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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도눈물도 없는 이방원이 왕에 오르게 된 계기
보통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아들로 이방원을 형제나 정적을 비참하게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인물로 기억하고 있으나, 그것만으로 이방원을 제대로 평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태종 이방원을 둘러싼 당시 주변의 환경을 알고 그에 대한 재평가를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방원의 삶에서 고려조에서의 이방원의 활동과 조선이 건국된 후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시기와 왕위에 오른 후, 그리고 세자책봉과 선위파동을 하는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이방원은 1367년에 아버지 이성계와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길재와 같은 마을에 살면서 학문을 강론하기도 하였으며, 일시 원천석을 사사하였다. 1382년에는 당시 대제학이던 민제의 딸과 결혼을 하였다. 매우 영특하여 1383년(우왕 9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388년(창왕 즉위년)부터 1389년까지 고려왕실을 보호할 의도에서 명나라에 파견된 정사 문하시중 이색의 서장관이 되어 남경에 다녀왔다.
그는 정치적 판단이 매우 뛰어나 아버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할 때 개경의 민심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도록 木子得國이라고 하여 결국 이씨가 새로운 나를 건설할 것이라는 선전 선동활동을 총괄 지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반대하였던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제거한다.
이성계를 조선 초대 왕으로 만들기
위해 결국 이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하기에
이성계와 정몽주도 한때는 같은 스승 밑에서 배운 벗이었지만 정치적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되면서 서로 없애지 않는다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입장이 된 것이다. 정몽주를 제거하면 조선의 정당성확보에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 탓인지 이성계가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애썼으나 요지부동이었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것도 사양만 하던 이성계를 조선 초대 왕으로 만들기 위해 결국 이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하기에 이른다.
사실 이 사건은 1392년(공양왕 4년) 3월에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은 것을 계기로 수문하시중 정몽주가 김진양 등으로 하여금 공양왕에게 상소하게 하여 정도전 등 이성계파의 핵심인물을 유배시키고 이성계까지 제거하기를 도모했기 때문에 이방원이 이를 미리 저지하고 아버지를 보호한 것이다. 이 일은 이방원의 탁월한 정치적 판단 아래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이성계와 이방원의 사이는 틀어지기 시작해서 점점 사이가 멀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결국 이방원의 도움으로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고 조선을 개국하게 된다.
조선 개국 공신 중 정도전은 스스로를 킹메이커로
인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자신의 정치적 이상향을 실현
조선이 개국(1392년)되기는 하였지만, 태조 이성계는 많은 부담을 떠안고 있었다. 고려를 버리고 많은 충신이자 정적들을 제거했어야 했다는 것에 대해 마음의 짐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조선 개국 공신 중 정도전은 스스로를 킹메이커로 인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자신의 정치적 이상향을 실현하려고 한다. 정도전은 왕권국가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재상이 나라를 총괄하는 내각중심의 국가를 꿈꾸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방원은 그런 정도전과 정치색이 매우 달랐다. 이방원은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보았고, 현실주의적이고 강력한 왕권중심의 국가를 꿈꾸었다.
이들은 당시 정치 세력의 중심이었고 서로 대립할 수 밖에 없었다. 대외정책에 있어서도 입장이 매우 달랐는데, 이방원은 명에 대해 사대를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정도전은 급진 개혁파로 요동정벌을 내세웠다. 정도전의 정치관은 매우 혁신적이었던 것 같다. 자주국가를 이루기 위한 그의 정치관이 매우 뛰어난 것이지만 그는 너무 성급했던 것 같다. 그는 현실을 너무 간과했고 정치에 있어서 숨고르기를 하지 못했던 것이 결국 그의 정치를 실패하게 만든 원인이었던 것 이다.
이성계는 정몽주의 일 이후로 이방원을 미워하고 있었고
정도전과 강비는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 인해 이방원을 배척
더구나 이방원은 조선 개국 이후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는 개국 공신들보다 더욱 조선 건국에 큰 힘이 되었으나 조선 개국 이후 이방원은 정안군으로 책봉되었을 뿐 정도전과 아버지의 계비인 강비의 배척으로 인해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 아마도 정도전이나 강비 뿐만 아니라 태조에게도 이방원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결국 이방원은 세자책봉에서도 제외되었다. 아마도 당시의 조선 내의 여론에 의해서도 이방원이 대세였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성계는 정몽주의 일 이후로 이방원을 미워하고 있었고, 정도전과 강비는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으로 인해 이방원을 배척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강비의 둘째 아들인 방석이 세자에 책봉된다.
