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뜰의 구조와 구원의 원리/ 1) 번제단 :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1) 번제단 :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성경 제일 뒤편에는 보통 “성막의 전경”이 그림으로 붙어 있다. 이 글을 읽기 전에 먼저 성경 제일 뒤편을 찾아 오늘의 주제인 번제단 그림을 음미하면서 내 글을 읽으시라. 번제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 한다(히13:10). 십자가는 모든 영적 체험의 기초요, 근거이다. 모든 영적 체험은 십자가에서 시작된다(갈6:14; 고전2:2; 갈2:20).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기술(記述)함에 있어, 요한은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는 달리 중요한 사건들을 상당 부분 생략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신의 기록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것을 요한의 신학이라 부른다. 요한은 예수님의 족보라든지, 탄생 이야기 등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의 30년 세월에 대하여 거의 침묵하고 있다.
그는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시기 이전의 신분, 곧 그의 신성을 소개하고, 곧 바로 그의 공생애의 시작점이 된 세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물론 마태도 예수님의 세례 사건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 관점이 전혀 다르다. 세례 예식이 있기 전,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 사이의 대화가 마태복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마3:13-17).
여기서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예수님께 세례를 줄 자격이 없다면서 사양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참 신분을 알고서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요한의 초점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그가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후 자기의 제자들에게 외친 첫마디는 바로 이것이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36)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은 요한의 성소 신학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한은 그가 유대인이었기에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예언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성령의 감동으로 이 말을 외쳤을 것이지만, 이 말은 성소를 통하여 드러난 구약의 구속의 예언을 압축한 것이다.
아담이 범죄 한 후, 죄에 대한 그의 최초의 반응은 범죄 전의 자신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창2:25). 그러나 범죄 후에 그가 한 행동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덮고자 하는 것이었다(창 3:7).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2:25).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coverings, NIV)로 삼았더라”(창3:7).
죄를 덮어 보기 위한 그들의 노력(무화과나무 잎), 곧 자기의 행위로써 자기의 죄를 덮어 보려고 한 그의 노력은 허사였다. 그것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었다. 이 돌발 상황에 대비한 하나님의 예비 조치가 21절에 처음으로 암시되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느니라”(창3:21).
여기서 말하는 “가죽옷”에 대해 잠시 음미해 보자. “가죽옷”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동물의 희생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곧, 죄의 수치를 가리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은 한 동물이 인간의 생명을 대속하기 위해 죽어야 하였다. “대속”이라는 말에는 “대신하여 죄의 값을 지불하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여기에는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는 속죄의 대(大) 원칙이 천명(闡明)되어 있다( 히9:22). 그렇다면 여기서 “가죽옷”은 도대체 무슨 가죽일까? 물론 여러 가지로 추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의문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성경은 그 자체가 해설서이며 한 구절이 다른 구절을 설명해 준다”.
창세기가 성경의 서론이라면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결론이다. 마치 논문처럼, 서론의 의문을 결론에서 찾아보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요한계시록 13장 8절을 주목해 보자.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계13:8).
이 구절로서는 가죽옷에 대한 답을 찾기가 매우 애매하다. 한글 성경은 이 성경 구절을 번역함에 있어 약간의 오류가 있다. 헬라어 원문 성경은 한글 성경과는 약간 다르다. 원문에 의하면,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다. 여기서 “죽임을 당한”이라는 말도 완료(完了)형으로서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그 상처를 현재도 보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국제역(NIV)의 번역은 옳다: “the book of life belonging to the Lamb that was slain from the creation of the world.” 그러나 신국제역도 ”죽임을 당한“이라는 동사의 완료형은 살려내지 못했다. 계시록 13:8에 비추어 볼 때, “가죽옷”은 양의 희생을 통하여 만들어진 옷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가죽옷 이후에 성소에서 날마다 상번제(常燔祭)로 드린 것은 어린양이었다.
“네가 단 위에 드릴 것은 이러하니라 매일 일 년 된 어린양 두 마리니 한 어린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양은 저녁때에 드릴 것이며”(출29:38, 39).
다시 말하면, 죄를 위한 가장 보편적인 제사는 매일 두 번씩 드린 어린양이었다. 메시아의 고난을 예고한 이사야 53장에도 어린양의 희생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6, 7).
