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훈현의 실전 스승, ‘괴물’ 후지사와 九단 특별 인터뷰(2002년).
후지쯔배 중일 원로 대항전에 참가한 후지사와 슈코 九단이 중국은행 광저우 지점 귀빈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현재의 근황과 자신의 바둑관, 한중일의 바둑계를 관망하는 인터뷰를 가졌다. 후지사와 九단은 77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의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변으로 장내에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후지사와 九단의 인터뷰 내용을 들어본다.
기자: 오늘 양복에 운동화를 신었는데 무슨 일이십니까?
후지사와: 일본에 있는 우리집은 산위에 있는데 산을 오르내릴 때 운동화를 신으면 아주 편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운동화를 신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기자: 현재의 근황은 어떠신지
후지사와: 현재의 건강상태는 양호하다. 나는 이미 10년 전에 암에 걸렸으며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라고 들었다. 의사는 담배를 피울 수 없다고 말했으나 나는 지금까지 계속 담배를 피우고 있다. 지금도 나를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아직 많은 일을 하고 있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집에서 갖가지 운동을 한다. 그 외의 시간에는 바둑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는다.
기자: 아직 술을 마십니까? 어떤 종류의 술을 마시는지요
후지사와: 요즘은 술을 경계한다. 취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현재 술을 조금이라도 마시면 몸이 견딜 수가 없다. 나는 젊었을 때 술을 매우 많이 마셨는데, 거의 매일 위스키 한 병씩 마셨다. 종일 술이 몸에서 떠나지 않았다. 최고로 많이 마셨을 때는 하루에 3병의 위스키를 마셨고, 어떨 때는 마오타이주(중국술)를 하루에 3병까지 마셨다.
기자: 현재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후지사와: 바둑입니다. 바둑을 배우는 것
기자: 바둑을 배운다고요? 당신은 기성입니다! 스스로 바둑생애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후지사와: 사실 나는 바둑에 대해 무엇도 알지 못한다. 어떤 것도 이루지 못했다. 때문에 아직도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
기자: 바둑의 어떤 점이 당신을 끌어당깁니까?
후지사와: 언젠가 어느 한 대국을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다. 성공한 부분도 실패한 부분도 있었는데 모두 감동적이었다. 이런 감동이 나를 끌어당긴다.
기자: 이전에 “50수까지는 천하에 적수가 없다.”고 인정받았는데 현재도 여전히 이런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후지사와: 이전에 비해 나는 다소 퇴보했다. 그러나 나는 뒤쳐지지 않도록 매일 노력하고 있다. 고노 린을 아는가? 그는 일본의 신세대 기사 중 1,2위로 여겨지고 있는데 그는 항상 나에게 가르침을 구한다. 현재에도 나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일류 기사는 매우 많다.
기자: 초일류기사가 되려면 천부적인 재능과 후천적인 노력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후지사와: 설마 두 방면 모두 중요하지 않다고 하겠는가? 설사 누군가 천부적 자질이 있다고 하더라도 만약 근면하지 않다면 자신의 재능을 모두 발휘할 방법이 없다. 창 하오가 8살이 되던 해 나는 상하이에서 그에게 지도바둑을 두어준 적이 있다. 당시에 그의 주변에는 또 한명의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그의 천부적인 재능은 창 하오에 비해 더욱 뛰어났다. 그러나 매우 애석하게도 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기자: 책을 쓰고 있다는 들었는데….
후지사와: 그렇다. 마침 한ㆍ중ㆍ일 프로기사의 책을 쓰고 있는데, 이 책은 반드시 세계기단을 흔들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아직 잘 쓰지 못했다. 언제쯤 펴낼 수 있을지 확실치는 않다.
기자: 한ㆍ중ㆍ일 3국의 바둑 수준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후지사와: 성적으로만 말한다면 당연히 한국이 가장 강하다. 그 다음은 중국과 일본 순이다.
기자: 현재 3국의 프로기사 중, 누구를 가장 좋아하는가?
후지사와: 사실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기사들에게 승부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바둑을 두는 것이다. 현재 이창호의 바둑은 확실히 제일 강하다. 나 역시 그는 매우 노력하는 기사라는 걸 인정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 보다 더 강한 사람이 출현할 것이다. 마침 현재 항 저우에서는 바둑 대회가 열리고 있는데 어쩌면 이창호 보다 더 훌륭한 재목이 그 아이들 사이에 있을지도 모른다.
