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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앰 댓 상권 37. 고통과 즐거움을 넘어선 곳에 축복이 있다.
M: 자네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자기를 포함한 모든 것의 증거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해, 그 누구도 자네의 존재를 증거해 주지 못 해. 왜냐하면 그의 존재가 우선 자네에 의해 확인되어야 하기 때문이야. 자네의 존재와 앎은 그 누구에게도 빚지고 있지 않아. 잘 기억해 두게. 자넨 전적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지 어디서 오거나 어디로 가지 않아. 자네는 무시간적인 존재이며 자각일세.
문: 선생님과 저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선생님은 진리를 아시지만 전 단지 제 마음의 작용만을 압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제가 듣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진리이지만 제가 이해하는 것은 허위입니다. 말은 비록 같을지라도 말입니다. 선생님과 저 사이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그 간격을 좁히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M: 자네 자신을 어떤 그것이라고 여기는 생각을 버리도록 하게. 그러면 그 갭이 없어질 거야. 그 갭이 생긴 것은 자네 자신을 분리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야. 그 갭을 메꿀 필요는 없고 그냥 만들지 않으면 되는 거야. 모든 것이 바로 자네이고 자네의 것일세. 다른 어떤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야. 이것은 진실일세.
문: 정말 이상한 말씀입니다. 같은 말이 선생님께는 옳은데 제게는 진실이 아닙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은 정말 엉터리 같은 말인데 말입니다.
M: 그 말은 옳거나 그르거나 그냥 내버려 두게. 말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은 자네가 자네 자신에 관해 지니고 있는 생각이야. 그게 바로 자네의 벽이니 말이야. 그걸 포기하게나.
문: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름과 형태에 제한되어 있다고 생각하도록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 반대로 말하는 것만으로는 그 정신적인 습관을 지우지 못합니다. 대대적인 머리청소가 필요합니다. 만약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M: 자네가 말하는 머리 청소라는 게 바로 요가야. 정신의 모든 습성을 없애도록 하게. 같은 생각을 하고 또 하도록 강요받아서는 안 돼. 전진을 해야지.
문: 말은 쉽습니다만 실제로는 좀 어렵지 않습니까?
M: 우스운 말이야. 고통을 겪는 것보단 바꾸는 게 더 쉬워. 삶의 유치한 수준에서 벗어나야 해.
문: 그런 일들은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발생하는 것입니다.
M: 모든 일들은 항상 발생하고 있어. 그러나 그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 준비된다는 것은 성숙함을 말하는 것이야.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지.
문: 진실이 저의 본성이라면 제가 언제고 준비되어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M: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것은 두려워한단 말이야. 자네는 자신의 참모습을 두려워하고 있어, 자네의 목적지는 전체(the whole)야. 그러나 지금 자신의 개체성을 상실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어. 이게 바로 성숙하지 못하다는 뜻이야. 욕망과 두려움, 의견과 관념 등의 장난감에 집착한다는 말이야.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진리가 자신을 드러내도록 준비를 하게. 그러한 드러냄이 가장 잘 표현되는 것이 "내가 있음"이라는 말속에서야. 나머지는 그 어떤 것도 존재를 지니지 않고 있어. 이점에 대해선 자네도 확실할 거야.
문: "내가 있음"이라는 것도 당연하지만 "내가 앎"이라는 것도 역시 옳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누구누구로서 육신을 지니고서 다른 육신의 소유자들과 다양하게 관계하면서 존재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M: 그건 모두가 현재 속으로 이입된 기억일 뿐이야.
문: 저는 오직 현재에 존재하는 것만 확신할 수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 기억과 상상 등은 모두가 정신의 상태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바로 제가 아는 모든 것이며 그것들은 바로 지금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금 선생님께서는 그것들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사람이 어떻게 현재를 포기할 수 있습니까?
M: 자넨 자네가 좋아하거나 말거나 늘 미래 속으로 움직여 들어가고 있어.
문: 저는 지금으로부터 지금 속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저는 전혀 옮겨다니고 있지 않아요. 다른 모든 것은 움직이지만 저는 아닙니다.
