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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장 흔들리는 기별 자들에게 배울 교훈
Ⅰ. 1888 기별의 더딘 수락에서 배운 교훈
1.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한 기별을 보내셨다
하나님께서는 미네아폴리스에서 당신의 백성에게 신랄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1888년 이후에 당신 자신이 택하신 사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저들은 하나미의 신임장을 가지고 있었다(R.&H. 9, 3, 1889. 5, 27, 1890). 저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중대한 기별을 전했다. 그것은 적합하게 전해졌다. 그러나 지적한바와 같이 저들의 기별은 혼잡한 반응(어떤 이는 받아들이고 어떤 이는 거절하거 어떤 이는 얼마동안 종립적인 입장에 남아서 불확실하게 있었다)을 보였다.
엘렌 화잇이 우리에게 강조한 것은 실제로 큰 왜침과 늦은비의 강조의 시작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더디한말 못할 기초적인 이유들을 선언한 것을 이미 주목해왔다(R.&H. 3, 22, 1892. p. 178). 그리고 계시록 18:1의 주대하는 천사들의 빛나는 광채의 시작이었다( R.&H. 11. 22. 1892. p. 723). 그러나 이 예언의 신의 말씀까지도 어떤 이들의 보류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 이들은 그 사자들에 대하여 깊은 원한이 있었다. 난점들은 남아있었다.
2. 유감스러운 주저의 이유들(원인)
그 제시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능하신 준비에 대한 포괄적인 말이 높이 적절한 말로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심판의 사업을 마치시고 시련 시기가 끝날 때 우리는 개인적으로 자기 것으로 하는 믿음으로 받아들인 이 모든 것을 채우시고, 모든 것을 이기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통해서만 변화와 우리의 영원한 집을 위해 적합하게 준비될 것이다. 이것은 칭의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가된 의일 뿐 아니라 성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나눠주시는 의로서 제시되었다. 이것은 성령, 신성의 복된 제 3위를 통해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내재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재림시에 영화시에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저들은 미네아폴리스에서의 논쟁의 기조적인 원칙들이었다. 물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영원한 복음, 예수의 믿음(세째 천사의 기별의 내적 핵심이요, 모든 것을 포함한 범위)에 대한 단순히 다른 술어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들의 눈에 숨겨졌고 완고한 소수(어떤 이들에 의하여 결정적으로 저항을 받았다) 그 대결의 결과에 관해서는 저들이 실질적으로 세째 천사의 기별의 구조적인 교리들로서 제한해왔던 우리의 독특한 시험하는 진리들을 그것이 가치를 떨어뜨릴까봐 참으로 우려했던 어떤 이들 편에서 강력한 반대가 있었다. 저들은 저들의 그리스도에 고나한 제한된 사상과 비인격적인 성령 십자가와 속죄의 분리들에 도전했음에 심히 놀랬다.
어떤 처음에 반대하던 자들은 저들의 종전의 그릇된 사상을 남자답게 자복하거 그 총회에서 저들의 적대를 자백하고 형제들과 재 연합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후에 어떤 이들은 저들의 길을 완전히 잃었다. 다른 이들이 바른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것보다 좀 더 무엇이 있었다.
3. 양편에 있었던 유감스러운 태도들
미네아폴리스에서 반대하는 무리는 칭의의 이론은 믿었으나 믿음과 행함 사이의 관계를 명백히 하지 못했고 구원인 결과라기보다는 구원의 원인으로서 행함을 설명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편 와그너와 존스는 선행을 이행함과 열매를 보다 수단으로 만든다고 느끼고 와그너와 존스는 한 동안 실제적 구원에 있어서 유일한 요인으로서 거의 전적으로 믿음에만 강조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불가피한 오해가 있었다. 그리하여 오해는 생겼다. 강력한 말이 반대에 사용되었다. 그 말들이 상처를 주었다. 화잇부인이 권고해야 했다.
양편 무리가 상대편의 견해를 조용하게 공평하게 보아주지 못했다. 그리하여 양편에서 서로 이끄는데 실패했다. 우리는 와그너와 존스의 젊은이들은 나이 많은 반대자들을 완고하고 반박 적이라고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을 가장 당황하게 한 일은 엘렌 화잇이 기별 자들을 더욱 비평하던 비평자들의 원한을 강화시켰다. 이것은 유감스럽게도 저들의 기별도 기별 자들을 더욱 비평하던 비평 자들의 원한을 강화시켰다. 이것은 곧 예언의 신 자체의 완전성에 대한 소수의 태도에 영향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 입장의 위태함이었다.
4.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교의(tenet)로서 취급했다
반대자들은 믿음의 의는 항상 S.D.A.에 있었던 교의, 즉 장로들의 유전이었다는 논리는 학술적으로 옳았다. 그러나 우리의 처음 40년간의 기록은 그러한 분야에 신학적 견해가 없는 것이 드러났다. 그리스도의 시대로 돌아가서 유대인들은 일몰시부터 일몰시까지 참된 안식일에 쉬었다. 그러나 저들은 진정으로 안식일을 지키지 못했다. 저들의 선조들은 메시야가 곧 오실 것이라고 말해왔다. 저들은 예수님을 인식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이것이 정신이 없는 형식의 기반이다.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는 어떤 같은 것들이 있다. 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백성들도 몸은 성령의 전이라는 진리를 인정한다. 그러나 세속이 그것을 더럽혔다. 저들은 심판에 관해서 열렬하게 설교했으나 동료들에게 판단 받고 비난받는다. 저들은 꼼꼼하게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고 저들의 희생의 공로를 자랑했다. 그러나 많은 자들은 불완전한 행위를 스스로 입고 하늘의 안약과 금과 그리스도의 흠없는 의의 흰옷을 구하고 찾는데 실패한다. 긴급한 필요를 요하는 입장에 있다.
5.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변화
그런 것이 1888년 전후로 교회의 000상태를 폭로할 때에 엘렌 화잇의 기소였다. 그리고 믿음의 의의 구제의 준비의 믿음의 의, 믿음, 성화와 하나님의 충만함의 화신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이 성취된다는 그 최고의 영과의 계시에 사로잡혔다(골 2:9). 그리고 저들은 이런 배경과 강조됨 중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선포하도록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았다. 그러나 저들의 제시의 생생함과 기별에 대한 어떤 디들 편에서의 반작용이 생겼다. 그리고 저들은 항상 행함에 대한 은혜의 관계를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오해와 비평과 반대에 대한 근거를 제공했다. 그 반대는 왔고 날카로운 비평이 그리고 그것은 기별자들을 상심시키고 해쳤다.
6. 1888의 진리의 최후의 승리
이것을 연구하는 모든 연구생들이 이 배경을 아는 바와 같이 1888년의 이 진리들은 아직 최고조에 달하지 못했다. 반드시 그 때는 와야 하고 세상을 향한 우리의 증거의 최후 국면에 돌입하기 전에 올 것이다. 이것들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최후의 증거의 심금을 울리는 모든 것을 확충하는 핵심이 분명히 될 것이다. 그 “최후의 운동”은 신속한 것들이 될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 중심적, 충만한 기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충만히 넘치도록 꽉 찬 운동이 될 것이다. 전진이 있을 것이다 관점들은 완전히 될 것이다.
