 ...... 난 선생님을 호텔 식사에 한번도 모신 적이 없다. 어디 음악회나 전시회도 모신 적이 없다. 대학교수인 내가 그 긴 세월 동안 왜 선생님 앞에서는 언제나 초등학생 노릇밖에 못했을까?
선생님은 우리 집과 내 주변에서는 유명한 분이시다. 엄마는 선생님을 마치 남동생 대하듯 친하게 대했다. ‘아직도’ 국민학교 선생님을 찾아다니냐는 말을 들으며, 매년 세배간 것이 위로가 될까? 내가 선생님께 드린 것으로는 국민학교 3학년 소풍가는 날 엄마가 담배 두 갑을 싸주었던 기억이 날 뿐이다. 거대한 바위이던 선생님이 세월과 함께 한알 한알 조각나고 있을 때 그 제자가 아는 척을 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위로가 되셨을까?
선생님 기대대로라면 ‘성인’이라도 되었어야 하는데
이제 나도 선생님을 만나러 갈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을 만나면, “선생님 억척스럽게 살다 왔어요”라고 말씀드릴 것 같다. 그렇지만, “저는 너그럽고 연약하고, 누군가 큰소리를 치면 눈물을 머금고 어쩔 줄 몰라하는 그런 사람이고 싶었어요”라고도 덧붙일 것 같다.
선생님은 내게 그러셨다. 너는 잡초와 같은 생명력이 있어서 어디다 내놓아도 살아날 것이라고. 그 시절 그것이 내게 필요했는지 모른다. 선생님이 내게 바라신 것은 무한한 생명력이었나 보다.
사람은 몇 살부터 자기를 깨닫는지, 특히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고 자기가 굉장히 존중받는 존재라는 사실은 몇 살에 깨닫는지? 어려서부터 그렇게 키운 집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생애 어떤 특별한 계기가 마련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조 선생님 덕택에 ‘중학교’라는 개념을 가질 수 있었다. 즉 나도 중학교를 진학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국민학교는 울어서 갔지만, 더 이상은 울어서 키울 꿈도 없었던 때였다. 울며 쫓아갈 주변도 없었다. 선생님을 만나면서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개념을 구축해간 것 같다. 물론, 선생님의 지도를 받는 동안 이것이 내 인생 별의 순간이구나라고 알아챈 것은 아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 어쩌면 지금에서야 그 만남이 ‘계기’였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내게 공부를 기대하지 않으셨던 엄마는 내가 장학금을 받고 진학하게 되면서, 적극 지원에 나서셨다. 사회에서 일하려면 갖추어야 하는 격식이 많은데, 우리 집에서는 보고 배울 것이 없으니 중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의 요청대로 그 댁으로 가라고 하셨다. 그분은 학교엄마이시다. 나는 그 댁에서 루소가 가정교사를 하면서 철학자가 되었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생각했다. 자기가 올라간 환경과 자기가 자란 환경에서의 차이, 자기가 자란 곳의 사람이 같이 올라와 주지 않은 것에 대한 갈등, 그런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학교부터 대학원까지 같은 재단의 학교에서 공부한 나는 더 넓은 세계를 한번은 체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학 과정을 밟았다. 내가 진학했던 성신여자사범대학 부속여자 중, 고등학교는 내가 대학 재학 중에 없어졌다. 당시 사범대학뿐이었던 성신여사대가 종합대학이 되면서, 캠퍼스가 모자라서인지 부속중고교를 문 닫았다. 그리하여 나는 중·고의 모교가 없는 학생, 대학에서도 오늘날까지 학과에서 유일한 졸업생 교수가 되는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집단사고’의 경향이 높은 한국에서 사회적 연고가 없는 환경에 놓였다. 독자적인 시선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까? 용꼬리가 되느니 닭의 머리가 되는 게 낫다는 말을 은사들은 수없이 뇌이셨다.
선생님들의 사랑을 업고, 교육을 통해 내가 걸어온 길을 신분 상승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평양의 어느 중학교 교장의 외아들인, 단신 월남 청년인 아버지에 걸맞는 위치를 찾은 것일까? 그보다도 어려운 환경을 딛고 선생이 된 분이 그런 환경의 아이를 발굴해 당신의 꿈을 키우고 있었던 걸까?
실제로 나는 장학금이 없는 국민학교는 교과서도 얻어써야 했지만, 중고등학교 때는 외부 장학금과 학교 장학금으로, 대학 때는 학교 장학금과 가정교사 월급으로 학비를 충당했고, 대학원은 고등학교 선생 월급으로 유학은 등록금이 없는 프랑스로 갔다. 조금만 거들어 주면, '상상 이상의 힘'을 창출하는 것이 사제관계인지도 모른다.
나는 믿는다. 교육은 ‘희망’이라고. 조금 더 노력하면 환경이 좋은 집에서 태어난 아이처럼 너그러워질 수도 있다고. 남을 아주 폭넓게 포용할 수도 있으리라고.
선생님은 늘 일기를 쓰셨는데, 돌아가시고 나서 보니까 일기장이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투병 중에 태우신 것 같다. 선생님이 남기신 루까복음 주석 노트가 내게 있다. 선생님의 영세명은 루까였다. 책으로 발표해 드려야겠다. 서둘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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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원고는 정말 쓰기가 쉽지 않네요. 편집위원장은 맨 마지막에 올리라고 해서 기다리는 사이 '숨'이 한번 죽었고, 또 다른 분 원고를 열심히 읽다보니 제 틀이 흔들렸는가 봅니다. 모든 교수님들께 정말 고생하셨다고, 그리고 정말 고맙다는 말씀드립니다. 물론 원고를 다른 것으로, 또는 다음에 내시겠다고 하신 분들도 마음 많이 쓰셨음을 잘 압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원고를 내시겠다고 하신 분이 두분 더 계십니다. 기다리면서 저는 편집에 들어갑니다. 11월 중순의 가운데쯤 전체 편집본을 교수님들 앞앞이 전달하겠습니다. 그때 전체 책 안에서 한번 더 수정하실 수 있겠습니다. 교권이 무너진다느니, 학교교육의 붕괴되었다느니 하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이 글들이 '귀한 자극'이 되었으면 합니다. 책 '예쁘게' 만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