M: 그렇다고 해. 하지만 자네 마음은 정말 움직이고 있어, 현재 속에서 자네는 움직일 수도 있고 움직일 수 없기도 해. 지금까진 자네가 자기 자신을 변하는 것으로 여기면서 변치 않는 것을 간과해 왔는데 이제는 그 마음을 반대로 해야 한다네. 가변적인 것을 지니면 자기 자신이 현존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지. 변함없는 실체로서 설명할 순 없지만 바위처럼 단단한 것이란 말야.
문: 만약 그것이 지금 존재한다면 왜 저는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까?
M: 그건 자네가 "난 그걸 모른다."라는 생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 생각을 버리도록 해.
문: 그런다고 해서 제가 알게 되지는 않습니다.
M: 잠깐. 자넨 지금 벽의 양쪽 면에 동시에 있으려 하고 있군. 그렇게 할 수가 있어. 그러나 그러려면 벽을 치워야 해. 그렇지 않으면 벽의 양쪽 면이 하나의 동일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든가. 그러니까 거기에는 "여기"라든가 "거기"라는 생각이 적용될 수 없는 것이야.
문: 비유를 한다고 해서 증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답답한 것은 다만 왜 선생님이 보시는 것이 제겐 보이지 않는가? 왜 선생님의 말씀들이 내 마음속에서는 참되게 들리지 않는가? 라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건 기다릴 수 있지만 이것만은 꼭 좀 알도록 해주십시오. 선생님은 현명하시고 저는 어리석습니다. 선생님께서 보시는 걸 저는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제가 저의 지혜를 발견하겠습니까?
M: 만약 자네가 자신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 전혀 어리석지 않은 것이야.
문: 저 자신이 몸이 아프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몸이 좋아지지 않듯이 제가 어리석다는 걸 안다고 해서 현명해지지 않습니다.
M: 자신이 병들었다는 걸 알려면 우선 건강해야 하는 게 아닌가?
문: 아닙니다. 제가 아는 건 비교로서 아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날 때부터 눈이 멀었는데 선생님께서 제게 만지지 않아도 사물들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면. 제가 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제가 눈이 멀었다는 걸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과 마찬가지로 저는 선생님께서 제가 알 수 없는 일을 주장하시면 내게 뭔가가 부족하구나 하는 것을 압니다. 선생님께서는 저에 대해서 이런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저는 영원하고 어디에나 존재하고 모든 것을 알며 지극히 행복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 유지 파괴하는 존재이며, 모든 생명의 원천이요 모든 존재의 핵심이며 모든 피조물의 주군이며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저를 궁극적인 실체이며 모든 존재의 원천이며 목적이라고 하시지만 저는 그저 멍청히 눈을 껌뻑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욕망과 두려움의 작은 뭉치이며, 어두움의 대양 속에 깜박이는 일시적인 불빛이고 고통의 물거품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M: 고통이 존재하기 전에 자네가 있었던 거야. 그리고 고통이 지나간 후에도 자네가 남아있네. 고통은 일시적이지만 자넨 그렇지 않아.
문: 죄송하지만 전 선생님께서 보시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제가 태어난 때부터 죽는 날까지 고통과 즐거움이 제 삶의 패턴을 짜게 될 것입니다. 나기 전과 죽은 후의 존재에 대해서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는 선생님 말씀을 받아들일 수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긴 하지만 그걸 아는 건 아닙니다.
M: 지금 자넨 의식이 있어, 그렇지?
문: 제발 이전과 이후에 대해선 묻지 마십시오. 저는 단지 지금, 현재에 존재하는 것만을 알뿐입니다.
M: 됐어, 자넨 지금 의식이 있어. 그 의식을 지켜 나가도록 해. 의식하지 않고 있을 때에는 여러 가지 상태가 있어. 그걸 무의식적 존재라고 하게.
문: 의식이 없다는 겁니까?
M: 의식과 무의식은 지금의 경우에 해당되지 않아. 자네가 자네라고 생각하는 존재는 의식 속에 있으나 본질은 의식과 독립해 있어.
문: 그것은 공입니까? 침묵입니까?
M: 왜 또 그런 식으로 갖다 붙이나? 생명이란 건 어디에나 퍼져 있으며 의식을 초월하는 것이야. 객관적인 의식이라는 건 단순한 의식의 한 부분이지. 그걸 넘어선 게 아니야.