변화가 생길 것이다. 1888년의 영광스러운 진리들은 승리할 것이며, 한 백성이 주께서 설계하시고 준비하신 하늘의 준비에 의하여 주님을 만나도록 충분히 준비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예정된 것이며 그대로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장에서 우리는 88의 기별 자들의 그 후의 흔들림에 의하여 생긴 부분에 다하여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마 한 가지 단순한 요인이상 때문에 1901년 총회 이후 얼마 안 되어 발전하던 미네아폴리스기별에 대한 관심을 식게 하고 주저하도록 한 것은 이 넘어짐이다. 사실은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들을 알아야 하거 솔직하게 정직하게 이 사실들을 직면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1888년 이후 첫 10년간이 일반적인 발전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그 위에 그 기별 자들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이것들은 나눌 수 없이 서로 연결된 고로 타당한 이해를 위해 이것이 긴요하다. 우리는 먼저 그것을 살펴보자.
Ⅱ. 또 다른 전환점인 1901년의 대총회
1. 1901년 총회의 목적과 의미
이번에는 베틀 크릭에서 개최한 1901년의 중요한 총회는 우리 역사에서 또 하나의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마치 1888년 총회나 19세기에서와 마찬가지도 20세기 초에 가장 중요한 총회였다. 그것은 조직 또한 더욱 정확히 말해서 재조직의 중대한 문제를 숙고한 것이다. 1860년대 초기로 돌아가서 그 문제는 도대체 어떤 조직이 있어야 하는지의 문제가(단순히 있어야 하지만) 있었다.
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실제로 형제우애와 조직적 자선을 위한 계획 등에서부터 저들은 증명서 안수법률문서 보존, 교회 이름 선택, 구체적 대회 조직 등으로 발전되었고 드디어 1863년에 대총회를 조직하였다. 이모든 것이 포함되었다. 이것 후에 안식일 학교, 우리 건강 기별과 사업, 소책자 사업들의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이 기관들은 처음에는 모두 대부분 자치적이며 독립적이었다. 예컨대 국제 안식일 학교 협회, 국제 종교 자유 협회, 특히 국제 의료 선교 및 자선 협회 등이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의료 선교 협회는 강력히 자라나서 다루기 힘들게 되고 고도로 공격적이 되어 1901년에 가서는 대총회에서 운영된 다기 보다는 대부분 개인적이 되었다. 그것은 왕 같은 권세를 가지고 세도를 부리고 대총회에 대하여 비난을 퍼붓고 도전했다. 경제 정책에 있어서의 변화가 필수적으로 되었고 빛을 피하는 것이 급한 문제였다. 베틀 크릭에서 1901년에 총회를 모였을 때 형편이 그러했고 그 총회 결의로 대총회장에 A. G. Daniells가 피선되었다.
2. 각부서가 재조직되었다
대총회는 각부서와 사업을 대표하도록 확대되었다(2-3개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그러나 철저한 재조직이 효과를 나타냈다. 대부분 자치하는 연합회가 창설되었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의료 선교와 자선 협회와 이에 관련된 기관들이었다. 이들 중에 어떤 것은 교파에 속하지 않겠다고 지껄였다. 베틀 크릭 대학은 교외인 Berrien Springs로 이전되었다. 그리고 다른 곳에도 비교적 변화와 증진이 있었다.
3. 본부를 Washinton으로 옮겼다
다음 우리 대총회 본부를 와싱톤 D.C.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두 가지 큰 재난들이 일어났다. 1902년 2월 베틀 크릭에 있는 병원이 불타고 1902년 12월에 R.&H. 출판소가 전소되었다. 둘 다 완전히 타버렸다. 이 대화재들은 한 중대한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하여 주께서 허락하셨다. 이것들은 Battle Creek을 떠나라는 한 신호였고 하나님의 경고를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는 증거였다. 1903년 Okland에서의 대총회에서 1901년의 계획대로 외방 선교단과 대총회가 병합되었다. 교단의 기관들은 1901년과 1903년 총회 기간에 결의한대로 우리의 기관들을 통해서 우리 백성의 소유가 되었다. 1901년에 안교부, 종교 자유부, 교육부, 출판부들이 조직되었고 1905년에 의료부도 첨가되었다. 이것들은 행정기관의 완전한 계획 하에서 함께 연합되었다. 이 나중의 제안을 Dr. Kellagg이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한편 1863년 이후부터 해마다 대총회를 해오던 것을 1889년부터 1905년까지 2년마다 하게 되었다. 그 후에 4년마다 한 번씩 하게 되어 1970년까지 계속되었고 1970년에 5년마다 한 번씩 하기로 결의했다. 이제 우리는 Dr. J. H. Kellagg으로 돌아가 보자.
4. 범신론적 위험이 표면에 나타남
이미 본 바와 같이 1905년 즘에 분파 작용이 생겼다. 1903년에서 1907년 사이에 만족한 확장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의료부에서 관리, 처리, 재정 정책(어떤 이들 편에서의 어떤 신학적 견해 차이들은 물론) 들에 관해서 강력한 불만이 번졌다. Kellagg과 대총회 사이에 긴장 관계가 깊어져 갔다. 이것은 1903년 초에 시작되었었다. 베틀크릭 위생병원이 Kellagg가 관장하는 베틀 크릭 대학과 더불어 옛 집터에 재건되었다. Kellagg는 그의 사상과 계획을 밀고 나갔다. 신학적인 차이는 깊어갔다. 항상 사색적인 특성을 가진 그 의사는 신비로운 어떤 신비에 항상 매혹되었다. 그는 생물계나 무생물계에 모든 생명은 본질적으로 신이요, 단지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가 아니요 그 속에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임재 한다는 사상으로 빠져들어 갔다. 피조물 속에 하나님이 편재한다는 사상이 그를 사로잡았다. 이것을 00의 생활에 적용했다. “씨는 그 속에 생명을 가지고 있고” 그리스도는 하늘 성소에서는 불론 우리의 이 지상 상소들 안에서 봉사한다는 등을 주장했다.
5. 자연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상
이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관한 새로운 관념이 싹텄는데, 고대의 그노스타즘이나 헬레니즘적 범신론주의자의 자연 숭배와 비슷한 것이다. 이것이 Kellagg의 “산 성전”이란 책에 구체화 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때에 그 책 6쪽에 찬성하는 독자들 중에 A. T. Jones와 E. J. Waggoner의 이름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Kellagg의 주장은 천연계 밖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천연계 안에 계신 하나님, 그 성전에 신령한 임재였다. 그는 어떻게 나타났던지 간에 모든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은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이다. 생물 속에 있거나 무생물 속에 있거나 본능과 지성에 있어서 나무속에 나무를 만드는 분이 있고, 꽃 속에 꽃을 만드는 분이 있다. 사람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있다. 물론 그것은 매혹적인 문구로 쓴 단순히 직통적인 범신론이다.
6. 1907-Kellagg도 GC와 관계를 끊었다
Kellagg의 “산 성전”의 교정쇄는 1902년에 이용가치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R.&H. 12월의 화재로 그 모험과 금속판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1903년 Oakland총회 후에 Kellagg박사는 즉시 “산 성전”의 판권을 자기 이름으로 얻어서 인쇄하여 분포하기 시작했다. 화잇 부인은 그 흉악한 음흉함이 포함된 것들에 대항해서 적극성을 띠고 말했다(8T 290-292). 그 위협들은 컸다. 강신술, 자유연애. 하나님에 관한 오해, 속죄의 부정, 인간의 자기 자신을 구세주로 삼음 등이 포함되었고 성경을 편의상의 가설로 인정 함들이 포함되었다. 그것은 큰 배도였다. 굉장한 토론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우리 의사들 중의 다수는 성경 진리와 예언의 신과 교회에 머물러 있었다. 소수(2-3)가 Kellagg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Battle Creek 위생병원은 교단의 주관에서 점차 분리되어 1907년에 절정에 달랬다. 건전한 건강 원칙들 때문에 베틀 크릭을 전세계에 유명하게 만들었던 Kellagg은 우리를 이탈했다. 그러나 교회는 발전했다. 그러나 존스와 와그너도 포함되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더 큰 무리를 제공했다.
