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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 이황 표준영정. 이 초상화는 상상화이며 현재 퇴계의 영정은 전하지 않는다. 한국은행 소장
"손으로는 물 뿌리고 소제(청소)하는 일도 할 줄 모르면서 입으로 천리(天理)의 오묘한 이치를 말한다."
남명 조식(1501~1572)이 퇴계 이황(1501~1570)에게 건넨 말이다. 같은 해에 출생한 두 사람은 조선 성리학의 양대 거목이었다. 이황이 경상 좌도 사림(남인)의 영수라면 조식은 경상 우도 사림(북인)의 영수였다. 남명은 퇴계가 제자 학봉 김성일에게 유교경전인 '태극도설'에 대해 설명한 것을 후일 전해듣고 이처럼 악담을 퍼부었다.
'퇴계선생언행록'의 기록 중 하나다. 퇴계 제자들의 각종 기록물에 산재해 있던 퇴계의 언행을 모아 도산서원에서 1883년(영조 49년) 간행했다. 학문·교육·예절관, 생활태도와 성격, 관직생활 등 퇴계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책이다.
▲ 남송의 주희 초상. 주자학의 창시자이며 조선 선비의표상으로 존경받았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성리학에서 주자(주희) 이래 일인자로 꼽히는 퇴계를 남명은 항상 가소롭게 여기고 사사건건 모욕했다. 사람이 너무 순진하고 고지식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도산정사(도산서원) 밑에 관청이 관리하는 어장이 있었다. 일반인들은 어획이 금지됐다. 퇴계는 여름만 되면 이곳에 와서 지냈지만 일부러 어장 근처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조식이 이를 알고 '어찌 그리 소심한가. 내 스스로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관가에서 금한다고 굳이 피할 것은 무엇인가'라고 비웃었다. 퇴계는 '조식이라면 그렇게 하겠지만 나는 이렇게 할 따름이다' 하였다" (김성일)
조식은 단성현감 벼슬을 사양하면서 쓴 상소에 어린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하던 문정왕후를 겨냥해
"대왕대비도 깊은 궁궐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묘사해 조정에 파문이 일었다. 남을 나쁘게 말하지 않는 퇴계도 이때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선생이 말하기를 '남명은 비록 이학(理學·주자학)으로서 자부하지만 그는 다만 일개의 기이한 선비일 뿐이다. 그의 의론이나 식견은 항상 신기한 것을 숭상해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주장에 힘쓰니 이 어찌 참으로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하였다." (정유일)
퇴계는 평생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익힌 바를 몸소 실천하는 진정한 학자였다.
"평상시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의관을 갖추고 서재에 나가 자세를 가다듬고 단정히 앉아 조금도 어디에 기대는 일이 없이 온종일 책을 읽었다." (정유일)
"선생은 온화하고도 어질며, 공손하고도 삼가며, 단정하고도 자세하고, 조용하고도 무거워, 사납고 거만한 얼굴이나 성내고 거슬리는 기색은 일찍이 한 번도 드러낸 일이 없었다. 바라보면 의젓해서 공경할 만한 거동의 위엄이 있고, 사귀면 따스해서 사모할 만한 용모와 덕이 있었다." (이안도)
"바른 학문을 밝게 드러내고 후배들을 끌고 인도하여, 공·맹·정·주(공자, 맹자, 정자, 주자)의 도가 불꽃처럼 우리 동방을 밝히게 한 사람은 오직 선생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박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한자리에 앉아서 책만 읽다 보니 건강을 많이 해쳤다.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 학문에 뜻을 두어 종일토록 쉬지 않고 밤새도록 자지도 않고 공부를 하다가 마침내 고질병을 얻어 병들어 못 쓰게 된 몸이 되고 말았다. 배우는 자들은 모름지기 자기의 기력을 헤아려서 잘 때는 자고 일어날 때는 일어나며 때와 장소에 따라 자기 몸을 살펴 마음이 방종하거나 빗나가지 않게 하면 될 뿐이다. 굳이 나처럼 하여 병까지 나게 할 필요야 있겠는가' 하였다." (이덕홍)
▲ 이우 초상. 퇴계 이황의 숙부이며 그의 유년기 스승이었다. 퇴계의 실제 용모를 유추해볼수 있는 단서 중 하나이다.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퇴계가 학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전적으로 숙부인 이우의 덕이다.
"선생이 말하기를 '숙부 송재공(이우)은 학문을 권면하면서 몹시 엄하셔서 말이나 얼굴에 조금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내가 '논어'를 주석까지 외워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도 틀림이 없었으나 그래도 칭찬하는 말은 한마디도 없으셨다. 내가 학문에 게으르지 않은 것은 다 숙부께서 가르치고 독려하신 힘이다' 하였다." (김성일)
성리학의 최고봉이 보기에 초기 사람파 학문은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조광조는 타고난 자질은 아름다웠으나 학문이 부족하다 보니 시행한 것이 지나쳐 마침내 일에 패하고 말았다. 학문에 충실하고 덕행과 기량이 이루어진 뒤에 세상일을 담당하였더라면 그 이룬 바를 쉽게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이 말하기를 '김종직은 학문하는 사람이 아니며 그가 종신토록 했던 일은 다만 화려한 문장과 시가에 있었으니 그 문집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이 말하기를 '김굉필의 학문이 실천하는 데 돈독했다고는 하나 도에 있어서 묻고 배우는 공부에는 지극하지 못한 점이 있는 듯하다' 하였다." (김성일)
성리학에서는 서경덕을 높게 쳤다.