문: 선생님은 도대체 어떻게 의식도 무의식도 아닌 그 순수한 존재의 상태를 아십니까? 모든 지식이라는 건 오직 의식 속에 있을 뿐입니다. 마음이 중지된 상태 같은 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리되면 의식이 관찰자로 나타나나요?
M: 관찰자는 오직 사건을 지켜볼 뿐이야. 마음이 중지되면 "내가 있음"이라는 감각도 해체되지. 마음이 없으면 "내가 있음"이라는 것도 없어.
문: 마음이 없다는 것은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생각으로서의 '내가 있음'은 가라앉더라도 존재감으로서의 "내가 있음"은 남지 않습니까?
M: 모든 마음과 더불어 가라앉아. 마음이 없으면 체험도 체험자도 있을 수 없어,
문: 관조자는 남지 않습니까?
M: 관조자는 단지 체험의 있고 없고를 기록할 뿐이야. 관찰자 그 자체로는 체험이 아니야. "내가 관찰자다."라는 생각이 솟아날 적에 체험으로 되지.
문: 저는 때로는 마음이 작용을 하고, 때로는 멈춘다는 사실을 알 뿐입니다. 정신적인 고요의 체험을 저는 마음의 부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M: 고요라고 하든 공이라고 하든 부재라고 하든 어쨌든, 사실은 체험자, 체험, 이미 한 체험, 이 셋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야. 관조하고, 자각하고, 의식함에 있어서 이것 혹은 저것이라는 감각은 존재하지 않아. 규정지어지지 않은 “있음”이 남을 뿐이야.
문: 무의식의 한 상태로서 입니까?
M: 뭔가 다른 것과 연관을 시키면 그와 동시에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구. 그것은 모든 상대적인 것들 사이에 또 상대적인 것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야. 의식도. 무의식도 중도도 아니며 둘의 너머도 아니야. 그것은 그 자체로 존재할 뿐이지. 체험이나 체험의 부재라고 불리울 수 있는 뭔가를 의지함으로써 존재하는 건 아니야.
문: 정말 이상합니다. 지금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건 그것이 일종의 체험인 것처럼 말씀하고 계신데요.
M: 내가 그것에 대해 생각할 적에는 되지.
문: 빛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꽃에 의해 차단되면 색깔로 나타나는 것과 비슷한가요?
M: 그렇지, 그렇게 말할 수 있겠군. 색깔 자체는 아니지만 색깔 속에 빛이 있으니까.
문: 나가르주나가 네 가지 부정을 했다더니 정말 어지럽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며 둘 다도 아니고 둘 중의 하나도 아니라니!
M: 자네가 어렵게 느끼는 것은 실재가 의식의 한 상태인 것으로 여기는 생각 때문이야. 자네는 "이건 참된 것이다. 저건 아니야" 그리고 "이건 부분적으로 참된 것이고 저건 일부 비실재이다"라고 말하는 습성이 있어. 마치 실재라는 것이 하나의 속성이나 성질이기라도 하듯이 말이야.
문: 제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결국 의식이라는 것은 고통을 느낄 때에만 말썽거리가 됩니다. 언제나 축복인 상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의식이 즐거움과 고통의 혼합인 것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M: 모든 의식은 제한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거야. 의식의 뿌리에는 욕망, 즉 체험의 충동이 놓여있어.
문: 욕망이 없으면 의식도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러면 무의식의 이점이 무엇입니까? 저는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해서 즐거움을 포기해야 한다면 차라니 그 둘 모두를 지니고 싶습니다.
M: 고통과 즐거움이 넘어선 곳에 축복이 있지.
문: 의식하지 못하는 축복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M: 의식도 무의식도 아니야. 실재할 뿐이야.
문: 선생님께서는 왜 의식을 싫어하십니까?
M: 그건 짐이야. 몸도 짐이고 감각, 욕망, 사고 등등 모든 것이 짐일 뿐이야. 그리고 모든 것은 갈등의 의식일 뿐이지.
문: 실재는 참존재, 순수의식, 무한한 축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고통은 그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M: 고통과 즐거움이 발생하지만 고통은 즐거움의 대가이고, 즐거움은 고통의 보상이야. 자넨 타인을 해침으로서 즐거움을 얻고 다른 생명을 즐겁게 함으로써 해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즐거움과 고통이 하나라는 것을 아는 것이 평화야.
