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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북머리님께서 펌해 둔 [서평]을 보셨는지요? 꼭 보시기를 권합니다. 참고로 쇠북머리님의 [펌글] 주소는 http://cafe.daum.net/mental-illness/WOmy/100
"분열병과 인류" (나카이 히사오 저, 한승동 역, 마음산책, 2015)
이 책의 저자는 정신과의사로서 1970년대 초반부터 10년간 정신의학사 강의를 했으며, 자신의 강의노트를 토대로 이 책을 저술했습니다. 저로서는 처음 접하는 내용이 많아서 "정신의학사" 부분을 읽을 때 나름대로 메모(타이핑)해 가면서 책을 읽었습니다. 아래는 제가 요약/발췌한 내용입니다. 책 내용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되십사 소개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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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친화자 vs. 집착성격자 / 수렵사회 vs. 농경사회
분열병자의 사회 ‘복귀’에 최대의 장벽이 되는 것은 사회의 강박성, 바꿔 말하면 강박적인 주변사람들이 환자들을 계속 압박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매일 체험하고 있다. 우리는 사회의 강박성이 얼마나 뼛속 깊이 박혀 있는지 알고 있다. 그 바깥에 반강박성적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p.50)
이처럼 사회와의 ‘화합(타협)’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S친화자가 인류의 상당 부분을 점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것이 인류에게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집착 성격자들로만 이뤄진 사회를 상정해보자. (p.52)
유아들의 엄마 표정 인지는 징후성에 대한 최초의 반응이다. 특히 분열병에 걸리기 쉬운 사람은 인생 초기의 이 징후성에 압도당할 만큼 과민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도대체 어찌 “전혀 말썽을 피우지 않는 착한 아이”일 수 있겠는가. (「응석의 단념」 참조) 이 과민성은 마비적으로 작용해 안전보장 감각을 결코 키워줄 수 없을 것이다. (p.53)
분열병자의 유소년기는 다수가 ‘착한 아이’라는 얘기를 듣는데 이 말썽 피우지 않고, 도드라지지 않고, 반항하지 않는 ‘고분고분’한 ‘착한 아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우울병자의 유소년기도 다수는 ‘착한 아이’다. 다만 바지런하고, 눈치 빠르고, 기특한 ‘착한 아이’인 점이 다른 것이다. 도이 다케오의 ‘응석’ 이론에 비춰 보면 어느 쪽이나 ‘응석부리지 않는’ 아이인데, 분열병자의 유소년기가 ‘응석’을 모르거나 ‘응석’을 두려워 하는데 비해 우울병자의 유소년기는 ‘응석’을 좋지 않은 것으로 여기며 단념한다는 인상을 준다. 아니, 부모를 위로하고 ‘어리광 부리게 하는’ 아이도 많다.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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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이스-로마 vs. 이슬람 : 알렉산드리아가 의학의 중심
중세 말 ~ 산업혁명 이전 : 마녀사냥
