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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의 딸 처녀'가 대적에게 짓밟히고 억압을 당한다는 사상이 공통적으로 흐릅니다 (애 1:15, 렘 14:17).
선지자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는 묘사가 일치합니다 (애 1:16, 2:11, 렘 9:1).
도성이 사방으로 두려움과 무서움에 휩싸였다는 독특한 수사법이 같습니다 (애 2:22, 렘 6:25).
원수들의 악행에 공의의 보복을 가해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탄원이 동일합니다 (애 3:64, 렘 11:20).
이토록 비통한 정서적 분위기와, 나라가 망한 뒤 제더미에 앉아 통곡하는 영적인 관심사를 볼 때, 예레미야 사도보다 이 책의 저자로 적합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불타는 성전의 참상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뼈저리게 체험한 예레미야의 친필 원고임이 확실합니다. 본서를 기록할 때도 그의 신실한 대리자이자 서기였던 바룩이 선지자의 구술을 곁에서 받아 적었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합니다.
백성들이 예레미야의 눈물의 최후통첩 기별을 거절하고 오히려 그를 핍박하여 시위대 뜰 감옥 구덩이 웅덩이에 처넣었던 사건이 예레미야 38장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흙만 가득한 깊은 구덩이 속에서 선지자가 굶어 죽어갈 때, 구스(에티오피아) 출신의 경건한 환관 '에벳멜렉(Ebed-melech)'이 목숨을 걸고 시드기야 왕에게 나아가 선지자의 무죄함을 호소했습니다. 허락을 받은 에벳멜렉은 밧줄이 선지자의 겨드랑이를 상하게 하지 않도록 낡은 옷가지와 헝겊 조각을 내려주어 예레미야를 웅덩이 위로 끄집어 올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귀한 자비를 베푼 에벳멜렉에게 훗날 바벨론 군대가 도성을 약탈할 때도 그의 생명을 온전히 보존해 주시겠다는 확실한 구원의 보상을 안겨주셨습니다(렘 39:16~18).
만약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다녀오신 분들은 시온산 언덕 가야바의 재판정 집터 지하에 파여 있는 깊은 바위 웅덩이를 보셨을 것입니다. 복음서 텍스트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오랜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가야바의 뜰 지하 이 차디찬 감옥 웅덩이에 홀로 내려져 밤새 처절한 고통의 사색을 겪으셨다고 전해집니다. 이때 메시아 비탄 시인 시편 88편 6절의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하신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믿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예루살렘의 심판을 외치다 깊은 웅덩이에 갇혀 고초를 겪은 예레미야는 장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깊은 고독의 감옥에 갇히실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준 선명한 표상적 인물입니다.
예레미야애가 다섯 편의 시의 구체적인 구조와 개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주제: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참혹한 인간적 비극과 그 배후에 깔린 하나님의 공의의 주권
1장: 예루살렘의 처절한 빈궁과 황폐함 한때 열방 중에 공주 같았던 도성이 과부처럼 외롭게 홀로 앉아 우는 슬픈 정경입니다. 밤마다 눈물로 뺨을 적시나 위로해 주는 자가 없고 백성들은 사슬에 묶여 탄식하며 방황합니다.
2장: 심판을 집행하신 하나님의 진노 도성을 무너뜨리고 성전 기둥을 부수신 파괴의 주체가 바벨론 군대가 아니라, 백성들의 배도 때문에 친히 대적이 되사 진노의 활을 당기신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인식하고 통회하는 내용입니다.
3장: 고난 속에서 발굴해 낸 성실하심의 찬가 (본서의 중심 축) 선지자가 백성들의 아픔에 감정 이입하여 함께 매를 맞으며 제더미 속에서 뒹구는 비탄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그 흑암의 절망 한가운데서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의 불변성을 깨닫고 위대한 소망의 함성을 지릅니다(3:22~23). 개인과 민족의 철저한 회개만이 무너진 도성을 재건하는 유일한 해결책임을 천명합니다.
4장: 도성의 타락과 소돔 같은 파멸의 비극 순금 같던 성전 자손들이 길거리의 토기 조각처럼 천대받고, 자비한 어머니들이 굶주림에 못 이겨 제 자식을 삶아 먹는 처참한 아수라장(식인 비극)을 생생히 보도합니다. 이 참혹한 파멸은 유다의 죄악이 과거 유황불로 멸망한 소돔의 죄보다 컸기 때문임을 밝히며 대적 에돔을 향한 심판을 예고합니다.
5장: 남은 자들의 처절한 절규와 회복의 탄원 재산과 유업을 이방인에게 빼앗기고 고아와 과부처럼 버려진 채 주리며 종노릇하는 남은 자들의 처량한 신세를 고백합니다. 보좌가 영원하신 창조주 여호와를 향해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옛적 같게 하옵소서" 맺는 간절한 소망의 탄원 기도로 시를 마칩니다.
