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인식과 감각의 시
신인 응모작을 받아드는 심사위원들은 언제나 새로운 인식과 감각의 작품을 기대한다. 시가 넘치는 시대에,
심지어 시 아닌 시는 없는가, 시 너머의 시는 없는가 하는 기대까지도 하게 된다. 여러 응모자의 작품들은
선자들의 경험과 기대지평 사이에서 달락이 결정되는 것이지만, 시적 상상력과 방법적 기량, 개성멸각의
개성적 표현력은 심사 기준의 기초가 된다.
이양덕의 시편이 보여주는 현실과 초월의 변용적 상상력, 서금숙의 시에서 발견되는 일상적 담론의 시대적
우울과 고뇌, 이경제의 시편이 표상하는 삶에 대한 통찰과 수용적 상상력 등은 그들을 한 개성 있는 신인으로
선정한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새로 등단하게 된 당선자들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이양덕의 시는 현실과 초월, 시적 상상의 변용과 집합적 조합이 돋보였다. 「고흐를 불러내다」는 광기어린
불운의 천재화가 반 고흐의 그림을 역동적인 이미지와 화가의 심리적 정신세계를 통해 생생히 드러낸
작품이다. 사물에 대한 투시력과 면도날이 지나간 듯한 문장력, 그리고 당당한 문체까지 그의 시는 사뭇 시선을
사로잡는다. 고갱과의 언쟁 속에 면도로 한 쪽 귀를 잘라 버리고 그린 고흐의 자화상, 조선시대의 화가 최북에
버금갈 그의 행위에 대해 "칭칭 동여맨 헝겊을 풀고, 마른 액자를 빠져나와 웃음꽃을 피우며 살아가길 소망하여
당신을 불러내는 것"이라고 한 시인은 화가를 액자, 혹은 박물관에서 탈출시켜 살아 있는 대화로 이끝다.
"가슴 속에 태양과 검은 별이 떠 있고 / 초록 몸통에 그려진 검푸른 줄무늬에/은하의 파도소리가 음각된다"는
「소박을 쓰는 여름」에서도 현상과 초월의, 이른바 하이퍼적 상상력과 변용적 결합의 이미지가 현저히
감지된다. 시공을 넘나드는 상상과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은 「뜨거운 결빙」에서 한층 두드러진다.
제목에서부터 대극적 충돌과 결합을 보여주듯, 이 시는 결빙 속의 뜨거운 생명력을 역동적 상상력과 다양한
이미지로 형상된 작품이다.
"빙하에 몸을 날린 동백은 천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이름을 부르면 선운사 석탑을 환하게 밝히던 모습으로 붉게
핀다. 결빙된 바위에선 뜨거운 물방울 하나가 탈출했다. 금세 허공이 출렁거리고 강물이 출렁거리더니 가늘고
파리해진 풀잎이 목을 축이고 숨결이 살아난다." 같은 대목에서 확인되듯, 시인은 이미 이미지의 건너뛰기와
가지치기 같은 리좀의 양상을 시적 상상력의 토대로 삼아 주제적 시상을 유감없이 체현해 보여준다. 능숙한
기량, 현실과 초월의 변용적 상상력은 이 시인의 가능성을 든든하게 뒷받침해 준다.
서금숙의 「파꽃일기」는 파를 심고, 매운 맛이 싫다는 아들에게 파김치를 만들어 주던 어머니가
파꽃 피던 날 암병동에 입원한 일을 중심으로 상상의 이미지를 펼쳐 나간 작품이다.
어머니의 암병동 입원생활은, 평상시처럼 파를 심는 상황적 이미지로 형상된다.
"원자력 암병동에 파를 심었다 불철주야 피 주사로 꾹꾹 찔러 온몸에 파꽃을 심었다 둥근 파꽃이 툭 터진 실핏줄
멍울마다 파랗게 애린 피를 심었다", 이렇듯 독특한 내면화의 산문율로 전개된 부분은 비록 몸은 병상에 있어도
어머니의 의식은 온통 파밭에 가 있음을 드러낸다. 파농사와 파김치는 아예 어머니의 무의식까지를 지배하는
업무가 되고, 그 같은 애착은 마침내 아내가 어머니의 파꽃을 피우고 파김치 맛을 이어가는 디물림 구조로
전개된다. 현실과 상상의 융합적 변용은 「강남몽」에서도 흥미롭게 표현된다.
아파트 건축업을 하는 아버지는 점점 술배가 나오고, 강남 아파트 붐을 타고 돈을 벌게 되는 한편, 어머니는
공사판 한쪽에 함바집을 차리고 고생한다. 이런 상황적 담화는 이 신인의 중요한 특성을 이룬다.