숲문화 vs. 농경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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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필자는 근대 정신의학의 탄생에 대한 얘기를 어떻게 마녀사냥을 종식시켰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중략) ... 그런데 필자는 마녀사냥의 종언을 고찰하는 데 몹시 눈에 띄는 하나의 현상을 주목하고자 한다. 그것은 네덜란드에서 다른 지역보다 한 세기 이상 빨리 마녀사냥이 대체로 종식됐다는 사실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네덜란드는 마녀사냥이 가장 빨리 끝난 지역임과 동시에 대학에서 임상의학, 즉 환자를 진찰하려는 시도가 최초로, 그리고 본격적으로 이뤄진 나라다. 이것은 프랑스보다 약 두 세기나 앞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신병자를--기타 부랑자나 매춘부, 범죄자와 함께--네덜란드에서 번성했던 모직물 공업의 집단 노동으로 치료하려고 한, 오늘날의 작업 요법을 처음 시행한 나라이기도 하다. (p.162-163)
'네덜란드라는 현상‘은 우리의 고찰에 아마도 가장 중요한 열쇠를 제공할 것이다. 원래 저지대 국가들은 중세 내내 선진 지역이었다. 간척에 의한 북부의 농업, 영국의 양모를 사용한 남부의 공업이 착실히 발전했다. (p.163)
17, 18세기를 통해 네덜란드와 스위스라는 두 개의 칼뱅주의 국가만큼 자유사상가가 안전한 지역은 달리 존재하지 않았다. 칼뱅주의와 자유사상은 현실에서 공존할 수 있었다. 이 양자가 어울려 우선 네덜란드에서 사상적 관용, 세속화, 계약에 토대를 둔 인간관계, 현세 내의 금욕, 근면과 연구(궁리)에 의한 문제 해결--즉, 전체적 종합에서 도출되는 해결이 아니라 현실세계 속에서 행동하고, 실례를 찾아 살펴보고, 현실수준의 근로와 궁리를 통해 곤란을 극복하려는 syntagmatism(통합주의)에서 paradigmatism(범례주의)으로의 커다란 사상 전환이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p.165)
주요 마녀사냥 반대자들은 칼뱅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네덜란드의 공기를 한 번은 마셨다. (p.166-167) ‘네덜란드라는 현상’ 속에는 네덜란드의 대학들 절반 이상이 망명해 온 위그노를 비롯한 외부 유입 교수들에 의해 시작된 사실도 들어간다... (중략) ... 실제로 레이던대학에는 유럽 각지에서 학생들이 그 임상의학을 배우기 위해 몰려들었으며, 그 영향은 멀리 터키에까지 미쳤다. 에라스뮈스를 비롯한 종교적 관용주의자들이 종교개혁 와중에 최종적으로 신교, 특히 칼뱅주의를 선택한 것은 결코 칼뱅주의가 그들을 환영했기 때문이 아니다. 칼뱅주의자들 자신은 칼뱅이나 크롬웰이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신정정치를 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윤리 자체가 좋든 싫든 유능한 실무가, 지식인, 기술자가 활동할 여지를 준비해놓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중세에도, 엄격하게 말한다면, 봉건 영주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네덜란드 북부나 프리슬란트의 개척 농민들은 일찍부터 ‘영주로부터 자유로운 백성’이라는 자각과 긍지를 갖고 있었다... (중략) ...여기서 있을 수 있는 반론, 즉 북아메리카의 청교도 식민지인 세일럼에서 일어난 유명한 (그러나 매우 작은 규모의) 때늦은 마녀사냥 【역주: 1692년 3월,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의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에서 일어난 집단심리 폭주에 따른 참극. 200명 가까운 무고한 마을 사람들이 마녀로 고발당해 열아홉 명이 처형당하고 한 명이 고문사했으며 다섯 명이 옥사했다.】 사실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에 대한 답이 나온다. 즉, 눈에서 비늘을 떼어내듯이 설득을 통해 이 마을의 마녀 소동을 종식시킨 것은 뉴욕(뉴암스테르담)에서 온 “렘브란트와 반에이크의 리얼리즘으로 무장한” 네덜란드계 시민이었다. 실제로 네덜란드 회화를 시대별로 살펴보면 르네상스적, 바로크적 회화가 급격하게 리얼리즘으로 변화하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대상은 저지대 지방의 넓은 하늘 아래 펼쳐진 풍경뿐만 아니라 일상의 도구나 식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17세기에 벌어진 네덜란드와 영국 간 해전에서 화가는 배를 타고 두 나라 함대 사이를 떠돌아다니며 실제 상황을 그렸다. 그 리얼리즘은 20세기 종군 카메라맨의 선구가 아니었을까? (p.180-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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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에서의 임상의학의 성립