본서가 기록된 역사적 배경 시기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전소당한 BC 586년 가을(8~9월경)이 확실합니다. 본서에는 참혹한 파멸 현장을 눈앞에서 방금 목격한 자만이 쓸 수 있는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한 정서적 표현들이 가득합니다. 그러면서도 문장 구조는 완벽한 대칭과 정교한 시적 유를 갖추고 있습니다.
보통 시인들은 출품작을 쓸 때 즉석에서 쓰지 않고 오랜 세월 동안 단어를 깎고 빼며 다듬는 '퇴고(推敲)'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BC 586년 8월 중순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던 참혹한 현장에서 마음에 터져 나오는 슬픔의 생생한 1차 초안(메모 원고)을 적발림(현장 스케치)으로 긴급히 작성해 두었다가, 이후 포로지의 기나긴 세월 동안 하나님의 영감 안에서 자수와 율격을 맞추며 정교하게 다듬어 현재 우리가 읽는 위대한 예레미야애가 정경을 완성해 내놓았을 것입니다.
세속 역사와 성경 기록을 통틀어 예루살렘 도성이 완전히 완파당한 비극은 역사상 크게 두 번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는 BC 586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서였고, 두 번째는 AD 70년 로마 제국의 티투스(Titus) 장군에 의해서였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이 두 번의 성전 전소 파괴 비극을 동시에 기억하고 애도하기 위해, 유대 종교력으로 다섯 번째 달인 '아브월 9일(Tisha B'Av, 현재 태양력으로 7~8월 한여름 성기)'을 국가적인 대금식일 기념일로 정했습니다. 연대기적으로 BC 586년 7월 9일에 예루살렘 성벽이 뚫렸고, 8월 7일에 성전이 불타기 시작해 8월 9일에 완전히 전소되었습니다. 훗날 AD 70년 로마군에 의해 성전이 다시 불탄 날짜 역시 신기하게도 똑같은 아브월 9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 이 아브월 9일 금식일마다 온 회당에 모여 슬픈 조명 아래 이 예레미야애가를 소리 높여 낭송하며 눈물로 참회해 오고 있습니다.
또한 역사적으로 AD 132년 '바르 코흐바(Bar Kokhba)'의 가짜 메시아 반란 사건 때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대대적인 보복 학살로 유다가 세 번째로 철저히 짓밟히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오늘날 예루살렘 성전 서쪽의 남은 잔해 바위 벽은 유대인들이 날마다 찾아와 머리를 비비며 눈물로 도성의 회복을 통곡하는 '통곡의 벽(Wailing Wall)' 성지가 되었습니다. 예레미야애가는 책 자체가 문자 그대로 구약성경 속 '통곡의 벽'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의 문학적 정교함은 구약성경 전체를 통틀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대단한 예술적 극치를 보여줍니다. 성경학자들은 다섯 장으로 구성된 본서를 인간의 비통함을 정교한 슬픔의 시로 승화시켰다 하여 '고통의 오경(The Pentateuch of Pain)'이라 칭합니다. 모세오경과 대칭을 이루는 고통의 다섯 장입니다.
본서의 1장부터 4장까지는 완벽한 '알파벳 이합체(Acrostic, 답관체)' 구조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자음 22자(알레프, 베이트, 기멜...)의 순서대로 시의 첫 문장을 열어 나가는 최고급 두운법 기법입니다.
1장, 2장, 4장: 정확히 22개 절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절의 첫 단어 시작 글자가 히브리 자음 22자 순서대로 매칭되어 결합합니다. 한 절의 행 자수는 1, 2장은 세 줄씩, 4장은 두 줄씩 대칭 배당되어 있습니다.
3장: 본서의 핵심부로 자그마치 66개 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알파벳 한 글자당 세 구절씩 배당하여 1, 2, 3절은 모두 '알레프'로 시작하고, 4, 5, 6절은 모두 '베이트'로 시작하는 방식으로 22자 자음에 3절을 곱하여 정확히 66절의 장엄한 대칭 시를 완성했습니다. 한 절의 행 자수는 짧은 한 줄씩 율격을 이룹니다.
5장: 마지막 장은 이합체 형식을 취하지 않는 자유시 형태이지만, 자수 절수만은 정확히 히브리 자음 개수와 동일한 22개 절로 맞추어 시적 통일성을 유지했습니다.
알파벳 자수 틀에 맞춰 슬픔의 크기를 절제하며 다듬은 지극한 문학적 결정판입니다. 마치 서구 복음의 문장인 요한복음 3장 16절을 영어 알파벳 정순으로 배열하면 첫 글자 조합이 정확히 '복음(GOSPEL)'이라는 완벽한 두운을 형성하는 퍼즐 구조와 같이, 예레미야애가는 문학적 엄격함 속에 하나님의 정교하신 구원 계획을 함축해 둔 것입니다.