"선생이 말하기를 '서경덕의 의론을 보면 기(氣)를 논한 것은 지극히 정밀하나 이(理)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였다. 기를 주장하는 데 너무 치우치기도 하고, 혹은 기를 이로 알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 동방에는 이보다 앞서 책을 지어 이렇게까지 한 사람이 없었으니 이와 기를 밝힘에 있어서는 이 사람이 처음이다. 다만 그가 말할 때에 자부함이 너무 지나친 것을 보면 터득한 경지가 깊지 못한 것 같다' 하였다." (김성일)
퇴계는 높은 관직을 지냈지만 스스로 낮추고 모범을 보였다. 고관들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퇴계는 언제나 관청의 세금이나 부역도 남들보다 앞장서 냈다.
"곽황이 예안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남에게 말하기를 '이 고을의 세금이나 부역에 대해 나는 아무 걱정이 없다. 이 선생이 온 집안사람을 거느리고 남보다 먼저 바치니 마을의 백성들도 서로 앞다투어 혹 뒤질까 두려워하므로 한 번도 독촉하지 않아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으니 내게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하였다." (우성전)
음식은 허기를 면하면 그만이었다. "선생은 손님과 마주 앉아서 음식을 먹을 때에는 수저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음식은 끼니마다 세 가지 반찬을 넘지 않았고 여름에는 건포 한 가지였다. 일찍이 도산에서 선생을 모시고 식사를 하였는데 밥상에는 가지 잎과 무와 미역이 전부였다." (김성일)
선물을 주고받는 데서도 도리를 앞세웠다. 관가에서 교제의 예로서 보내오는 작은 물건은 애써 거절하지 않았다. 받더라도 주위와 나눴다.
"선생이 일찍이 월란사(月瀾寺·예안의 사찰)에 있을 때 작은 물고기를 보내 준 사람이 있었다. 선생은 이웃 노인들에게 나누어 보낸 뒤에 비로소 맛을 보았다." (이덕홍)
임금은 이 현인을 늘 가까이 두려고 했지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기를 소원했다.
"명종 말년에 소명(召命)이 여러 번 내렸으나 굳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명종은 이에 '어진 이를 불러도 이르지 않는다(招賢不至)'는 시제(詩題)를 내 가까운 신하를 시켜 시를 지으라 하고, 다시 화공을 시켜 그가 사는 도산을 그려서 바치게 하였으니 그 선생을 공경하고 사모함이 이와 같았다." (이이)
퇴계의 외모도 언급된다. 1000원짜리 지폐에서 퇴계는 안면이 여의고 병색이 짙은 모습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얼굴이 그다지 갸름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선생은 이마가 두툼하고 넓었다. 송재(숙부 이우)가 매우 아껴서 이름을 부르는 대신 항상 '광상(넓은 이마)'이라고 불렀다." (이안도)
언행록은 고종기(考終記)로 장식한다. 병세가 완연해진 때부터 사망하기까지 한 달 동안 쓰여졌다.
"1570년(선조 3년) 11월 9일(음력) 제사를 지내려고 온계의 종가에서 묵다가 처음 한질(감기)을 만났다. 제사를 지낼 때 신주를 받들고 제물을 드리는 것도 손수 하였는데 기운이 갈수록 편치 않았다."
(이안도)
15일 병세는 더욱 악화됐지만 공부를 그치지 않았다.
"기대승이 일부러 사람을 보내 편지로 문안했다. 선생이 자리에 누운 채 답장을 썼다. 치지격물(致知格物·지식을 넓혀 사물을 깊히 연구한다는 정주학파의 학문관)의 해설을 고쳐서 자제들을 시켜 읽게 한 뒤 기대승과 정유일(퇴계 제자)에게 부쳐 보냈다."
(이안도)
12월 4일 유훈을 적게 했다.
"첫째, 예장(禮葬·나라에서 지내는 장사)을 하지 마라. 예조에서 전례에 따라 예장을 하겠다고 하거든 유명이라고 자세히 말해서 굳게 사양하라. 둘째, 유밀과(기름에 튀긴 과자)를 쓰지 마라. 셋째, 비석을 세우지 말고 다만 조그만 돌을 쓰되, 그 앞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쓰고 ~." (이안도)
퇴계는 8일 눈을 감았다. "아침에 화분의 매화에 물을 주라고 하였다. 이날은 개었지만 유시(酉時·17~19시)부터 갑자기 흰 구름이 지붕 위에 모이더니 눈이 내려 한 치쯤 쌓였다. 잠시 후 선생이 자리를 바르게 하라고 명하므로 부축하여 일으키자 앉아서 운명했다."(이덕홍).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 매일경제 프레미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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