Ⅲ. Battle Creek 위기와 존스와 와그너와의 관련성
1. 충실히 기록할 책임
역사적 증거의 평가는 조심해야 할 일이며 크게 책임져야 할 일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는 많은 소용돌이와 십자로들이 있다. 이 때문에 신령하신 비추임이 필수적이다. 그것을 연구하는 자는 하나님께 책임을 지고 묘사해야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오류가 없고 옳지 않은 기록이 없도록 기도드린다. 그러나 사실을 참되게 해석하는데 책임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우리가 취급하려는 것은 특히 조심해야 할 미묘한 것인데 1888년에 하나님이 그렇게 크게 사용하신 후에 지금까지 뛰어나게 존경받아 왔기 때문에 A. T. Jones와 E. J. Waggoner가 행한 역할의 여파에 관해서 기록하려함에 있어서 특히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이 모두 그 당시 방법은 달랐지만 드디어 비틀거렸다. 다시 강조하는 것은 묘사하기 위해서는 이해하는 맘을 가지고 분별력과 공정함이 요구된다. 여기에 냉정한 사실들이 있다.
2. 존스의 교단과의 관계의 개략
먼저 다음의 매우 짧은 묘사를 한다. Alonzo T. Jones(1850-1923)은 와싱톤주 Walla Walla에서 군대에 입대했다. 그러나 모든 여가 시간을 성경과 역사적인 서적들에 몰두했다. 1873년에 제대한 후에 그는 얼마 안되어 S.D.A.교회에 들어갔다. 그 후에 그는 서해안에서 설교를 하기 시작했고, 그 후에 새로 설립한 Hearldsburg Waggo- ner와 그는 함께 편집일을 보았다. Jonse는 1889년에 그 일을 그만 두었다. 이들은 그러므로 그 역사적인 미네아폴리스 총회 시에 00의 기관지의 동사 편집인들이었고 그 일 후에 존스와 와그너는 약 2년간 엘렌 화잇과 널리 여행하면서 여기 저기 다니면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해서 효과 있게 설교했다. 화잇 부인이 1891년에 호주로 떠난 후에 존스와 와그너는 1893년과 1897년에 있은 대총회의 2년 회기에서 두 강사로서 활약했다. 그 후의 일을 일반적이 이야기를 알기 위하여 몇 말씀 더 보충해야 하겠다.
3. Jones가 교단과 관련을 끊다
1897년에 존스는 대총회 편의원이 되었으며 1897년부터 1901년까지 리뷰지의 편집부장이 되었다. 얼마 후네 그는 캘리포니아 대회장으로 피선되었다. 그는 자신의 어떤 일반적인 행정 정책과 조화되지 않음을 발견하고 대총회 행정 위원직을 사임했다. 그 다음에 1903년에 그는 캘리포니아 대회장직을 사임했다. 그 후에 그는 Kellagg와 연합했는데, Kellagg는 이미 베틀 크릭 위새병원을 교단의 주관 하에서 분립시키려고 애쓰고 있었고, 엘렌 화잇의 간절한 권면에 배우 대적하여 일하고 있었다. 1903년에 본부를 Washinton D.C.로 이전한 후에 존스는 잠시 그곳에 왔다가 곧 베틀 클릭으로 돌라가서 그는 더욱 더욱 Kellagg의 투쟁에 동조하게 되어 결국 교단에서 분리되고 말았다. 1909년에 존스는 화해하기 위하여 최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허사였다. 존스가 교회의 근본 교리들을 믿는 신자로서 머물러 있는 한편 그의 아내는 1346년 그녀가 죽을 때까지 베틀 크릭에 있는 Tabernacle교회의 흔들리지 않는 신자로서 남아있었다.
4. 와그너의 활동의 개관
존스보다 5살 아래인 Ellet J. Waggoner(1855-1916)는 M.D.를 베틀 크릭에서 마친 후 뉴욕의 Belleoue 의과 대학에서 의과를 졸업했다. 그는 처음에는 베틀 크릭 위생병원에서 의료 직원으로 봉사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목회에 있었다. 고로 그는 의사직을 떠나서 1884년에 태평양 인쇄소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그의 아버지 Joseph H. Waggoner의 지도 하에 “시조”지의 보조 편집자로서 있었다. 그도 역시 Healdsburg 대학에서 성경을 가르쳤다. 그 후에 그는 A. T. Jonse와 1886년에 시조지의 편집자로 봉사하면서 1888년 미네아폴리스 총회를 맞이했다. Waggoner는 Jonse보다 2년간 시조지 경험을 더 계속했다.
5. 와그너의 생애의 후년
잘 아는 미네아폴리스 경험을 겪은 후 와그너응 영국으로 가서 1892년부터 1897년까지 영국 현대 진리를 편집했다. 그와 W. W. Prescott은 영국의 사역자 양성학교를 지도했으며 와그너는 남영국 초대 대회장이 되었다. 1902년에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서 임마누엘 선교 대학의 직원으로 잠시 있었다. 가정의 발생한 문제로 이혼하거 재혼했기 때문에 교단의 직책에서 떠나게 되었으나 그가 죽는 날까지 그는 S.D.A. 기본 교리를 계속해서 믿고 옹호했다. 그의 여생의 마지막 6년간은 당시 Kellagg의 지도 하에 있는 재조직된 베틀 크릭 대학에서 교수하는데에 보냈다. 와그너의 후기의 생애는 후에 좀 더 상세히 연구하겠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Ⅳ. 존스 - 조직과 책망에 걸려 넘어지다
1. 와그너와 존스의 여파
오늘날 우리 사역자들 중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자주 당연히 일난다. 1880년대 후기와 90년대에 진리와 교회 사업에 놀라운 공헌을 한 후에 A. T. Jonse와 E. J. Waggoner에게 정확히 말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저들은 그 때 비극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무엇 때문인가?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들의 말년에는 어떻게 되었으며 교회와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이 질문들은 온전히 타당한 질문들이다. 비록 즐거운 질문은 아니지만 그리고 솔직히 답변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중에 가장 공정하고 충실한 답변은 A. V. Olsons의 위기에서 승리라는 책 부록 B(302-316)에 있다. “A. T. Waggoner는 어떻게 되었는가? 의 제목으로 되어 있고 화잇 출판위원 Arther White가 기록한 것이다. 거기 나타난 말씀들은 모두 문서로서 증명되어 있다. 그리고 물을 필요도 없이 엘렌 화잇 서류철에 기록된 증거 서류들이 보관되어 있다. 우리는 이것들을 볼 수 있다(본 저자는 직접 그것을 연구해 본 결과 화잇의 결론과 완전히 일치 되었다. 화잇이 인용하여 기록하기 전에 연구해 보았으나 그 책 부록에 기록된 대로이므로 그냥 그것을 인용한다).
