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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42
ㅡ 역사기록과 고대사 논란에 대하여 ㅡ
내가 쓰고있는 고대사와 관련 계속 내 글에 딴지를 거는 분들이 있다. 아마 대부분 '환단고기'를 추종하며 우리 민족 고대사가 얼마나 영광스러웠는지를 밝히고 싶어하는 분들이다. 물론 그 분들 애국심과 우리민족에 대한 충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역사라는게 단편전인 기록 몇 가지로 우리만 주장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환단고기'는 대부분 역사학자로 부터 위서로 판단 받았다. 그 내용도 황당무계 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리고 대부분 우리 국민들도 믿지 않는다. 환단고기를 추종하시는 분들은 내 말이 기분 나쁘겠지만 현재 현실이 그렇다.
그리고 신석기시대에나 해당되는 상고사가 뭐가 그리 중요할까?
당시는 민족이란 개념도 없었고 단지 그 지역에 사는 생활인였을 뿐이다. 단지 다 같은 인류였을 뿐인데 지금에사 우리 민족 선조이니 어쩌니하며 그 뿌리를 찾는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어쨌든 민족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시며 '환단고기'를 신주단지 모시고 믿는 분들에게 한 가지 묻고 싶다.
['일본서기'는 그래도 정통 역사서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분명하게 '임나일본부'가 기록 되어 있다. 임신한 '신공태후'가 바다를 건너와 신라와 백제를 무찌르고 한반도 남부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백제 신라를 오랫동안 통치했다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이 기록을 바탕으로 조선을 식민지화 하는 것을 정당화 시켰다.]
임나일본부설은 광개토대왕비 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어 아직도 논란이 있다.
'환단고기'를 믿는 분들은 '임나일본부설' 기록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으니 100% 진실로 믿는 가?
요즘 일본 역사학자들도 당시 상황을 연구하고 다른 기록들과 교차 검증결과 '임나일본부설'을 거의 대부분 부정하고 있다.
일본서기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기록이 우리 고대사를 헷갈리게 하고 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은 중국 역사가 '진수'(233~297)가 서기 3세기 말에 편찬한 역사서로, 우리가 너무나 잘알고 있는 중국 삼국시대(위, 촉, 오)동안 역사와 주요 인물들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정통 역사서이다. 진수가 삼국 중 위나라 역사를 기록 하면서 마지막 부분에 중국 동쪽에 위치한 이민족들에 대해 기록한 부록같은 항목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너무나 유명한 '삼국지' 내용은 '진수 삼국지'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가 진짜로 믿으면서 알고있는 <유비 관우 장비등 삼국지>는 진수 삼국지가 나온 이후 천 년후에 '나관중'에 의해 쓰여진 소설 '삼국지연의' 내용이다. 우리는 소설 내용을 사실로 알고 있는 것이다. 진수 삼국지에 관우 장비는 단지 몇 줄 정도 나오고 만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서 '동이(東夷)'는 중국 고대에 중국 동쪽에 위치한 여러 민족들을 일컫는 용어로, 이들에 대한 중국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즉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왜> 등에 대해 단편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삼한사회'에 대한 가장 오래된 역사기록은 위에 쓴 '삼국지위지동이전'이며, '후한서', '진서' 등에도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지위지동이전' 기록들이 김부식 '삼국사기' 기록과는 달라 우리나라 고대사를 헷갈리게 하고있다.
'삼국지위지동이전'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백제 건국연대는 서기 3, 4세기경, 신라 건국연대는 5세기경까지 올라 간다.
김부식 '삼국사기' 기록과는 3, 4백년 차이가 난다.
그런데 '삼국지위지동이전'에 '삼한'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이 우리나라 기록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혼선을 주고 있다.
'삼한'은 고조선 멸망 후 한반도 중남부에 존재하였던 정치집단인 마한(馬韓)·진한(辰韓)· 변한(弁韓)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마한은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지역에, 진한과 변한은 경상도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삼국지위지동이전'에서는 [3,4 세기 경 마한에 54국,
진한 변한에 각각 12국이 있었고,
게다가 삼한은 대방군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큰 강, 큰 호수)를 한계로 삼고, 남쪽은 왜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천리 쯤 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사방 4천리> 가 문제이다.
<사방4천리>이면 고구려 부여도 포함하고 중국 동부, 일본 일부쪽 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이 기록이 '환단고기'와도 맛물려 '삼한'이 중국 동부와 일본 일부까지 있었다는 것을 철썩같이 믿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내가 올린 고대사나 지도들이 '일제식민 사관'에 찌든 글이라며 나를 강하게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역사라는게 그렇다.
우리가 한 역사를 정설로 받아 들이는 것은 거의 대부분 역사학자들이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연구는 과거 사건, 인물, 사회 구조, 문화 등을 이해하고 기록하는 학문으로, 이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단지 단편적인 기록하나로 몇 사람이 주장하는 것이 아닌 대부분이 받아 들여지는 정설이 중요한 것이다.
아래는 역사를 정설로 받아들이는 주요 이유들이다.