"남산만한 아버지의 뱃속에 빈 위스키병과 정 마담이 들어 있는"는 대목과 일곱 식구가 강남 물을 먹게 되었지만
곧 부도가 나서 빨간 딱지가 붙던 날과 대비된다. 쫓기듯 강남을 떠나야 했던 화자는 그 뼈저린 기억 속에 아직도
강남 사는 꿈을 꾸곤 한다는 것이다. 「시계꽃」은 실업시대의 우울과 고민을 형상한 작품이다. 덩굴성
여러해살이풀인 시계꽃의 이미지와 상징적 의미를 한껏 활용하며 실직의 고뇌와 허탈감, 그리고
"우수에 젖은 덩굴성"이 상징사듯, 시대의 우울을 시계꽃 시계의 시간으로 타전한다. 가족 이야기나 현실의
사소한 문제를 시적 담화의 가치로 체현해 보인 그의 특성은 또 다른 경지를 개척해 가는 힘이 될 것이다.
이경제의 「처음처럼」은 소주계의 인기 상표 '처음처럼'을 상기시키며, 처음, 혹은 처음처럼이 풍기는
위앙스와 그 실제의 의미를 경쾌한 문체로서 결구한 작품이다. "그대를 처음 봤을 때의 심쿵한 미소/ ...
(처음) 품에 안고 맡은 아기 머릿내음"등이 시사하는 '처음'의 상징적 의미는 따뜻하다.
그러나 "처음의 기억에 매달리면 중독되기 마련"이며, 그 중독성의 심화는 "처음처럼 거짓말 같은 말도 없을 걸"
이라는 반전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시인의 의도는 처음처럼의 마력과 의미의 중독, 그리고 그 중독의 상태가
거짓 같지만 우리의 삶을 지탱시켜 주는 실제라는 것이다. 「바다」가 보여주는 넉넉함의 포용적 이미지는
이 시인의 삶의 철학적 인식과 수용적 성신의 시세계를 재확인시켜 준다. 시인은 바다의 이미지를 우선
"세상에서 잘린 모든 꼬리들이/끝없이 모여들어 꼬리치는 곳"이라고 함축해 보여주며, 실개천에서부터 흐름을
이루어 모여들지만, 넘치지도 미어터지지도 않는 해양의 드넓은 미덕을 강조한다.
모든 망각의 조각들을 삼키는 바다는 새날의 새싹과 꽃을 피우고 "어머니의 품속 울음의 기도실"
깊은 생명체의 근원적 안식처라는 것이다. 「회초리를 맞아야」에서는 삶의 상처를 되풀이 망각하고
그 자리에서 맴도는 일상의 구조를 노래한다. "오래된 상처의 기억도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을 때쯤/
높은 문턱에 걸려 넘어지며, 오른쪽 정강이에 움푹 패이는 상처", 그것은 일종의 무감각의 중독현상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회초리를 맞아야 쓰러지지 않고/제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팽이처럼/ 겨우 그 자리 맴돌고 있으면서"에서
보듯,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 때나 별반 다름없는 망각과 상처의 되풀이는 성찰의 한 계기를 마련해 준다.
이 같은 그의 삶에 대한 통찰과 수용적 상상력은 폭넓은 시세계의 발전적 전망을 기대하게 한다.
최종심에서 선외로 밀린 최명숙의 경우, 전통적 서정에 갇혀 시대의식을 충분히 읽어내지 못한 점이
지적되었다. 표준에 잘 맞는다고 해서 작품이 우수하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그 표준의 틀을 깨고 시의 영토를 확장해 가려는 의식이 중요하다. 심기일전 재도전을 권한다.
심사위원 : 심상운, 정연덕, 손해일, 조명제(글)
===================================================================================================-
신인우수작품상 : 이양덕
고흐를 불러내다
귀를 자른 칼이 액자를 찢었다. 꽃들이 화병을 안고 온다. 단단한 벽에선 뿌리를 뻗을 수 없다.