성소에서 날마다 드려진 어린양은 하나의 상징적 예표이다. 이 어린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말한 인물은 세례자 요한이다. 어떤 면에서 그는 신약의 문을 여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일 것이다(마11:13).
구약의 끝에서 그가 예수님을 보자마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외친 것은 양으로 상징되었던 그림자가 실체를 만나는 환희의 순간이었다.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이미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천사의 말에서 잘 드러나 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죄에서 구원할 자”는 곧 “죄를 지고 가실 자”이다. “죄를 지고 간다”는 사상은 레위기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죄를 옮긴다”는 말로도 표현될 수 있다. 속죄제의 희생 고기를 제사장이 먹거나 아니면 그 피를 성소 휘장으로 가져가 뿌림으로써 죄가 죄인에게서 제사장에게로 또는 성소 휘장으로 옮겨졌다(레위기 4장, 6장).
히브리서에도 동일한 사상이 나타나 있다(히브리서 9장). 성소 제도에 비추어 봄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양들의 실체 되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그 길은 이제 생명의 길이 되었다(히10:19-20).
우리는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하나님의 어린 양”을 요한의 계시록에서 다시 보게 된다. 이를테면, 하늘 성소이다. 계시록 4, 5장에는 하나님의 거대한 성소, 또는 하나님의 보좌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네 생물들(그룹천사들, 에스겔 1장과 10장)과 24장로들이 등장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장래가 걸려 있는 인봉된 일곱 인(印)의 비밀을 풀 자가 없어 요한이 울 때에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한 한 분이 소개된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5:6, 9).
죄에 팔린 우리를 “피로 사서” 하나님께 다시 드리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사명이 성소의 번제단에서 오랜 세월 드려졌던 양들로 상징되어 왔다. 이와 같이 성소 뜰의 번제단에서 드려졌던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상징한 것이었다. 번제단의 어린양의 희생을 상징하는 십자가는 생명의 길로 가는 길을 활짝 열어 주었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다음의 약속을 받았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는 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칭의(稱義, Justification)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이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거듭남”은 어린양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요3장).
우리는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나 그 종착역은 죽음이다. 아담의 범죄로 우리는 그의 DNA를 물려받아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창조시의 생명, 곧 영생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번제단의 어린양, 곧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을 외적으로 표명하는 것이 있다.
2) 번제단의 내용물인 그물과 고리와 채들
번제단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번제단의 내용물인 그물과 고리와 채들이 있다. 번제단의 뜻과 의미는 번제단 안에 설치된 그물이 있고, 그물 네 모퉁이 위에 네 놋 고리들이 있다. 마지막으로 번제단 양 편 위에는 이동할 때 앞 뒤 두 사람이 잡을 수 있도록 손잡이 채들이 있다(출27:4-6).
첫째, 그물은 구속을 이루신 구속자이신 그리스도를 표징한다(엡1:7). 구속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한 인격, 곧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속은 분리될 수 없다(히9:12). 번제단 안의 놋 그물은 하나님의 심판이 그리스도의 내적인 부분들에까지 미쳤음을 표징한다(시22:14). 또한 그물의 높이가 일 규빗 반으로 법궤의 속죄소의 높이와 똑같은 것은 그리스도께서 속죄소의 요구에 따라서 구속을 성취하셨음을 의미한다.
둘째, 그물 네 모퉁이 위의 네 놋 고리들은 영원하신 영을 예표한다(출27:4; 히9;14). 만유(萬有)를 포함한 그리스도는 영원한 영을 통하여 만유를 포함한 죽음을 죽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능은 영원하신 영에 달려 있다. 고리들이 그물과 한 덩어리로 이루어지는 것은 구속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생명주는 영이 되셨음을 가리킨다(고전15:45).
셋째, 번제단 양편 위의 채들은 번제단의 이동을 위하여 믿는 이들의 협력을 통한 십자가의 움직임이 간증임을 표징한다(출27:6-7). 번제단을 통하여 신약 전체의 그림, 곧 구속하시는 그리스도, 성령, 교회를 갖는다.
다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공식적으로 표명하는 한 예식이다. 그것은 바로 번제단 다음에 있는 것으로서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갈 때 반드시 수족을 씻고 들어가야 하는 물두멍이다.
할렐루야! 아멘!
첫댓글 아멘감사르 ♡♡♡
십자가 구속의 번제단의 의미를 알려주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