영국 스코틀랜드 (애든버러, 이후 글레스고) : 네덜란드 유학자 시드넘이 주도한, 임상기록 중심의 임상의학 패러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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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견이지만, 시민사회의 성립과 근대 정신의학의 성립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첫째, 시민계급이 경제적 주도권을 쥐는 것과 병행해서 마녀사냥은 종식되기 시작했고, 시민혁명 때까지는 어떤 지역에서도 결정적으로 종말을 고했다. 이미 불태워야 할 악마 빙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 다만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을 경계로 한 변화도 컸다. 이전에는 정신병자는 범죄자나 매춘부, 신체장애자 등과 함께 ‘시설’에 수용돼 있었다. 산업혁명에 의한 대규모 공장제도 및 대형 형무소의 출현... (중략) ... 등의 출현으로 인간 집단을 통제하는 모델은 형무소나 병영으로 변환됐다. 정신병원도 정신병자만을 수용하고 남녀를 구별했으며 종종 제복을 입게 했다. 모든 방을 동일 형식으로 만들고 동일 증상의 병자들을 같은 방에 모았다. 관리상의 능률을 이유로 수천 명을 수용하는 대형 정신병원이 출현했다. (p.167)
이들 시민혁명을 계기로 한 임상의학의 성립과 동시에 정신 질환은 내과 질환을 모델로 하는 의미에서의 질환으로 기술되고 인식되게 된다... (중략) ... 그들이 의사로서 직면했던 질병의 구성이 오늘날과는 매우 달랐던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근대 시민사회는 그 해의 무역, 식민지 획득의 이른바 반대급부로서 끊임없이 외래 전염성 질환의 내습을 받았다. 19세기 말에도 정신병원 수용자의 3할은 필시 진행성 마비에 의한 것이었다. 산업혁명에 따른 결핵의 확산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징거가 정신의학의 건설자임과 동시에 전염병 연구에 종사한 것도 3월 혁명 뒤의 일종의 망명에 따른 것이기도 했지만, 이런 문맥에서 이해할 수 있다. (p.169-170)
근대 정신의학의 시작을 살펴보면 그 시조인 피넬의 생애 자체가 매우 시사적이다. 피넬은 그 제자 에스키롤과 함께 남프랑스 출신자다... (중략) ... 피넬은 파리에서 세 가지 중요한 체험을 한다. 하나는 식물학과의 접촉이다. 즉 젊은 날의 피넬은 왕립식물원에서 동식물 분류 연구에 종사했다. 오늘날과는 달리 식물분류학은 천체역사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당시 가장 확실한 선진 과학이었다. 의학자이자 식물학자였던 린네의 방법에 따라 자연계의 개체를 분류해서 하나의 체계로 만드는 확실한 방법들을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은 여러 영역에 적용되고 있었다. 실제로 질환을 이 방법에 입각해서 분류하려 한 것은 식물학자 드 소바주, 카바니스였다. 피넬은 식물분류학에서 카바니스 등의 후계자일 뿐 아니라 연구를 통해 카바니스에 속하는 하나의 사상 집단에 접촉하게 된다. 그 사상 집단은 엘베시우스의 미망인이 주최하는 살롱에 모이는 일단의 사상가들로 ‘이데올로그’로 불린다. ‘이데올로기’란 명명자 데스튀트 드트라시에 따르면 존 로크, 콩디야크의 감각론에 따라 사상을 그 요소인 감각으로 분해하고 또 그 감각에서 출발해서 그 종합을 통해 사상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중략) ... 