2. 배반 - 반대자들이 가장 크게 말하는 점
이들은 1888년과 1890년대에 하나님께서 크게 쓰셨으나 엘렌 화잇은 존스와 와그너는 감당키 너무 어려운 시험들이 있다고 1892년에 암시했다(Letter 24, 1892). 그 운동에서 그들의 위치가 뛰어나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건전하게 용감하게 선포한 기본 지리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심비성에 대항한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될 것을 가장 잘 아는 악한 자, 자신이 친히 참혹한 공격의 초점이 되었다(만일 그들을 혼돈 시키고 전복시킬 수 있다면).
더욱이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을 반대했던 어떤 이들도 그리고 사단 자신이 그 일 때문에 가장 강력하게 공격하는 요점이 되었다. 너희는 그런 빗나간 기별의 열매를 보지 못하는가! 너희는 그 기별의 해석자들과 기별 자들인 저들에게 일어난 일을 보지 못하는가! 그리하여 어떤 이들이 꼭 그대로 말했다.
3. 수년간의 신실한 경고
1888년 이후 수년 동안에 화잇 부인은 이 사람들은 약점과 잘못이 있으나 하나님을 위한 봉사에 자격이 없지는 않았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들은 만일 이 약점들을 교정하지 않았다면 길을 잃을 것이라고 경고를 받았다. 저들의 생애를 다시 역사적으로 살펴보라. 두 사람은 모두 “시조”지의 편집자들(1886년 5월 13일부터 와그너는 1890년 12월 29일까지 존스는 그보다 조금 더 먼저 그만 두었다)이었다. 존스는 1890년대에 대부분 Battle Creek에 있으면서 1888년에서 1905년까지의 모든 대총회 회기에 참석했다. 1893년에 엘렌 화잇은 존스에게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제시할 때 극단에 치우쳤다고 주의를 주었다(1SM 377-380). 부인은 또한 글 쓰는 것과 말에 있어서 모욕을 주는 일을 피하라고 권고했다(Spalding의 말을 들으면 그는 자기의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과 자극적인 접근법을 자랑했다고 한다). 1897년에 존스는 리뷰지의 편집국장이 되었다(R.&H. 10, 5, 1897. p. 640). 또한 그는 1897년에 대총회 평의원에 피임되었으나 1901년 대총회 전에 사퇴했다. 이것은 당시 대총회장 G. A. Irwin에게 가볍게 책망을 받았기 때문이다(p. 96. A. T. Tones가 한 비난을 반박하는 글, 1906, 5. p. 15).
4. 1904년에 갈라진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1901년에 큰 재조직하는 총회시에 존스는 종전까지 의장으로 부르던 것을 대회장으로 부르기로 한 것에 대하여 반대했다(그러나 자기 자신은 1901년에 캘리포니아 대회장직을 이상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1903년에 화잇 부인이 떠나지 말라고 경고했음에도 부인의 권면을 거절하고(Letter 116, 1906) Kellogg의 미국 의료 선교 대학으로 갔다. 1904년에 화잇 부인은 존스에게 공중 전도회를 위하여 큰 대도시를 가라고 전했다(Letter 187, 1905). 그러나 그는 그 호소에 응하지 않았다. 그 대신 존스는 계속 Kellogg와 그의 동료들의 영향 하에 베틀 크릭에 머물러 있었다. 화잇 부인의 그에 대한 최후의 기별은 1911년에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1904년 6월 23일과 1911년 11월 10일 사이에 12 번 보낸 연속적인 기별을 절정이었다(A. L. White, in through Crisis to Victory, p. 307-310). 1905년에는 화잇 부인이 존스는 그의 영적 시력을 잃었고 하나님의 경고를 거절했다고 말했다. 비참한 밀이 발전되었다. 그는 미혹을 당하고 속임을 당했고 빛 대신 어두움을 택했다. 그는 Kellogg에게 지배되었고 성령을 슬프시게 했다. 1907년에 그는 “믿음에서 떠나” “배도” 중에 있게 되었다. 회개와 자백만이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Through Crisis to Victory를 보라).
5. 신임서를 철회하고 제명했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 지도자들을 대항해서 투쟁했기 때문에 존스의 목사 신임서를 회수했다. 1909년에 A. G. Daniells에 의한 화해를 위한 최상의 노력을 했다. 그러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얼마 않되어 존스의 이름은 S.D.A교회 교인 명부에서 제명했다. 그 후 1915년에 그는 시작하여 1916년에 신자가 되었다. 그의 이름은 재림교회의 자매 관계에서 제명될 당시 그의 이름은 그 교회에 있었다. 존스는 1923년에 죽었다. 반복해야 할 것은 A. T. Jonse의 부인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그 변화무쌍한 시기동안 계속 한 신실한 S.D.A. 신자로 남아 있었다. 그녀의 목사였고, 그녀의 장례식 설교자였던 T. G. Bunch목사에 의해 그 후에 알게 되었다.
제35장 비틀거린 기별자들에서 배울 교훈 - No. 2
Ⅰ. 와그너는 신비한 이론들의 교활함 중에서 길을 잃었다
1. 이상한 이론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1888년의 미네아폴리스 총회 후에 E. J. Waggoner는 화잇 부인이 호주로 9년간 체류하러 떠나던 때인 1891년까지 시조지의 편집자로 남아있었다. 그 다음 1892년에 와그너는 편집 사무를 지도하기 위하여 영국으로 부름 받았다. 그는 1903년의 대총회 시까지 런던에 체류하면서 얼마동안 W. W. Prescott과 교제했다.
1894년에 화잇 부인은 조직에 관하여 와그너가 주장하는 견해에 관하여 우려를 표시했다. 미네아 폴리스 총회시와 그 이후로 부인은 와그너와 존스의 뒤이어 강력하게 영향력을 끼치도록 밀어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때를 위한 하나님의 사업을 그 당시에 현저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Letter 37, 1894). 그러나 와그너는 위험성이 다분한 이상한 이론들을 품고 선동하기 시작했다.
2. 영적 인척 관계에 관한 위험한 사상
와그너는 1897년 대총회를 위하여 영국에서 미국으로 돌아와서 Callege View에서 Hebrew에 관한 18시간의 연속 연구회를 지도했다(G. C. Bulletin, 1897). 그는 또한 그 때 대총회의 마치는 안식일 설교를 했다. 그러나 Kellogg도 그곳에 있었는데 그 같은 총회에서 그의 간교한 범신론적 견해를 교묘하게 소개했다. 와그너에게 해로운 영향을 끼치게 된 사상을 소개했다.
영국에 돌아와서 와그너는 어떤 영적인 관계에 관한 교묘한 이론을 전개하게 시작했다. 드디어 그것은 그를 혼돈하게 하였다. 베틀크릭에서 있었던 1901년의 대총회에 참석하여 그가 귀한 영적 빛을 받았다가 열을 냈으나 그것은 위험천만한 그릇 인도하는 꾸며낸 이야기였다(E. G. White Letter 224, 1908).
엘렌 화잇은 “와그너는 그가 영적 인척관계에 관하여 교리 중에는 믿음에서 떠나고 있는 것이었다.” 유럽에서 그는 이미 악한 열배를 거두고 있는 씨들을 뿌렸다(Letter 121, 1906). 미혹하는 영과 마귀의 교리들에 대하여 주의를 주었다. 그는 사로잡히고 있었다.