이성계는 정통성 결함가진 태종에게 옥새를 넘기지
아니하고 소요산, 금강산, 오대산 함흥으로 2년간 외유
이로 인해 이성계의 첫째 부인이었던 신의왕후의 여섯 아들들이 불만을 품고 일어나기에 이르고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정도전은 배후세력을 이용해서 이 여섯 아들을 한 군데 모아서 제거하려고 한다. 그러나 빠른 판단력을 지닌 이방원과 아내인 민씨는 그 위험을 인식하고 정도전을 먼저 제거하려고 한다. 결국 민씨가문과 이방원의 정치적 조력자인 하륜과 이숙번의 도움으로 이방원은 정도전과 반대파를 제거하게 되고, 정종(1398년-1400년)이 즉위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정종은 즉위한 지 2년 2개월만에 왕위를 물러나 이방원에게 왕위를 넘기기로 한다. 아마도 정종이 조선 내의 세력이 모두 이방원에게 집중되어 있음을 인식하였고, 이방원에게 왕위를 넘기라는 주위의 압력이 강했기 때문에 현실을 선택한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제2차 왕자의 난은 이성계의 넷째 아들인 방간이 이방원에게 왕위를 넘기는 것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켜 이방원을 죽이려고 한 것이다. 이방원과 정면으로 대립하게 된 이방간은 오히려 이방원에게 패해 유배를 가게 된다. 이렇게 여러 번의 피를 보게 된 이후 결국 이방원은 1400년 왕위에 오르게 되고,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이 된다. 왕위 하나를 얻기 위해 같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난 형제들이 서로 칼을 겨누는 것이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당시의 왕자들의 입장에서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걸린 것이기 때문에 이런 비극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한다.
이방원은 태종에 즉위했으나 이성계와 마찬가지로 정통성확보에 문제가 있었다. 아버지를 몰아내고 형제들을 죽여가면 등극했다는 것은 명분에 있어서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조선은 충효를 앞세우는 유교국가였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되었다. 태종은 태조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한 번 멀어진 태조 이성계의 마음은 열리지 않았다. 왕위에서 물러난 뒤 태상왕이라는 존호를 받았지만 허울뿐이어서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이성계는 태종에게 옥새를 넘기지 아니하고 소요산, 금강산, 오대산 등으로 떠나버렸고, 다시 함흥으로 옮겼다. 함흥은 그가 무장시절부터 장악해 온 땅으로 아직도 그 곳 백성들은 그를 영웅으로 떠받들고 있었다. 태조는 무려 2년 간이나 철저하게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함흥 별궁에 머물렀고, 그 2년 동안 태종의 차사들은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나온 말이 함흥차사였다.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태종은 중앙제도를 정비하기 위해 노력해 한양귀환
거기에다 당시 안변부사였던 조사의와 합세하여 조정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마침 태조의 오래 된 친구인 무학대사가 태조를 회유하여 태조가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또 다시 이방원을 죽이려고 했지만, 이방원이 죽음을 모면하자 결국은 이방원에게 옥새를 넘기고 왕으로 인정하게 된다. 태종은 다른 왕들처럼 궁에서 태어나 자란 것이 아니라 사가에서 자라 과거를 통해서 벼슬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조정 관료들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진정한 왕으로 인정받은 태종은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 확립을 위하여 공신과 외척을 대량으로 제거하려고 한다. 시범 케이스가 이거이와 이저 부자였는데, 이거이는 왕실과 겹사돈을 맺어 권력이 집중되자 이를 경계하기 위해 1404년에 3년 전 있었던 이거이 난언사건을 들추어 이거이 및 이저를 귀향시켰고, 1407년에는 불충을 들어 처남으로서 권세를 부리던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죽였다. 다시 1409년에는 민무구와 관련된 인물로 연계시켜 이무, 윤목, 유기 등을 각각 목 베었다.