그들은 프랑스혁명의 지롱드당적인 측면을 대표하게 되고, 사상적 입장에 따라 교육제도의 개혁이 사회혁명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믿었으며, 혁명 때 입법위원회 멤버로 활약했다. 근대 프랑스 교육제도는 그들에게 빚진 바가 많다... (중략) ... 피넬은 이데올로그와의 접촉을 통해 의학에 종사하도록 권장받은 사람이다. 실제로 그는 이데올로그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해도, 그런 관점에서 보면 피넬 정신의학의 절반은 분류학적이고 또 절반은 계몽철학적인 성격, 또 저 유명한, 전설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신병자들의 족쇄로부터의 해방’으로 대표되는 제도에의 관심, 병원 관리에 대한 흥미, 그리고 정치권력과 연계한 개혁이라는 성격이 매우 명료해질 것이다... (중략)... 매우 후진적이었던 프랑스의 의학 제도는 대혁명과 함께 네덜란드, 영국, 또는 양국과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하노버 지방이 괴팅겐 대학 모델을 본떠 절묘하게도 시민 의료, 즉 ‘폴리클리닉’으로 명명한 대학 임상을 개시한다. 그와 동시에 백과사전의 정신을 계승해 분류에 의한 병원 체계를 만든다... (중략) ... 실제 의료에서도 여컨대 에스키롤의 이념을 토대로 질베르가 설계한 샤랑통의 정신병원은 똑같은 스타일의 ‘ㄷ’ 자형 건물의 정연한 집합체로 하나의 섹션에는 같은 종류의 정신병자들이 수용돼 흡사 상자 모양 같았다. 이런 스타일의 병원은 지금까지 하나의 전통이 돼 1,000병상이 넘는 신경학 또는 소아과 단과병원이 있고, 학생과 연구자는 거기서 사실상 모든 종류의 질환을 살펴볼 수 있다. (p.173-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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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시민사회의 정신의료가 수천 명을 수용하는 대형 정신병원에 국한돼 있다고 보는 것은 일면적이라는 점이다. 에스키롤 자신이 자택에 수십 명의 정신병자를 받아들여 그들과 식탁을 함께 사용했다. 19세기에는 상류계급, 부유층 시민을 위한 ‘건강한 집’이라는 소규모 진료소가 존재했으며, 모파상과 보들레르, 프루스트가 치료를 받은 곳은 이런 타입의 진료소였다. 즉, 근세에 형성된 ‘수도원이냐 수용소냐’라는 계층에 따른 2분제는 시민사회에서도 ‘건강의 집이냐 정신병원이냐’라는 두 개의 분류로 나타나 정신병원으로의 수용은 빈곤 계급, 또는 지배적 계층에서 탈락하거나 소외되는 것이 그 계층에겐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진 중증 병자들로 한정돼 있었다. 치료법에서도 이원성이 나타났다. 정신병원에서는 종종 구속 또는 충격적인 치료법이 주류를 점하고 있었지만, 진료소에서는 전세기의 이른 바 낡은 부분에서 남겨진 퓌세귀르나 메스메르의 자기술을 포함한 보다 특권적이고 온화한 치료법이 시행됐다. 신경증군과 정신병군으로 나뉜 두 개의 계보는 어느 정도는 이 치료의 장이 지닌 이원성과도 관련이 있다. 그 조금 뒷시대의 일이지만, 크레펠린은 단기간 부유한 계층을 위한 플렉시히의 진료소에 근무했다고는 하나 거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관되게 정신병원을 기초로 그 체계를 만들었다. 거꾸로 프로이트는 소아 병원의 진찰을 거쳐 가장 부유한 계층을 포함한 시민을 위한 개인적 진료를 실천했다. (p.176-177)
부르주아지는 치료를 쾌적한 환경과 목욕, 일광욕에서 구했다. 특히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서 휴양지가 발달했다. 경증 환자들은 종종 전지(轉地) 요양을 권유받았다. 하지만 중증 환자는? 18세기의 수용소는 오늘날의 인도 정거장과 다름없었다. 배를 기다리는 유형수와 매춘부와 환자들은 함께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일종의 자유가 있었다. 거기는 “안심하고 미칠 수 있는 장소”(윌리엄 앨런슨 화이트)였고, 호가스의 판화에서 볼 수 있는 외잡스러운 세계였다. 원내 출산 수는 매년 관리자 보고 사항의 일부였다.