3. 천명을 거절했다. 분리될 수밖에 없었다
와그너는 1903년의 Oakland(California) 총회 후에 미국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화잇 부인은 그가 기만당한 이론에서 끊어버릴 것을 희망하고 시험적 근거지로서 임마누엘 선교 대학의 직원으로 있으라고 원고했다.
1903년 10월 28일 화잇 부인은 와그너에게 사단이 사람들을 그릇 인도하기 위하여 자기의 특별한 교활함을 의의 겉옷으로 옷 입혔다고 경고했다(Letter 231, 1903). 그 문제의 핵심에 관한 화잇 부인의 통찰은 감명 깊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았다.
와그너는 Berrien Spring에서 잠시 가르친 후에 자기 정신과 더욱 흡사한 베틀 크릭 대학에서 존스와 Kellogg와 연합하여 범신론적 가르침 속에 자신을 맡기고 예언의 신에 대하여 엄청난 회의주의에 빠졌다. 화잇 부인은 베틀 크릭을 떠나서 “산 성전”의 감화와 감성주의를 벗어 버리라고 부인은 권고했다(Letter 279, 1904). 부인은 와그너와 존스에게 보두 도시 전도의 일터로 가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것에 저들은 응하지 않았다.
4. 비극적인 이야기에서 배울 중대한 교훈
기록한 바와 같이 1906년에 와그너는 이혼하고 재혼했다. 그 사실은 교회와 그의 관계를 차단했다. 그러나 그는 교회를 반대하지는 결코 않았다. 그리고 그는 교회의 주요 교리적인 견해들에 돌아서지도 않았다. 그는 한때 Battle Creek에서 의사 일을 보았다. 그는 그가 바로 죽기 직전에 그가 한 마지막 설교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이것에서는 결코 신념을 바꾸지 않았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배울 기본적 교훈으로 가득 찬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그 분과의 밀접한 교제 중에 살고 있을 때에 교회 내에 한 큰 개혁적인 운동을 위하여 와그너와 존스의 설교와 저서를 사용하셨다. 그 관계가 변경되었을 때 저들의 능력은 없어졌다(주님께서는 1888년부터 몇 년간 잘 사용하던 마이크가 고장한서 못쓰게 되었다. 역자 주). 저들의 봉사의 결과는 한결같다. 그들이 진리에서 탈선하여 조직에서 차단되었을 때 그 두 사람의 대부분 크게 열매 없는 설교를 한 시기가 있었다. 바울이 권면한 것과 같이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이것은 우리 각 사람을 위한 엄숙한 교훈이다(고전 10:12).
5. 행운으로 시작한 비극적인 결말
1888년의 기별을 거부했던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항해서 사운 투쟁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 기별의 속도를 감속시킨 것은 분리된 반응(그 기별을 거절한 것은 지도자들이 아니었다. 저들은 거부하지 않았다)만은 아니었다. 도리어 E. J. Waggoner와 A. T. Jonse(하늘이 보낸 1888년의 기별에 맨 앞장섰던 두 사람)이 잠재적이며 발전적인 약점들에 정복당하여 교회에서 떠났다는 비극적인 사실에 원인이 있었다. 이것은 의심할 것도 없이 다른 어떤 한 가지 요인보다 더욱 많은 이들의 의문을 야기 시켰다. 저들이 전했던 기별의 정당성에 관하여 더욱 많은 의문을 일으켰다. 그리고 따라서 저들의 탈선은 그 교훈의 열매이다라고 어떤 이들이 비난하도록 되었다. 그 교리가 전반적으로 부적당한 결론이었다. 와그너는 그가 죽기 전에 교회의 가르침들에 대한 그의 충성을 거듭 이야기 하였다(어디까지나 충실한 와그너의 딸 Pearl Waggoner Howard). 1969년 그녀가 죽을 때까지 충실한 재림 교인 이였던 분에게서 얻은 와그너 가족의 상세한 기록에 의하면 그리고 그 가족과 밀접히 접속해 M. C. Wilcox 같은 분들에 의하면 그렇다. 의문의 여지없이 히 사람들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의 의의 복된 진리에 대하여 의문과 불명예를 끼친 큰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탈하기 수년 전에 저들의 능력을 스스로 잃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제가 그의 인도에 순복함에서 이탈한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Ⅱ. 비극적인 타락의 발판(떨어짐 발판의 비극)
1. 발판은 없어졌으나 성전은 서 있다
사람들과의 어마어마하고 영구적인 진리의 대성전의 뾰족탑을 세우는데 유용하거 긴요한 단지 일시적인 발판이 된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 후에는 떨어져서 내버려지는 발판이 됨은 비극이다. 최초에는 필수적으로 사용된 후에 건물이 계속 남아 있도록 그 건물이 설립되도록 도와준 후에 떼어서 없어지는 그런 인간 말판을 보는 것은 비극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나 선언하는 일에 크게 사용된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
이같이 1888년의 중대한 발전 후에도 있었다.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위대한 진리(재림 운동의 바른 핵심을 이루는 진실로 세째 천사의 기별인)를 재확립시키는 데에 필수적으로 효과 있게 이두 사람들은 이 등한시 되어지는 진리에 관심을 갖게 하고 교회에 궁극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다시 뛰어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의미심장한 공헌을 한 후에 그 후에 사라졌다. 인간 발판은 교단의 시야에서 탈락되고 사라졌으나 저들이 도운 진리의 고상한 건물은 섰다. 그것은 슬픈 종말이다.
2. 일시적인 역할에 우리가 진 벌
그러나 무대 건설에서 필수적인 와그너와 존스의 역할은 가치를 저하시키거나 침묵하여 버리거나 멸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공헌을 결코 경시하거나 품격을 떨어 뜨여서는 안 된다. 비방은 단 한번이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동시대의 예언의 신이 보증하는 신임이 있다. 진리의 성전에서 경배하기를 계속하는 자들은 그 건물을 짓는데 협조한 자들에게 항상 빚을 지고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잠시 동안이나마 중대한 역할에 대하여) 상관키 않고 경의를 표하는 인정을 마땅히 받아야 할만큼 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를 위한 권면이다. 그들이 충성했을 때에 그런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씻을 수 없게 기록에 남아 있다. 그들은 그분의 기별 자였다. 이들은 하늘에서 온 신임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하늘에서 온 기별을 전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공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기념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와 비슷한 비극이 우리 중 누구에게도 닥치지 않도록 부지런히 깨어있어야 한다. 1888년에 E. J. Waggoner와 A. T. Jonse가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중심적 진리를 발전시켰다는 것은 SDA 역사의 엄연한 사실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신령한 진리는 단지 영구적으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이 운동의 최후의 승리의 크라이막스에 중심 주제가 되게 되어 있다. 우리는 사라진 발판의 비극의 교훈에 유의해야 하며 그런 일의 반복을 피해야 한다. 흔들이는 때가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이들, 많은 이들이 그 길을 따라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참으로 그 흔들리는 때가 명백히 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숙고해야 할 엄숙한 교훈이다. 그러나 좀 더 배울 것이 있다.