1. 객관적 증거와 사료: 역사 연구는 고고학적 발견, 문서, 비문, 그림, 유물 등 다양한 사료에 기반하여 이루어진다. 이러한 사료는 과거의 사건을 객관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객관적인 증거가 뒷받침되기 때문에 정설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2. 학문적 연구와 검증: 역사는 학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논의된다. 역사적 사실은 여러학자 연구와 검토를 거쳐야만 정설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런 학문적 절차를 통해 역사의 정확성을 높이고, 잘못된 해석이나 편견을 제거할 수 있다.
3. 사회적 합의: 역사적 사실은 학자들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합의된 내용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정설로 인식된다. 역사 교육, 대중 매체, 문화적 전통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사회 전반에 확산되고, 사람들은 이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배우고 이해하게 된다.
물론, 역사해석은 주관적인 요소도 있을 수 있으며, 새로운 증거나 연구에 따라 기존의 정설이 수정되거나 새로운 해석이 추가될 수 있다.
이처럼 역사는 단편적인 기록하나로 정설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기록들이 다른 기록들과 당시 상황이 교차검증 되어야 하고 그에 맞는 고고학적 유물등이 발견되어 그 기록이 맞다는 것이 검증되어야 한다.
삼한(三韓)이 <사방 4천리> 면적을 가진 광대한 나라였다고 '삼국지위지동이전'에 기록된 것은 고구려(사방 2천리)와 부여(사방 2천리) 두 나라를 합하고 중국요동, 일본일부까지 차지해야하는 황당한 이야기인 것이다.
당시 다른 기록들과 교차검증해도 말이 안 된다. 이 시기는 우리가 즐겨 읽었던 중국 삼국시대이다.
삼국지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일본서기에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김부식 '삼국사기'에도 삼한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나오지 이런 기록은 전혀없다.
이런 말을 하면 나를 자꾸 일제식민사관에 찌든 사람으로 몰아가는데 그렇다면 김부식도 일제식민사관에 물들어서 <삼한 사방 4천리>나 되는 그 자랑스러운 '삼한'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고려, 조선시대 많은 역사학자들도 일제식민사관에 찌들어 <삼한 사방 4천리> 언급을 전혀하지 않은 것일까?
이 기록이 '삼국지위지동이전'에 왜 그렇게 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진수'가 별 관심없는 삼국 이외의 지역에 대해 귀동냥으로 들었거나 그냥 성의없이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일본서기'를 믿지 못하듯이 '삼국지위지동이전'
의 <삼한사방사천리> 기록은
교차검증 해본 결과 곧이 곧대로 믿기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삼국지위지동이전'은 동아시아 지역 고대 민족들에 대한 귀중한 사료로, 당시 중국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과 기록 방식을 보여 주는 한국과 일본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인 것은 확실하다.
'삼국지위지동이전' 기록은 이후 중국의 다른 역사서인 '후한서(後漢書)'와 우리나라 김부식 '삼국사기(三國史記)', 일본 '일본서기(日本書紀)'등 역사서와 비교되며, 동아시아 고대사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아래는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나오는 내용으로 한국사 시험에 아주 잘 나온다.
참고자료로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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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한 - 경기, 충청, 전라도 지방의 54개국. 목지국의 지배자가 마한왕 또는 진왕으로 추대되기도 함→ 백제국 성장, 마한 지역 통합→ 백제로 발전
* 진한 - 대구, 경주 지역 중심 12개국 → 사로국 성장 → 신라로 발전
* 변한 - 김해, 마산 지방 중심 12개국 → 가야국 성장 → 가야 연맹으로 발전
<이미지 출처 : 2009년 개정 한국사 교과서>
1) 위치
한강이남 지역 → 진의 발전으로 마한, 변한, 진한의 연맹체 등장
(한강 이남 지역의 진(辰)이 B.C.2세기경, 남하 유이민들의 새로운 문화와 토착 문화와의 융합으로 삼한 형성)
2) 정치
① 군장국가 : 신지 ․ 견지(큰족장), 부례 ․ 읍차(작은족장), 마한 목지국(진왕) → 삼한 전체 주도
② 제정분리 : 제사장인 천군이 농경과 종교에 대한 의례를 주관하는 신성 지역 소도의 존재
③ 마한(백제국) → 백제, 변한(구야국) → 가야연맹왕국 , 진한(사로국) → 신라
3) 경제
① 철제 농기구 사용 → 벼농사,
② 수전경작이 시작되어 벼 농사 널리 행해짐 → 저수지 발달(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 제천 의림지 등)
③ 철 생산(변한) → 화폐 사용, 낙랑 ․ 왜 수출
④ 변한의 특산물 : 철 → 낙랑, 일본에 수출, 화폐처럼 사용
4) 풍속
① 반움집(구덩식 움집), 귀틀집(큰 통나무로 정(井)자 모양으로 귀를 맞추어 층층이 얹고 틈을 흙으로 발라 지은 집)
② 두레조직(공동작업)
③ 소도(蘇塗) → 정치적 군장의 세력이 못 미치는 곳. 제정분리.