그 뒤 1415년에는 불충을 들어 나머지 처남인 민무휼·민무회 형제를 서인으로 폐하였다가 이듬해 죽였고, 같은 해 개국 공신인 이숙번도 축출하였다. 이숙번과 하륜은 태종의 핵심 조력자였다. 태종은 왕권을 거스르지 않는 한 쉽게 자신의 사람들을 내치지 않았는데, 이에 따라 하륜은 태종의 재위기간 동안 여러 탄핵이 있어도 늘 태종의 보호 아래에 있을 수 있었으나 이숙번은 민씨 외척들과 함께 눈밖에 나게 되어 결국 축출당한다. 태종이 민씨형제들을 제거한 이유는 외척인 민씨가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외척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원경왕후 민씨 외에 많은 후궁을 두었다는 설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설일 뿐이고, 호탕한 기질에 사냥을 좋아하고 여자도 좋아했다는 것으로 봐서 추측일 뿐인 것 같다.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태종은 중앙제도를 정비하기 위해 노력
우정승이 장악하였던 문무관의 인사권을 이조와 병조로 이관
이와 함께 1414년에 잔여공신도 부원군으로 봉하여 정치일선에서 은퇴시켜 말년에는 왕권에 견제가 될 만한 신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태종은 중앙제도를 정비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1401년에 종래까지 의정부 합좌에 참여하였던 삼사·예문춘추관·삼군총제를 제외시키고 의정부 구성원으로만 최고 국정을 합의하게 함으로써 의정부제를 정립하였다. 또한, 간쟁을 관장하던 문하부낭사를 사간원으로 독립시켰으며, 삼사와 삼군부는 사평부와 승추부로 개정하였다. 1405년에는 육조직계제로의 전환에 따른 의정부기능 축소와 육조의 기능 강화책으로 육조의 장관을 정3품 전서에서 정2품의 판서로 높였고, 전곡과 군기를 각각 관장하던 사평부와 승추부를 폐지하고 그 사무를 호조와 병조로 이관시켰다. 한편 좌·우정승이 장악하였던 문무관의 인사권을 이조와 병조로 이관하였다.
같은 해에 대언사를 강화하여 동부대언을 증설하고 6대언으로 하여금 육조의 사무를 분장하도록 하였으며, 육조의 각 조마다 세 개의 속사를 각각 설치하고 아울러 당시까지 존속한 독립관아 중에서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 승정원, 한성부 등을 제외한 90여 관아를 그 기능에 따라서 육조에 분속시켜 각각 육조로 하여금 관장하거나 지휘하게 하는 속사제도와 속아문제도를 정하였다. 이러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육조직계제를 단행하여 육조가 국정을 분장하도록 하면서 왕 - 의정부 - 육조의 국정체제를 왕 - 육조의 체제로 전환시켜 왕권과 중앙집권을 크게 강화하였다. 그 밖에도 태종은 지방제도를 정비하고 군사제도와 조세제도를 개혁하기도 했다.
1413년에 이르러서야 지방제도를 개편하였는데 완산을 전주, 계림을 경주, 서북면을 평안도, 동북면을 영길도, 각 도의 단부관을 도호부, 감무를 현감으로 각각 고치고 아울러 군·현의 이름에 있는 ‘주(州)’자를 ‘산(山)·천(川)’자 등으로 개명하면서 1유도부, 6부, 5대도호부, 20목, 74도호부, 73군, 154현의 지방행정을 정비하였다. 1414년에는 경기좌·우도를 경기도로 개칭하고, 1417년에는 평안·함길도의 도순문사를 도관찰출척사, 도안무사를 병마도절제사로 개칭하고 풍해, 영길도를 황해, 함경도로 개칭하면서 8도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밖에 1409년에 전라도 임내를 가까운 군·현으로 이속하였고, 향·소·부곡도 가까운 군·현으로 이속시켜 점진적으로 소멸시켰다.
태종은 군사적인 무력을 배경으로
즉위한 만큼 군사에 대한 관심이
태종은 군사적인 무력을 배경으로 즉위한 만큼 군사에 대한 관심이 컸다. 먼저 왕 개인을 위하여 즉위하던 해에 수하병을 갑사로 편입하고, 의관자제들 중에서 무재가 있는 자를 뽑아 별시위로 편성하였으며, 1404년에는 응양위를 설치하였다. 1407년 내상직을 내금위로 개편하면서 자신이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인물을 등용하였다. 1409년 내시위를 설치하였으며, 10사 중 9사를 시위사로 개편하였다. 군사 지휘체제에 있어서는 1401년 삼군부를 승추부로 개편하여 왕명 출납과 군기를 장악하게 하였고, 1403년 삼군부를 삼군도총제부로 부활시키면서 승추부는 군기를, 도총제부는 군령을 나누어서 장악하게 하였다. 1405년 승추부를 병조에 귀속시켜 병조가 군사 지휘권까지 장악하게 하였고, 1409년에는 삼군진무소를 설치하여 다시 병조는 군정을, 진무소는 군령을 담당하게 하다가 곧 삼군진무소를 의흥부로 개칭하였다. 그뒤 1412년에 의흥부를 혁파하고 병조가 군정을 전장하게 하였다.
