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훈장을 통해 본 한국전쟁의 실상을 조명한다
글 사진 : 김연려
안작 데이(호주현충일) 캠시 소재 충혼탑 앞 광장의 김용광씨, 무공훈장들이 돋보인다. (2009.4.25)
6.25 그날 밤 부산앞바다의 승전보(勝戰譜)
북한군이 새벽에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돌파한 1950년6월25일이 저물고 있었다. 그날 밤 오후8시경 수 백명으로 추산되는 군인들이 승선한 1000톤급 의아선박이 부산 북동쪽 먼 바다에서 부산을 향해 남진 중 이였다. 이 의아선박을 발견한 것은 대한민국 해군 제1호 정예함 백두산(701)함이다.
발광신호로 의아선박(疑訝船舶)에게 국적 선명을 조회했으나 회신 없이 전속력으로 남하했다. 의아선박 과의 거리가 좁혀지자 일몰후의 박명(薄明)으로 다수의 병력이 식별되었는데 이동식 육상포로 간주되는 물체 도 있었다. 서울 해군본부에 상황보고와 이어지는 교신으로 4시간여의 추적과 뒤따라 공격이 개시 됐는데 의아선박은 많은 부유물을 남기고 침몰했다. 백두산 함도 적의 포탄이 조타실 하부 쪽에서 폭발하여 조타사등 4명이 부상했고 끝내 2명은 전사했다.
천우신조(天佑神助)란 단어를 되새겨보게 된다. 해군장병 총원이 봉급에서 10%을 헌납한 돈과 해군부인회에서 바자회 등으로 모금한 US$15,000를 들고 당시 손원일 초대참모총장이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께 보고 드렸다. 정부는 US$ 45.000을 지출하여 합계 US$ 60,000을 갖고 미국에서 구매해온 백두산(701)함은 3인치(76mm) 구경(口徑) 함포 한 좌가 함수갑판에 있는 450톤급 정규 군함이다.
미국에서 구입한 백두산(701)함이 한국해군의 손으로 진해에 도착하자 곧 함정 구입비를 헌납한 장병과 그 가족에게 선보이려고 묵호 부산 목포 인천등 해군기지를 일주하고 진해에 도착한 것이 50년6월24일 밤이다. 다음날 해군 항해학교 수료 3일을 앞두고 701함에 승함한 사병 중에 이 글에 소개되는 김용광상병이 지금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다.
충무무공훈장을 수여 받은 김용광씨
시드니에서 20년간 같은 해군출신이라서 군 관계행사에는 함께 동참하며 충무무공훈장2개 화랑무공훈장 2개 총4개의 훈장을 패용한 김용광씨를 대단한 분이라고 여겼다. 6.25 바로 그날 오후3시 701함을 타고 진해를 떠난 김상병은 부산 앞 먼 바다에서 의아선박과의 교전에 동참했다. 처음 군함을 타게 된 김상병은 교전 중 내내 적 포화에 노출되면서도 포탄을 운반하고 조타실이 피격되어 조타사들이 중상을 입고 의무실로 후송되자 항해학교 출신답게 바로 함의 조타를 잡았다.
지난 3월22일 시드니의 한인 촌 캠시 시립도서관에서 김용광씨를 만나 훈장 수여증명서도 보고 2시간 넘도록 그날 밤의 전황을 들었는데 “속된말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식으로 좌충우돌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뛴 것 말고는 훈장 받을만한 공적의 기억이 없다”고 겸양해 했다. 당시 18세란 나이 탓일까 죽음의 공포를 몰랐다면서 60년이란 긴 세월의 흐름을 회상하는 뜻 했다.
뒤이어 김용광씨는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701함에서 두 번째 충무무공훈장을 수령했다. 뒤따라 해군 특수부대 요원으로 51년2월5일, 51년12월7일에 화랑무공훈장을 수령했는데 해군에서도 희귀한 경력 소지자인데 상세한 공적 내용을 다 소개 못해서 아쉽다.
전장(戰場)에서의 가정(假定)은 무의미하다고 귀에 새겨왔다. 그래도 대한해협 해전에 대하여 한 소절 첨가하고 싶다. 만일에 적의 수송선이 개전 첫날 한밤중에 부산항으로 접근하여 정예 육전대(陸戰隊)들을 상륙시키고 3부두와 중앙부두등 하역시설 더 나아가 시내중요시설에 적재한 포탄을 다 발사했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전개 되었을까. 전쟁 첫날밤 부산의 공황(恐慌)은 미군 뒤따라 유엔군의 즉각적인 참전개입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유엔군의 젖줄인 부산의 안전확보는 한국전쟁의 하나의 분수령으로 보는 이유이다.