기자: 왜 현재 일본바둑은 한국 프로기사에 비해 수준이 낮은가?
후지사와: 일본기원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한다. 관서기원 역시 책임이 있다. 20여년 전 나는 그들과 함께 얘기한 적이 있는데, 중국과 한국 프로기사는 반드시 따라잡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당시 그들은 믿지 않았고, 도리어 나를 놀렸다. “당신은 그들이 따라오기를 바라십니까?” 현재 나의 예언은 현실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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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사와 九단은 어버이날이었던 2009년 5월 8일 오전 7시경 향년 83세의 나이로 도쿄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의 관한 ‘정보’는 바둑 칼럼니스트 양형모의 아래글을 참조할 것.
일본 바둑계의 거인 후지사와 슈코 9단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3년이 흘렀다. 2009년 5월8일. 향년 83세였다. 후지사와 슈코는 바둑사에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그는 한ㆍ중ㆍ일 바둑계를 통틀어 가장 독특하고 자유분방한 인물이었다. 영어로 표현하면 ‘언터처블(Untouchable)’이 바로 후지사와 슈코였다. 오죽하면 생전 그의 별명이 ‘괴물 슈코’였을까.
그의 삶은 바둑ㆍ술ㆍ도박으로 채워졌다. 젊어서부터 두주불사였던 후지사와는 술에 취한 상태로 텔레비전 생방송에 출연해 사고를 친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다. 조훈현 9단의 실전 스승이기도 했던 그는 “내가 다른 것은 다 훈현이에게 가르쳤는데, 술만은 못 가르쳤다”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경륜과 경마로 재산을 탕진해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했다. 명인전ㆍ천원전ㆍ기성전 등 일본 최고의 기전에서 다수 우승했다. 그것도 1회 대회만 골라 우승해 ‘1기의 사나이’로 불렸다. 이 중에서도 우승상금이 가장 많은 기성전은 6년이나 연속 우승했다. 당시 후지사와가 남긴 “나는 1년에 네 판만 이긴다”는 말은 그의 어록에서 빠지지 않는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다른 바둑은 다 져도 기성전 도전기(7판 4승제)에서 네 판만 이겨 우승하면 ‘1년 농사’ 다 짓는다는 뜻이었다. 그가 악착같이 1기 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빚쟁이에게 쪼들려 상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일본 유학 시절, 어린 조훈현은 후지사와에게 바둑을 배웠다. 세고에 겐사쿠 9단이 정식 스승이었지만, 원로기사인 세고에 9단은 조훈현을 앉혀 놓고 조곤조곤 바둑을 가르치는 타입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대 최강자 중 한 명이었던 후지사와는 조훈현을 위해 수많은 연습바둑을 둬 주었다. 번뜩이는 감각과 번개 같은 수읽기 능력을 지닌 조훈현의 기재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속기예찬론자였던 후지사와는 싸구려 접는 바둑판을 가져다 놓고 조훈현과 속기로 내기 바둑을 두었다. 조훈현이 지면 어김없이 후지사와의 어깨를 주물러야 했다.
후지사와가 조훈현에게 좋은 일(?)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조훈현이 주변의 권유에 휘말려 다른 프로기사와 100엔짜리 내기 바둑을 뒀다가 스승 세고에 9단의 노여움을 사 파문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스승 집에서 쫓겨난 조훈현은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며 지내다가 간신히 용서를 빌고 스승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내기 바둑을 열렬히 꼬드긴 사람이 바로 후지사와였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짱짱한 기력을 과시했던 후지사와는 67세의 나이에 왕좌전에서 우승했다. 한ㆍ중ㆍ일을 통틀어 최고령 우승기록으로 아직까지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은퇴 후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아마추어 단증을 발행하다가 일본기원으로부터 제명을 당하기도 했다. 하여튼 하고 싶은 일은 다하고 살았던 기인이었다.
그의 3년 기일을 맞으니 새록새록 거인에 대한 추억이 돋는다. 100년이 지나도 후지사와 같은 기사는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바둑사에서 ‘괴물’은 후지사와 슈코 한사람을 위한 이름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