Ⅲ. 1888년 대결 이면의 진정한 동기
1. 도덕적 동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다른 무엇이 있다. 그 당시 어떤 강력하고 존경받던 뛰어난 지위에 있는 자들 - 당시 대총회 서기와 동시에 리뷰지의 편집자요 그 총회를 보고하는 대총회 회보의 편집자요, 베틀 크릭 대학의 성경 교사의 우리아 스미스 같은 사람들에게 도전하는 1888년 미네아폴리스 총회에 와그너가 한 기별을 전하는데 에는 비젼과 깊은 확신과 도덕적 용기가 필요 되었다. 스미스는 그의 편집 동료였었다. 그리고 J. H. Morrison은 Iowa 대회의 뛰어난 대회장이었다. 자기의 존경하는 친 아버지 Joseph H. Waggoner가 강조하고 반복해서 한 말에 대하여 도전한다는 것은 진정한 용기와 결심을 요했다. 그러나 E. J. Waggoner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가족 관계나 편집자에 대한 충성에 관한 문제도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존경하는 지도자들 편에서 발전시킨 유형에 일치 시키거나 탈선하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것은 근본 원리와 의와 건전한 신학과 성경 진리에 관한 문제였다.
2. 깊은 확신의 결과
그가 행한 일은 말씀을 이해하고 연구하며 널리 연구한 것에 기초한 개인적 깊은 확신에 관한 문제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논쟁적 견해와 깊은 감성과 강한 편견이 있었던 영원하신 신성의 놀라우신 제 2위이신 그의 주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와 완전한 신성에 관하여 그가 깨달은 명백한 계시의 결과였다. 그는 그가 침묵하는 것은 근무태만이었다. 와그너는 자기가 반드시 선포하지 않으면 안 될 하늘로부터 온 한 사명과 한 기별을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될 한 명령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고 느꼈다. 그는 그 엄숙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크게 비난받을 때에 최고로 중요한 진리에 관하여 하나님을 위한 대변자가 되어야 한다고 겸비하게 인식했다. 비난하는 사상의 도전은 성서적 대결 없이 허용해서는 안 된다. 오류는 반드시 진리와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혼돈과 오해는 청명함과 성서적인 모순이 없는 것과 대조해야 한다. 그의 책임은 분명했다. 그의 행동은 반듯이 나아갔다.
3. 깊은 확신에 의하여 말하도록 강요함
그의 사업은 모순에 기초되지 않았다. 깊은 강박감이 그를 강권했다. 그는 본래 논쟁가가 아니었다. 그는 논쟁적인 제시를 하지 않았다. 그는 논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피상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미숙한, 성급한 제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피상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말씀에 관한 최고의 가장 깊은 가르침의 조용한, 솔직한 제시였다. 그것은 수년간 연구의 결과였다. 더욱이 그는 이 최상의 구속의 진리는 어떤 이들이 두려워한 것처럼 세째 천사의 기별의 독특성을 과소평가하도록 하지 않고 변경시키지도 않음을 확신했다. 오히려 그것은 강화시켰고 가치를 높였고, 더욱 큰 능력과 투명하게, 유료하게 제시했다. 그는 어떤 이들이 부당하게 주장한 것처럼 “현대 진리”의 큰 구조에서 주의를 돌리는 이탈하는 의미가 없음을 보았다. 그 대신 그것은 도리어 그 기별은 더 큰 능력과 힘과 매력적으로 주입시켰다. 이것을 화잇 부인이 입증했다.
4. 세상에 참으로 제시함이 필수적임
와그너 박사의 제시는 세째 천사의 기별에 새로운 의미와 능력과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점점 정지 상태의 형식주의 화하는 것에 생기를 주었다. 그것은 소극적인 것에서 적극적인 것으로 옮겼다. 그것은 추상적인 신학적 교리(단지 지적 승인만을 요구하는)에서 살아있는 주관하는 원리와 준비에도 모두 바꾸었다. 그는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 최고로 존귀하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필요 불가결하고 주님을 온 세상에 전하지 않으면 안 될 영원한 복음의 더욱 충분히 제시하는 데에 그리스도의 합당한 위치에 올려놓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어떤 이들이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그릇된 견해를 계속 그릇되게 주장하거 있고 신성의 제 삼위이신 성령의 영광스러운 신격을 대항해서 싸우고 있음을 보았다. 그는 이것은 비성서적이요, 그릇된 견해임을 느꼈다. 그것보다도 더욱이 그것들은 우리 주위의 종교계에 증거하는 일에 있어서 점점 우리에게 오해를 초래하게 만들고 우리를 불리한 위치에 둔 것이었다. 타 종교계의 대다수가 이 특별한 기독교 기본 진리에 관하여 올바른 사상을 아직도 주장하고 있는데 우리 중에 있었던 이 소수의 견해는 확실히 틀렸다. 그리스도의 크기를 줄이고 신성을 제한하고 성령을 비인격화하고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이다 이 오해는 반드시 교정되어야 한다. 그것에 관해서 그는 명백히 하였고 확정되었다. 이것이 그의 진로를 지도했다.
5. 예언의 신의 반응의 시험
더욱이 와그너는 존경하는 원로들 앞에서 그의 발표를 했을 뿐만 아니라 훨씬 더 큰 비중이 있는 남은 교회를 우하여 임명된 사자 앞에서 제시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제시가 진실하고 성서적이요 그 기별에 충실했음을 느꼈다. 다른 아무 길도 그에게 열리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시험을 통과할 것임을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대로 되었다. 엘렌 화잇은 1844년의 실망을 통과했으며, 현대 진리의 모든 국면이 확립되는 매 계단을 알았고 그 당시 문제점들과 약점들과 필요들을 잘 알았다. 와그너는 또한 그 발표는 의심 없이 한 위기를 초래했고 내포하고 있음을 알았다.
6. 주의 사자가 확증함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었다. 그 후에 엘렌 화잇이 한 말에 의하면 “주께서는 그의 크신 자비로 당신의 백성에게 가장 귀한 기별을 와그너와 존스 장로들을 통해서 보내셨다”(Letter 57, 1895; TM 91). 그들은 하나님의 신임장을 지닌 한 기별을 전했다(E. G. W. R.&H. 9월 3일 1889). 그들은 우리의 독특한 하늘이 지시한 기별을 훼손시키지 않고 오히려 강화시킨다. 그들은 우리의 기본적인 증언을 부인하지도 않고 흐트러뜨리지도 않고 그것을 새로운 의미로 제시한다. 그들의 연구 발표는 참으로 세째 천사의 기별이었다(R.&H. 4, 1, 1890; TM 92, 93). 그것은 꼭 이 때를 위한 바로 그 진리이다(Ms. 10, 1889; 1SM 361, 362).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상에 보내라고 명하신 그 기별이었다(TM 91, 92). 그 당시 1888년의 기별이 필요불가결한 형태로 선포될 때 아무 잘못이 없었다. 이것이 예언의 신의 수많은 변증이었다.
7. 큰 분수령을 넘어섰다
수많은 보증이 다수가 결정을 내리게 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은 결정적인 증언은 초인간적인 근원에서 했다는 것이다. 그런 하늘이 보낸 빛이 승리를 얻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을지라도 그것은 승리하도록 되어 있었다. 달리는 될 수 없었다. 어떤 이들은 엘렌 화잇의 시인에 의하여 어리둥절했을지라도 종국에는 진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반대자들 중의 어떤 이들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재림운동의 위기는 지나갔다. 시간은 제시된 성서적 진리를 옹호했다. 시간은 완고한 반대를 극복했다. 그리고 시간은 상처와 틈을 완전히 고쳤다. 그어나 그렇게 되는데 는 시간이 많이 걸렷다. 우리는 큰 분수령을 통과했다. 초기의 오해들은 교정되었다. 화잇 부인의 저서들은 제시된 진리를 단지 확고히 했을 뿐만 아니라 치료와 연합시키는 역할(하나 되게 하고 강화시키는 일을 했음이 입증되었다. 1888년은 참으로 재림운동에 있어서 한 새로운 시대에 될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더욱 강력하고 더욱 높고 더욱 능력 있고 호소력 있는 지리의 연단에 서 있다. 세째 천사의 기별은 결과적으로 더 큰 차원과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전달하기 위해 협조했던 자들을 인정하고 존경해야 한다.