녹 슨 태극무공훈장
해군을 전역한 후 상선선장이 되었다. 1975년 필자가 탑승한 화물선 월드 아트라스(World Atlas)호가 미국동북부에 위치한 뉴포트 뉴스(Newport News)항에 입항했다. 일본으로 운송될 석탄 6만톤을 적재하기 위해서다. 이곳에서는 미국동해안에서 제일 큰 군항인 노퍽(Norfolk)가 택시로 약 30분 거리로 기억된다. 선탄적재를 위한 1박2일의 짧은 일정 탓에 서둘러 맥아더기념관을 방문했다.
맥아더원수의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해서 옛 시청청사를 노퍽시는 맥아더기념관으로 기증했다. 맥아더사령관이 한국전쟁에서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인천상륙 작전을 감행(敢行)하여 서울을 수복하는 양상은 드라마의 명 장면을 연상케 했다. 1950년9월29일 맥아더사령관은 중앙청에서 거행된 서울 수복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6.25을 전후한 신생 대한민국에서 당시의 도금기술로 최선을 다 한 것이겠지만 4반세기가 지나면서 기념관에 전시된 태극무공훈장이 녹이 슬어서도 필자는 6.25의 자랑스러운 증표로 맘에 새기고 귀선 했다. 금년은 필자가 기념관을 방문한지 다시 35년이 지났는데 녹슨 태극무공훈장의 외양은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다. 그러나 폐허 속에서 일어난 대한민국의 국력과 made in Korea의 첨단상품들이 지구촌에서 당당히 선진대열에 합류했다는 사실과 대조해 볼 때 가슴이 뿌듯하기만 하다.
“추운 벌판으로 가다”
호주에서는 한국전쟁을 상기하는 큰 행사를 매년 4월에 거행한다. 왜냐하면 “가평전투의 날”과 “앤잭 데이(ANZAC DAY-호주현충일)”가 4월에 있기 때문이다. 10년 전이다. 한국전쟁 50주년을 기념하여 호주 수도 캔버라에서 2000년4월18일 거행된 한국전쟁 참전기념비 제막식 취재를 위해 하루 전날 캔버라에 도착했다. 캔버라로 간 것은 제막식 전날 오후 4시 전쟁기념관 앞 광장에서 거행되는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기념예배”와 그날 밤6시 국회의사당 대연회장의 기념파티의 취재를 위해서다. 시드니에서는 10여개 발행되는 교민매체 중에서 필자만이 참가했다.
밤늦게 끝나는 기념파티장에서 아주 가깝고 숙뱍비도 저렴한 맥쿼리호텔을 찾아낸 것은 자비로 뛰는 자유기고가로서는 다행이었다. 다음날 제막될 참전기념비를 먼저 찾아 나섰다. 참전기념비구역에 갔더니 아무도 없어 구석 구석 사진을 촬영 할 수 있었다. 오후3시경에는 기념비 옆에 있는 호주전쟁기념관을 찾았다. 1층 넓은 홀 입구에 “한국전쟁50주년 특별기획전” “OUT IN THE COLD – 추운 벌판으로 가다” 현수막을 본 것이다.
이민온후 4회 전쟁박물관을 방문했지만 한국전쟁 상설전시실에서는 본적이 없든 한국의 태극무공훈장이 눈에 띄였다. 윤보선대통령이 한국전에 참전하여 희생된 호주군 무명용사에게 수여한 훈장이 유리상자 속에 있었다. 인터넷 탐색에서는 이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된 기록이 없어서 서울 행정자치부 상훈담당관실에 문의했더니 담당자가 수여된 사실을 금년3월25일 자상하게 이-메일로 확인해주어 몹시 고마웠다.
뉴욕 방문시 강병희대령(예)부부와 3Km의 새벽 산책을 하며 공대함 전투 이야기를 들었다.
철산반도 근해 공대함(空對艦)의 전투
6.25남침 후 1951년4월은 육상전투에서 중공군의 5차 대공세로 중부전선에서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던 때이다. 이런 전황 속에 한국해군 PF-62함(함장 이재송대령)은 평안북도 철산반도 근해에서 1951년 4월 XX일 아침8시에 적 야크(YAK) 전투기 5대의 공습을 당했다. 전날 오후 늦게까지 3인치포로 적 비행장시설에 포격을 가했는데 이에 대한 보복공격으로 해석되었다.