그러나 19세기와 함께 분위기는 급속히 변했다. 정신병원에는 정신병자만을 입원시킨다는 큰 변화만 있었던 게 아니다. 분리 수용은 20세기 전반기까지 정신과의의 최대 관심사였다... 일종의 배려는 병원 건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최대의 치료 수단 중 하나는 병원 건축이라는 인식은 이미 얘기한 바와 같이 계몽 시대에 존재했다.) 예컨대 샤랑통의 정신병원은 두 개의 강이 합류하는 절벽 위에 지어졌고 병원 전체의 철책은 절벽 중간에 설치돼 환자들에겐 보이지 않도록 했다. 병원은 ‘ㄷ'자형 병동들의 집합이었고, 모두 강을 향해 열려 있어 환자들은 계곡 너머 일드프랑스의 넓은 들판을 마음대로 조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또한 앞서 얘기했듯이 너무나 표본 상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반 고흐의 그림에서 보듯 닫힌 안마당을 청회색 옷을 입은 환자들이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병원이 더 많았을 것이다. 정신의학사를 쓰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정신병원의 실상이 당시와 별로 다르지 않고, 몇 번의 개혁 시도도 계몽 시대 또는 프랑스혁명 시대 사람들의 생각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p.192-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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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정신의학의 관계를 3단계로 나눠 추적할 수 있다. 그리고 국민국가 성립과의 관련 속에서도. 제 1기는 이미 얘기한 대로 칼뱅주의 윤리와 노동 치료가 조화적으로 존재한 시대다. 직업윤리에 입각한 의사(종종 현세적으로 유복한 시민이 돼 있었다)가 노동 치료를 하는 수용소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그림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회진이 visite(방문)이라 불리고 있는 이유다... (중략) ... 그러나 그 중심지인 네덜란드는 17세기 말이라는 이른 시기에 몰락한다... (중략) ... 그런데 무대를 영국으로 옮기면, 그 인클로저 운동과 산업혁명은 하나로 연속돼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장원을 중심으로 한 중세 농촌의 전형을 발달시킨 그 영국이 농업을 포기하고 토지에서 인간을 추방한 뒤 대신에 양을 키우기 시작했다. 양모는 처음 플랑드로 지방 또는 인도에까지 수출됐고, 제품이 돼 다시 영국으로 환류했다. 영국이 18세기 전반에 1차 산업국이었던 것을 우리는 곧잘 잊어버린다... (중략) ... 17세기 크롬웰의 아일랜드 정복은 국민국가로서의 영국 최초의 식민지 획득이었다... (중략) ... 7세기에는 서방 세계에서 유일한 ‘문명국’이었고 중세 철학의 연원이었던 이 지역에 잉글랜드인이 지주로 들어가 아일랜드인을 소작인 지위로 밀어냈다. (영국의) 농업 포기는 농업국 아일랜드의 획득으로 보완됐다... (중략) ... 그러나 2차에 걸친 인클로저 운동으로 땅에서 쫓겨난 농민들은 실직한 빈민으로 도시에 흘러들어갔다. 18세기 후반 영국에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은 그들 자국민의 착취에서 비롯됐다... (중략) ... 하지만 산업혁명 사회는 정신병자에 대한 사회의 허용성을 현저하게 위축시켰다. 감금에서 풀려났던 그들은 다시 ‘감금’ 당하든가 굶어 죽도록 방치됐다. 외국의 관찰자들에게는 이 매연에 뒤덮인 인구 과밀한 새로운 사회 자체가 정신장애의 원인이었고, 그것은 ‘영국병’이라는 이름이 붙기에 이르렀다. 당시 장기설 【역주: 열병을 일으키는 산천의 독기, 즉 나쁜 공기가 정신 질환을 낳는다】 이 유력했는데, 동시대의 프랑스 정신병원이 과민할 정도로 통풍에 신경을 쓴 것을 함께 생각해보기 바란다. (p.181-185)
청교도주의와 근대사회의 관계에 변화가 일어나 제2기에 들어간 것은 산업혁명이 그 계기가 됐다. 예전의 근면의 윤리 대신에 전면에 등장한 것은 거의 다 드러난 ‘지배의 윤리’였다. 그것은 “워털루의 승리는 이튼교의 교정에서 이뤄졌다”라고 얘기했듯이 영국 지배층의 교육의 윤리이기도 했으며, 19세기에는 사회 다윈주의라는 ‘우승열패’ ‘약자 도태’의 윤리가 되고, 해외 식민지 정복 때는 ‘백인의 무거운 책임’이 되기도 했다. 근면은 여전히 회자되고 있었지만 그것은 통속 도덕으로 여겨졌다. 자선 또는 복지는 사람들을 타락시키는 것이라 하여 늘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다. 실업은 게으름 탓으로 돌려졌다. 비자발적 실업, 즉 아무리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값싸게 팔려고 해도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실업의 발견은 실로 1920년대의 케인스를 기다려야 했다... (중략) ...