Ⅳ. 기별과 운동의 승리의 보증
1. 사람들은 사라졌으나 운동은 전진한다
수십 년은 통해서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가끔 신앙에서 떠난 것을 재림 운동사에서 볼 수 있다. 각각 어떤 특별한 불평의 원인이나 걸려 넘어지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운동은 전진했고 실제로 저들이 물러갔기 때문에 더욱 강력하게 발전했다. 어떤 이는 교리 중의 어떤 점이나 예언의 신의 저서의 어떤 점이나 혹은 항상 공격하기 좋은 점, 영감, 조직, 범신론, 가끔 성소 문제 등에 걸려 넘어졌다. 그리고 적지 않은 수가 개인적인 야망, 실망, 질투, 혹은 도덕적인 문제 때문에 넘어졌다. 사람들이 그들의 길을 잃어버리는 것을 보는 것은 비극이다. 그러나 그런 변절자들이 이 운동을 무효화시키거나 저지시키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분파로 갈라지게 하지 않으시고 한 운동을 인도하고 계시다(TM 61). 그것은 전체로서 한 몸이다. 교회는 연약하고 흠이 있을지라도 항상 그럴 것이다. 하나님의 최고의 관심의 대상이다(2SM 396). 남은 교회에 보내는 그것을 비난 자들보다 더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택한 그릇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의 교회의 확실한 승리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 부인에게는 어떤 이들이 논쟁하는 것같이 남은 자 중의 남은 자가 없다.
2. 궁극적 승리의 확신
엘렌 화잇은 전체 운동에 대한 책망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거나 그것을 버리셨다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 역사해 오셨고 그들은 반응을 나타냈다. 그분은 택한 개인들에게 한 짐을 지워주시고 저들은 주의 부르심에 정력을 집중했다. 우리의 라오디게아 상태에 관하여 수십 년간을 통해서 점점 더 열연한 기별들을 주셨다. 이 권면들은 우리의 약점들을 지적하는데 결코 실패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완전히 따르고 교제하는데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충실히 간청한다. 그러나 항상 그 권면과 필여의 선언과 더불어 재림 기별과 운동의 궁극적인 승리의 보증이 간청한다. 그러나 항상 그 권면 필요의 선언과 더불어 재림 기별과 운동의 궁극적인 승리의 보증이 있었다. 이에 관해서 결코 어떤 암시나 의심도 없었다. 잘못은 고쳐질 것이다. 오류는 교정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떨어져 나갈지라도 진리는 보존될 것이다. 한 백성이 완성될 것이며 승리에 대한 하나님의 전능이 있다. 그의 계획과 준비는 실행될 것이다 그리고 재림운동은 그의 우리 앞에 항상 제시된 빗나가지 않는 희망이었다.
3. 떨어져 나가는 일은 끝까지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Moses나 David가 시험에 결코 넘어가지 않았는가를 바랄 수 있다. 혹은 그 일 때문에 아담이 넘어가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결코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마치 한 이상 같은 무엇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책에는 아담 때 이후로 인간 약점들의 00으로 채워져 있고 죄의 파괴로 채워져 있다.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것은 그 철저한 솔직성이다. 우리는 아직 끝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는 길가에 넘어진 사람들에도 불구하고 행군해 왔다. 엘렌 화잇의 최초의 계시는 끝에까지 가는 길에 계속(하늘 도성으로 향하여 비추어진 길에서 어떤 이들이 떨어지는 것을 계시했다. 우리는 그런 일을 예상하고 당황하지 말아야한다.
Ⅴ. 기별자의 나중의 부족 때문에 기별의 가치가 저하되지 않음
1. 엘렌 화잇은 Crosier의 기별을 명했다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기본적인 원칙이 있다. 추후의 흔들거림이나 변절이 그가 충성했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전한 참된 기별을 조금도 무료화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O. R. L. Crosier는 1844년 10월 22일 대실 망 이후 성소 진리에 관해서 함께 발견한 것을 제시한 Hiram, Edson, Crasier와 F. B. Halm 등의 역사적인 연구 발표에 관해서 썼다. 어떤 세부사항에 결00과 오류가 없지는 않을 지라도 그 주요점은 하늘에서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에는 두 국면이 있다는 것과 1844년 가을에 그리스도께서 하늘 봉사의 두 번째 최후 심판의 국면에 들어가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에서 온 기별이었다. 그것은 비록 초기 Millerite 운동 사상의 중심에는 혁명적인 것일지라도 기본적으로 건전했다. 그것은 발전의 시초였다.
2. 엘렌 화잇의 강력한 보증
Crasier의 논지는 그리스도께서 지성소 혹은 하늘에서 그 당시에 기다리고 있는 당신의 백성에게 축복하시려고 나오신다는 그들의 종전의 기대 그리고 그의 재강림일 것이라고 먼저 생각했던 것을 정당화시킬 것은 예언 중에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했다. 화잇 부인은 가장 먼저 기록된 말씀의 핵심에 대하여 가장 강력한 보증을 했다. 부인은 명백한 문장으로 말했다. “나는 Crasier가 1846년 2월 7일 Extra Day-Star지에 우리에게 전한 견해로 기록한 것은 그 분의 뜻임을 보았다. 나는 그 Extra를 모든 성소에게 추천하도록 주님에게서 충분히 보증을 받았다고 느낀다”(E. G. White, A Word to the Little Flock, 1847. p. 12). 그것은 그 초기에 발행된 가장 강력한 보증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짧은 기간 우리와 함께 있다가 Crasier는 서서히 형성되는 S.D.A.에서 이탈했으며 일찍이 관심을 집중시켰던 진리의 공헌과 인연을 끊었다. 그러나 교회는 그와 더불어 폐기하거나 부인하지 않았다. 그가 선언한 그 기본 진리는 이 운동에 의하여 유지되어 왔고 재림신앙의 강단에서 중요한 원리로 남아있다.
3. Preble의 변절은 안식일의 진리를 무효화시키지 않았다
다른 한 경우는 더욱 확실하다. 자유의지 침례교인이며 재림 신자인 T. M. Preble는 1845년 2월 28일 “이스라엘의 소망”이란 소책자 난을 통해서 Joseph Bates에게 안식일의 빛을 먼저 전한 책임이 있다. 이번에는 Bates가 1846년에 영원한 표인 제칠일 안식일이란 제목으로 안식일에 관한 우리 교회의 첫 번째 소책자를 썼다. Preble의 전달이 제구실을 했고 Bates와 이 운동은 탈선하지 않고 그것을 보존했다. 그러나 Preble 자신은 수년 후에 그가 종전에 선포했던 것은 포기했고 그것(안식일)과 싸웠다. “제일일 안식일”이란 책을 써서 대항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 당시에 또한 역시 재림신앙의 필수적인 항구적인 부분이 되었다. 그 진리를 전달한 그 사자의 흔들림과 그 후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진리는 진리이다. 참 진리는 영구적이며 보존된다.