소련제 야크 전투기는 1대식 꼬리를 물듯이 62함 위를 횡단하며 기관포로 사격했다. 아군도 적 내습과 동시에 전투배치하고 야크기를 향해 응사했다. 함교(艦橋) 바로 밑 중갑판 좌 우편에 위치한 20미리 대공포 사수들은 함상 실습중인 졸업을 앞둔 이흥섭 강병희 두 사관생도였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공습을 강행하든 야크기 1대가 피격되어 바다로 추락하고 잠시 후에 공격하던 또 다른 1대도 불을 뿜으며 함상을지나 바다로 곤두박질 했다. 2대의 공격 야크기의 격추로 놀라서인지 남은 야크기 3대는 곧 북쪽으로 사라졌다.
한편 피습된 62함은 함미(艦尾)쪽 수면 밑이 적의 포탄으로 피격되어 침수하기 시작했다. 다행이 급보를 받은 영국 해군순양함이 당도하여 수중에서 용접하는 전문팀을 긴급투입 임시적 수리를 해주어 무사히 일본 사세보(佐世保) 미해군 군항으로 귀항할 수 있었다.
전술한 포대 사수였든 강병희 생도는 전투가 끝나자 바로 의무실로 옮겨졌다. 뒷 등쪽을 적의 기관포탄의 파편이 스쳐갔기 때문이다. 이 전투의 공로로 두 사관생도는 충무무공훈장을 수령했다. 사관생도로서 무공훈장의 수령은 창군이래 지금까지 처음 있는 쾌거다.
6.25사변이 발발하자 생도신분으로 말단 분대원이던 필자는 진해외곽 상남 방어선 주둔지에서 분대장으로 모신 강병희대령(예)님과는 60년간 변함없는 유대 속에서 지내왔다. 2007년 뉴욕 강대령님 가족을 방문한 필자는 철산 앞바다 공대함전투의 실황을 상세히 듣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호주전쟁기념관에 전시된 VC훈장 수훈자. 한국전쟁에서는 수훈자가 한 명도 없다. (17-10-2008)
VC무공훈장 수여자가 없는 한국전쟁
호주군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과 함께 두 번째로 한국에 파병되었다. 한국전쟁 3년간 호주군 참전병력 17,000명 전사자 339명 부상자 1,216명 포로 29명으로 국력에 비해 많은 희생자를 바친 참전국이다. 그런데 이런 희생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태극무공훈장에 막 먹는 호주군 최고의 무공훈장인 빅토리아 크러스(Victoria Cross)훈장의 수훈자가 한국전쟁에서는 단 한 명도 없다. 최근의 전쟁만 살펴봐도 2차대전에서 20명 한국전 다음에 참전한 베트남전에서는 4명 그리고 근래 아프가니스탄 파병에서도 1명이 수훈했다.
캔버라 전쟁기념관에는 VC훈장 전시실이 따로 있다. 수훈장병 개인마다 사진과 함께 수훈공적이 소개된 내용을 살펴보면서 무공훈장을 보는 시각이 변했다. 무공훈장에 대한 호주군과 국민의식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게 된 것이다.
무공훈장의 글을 끝내면서 –
2009년11월11일 해군의 요람지 서울종로 관훈동에서는 한국해군의 창설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백두산(701)함의 대한해협 해전 중에 전사한 전병익 일등병조에게 1952년12월에 추서된 을지무공훈장을 57년만에 생존한 누이동생 전광일(72세)씨에게 전달한 사실을 해군매체를 통해 알았다. 당시 백두산(701)함 최영섭 갑판사관(대령 예편)의 오랜 집념으로 성취된 미담이다.
1950년6월10일 6.25사변 직전에 해군사관학교에 입교한 필자와 7기 해군사관학교 동기생 중에는 동해에서 간첩선을 격파한 공로로 화랑무공훈장 수훈자 한봉규준장(예) 한 명이 있고 기타 동기동문들은 무공훈장 수훈자는 한 명도 없고 6.25참전, 공비토벌, UN종군기장등 참전기장만 3개가 있을 뿐이다
한국전쟁 60주년 특집을 편집하고 발표 날을 기다리는데 한국에서 천안함의 침몰뉴스를 접했다. 멀리 지구촌 남반부 시드니에서 해군출신의 일원으로 천안함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가족들에게는 위로의 뜻을 전하며 생존한 장병들에게는 자책의 맘을 접고 희생자들이 못다한 우리의 바다 수호 몫까지 감당해주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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