그때 스코틀랜드는 어떻게 돼 있었던가. 종교를 통해 네덜란드의, 그리고 왕실 혼인 관계를 통해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잉글랜드보다 대륙적이고 체계적인 사고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것은 완전히 대륙적인 그 법체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17세기 말 이래의 스코틀랜드 학파의 때로는 지나친 ‘네덜란드적’ 질병 분류--정신병을 300가지 이상으로 분류한 자도 있었다--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또 스코틀랜드 학파의 또 다른 일면, 예컨대 강력성과 약력성 등에서 보이는 평형적 건강론 (평형 파탄에 의한 병리 발생)은 장로교회 내의 모더라티즘(중용파)에 대응하는 것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스코틀랜드는 컬로든의 대패, 잉글랜드와의 의회 합동 이래 사실상 합방됐지만, 항상 ‘지배의 윤리’를 보완하는 ‘근면의 윤리’, 경험주의를 보완하는 체계주의를 잉글랜드에 계속 제공했다. 그들은 뛰어난 학자나 정치가들을 잉글랜드에 공급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의 식자율은 잉글랜드보다 훨씬 더 높았고, 나폴레옹전쟁 시대의 영국 해군 수병 중에서도 문맹이 아닌 자는 거의 스코틀랜드인들뿐이었다.
그럼에도 스코틀랜드는 이미 정신의학의 선행적 시행자는 아니었다. 실천 상에서 청교도주의가 산업혁명에 대립한 것은 잉글랜드에서였으며, 유명한 듀크 가문은 산업혁명의 매연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시골 벽촌에 요크 휴양소를 세웠다. 경증 환자들이 마을길을 걸어 다녔고, 때로는 마을 사람들 집에 하숙을 했다. 이 모럴 트리트먼트(도덕요법, 정신요법)는 너무나 유명하지만, 중요한 것은 의사가 아닌 그들이 정신병자와 화합하면서 함께 생활하는 전통을 발전시킨 일이다.
의사들이 정신병원을 ‘방문’하지 않고 그 속에서 일하거나 또는 거기서 살아간 것은 그 뒤의 일이었다. 에스키롤이 샤랑통에 일종의 목가적 세계를 건설하려 했고, 출신지 농민들의 여망을 짊어지고 정신과의가 돼 출신지의 병원장이 된 블로일러가 병원 건설에 전 생애를 바친 것은 19세기의 일이다. 의사가 아닌 듀크 가의 사람들은 국교도가 아닌 데다 산업혁명 비판자들이라는 의미에서 이중이 논컨포미스트(비국교도 또는 순응거부자라는 의미)였다. 공직에서 배척당한 그들은 적극적으로 천직의 윤리에 입각해 세련된 기능과 봉사 정신으로 일을 했다. 많은 정신병원 개혁이 개혁자의 생명보다 영속하지 못했던 것과 대비될 만하지만(새뮤얼 듀크는 의사를 극도로 배척했다), 그들한테서 배운 많은 정신병원 개혁자들은 모럴 트리트먼트를 오해했다. 이것은 당시의 용어법에서는 ‘도덕 요법’이 아니라 ‘사회 요법’이라고 해도 문제없었다. 그러나 ‘도덕 요법’으로 불린 것은 ‘정신병자는 게으른 자’라는 설의 영향일 것이다. 특히 독일에서 그런 경향이 강하다.
듀크 가의 전통은 오늘날에도 영미권에 존속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자원봉사자의 참가에 의한 모럴 트리트먼트는 19세기 말까지 영국에서 행해졌다. 그것을 폐지한 뒤 환자의 퇴원율은 눈에 띄게 낮아졌다. 그러나 그 영향은 남아 영국의 정신병원 간호사의 8할 내지 9할은 듀크 가와 마찬가지로 퀘이커 교도들이다. (p.185-188)
우리는 20세기에 청교도주의와 정신의학의 제 3기를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청교도주의의 윤리 자체가 인간을 정신병으로 몰아간다고 최초로 고발한 사람은 아마 해리 S. 설리번일 것이다. 그 자신은 아일랜드계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에겐 기독교 이전의 아일랜드 민간전승의 세계도 남아 있었지만, 그는 일찍이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뉴욕 주 농업지대의 프로테스탄트 농민들 사이에서 고독하게 자랐다.