한편, 지방군은 1409년 11도에 도절제사를 파견하였고, 1415년경까지 해안을 중심한 영진군, 수성군을 정비하였으며, 1410년경부터는 군역에서 제외된 향리, 공사노비 등으로 잡색군을 조직하여 유사시에 내륙을 수호하게 하였다. 수군은 시위패의 일부를 수군으로 충당하여 강화하였고, 1403년에는 각 도마다 경쾌소선 10척씩을 만들어 왜구에 대비하게 하였고, 1410년부터 1412년까지 병선 200여척을 새로 만들었으며, 1413년부터 1415년까지는 거북선(이순신의 거북선과는 다르다.)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1412년과 1417년에는 축선법과 연훈법을 채택하도록 하였다. 사법·경찰은 1402년에 고려말 이래의 순군만호부를 순위부로 개칭하였고, 1403년에 순위부를 의용순금사로 개편하여 도적을 방지하면서 반역죄인 등을 사찰, 심문, 처벌하게 하였다.
토지제도는 1405년부터 이듬해까지 6도를 양전하고, 1411년부터 1413년에
걸쳐 평안도, 함경도까지 양전함으로써 모두 120만여결의 전지확보
토지제도는 1405년부터 이듬해까지 6도를 양전하고, 1411년부터 1413년에 걸쳐 평안도, 함경도까지 양전함으로써 모두 120만여결의 전지를 확보하였다. 사전의 지배를 강화하여 나갔는데, 1401년에 별사전을 개혁하여 새로 벼슬한 자에게 지급할 것을 정하였고, 이듬해는 과전법을 개정함으로써 종래까지 무세지였던 사원·공신전을 유세지로 편입하였다. 또한 고려말의 전제개혁에서 제외되었던 사원전을 개혁하여 5만∼6만결을 새로이 확보하였다.
1412년에는 원종공신전의 세습제를 폐지하고 외방에 퇴거한 자의 과전을 몰수하였다. 1414년에는 수신전·휼양전의 지급을 제한하였고, 1417년에는 1403년 이래 7차에 걸친 사전의 이급논의를 매듭지으면서 각종 공신전·과전 등 전체의 3분의 1을 충청도·경상도·전라도로 이급하고, 이속된 토지는 군자전으로 귀속시켰다. 그리고 조세정책으로는 1408년에 공처노비의 신공과 제주의 공부를, 1413년에 함경도·평안도의 공부를, 1415년에는 제주의 수조법과 맥전조세법을 정하였다. 그리하여 후반기에는 곡식을 보관할 창고를 대량으로 만드는 등 비축해 놓은 곡식의 규모가 크게 증가하였다. 그 밖에도 백관녹과를 정비하고, 호구법을 제정하였으며, 호패법을 실시하여 호구와 인구를 파악하였다.
이렇듯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에 많은 제도를 개혁하여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민심을 수습하여 안정시켰다. 강력한 카리스마의 왕권이 제대로 그 실력을 발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지만 늘 정통성에 대한 자책감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자식들만은 그렇게 되지 않고 서로 위하면서 살기를 원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국왕이 선위를 하겠다고 했을 때 쉽게 동조하는
신하는 나중에 역모죄로 몰릴 수 있기 때문
태종은 뛰어나고 노련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4번의 선위파동을 일으키는데 이들 선위파동은 그의 정교한 정치기술이며 외척을 제거하고 세자를 교체하는데 이용했다. 정치적 판단이 뛰어났던 태종은 후계자 결정에도 신중을 기했으나 첫째아들 양녕은 자신을 너무도 닮았다. 태종은 자신의 후계자는 좀 더 조선왕조를 반석에 올려놓을 수 있는 자질을 가진 군주이기를 바랐다. 양녕의 여자문제에도 개입하여 충고하였지만 소용 없었고,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키자 마음이 떠난 태종은 셋째아들이자 나중에 세종이 된 충녕에게 마음이 기운다. 1406년 태종은 세자인 양녕대군에게 선위를 하겠다고 밝힌다. 국왕이 선위를 하겠다고 했을 때 쉽게 동조하는 신하는 나중에 역모죄로 몰릴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신하들이 나서서 말렸다. 사실 태종 스스로도 아직은 때가 아님을 알고 있었고 결국은 철회하였다. 이는 외척 민씨형제들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기술이었던 것이다.