문: 그 모두가 재미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의심스럽지도 않습니다. 저의 목적은 보다 단순한 것입니다. 저는 삶에 있어서 더 많은 즐거움과 더 적은 고통을 바랍니다. 그러니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M: 의식이 존재하는 한 즐거움과 고통은 있을 수밖에 없어. 자기 자신과 대상들을 동일시하는 것은 "내가 있음" 즉 의식의 본성에 속하는 일이야.
문: 그러나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이 모든 것이 제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것은 제게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M: 만족되지 않는 게 누군가?
문: 고통과 즐거움의 인간인 제가 바로 그렇습니다.
M: 고통과 즐거움 둘 모두가 축복이야. 내가 자네 앞에 앉아서 말하고 있는 건 지금 당장의 나의 직접적 체험을 말하는 것이야. 고통과 즐거움은 축복의 바다 속에 출렁이는 파도의 종마루와 골짜기일 뿐이야. 깊은 아래 쪽에는 지극한 만족이 있어.
문: 선생님의 체험은 항구적입니까?
M: 시간도 없고 변화도 없는 거지.
문: 제가 아는 건 즐거움에 대한 갈망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 뿐입니다.
M: 그것이 바로 자네가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거야. 그걸 중지하게. 당장 습관을 없앨 수가 없으면 곰곰이 생각해서 그 습성의 허위를 바로 볼 나은 방법을 생각해 보게나. 습관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이 마음의 의무일세. 마음이 만든 것은 마음이 없애야 해. 그렇지 않으면 마음 바깥에는 욕망이 없음을 깨닫고 벗어나든가.
문: 솔직히 말씀드리면 모든 것을 마음이 만든 것이라 설명하는 것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마음이라는 건 눈이 하나의 도구이듯이 도구일 뿐입니다. 그걸 지각(知覺)이 꾸며낸 거라고 하시겠습니까? 저는 창문을 통해서 세계를 보는 것이지. 창문 속에서 보지는 않습니다. 공통의 토대가 있기 때문에 선생님의 말씀은 앞뒤가 잘 맞지만, 저는 선생님의 토대가 진리에 기초한 것인지 마음속의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저는 단지 하시는 말씀을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을 뿐이지요. 그것이 선생님께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저는 모릅니다.
M: 자네가 자신의 위치를 마음속에 두는 한 자넨 내가 마음속에 있다고 볼 걸세.
문: 말이라는 건 정말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군요.
M: 말한 일이 없으면 이해할 게 뭐가 있나? 이해의 필요는 오해에서 생기는 것일세. 내가 말하는 것은 진실인데 자네에겐 이론에 불과하겠지. 이것이 진실이라는 걸 자넨 어떻게 알텐가? 듣고 기억하고 생각하고 머리속으로 그려 보라구 그리고 그걸 일상생활 속에서 응용해 봐.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에 대해 인내심을 좀 가져 주게나. 그리고 자넨 자네 자신의 유일한 장애물이니 스스로에게도 인내심을 가지게.
길은 오직 자네를 통해서 자네를 넘어가는 것 뿐이야. 자네가 만약 오직 특별한 것만이 실재하고 의식이 있으며 행복하다고 믿고. 이중성을 넘어선 실재가 상상으로 만든 추상개념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길 거절한다면 아마 자넨 내가 여러 개념들과 추상들을 펼치고 있다고 느낄 거야. 그러나 일단 자네 자신의 존재 속에서 실재와 만나게 되면 내가 묘사하는 것이 자네에게 가장 가깝고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간단하게 글 하나 덧붙이자면 답을 하는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는 질문자를 의식으로 보고.. 의식으로써 답을 하고 있고, 질문자는 자기 자신을 육신과 마음을 자기자신으로 아는 동일시된 상태에서 질문을 하고 답을 듣고 있습니다. 이 차이를 명확하게 알기 전에는 '아이 앰 댓'의 내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글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신 자신을 형체 없는 깨달은 사람이라고 치고(당신이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계속해서 글을 읽어나간다면 개념은 조금씩 수정될 것이고 결국에는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될 겁니다. 그리고 깨달음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되었을 때 책의 내용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오면 세상 모든 경전의 내용을 궁리하지 않고도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런 것을 일러서 해오解悟했다고 하며 이 상태에 이르면 남는 것은 수행을 해서 진짜 깨달은 사람이 되는 일만 남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