진딧물이 끼어 꽃잎에 생채기가 나도 하늘을 지붕 삼아 비바람에 부대끼던 글라디올러스가 광합성을 퍼나른다
장미를 그려놓고 붓 터치로 가시를 지우고 홀로 견뎌야 했던 우울을 밤별에게 호소하며
귀와 함께 절망도 자르고 싶었던 당신,
이젠 박물관에서 탈출해야 한다. 칭칭 동여맨 헝겊을 풀고, 마른 액자를 빠져나와 웃음꽃을 피우며
살아가길 소망하여 당신을 불러내는 것이다
굳어버린 눈동자에서 버석거리는 소리, 영혼까지 삼킨 벽, 죄다 허물어뜨리고 눈망울이 젖은 여인과
자화상에서 탈출하시라, 당신이 캔버스에 해바라기를 그릴 때, 시엔이 어린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을 때,
생애 최고의 명화를 만날 수 있으리니, 우울과 절망이 없는 청개구리 울음 돌아온 정원에서
다시 그림을 그리시라! 부디 행복을 맛보시라! 반 고흐 씨
수박을 쓰는 여름
바다가 보이는 초록행성
이마에 땀방울이 솟는 이유를 알고
불타는 햇살을 받아먹는다
가슴 속에 태양과 검은 별이 떠 있고
초록 몸통에 그려진 검푸른 줄무늬에
은하의 파도소리가 음각된다
술 익는 소리 후끈 달아오른 밤마다
떨리는 기장 속에서 달아오른다
허공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칼날이
몸통을 사정없이 가르자
선홍빛 속살이 탄성을 지른다
부드러운 혀에 감겨 사르르 넘길 때
태양의 색과 맛을 세포 속에 기록한다
여름의 대지를 위하여
푸름은 확장되고, 꽃과 나비가 조우한다
짧은 밤을 하얗게 지새운 사람들
농익은 달을 삼키고 있다
뜨거운 결빙
결빙된 물병자리를 건져 올리기 위해 빙하지대에서 극한을 견디는
펭귄들이 뒤뚱뒤뚱 무리지어 해빙을 기다린다. 빙하에 몸을 날린 동백
은 천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이름을 부르면 선운사 석탑을 환하게 밝히
던 모습으로 붉게 핀다. 결빙된 바위에선 뜨거운 물방울 하나가 탈출했
다. 금세 허공이 출렁거리고 강물이 출렁거리더니 가늘고 파리해진 풀
잎이 목을 축이고 숨결이 살아난다. 푸른 피가 언 관을 뚫고 내 손을 잡
는다. 봄 햇살은 처마 밑에 숨었는데 겨울의 뒤란엔 나비와 목련이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백야에 떠오른 달이 귀를 삼켜버린 후 노랫소리가 들려
오지 않을 것 같았건만 유리관을 맵찬 바람이 철석철석 때린다. 금이 간
너의 말이 웃음소리를 앗아갔으나 심장은 뜨거운 피가 솟구치고 있다.
지금 한 번도 식지 않은 입술로 주고받아야 할 말이 물푸레나무에서 푸
릇푸릇 돋는다
------------------------------------------------------------------
신인우수작품상 : 서금숙
파꽃일기
아내가 어머니의 파김치 맛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칠순잔칫날 가족
사진 한 장 찍는 소원을 이룬 어머니, 원자력 병원 암병동에 파를 심었다
불철주야 피 주사로 콕콕 찔러 온몸에 파꽃을 심었다 둥근 파꽃이 툭
터진 실핏줄 멍울마다 파랗게 애린 파를 심었다 밭에 나가 팟단을 묶고,
발목을 묶고, 미운 맛이 싫다는 아들에게 파김치를 만들어 주었다
아버지를 기다리던 파꽃 하얗게 피던 날 어머니의 몸속 백혈구가 피를
말렸다 어머니가 밭에 머문 시간을 잊고 지냈을 자식들은 밤낮으로 오래
머문 그녀의 흔적을 뿌리째 뽑았다 팟단을 묶느라 오그린 무릎이 파열음을
냈다 내가 길고 튼실한 큰 파와 작은 파가 꼭 붙어 있는 쪽파를 사왔다
파김치가 아린 맛을 내는 봄이 될 때마다 아내는 파꽃을 피우는
어머니가 된다
강남, 몽(夢)
눈웃음이 치열 고른 입가까지 흘러내렸다 남산만한 아버지의 뱃속에
빈 위스키병과 정 마담이 들어 있다 아파트 공사 일을 하는 아버지는
외삼촌이 지고 온 가방 속 돈다발을 꺼내 월급을 준다 베란다처럼
줄을 서는 인부들, 인부들의 장화 속 쿰쿰한 돈 냄새가 집안가득 번진다
아버지는 돈을 잘 벌수록 배사장이 되어 갔다 강남아파트 분양이 끝날 무렵
아파트 붐이 일고, 집안에는 모래바람이 훈훈했다 어머니는 오남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공사판 한 쪽에 함바집을 차렸다 국수를 삶는 솥에서
화독내가 나면 허기가 참을 수 없다고 뱃가죽에 딱 달라붙은 어머니 등이
휘었다 사내 팔뚝만한 주걱을 휘휘 저었다 국물을 우려낸 연기에 눈이
시렸다 아버지의 배에서 바람이 빠진 날, 일곱 식구가 강남 물을 먹던 날,
빨간 딱지가 붙던 날, 버려진 교과서, 기억은 낙타를 타고 바늘귀를 넘고,
나는 아직도 강남 사는 꿈을 꾸곤 한다
시계꽃
오늘 하루가 섹션 티브이보다 더 잘게 잘려나가고 있다
고양이에게 참치 캔을 주고도 남는 시간
처리를 못해 땅에 꽂는다
이리저리 시달리고 끄달려도
일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화창한 일기를 저장하고 싶은
고된 하루를 꿈꾼다
내가 꿈꾸는 자리는 어디일까?