이 두사람 Crosier와 Preble은 모두 말하지만 그 당시에 가치 있는 발판이었다. 그들은 튼튼하고 어마어마한 진리의 성전을 건축하는데 중대한 도움이 되었고, 그 당시 저들에게 지정된 역할을 잘 감당했다. 저들은 넘어져 나갔을지라도 그들이 건축하는데 협조했던 건물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4. Kellogg - "Battle Creek Idea"도 사라졌다
또 하나의 현저한 경우는 John H. Kellogg(1852-1943)박사인데 그는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Battle Creek 위생 병원의 의사요 물리요법, 과학적인 식이요법과 천연요법에 뛰어난 분이었다. 아마 그 어느 누구보다도 그는 세상에 인기 있게 건강 문제를 이 운동에 공헌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Good Health"를 발간했고 Battle Creek 간호학교를 창설했고 그리고 본 교회 첫 번째 의과 대학을 창설했다.
우리는 Kellogg는 유명한 외과의사요, 수술기구의 발명자요, 치료학의 응용뿐 아니라 마른 곡류 조반의 Cornflake type의 창시자요,(지금 서방 세계의 식사습관을 이루고 있는) 그리고 고기 대용식의 창설자이다. 그는 100만부 이상 배포된 50권 이상의 책 저자이었다. 그는 Battle Creek Idea를 제시하여 전 세계의 관심을 모았고(그리하여 베틀 크릭을 그 당시에, 지금 Rocheter Maylo clinic처럼 만들었다)는 것을 이미 보았다. 그러나 그는 전 S.D.A. 의료 기구들과 식품 공장들을 관할하기 위하여 대총회의 지도층과 투쟁하게 되었다. 그는 서글픈 범신론으로 빠져들어 간 것도 역시 이때쯤일 것이다. 1907년에 그는 교회에서 제명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시 그 후에 우리에서 분리된 건전한 건강 개혁의 원칙들, 음식들, 기구들의 창시자의 이 또 하나의 예를 본다. 그러나 교회는 상관없이 건강의 강조의 사명을 계속 이행하고 있다. 그러한 이탈자들이 소개했던 진리들을 그 후에 우리에게서 떠남으로 말미암아 무효화 되지 않는다.
5. Beldom의 탈선은 노래를 무효화하지 않았다
중요한 또 하나의 경우가 또 있는데, 기별을 위한 저명한 성곡 작곡의 은사를 가졌던 Frank E. Belden의 경우이다. 그는 재림운동의 날과 씨로 짜여진 20여개의 찬미와 복음 송을 작사, 작곡했다. 이것들과 같은 것들은 아주 없다. 봉급 문제로 일어난 논쟁이 있었고, 역시 1907년에 Belden은 교회에서 물러갔다.
1941년에 우리 교단의 현재 교회 찬미가 나올 때 1936년에 임명된 20명으로 구성된 찬미 위원들은 그 기별자의 타락에 관한 문제로 논란했다. 어떤 이는 Belden이 넘어졌고 교회를 괴롭히고 떠나갔으니 새 찬미가에는 그의 노래를 삭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위원들 중의 다수의 더욱 건전한 의견이 득의했다. 그들의 잘 선택된 요지는 이러했다. 이 복된 노래들은 Belden이 재림 희망과 기별의 정신과 진스를 노래로 표현할만한 은사를 가진 열열하고 헌신적인 재림 신자였던 것이다. 이것들은 유감스런 그 후의 Belden의 넘어진 것에 상관없이 이운동의 필수적인며 항구적인 부분이 되었다. 가장 좋은 노래들은 보존되어야 한다. 그 위원회는 모든 사실을 달아본 후에 약 22개 되는 이 노래들을 보존해 두도록 결의했다.
6. Waggoner - Jonse의 탈락이 무효화시키지 못한다
그 같은 원칙을 결과적으로 와그너와 존스에게도 적용된다. 등한시되었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은 하나님의 택하시고 부름 받은 사람들을 통해서 미네아폴리스에서 전파되었다. 그의 기별을 짊어지고 적합한 기별이 서서히 전달되었고 예언의 신에 의하여 반복적으로 보증되고 논증된바 이것은 재림 운동이 기초 구조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그것은 1931년의 표준 “기본 신조”와 1941년의 침례 서약서에 포함되었고 우리의 신앙과 운동의 한 필수적인 부분으로서 세계적으로 인식되었다.
* Frank E. Belden(1858-1945) 안식일 학교 찬미와 노래, 수백 개의 저자, 자주 작사, 작곡, 한때 R.&H.출판소의 관리자였다. 재정적인 불만과 관계된 문제들 때문에 그는 1907년에 교회와 분리되어 Kellogg와 긴밀히 교제했다.
우리는 이점을 상조한다. 따지는 것은 그 기별 자들의 그 후의 약점이나 변절이 아니요 하늘이 지시한 기별이냐 하는 것이다. 일단 건물이 세워진 후에 발판이 떨어져 나갈지라도 중요한 영구적인 건물은 있다(교회 건축자가 그 후에 타락했다고 해서 그 손으로 지어놓은 건물 전체나 일부를 헐어낼 필요는 없고 헐어서는 안되며 어리석은 짓이다. 전물 자체가 나쁘고 헐었으면 건축자에 관계없이 헐어야 하거 다시 건축해야 한다. 역자 주해). 이 원칙에 관하여 엘렌 화잇은 수정같이 명백하다.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와그너와 존스가 그 후에 이탈했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이지 않고 서있다. 우리는 그들의 그렇게 되지 않았기를 충실하게 원한다. 그러나 그들의 변절이 그들이 전한 진리를 무효화 시키지 않았다(그들이 전한 진리 자체가 그들의 사상이나 추측이라면 모르거니와 하나님의 불변의 말씀 성서에 확고히 기초된 하나님의 진리인고로). 그 손해는 비극적으로 그들의 손실이자 우리의 손실은 아니다.
7. 그 길의 대조적인 끝
대조적인 끝이 있는 두 길 더 높은 길과 더 낮은 길이 있다. 하나는 항상 위로 향한 길이요 다른 하나는 비극적으로 아래로 향한 길이다. 위로 가는 길 위에서 하나님과의 충분한 교제와 교회와의 일치중에서 인생의 일몰을 맞이하는 사람의 운명은 행복할 지어다. 항상 서 있는 진리의 본체에 근본적인 충성에 항상 머물러 있는 자. 하나님과 화목 되고 그의 형제들과 조화된 자들 그의 말이 하나님의 도성으로 인도하는 위로 향한 빛을 받은 길에 항상 더욱 굳게 서 있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런 자들에게 복된 여행과 전망이 있을 진저.
한편 봉사의 생애를 산후에 그의 사상이 혼돈되고, 왜곡되고, 변한 사람, 오류를 진리인 것처럼 오해하고 이젠 진리를 오류라고 여기는 사람, 그의 형제들과의 우정을 끊고 한때 그가 잘 섬기던 교회에서 돌아선 사람의 궁경의 비극이 있다. 이젠 황혼의 그늘에서 걸려 넘어져서 그의 마음은 의심과 환멸로 괴로워하며 하나님과 인간과의 조화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비난하기보다는 오히려 긍휼히 여겨야 한다. 그것은 실망과 환멸과 드디어 없어질 내리받이 골지기길 위에 있는 쓸쓸하게 좌절당하는 종국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주에 아무든지 그런 음침한 비극적인 종국에서 구원해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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