원경왕후 민씨는 태종의 부인이기도 했지만 고도의 정치적 판단으로 태종의 정치적 조력자이기도 했다. 태종에게는 여러 위기에 큰 힘이 되되고 위험에 빠진 태종을 구해주기도 하였으나, 결국 원경왕후의 형제인 민씨형제들을 죽게 한다. 태종은 위와 같은 선위 파동을 1409년과 1410년에도 하는데, 이러한 기회를 통해 가뭄으로 인해 민심이 흉흉하고 조정의 여론이 악화되는 것을 돌파하기 위해 선위파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렇게 선위파동은 태종의 고도의 정치기술인 것이다. 1418년 드디어 태종은 마지막 선위파동을 준비한다. 그는 여자문제뿐만 아니라 문제가 끊이지 않는 양녕대군을 폐위시키고, 대신에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충녕을 세자로 책봉한 지 한 달만에 선위를 하겠다는 결심을 밝히고 이에 신하들이 반대를 하였지만, 태종은 거듭 그 뜻을 밝히며 군통수권을 제외한 나머지 권한을 모두 충녕에게 넘긴다. 국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충녕이지만, 국왕이 된 후의 일은 세상이 모두 알만큼 뛰어난 왕이 된다. 이렇듯 태종은 뛰어난 정치적 판단과 더불어 정치기술을 쓸 수 있을 만큼 노련한 정치를 하는 군주였던 것이다.
왕권강화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하고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왕 이방원
태종 이방원은 타고난 자질에 산전수전을 두루 거치며 터득한 노련미를 통해서 왕위에 오르고 왕권강화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하고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왕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태종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 있어서 제1,2차 왕자의 난과 같은 비극을 겪으면서 잔인한 군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생사의 문제였고, 당시의 상황이 조선 건국 초인 만큼 정적을 회유하기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많은 피를 보고 왕위에 올랐지만 그 후에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아버지 이성계의 반발과 개국 공신들의 왕권 위협, 외척의 득세 등 모든 것들이 그가 떠안게 된 짐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결국 그는 또 다시 칼을 들었고,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들은 제거된다.
외척이나 개국공신이라고 해도 하륜을 제외하고는 예외는 없었다. 나라의 안정을 위해 그가 선택한 일이지만, 왕위에 오른 후까지도 정적 제거에 힘을 써야 했던 태종도 명분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정말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하지만 나는 그의 정치적 역량과 기술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세종대왕이라 칭하면서 세종을 높이 평가하지만, 나는 세종이 그렇게 자신의 정책을 이룰 수 있는 밑바탕을 만들어 준 이가 바로 태종이라고 생각한다.
세종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선위파동을 일으킨 것만 봐도 그렇다. 그 밖에도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많은 대내정책이나 대외정책에 있어서도 안정된 기틀을 마련하고 조선의 안정을 꾀한 그를 그가 행한 많은 숙적을 제거한 것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태종은 정적은 제거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신하들은 매우 신임했다. 왕권을 위협하지만 않는다면 그는 자신 역시 신하였던 시절을 겪었기 때문에 사소한 비리들은 다 알면서도 눈감아 주었다고 한다. 그것이 꼭 옳은 일은 아니지만, 그런 것도 다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한다.
사소한 비리로 자신의 사람을 적으로 만드는 것도 어찌보면 어리석은 일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태종 이방원은 골육상잔의 비극으로 왕위에 올라 여러 정적을 제거하기도 하여 이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많은 제도를 개혁하고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조선 최고의 후계자를 선택한 것으로 앞의 부덕한 것들을 만회하여, 조선의 역사에서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왕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 한효상 ]
첫댓글 이성계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학문을 같이 배운 벗 정몽주를
이방원은 제거에 나선다
뒤집어지고 업허지고
지금이나 옛날이나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
이방원 생각하니
고 박정희 대통령이
생각납니다
욕도 많이 먹었지만
이루어 낸 역사도 많지요
역사 이야기 좋은 공부가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