일어나고 싶어도 일어나지 못한 요일들 속에
나의 라임은 서식지 온실, 생욱지 화단
수확의 기쁨을 맛보고 싶은 아버지의
아픈 손가락이 된 지 오래다
세기말 사건이 터질 때마다 양각이 되든지
음각이 되든지 양다리를 걸치려고 해도
파편이 되려고 해도
반쯤 오므린 힛살은 하품만 늘어지게 한다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땅 속에 뿌리를 내린
우수에 젖은 덩굴성
여러해살이 풀이 구름을 화폭에 담아갔다
해 저문 공원에 나와 앉아 꽃이 된 이 순간이 행복하다
초초초 분분분 똑 부러진 시간을 타전한다
나는 어제 비정규직에서 짤렸다
-------------------------------------------------------
신인우수작품상 : 이경제
처음처럼
지금 이 순간은 처음이지
늘 처음이야
가버리지 않는다면 처음이 아니지
상표로 강요하는 처음처럼
그대를 처음 봤을 때의 심쿵한 미소
아련한 기억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지
달콤한 꿀맛이 독하기까지 했던
사이키델릭사운드의 요란한 소리에 흥분한 온몸을 떨듯이 흔들었었지
품에 안고 맡은 아기 머릿내음
내 손안에 쏙 들어와 오물거리던 작은 손의 따뜻했던 촉감
오감을 건드렸던
처음의 기억메 매달리면 중독되기 마련이야
더 많이 더 크게 더 독하게
더더더
처음처럼 거짓말 같은 말도 없을 걸
바다
세상에서 잘린 모든 꼬리들이
끝없이 모여들어 꼬리치는 곳
송사리 살던 실개천이었지
미꾸라지 숨어 있던 진흙뻘
가물치 헤엄치던 강이라고 했지
깊은 산속 옹달샘이랬지
먼 곳에 가까운 듯이
여기저기서 모여들기만 하는데
넘치지도 않아
미어터지지도 않지
울타리를 치지 않기 때문
벽을 쌓아 올리지 않기 때문
오히려 바위를 쪼개는 끈기
육지를 올라서는 당당함
고요한 밤엔 더 큰 소리로 잠 깨우는 뻔뻔함을
싫다고 하지 않는 이유 알 수가 없어도
바다에 모여드는 망각의 조각들
꿀꺽꿀꺽 삼킨 검은 하늘
오늘 아침에는 새싹으로 태어날까
꽃으로 만발할까
고여도 썩지 않는
어미의 품속 울음의 기도실
회초리를 맞아야
한창 뛰어다닐 나이
신발 디딤대를 딛지 않고 마루까지 뛰어오르려다
왼쪽 정강이가 마루에 부딪치며 넘어져
물렁한 어린 정강이뼈가 쑥 들어가며 붉은 고통이 요동쳤다
대상도 없어 억울한 울음은 눈 꼭 감고 잦아들었다
움푹 패인 상처는 한 번에 한 계단씩 오르라면서
돌아서려는 기억을 자꾸 돌려세웠다
오래된 상처의 기억도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을 때쯤
높은 문턱에 걸려 넘어지며 오른쪽 정강이에 움푹 패이는 상처
아파서 울을음 울기엔 너무 나이 많은 어른
울음은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다
희미했던 왼쪽다리 상처 갑자기 더 커진 듯이 눈에 들어오니
더 아프다
상처 하나로 부족한 양쪽 다리 정강이 깊은 상처
바보는 아닌데 어디에 쓰겠다고 욕심을 부렸나
조심도 안 하고 잘난 척했나
어른은 무슨 어른
회초리를 맞아야 쓰러지지 안혹
제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팽이처럼
겨우 그 자리 맴돌고 있으면서
첫댓글 이양덕 시인 서금숙 시인 이경제 시인
시문학 등단을 축하합니다.
멋진 작품 좋은 활동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