본서가 고발하는 가장 강력한 특징은 '파멸의 주체성'입니다. 예레미야서에서는 '바벨론'과 '느부갓네살'의 명칭이 150회 가까이 끊임없이 등장하며 역사적 심판을 경고했지만, 놀랍게도 예레미야애가 다섯 장 속에는 '바벨론'이나 '느부갓네살'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적 군대가 잔인해서 도성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파괴와 징벌을 집행하신 실제 주체는 오직 백성들의 죄악에 진노하사 친히 활을 당기신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심을 선포하는 공의의 신학입니다. 바벨론은 주님의 손에 들린 막대기이자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민족의 영원한 회복 역시 전적으로 군사적 독립이 아닌, 오직 하나님 앞에 가슴을 찢고 돌아가는 진정한 도덕적 성결과 회개에 달려 있음을 역설합니다.
그 잿더미의 절망 한가운데서 선지자가 발굴해 낸 최고의 신학적 보화가 바로 주의 성실하심(하나님의 불변하시는 헤세드 사랑)입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애 3:22~23)"
히브리어로 '랍바 에무나테카(Great is Your faithfulness)'라 외친 이 위대한 함성은, 온갖 축복과 번영 속에서 터져 나온 기쁨의 환호가 아닙니다. 자식들이 굶어 죽어가고 성전이 불타 없어진 처참한 심판의 절망 속에서, 역설적으로 '우리가 완전히 쓸려가지 않고 이만큼이라도 그루터기가 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헤세드)과 신실하심(에무나)이 여전히 살아서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임을 고백한 신앙의 극치입니다. 징계하시는 하나님이 소망의 하나님이심을 꿰뚫어 본 고귀한 복음의 눈물입니다.
마지막으로 예레미야가 당한 처절한 고난과 눈물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 제더미 위에 홀로 버려지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성과 사역을 완벽하게 예표합니다. 예레미야는 40년간 온 민족에게 거절당하고 마침내 백성들이 던진 돌에 맞아 이집트 외양간에서 객사했다고 전해지기까지, 고난받는 선지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사야와 요한계시록 21장 4절이 증언하듯, 장차 우리가 흘린 모든 비통한 눈물과 아픔을 눈에서 영원히 닦아주실 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예레미야애가를 읽으실 때 단순히 고대의 슬픈 노래로 흘려듣지 마시고, 선지자의 뜨거운 눈물의 시선을 빌려 우리의 심령 성전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죄를 향해 분노하시되 남은 자들을 반드시 정금처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에무나' 사랑을 깊이 체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강의를 마치고 다음 주부터는 또 다른 위대한 묵시의 성경, 『에스겔서』의 장엄한 기별과 신학을 함께 공부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핵심 요약정리
표제와 '고통의 오경' 구조:
히브리어 표제는 탄식의 감탄사인 '에이카(어찌하여!, 어쩌나!)'이며, 다섯 편의 독립된 장 장엄한 시로 구성되어 '고통의 오경(The Pentateuch of Pain)'이라 불립니다. 유대 백성들은 성전 파괴일인 아브월 9일 대금식일마다 본서를 통독하며 참회해 왔습니다.
단일 저자성과 정교한 이합체 설계:
예레미야서와 일치하는 '시온의 처녀', '하염없는 눈물'의 필치를 지닌 예레미야 선지자의 확실한 저작입니다. BC 586년 8월 함락 현장의 생생한 초안(적발림)을 토대로, 오랜 세월 퇴고를 거쳐 히브리어 자음 22자 순서에 맞춰 첫 문장을 여는 정교한 알파벳 이합체(Acrostic) 시 구조(3장은 한 자당 3절씩 배당한 66개 절의 극치)로 완벽 편찬했습니다.
파멸의 주체와 철저한 심판 신학:
본서 다섯 장 내부에는 유다를 파멸시킨 '바벨론'이나 '느부갓네살'이라는 명칭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멸망의 실제 주체는 이방 군대가 아니라 백성들의 해묵은 배도 때문에 친히 활을 당기신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임을 천명하며, 성전 건물이라는 종교적 형식이 결코 자동적인 구원을 보장해 주지 못함을 엄중히 경고합니다.
위대한 성실하심('에무나')과 회복의 소망:
모든 유업과 성전이 제더미가 된 최악의 절망 속에서도 "주의 성실하심(에무나)이 크시도소이다 (애 3:23)" 고백하며,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인자와 헤세드 사랑이 무궁하기에 백성들이 진멸되지 않고 소망의 남은 자로 보존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보좌가 영원하신 주님을 향해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우리를 옛적 같게 돌이키소서" 탄원하는 구원과 부활의 확실한 이정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