④ 노비는 머리를 깎고, 남자는 상투를 틀었음.
⑤ 변한에서는 장례에 새의 깃털을 사용하여 사망자의 승천을 빌고, 문신의 풍습이 있었음.
5) 제천행사
① 수릿날(5월, 씨 뿌리고 난 뒤)
② 계절제(10월, 가을 곡식을 거둔 후)
옥저(沃沮)
옥저(沃沮)는
부여족의 한 갈래로 옥저는 동옥저로도 불렸고, 다시 남옥저와 북옥저로 구분된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동옥저는 남옥저와 동일한 집단으로 보기도 한다. 3세기 전반 동옥저의 가구 수는 5천여 호(戶)였으며, 해안을 따라 동북방향으로 길게 뻗친 거주지역은 1천여 리에 달하였다고한다. 위치는 기원전 3세기 무렵에 함경남도 해안일대에서 두만강 유역 일대에 걸쳐 있었던 종족과 읍락 집단이다. 남옥저는 함흥 일대에 있었고,남쪽 영흥 부근에서 동예와 경계를 이루었으며, 북옥저는 길림 연변에서 두만강까지에 있었다고 한다. 동예와 마찬가지로 변방에 치우쳐 있어 선진 문화의 수용이 늦었으며, 일찍부터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정치체제는동예와 마찬가지로 군장국가였다.
동예(東濊)
동예(東濊)는 1세기 초에 임둔군 옛땅에서 자립한 고대 종족의 국가이다.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인구는 2만여 호이고, 혼인·장례 등의 풍속과 언어가 고구려와 비슷하였다고 한다. 위치는함경남도 원산·안변 일대에서 경상북도 영덕에 이르는 동해안 지대 및 강원도 중부 이북 내륙지대에 걸쳐 존재 → 변방에 치우쳐 있어 선진 문화의 수용이 늦었으며, 일찍부터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정치체제는 군장국가(君長國家, chiefdom)의 형태이며, 왕이 따로 없고 각 읍락(邑落)에 후(侯)·읍군(邑君)·삼로(三老)라는 군장(君長)이 있어서 자기 부족을 다스렸으나, 이들 군장은 큰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경제는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여 농경, 어로 등 경제생활을 했다.
고구려
고구려초기는(고대국가 이전) 1) 건국 :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 유역의 졸본(환인) 지방 → 주몽이 건국(B.C. 37) 2) 경제 ① 산악지대 위치 → 약탈 경제 ② 압록강 지류 동가강 유역의 졸본 지방, 산악 지대로 토지 척박 ③ → 활발한 정복 활동 전개, 정복국가로 발전(한의 군현 공략 → 요동 진출, 옥저 정복(태조왕 AD56) → 공물 수취), ④ 진수[삼국지]에 나쁘게 묘사( → 약탈 경제 때문) 3) 정치 : 정복 전쟁(평야지대 진출) → 국내성 천도 ① 5부족 연맹왕국 : 왕 과 대가(大加) ,
그 아래 사자, 조의, 선인 등 관리 ② 왕 - 대가(상가, 고추가 등의 독립적인 족장) - 사자, 조의, 선인 ③ 제가회의 : 중대한 범죄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음
부여(夫餘)
부여(夫餘)는 서기전 2세기경부터 서기 494년까지 북만주지역에 존속하였던 예맥족의 국가이다. 훗날 538년부터 660년까지 불린 백제의 별칭인 남부여(南扶餘)와 구분하기 위해 북부여라고도 한다.
부여는 만주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송화(쑹화)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반농, 반목으로 농경과 목축을 주로 하였고, 특산물로는 말, 주옥, 모피 등이 유명하였다.
정치체제는 1세기 초에 왕호를 사용하였고,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는 등 발전된 국가의 모습을 보였다. 북쪽은 선비족, 남쪽은 고구려와 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3세기 말엽 선비족의 침략을 받아 크게 쇠퇴하였고, 최후에는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왕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馬加)·우가(牛加)·구가(狗加)
부여 남쪽에 고구려가 있고, 고구려 남쪽에 만리장성이 있다 부여와 장성의 거리가 1천리이니
고구려의 남북거리는 1천리이고, 부여의 남북 거리도 1천리로 추정하여 위치를 비정해야 한다
(위만조선 시대인 BC 2세기 2천리 북부여를 고구려와 부여로 각각 1천리로 나누어서 비정할 수 밖에 없다)
고구려 북쪽에 부여가 있으니, 부여의 위치는 하북성(고구려) 북쪽이니 승덕시와 적봉시 지역에 부여가 있었다.
ㅡ 초롱박철홍 ㅡ
아래 사진은 첫 번째, 두 번째 사진은 삼국지위지동이전이나 환단고기에 따른 당시 상상 지도
세 번째는 우리 역사교과서에 나오는 지도
첫댓글 고대국가들은 거의 다 부족연합 이었습니다
때문에 대부분 다 민족 국가였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