그는 처음에 자신의 출신을 부정하고 양키가 되고자 했으나 실패한다. 그때가 그의 자립 시기였다. 제 2차 세계대전 뒤 이미 부유한 의사가 돼 있던 장로교회 목사의 아들 R. D. 레인이 아내가 남프랑스에 별장을 구하려 한 것을 계기로 반정신의학 쪽으로 돌아선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프로테스탄트 가정의 유아교육에 대한 고발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설리번은 또한 미국이 청소년, 성인의 ‘성공 원리’도 고발하고 있다)과 그 자신의 금욕성인데, 청교도주의 윤리가 청교도적으로 고발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을 단지 청교도주의 윤리의 고발자라고만 보는 것은 너무 단순할 것이다. 레인의 저작 일부는 영국의 동요를 떠올리게 하며 또 다른 일부는 러셀로 대표되는 영국 철학에 의해 촉발된 감이 있다. (사르트르의 영향은 오히려 희박하다.) 설리번에게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아일랜드 서부의 이교적 분위기가 배어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칼뱅주의자 목사의 아들로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창한 장 자크 루소가 이 제3기의 예고자, 선구자라고 할 수도 있다. 그의 교육론 『에밀』은 지금이라면 반교육론으로 규정당할 것이다. 그는 정신의학에 직접 관계하진 않았으나 앙시앵레짐의 정신병원 개혁에서 시작되는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충분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다.
마찬가지로 칼뱅주의 하에 있던 스위스의 주들은 중세 말기에 이미 신성로마제국에서 이탈했지만 ‘네덜란드적 현상’은 훨씬 미약했다. 볼테르를 비롯한 지식인들의 피난처가 됐으나 19세기의 시계 공업과 20세기의 수력발전(그리고 그에 따른 화학공업)이 일어날 때까지 가난한 목축 국가였고 외지 돈벌이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외국 용병이 된 그들은 그 충성심과 함께 ‘향수병’으로도 유명했다. 그럼에도 멀리는 파라켈수, 가까이는 라바터를 배출했다. 모두 정신의학을 포함한 의학의 혁신자들이다. (p.18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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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오스트리아의 18세기 ‘계몽된 전제주의’는 또한 근대화 장비의 하나로서 형무소(교도소)나 병영과 함께 정신병원을 필요로 했다.
17, 18세기는 네덜란드를 모델로, 19세기는 프랑스를 모델로 삼아 오스트리아는 그 치료 의학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파리와 빈은 19세기 의학의 주축이 됐다. 그러나 절대주의 국가에서는 민중이 치료를 요구한 결과 의사에게 가해지는 압력은 약했다. (p.194)
슈타인의 개혁은 프로이센을 규범적인 근대 관료 국가로 바꿔놓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독일 각지에는 프랑스형의 거대 정신병원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대학은 아직 정신의학 강좌가 없었고 ‘정신병원장의 의학’의 시대였다. 낭만파 의학에 침윤돼 있던 이델러와 노이만 등의 정신병원장은 낭만적으로 정신의료의 이상을 구상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읽을 만한 부분을 갖고 있지만, 어느 정도로 실천됐을까. 오히려 엄격한 관리가 그 특징인데, 때로는 여자 환자에게 군장을 시켜 교련을 하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럴 트리트먼트는 그 의미를 바꿔 강요적인 도덕 요법이라는 의미가 강화됐다.
M. 슈렝크는 그 이후 150년간 독일 정신병원은 거의 바뀐 게 없다고 얘기한다. 이 단순한 닮은꼴 환경 속에서 점차 정신병자들은 분류가 가능해졌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중략) ... 19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대학 정신의학 건설이 이뤄졌다. 하지만 프랑스가 사제 간 전승의 전통을 결국 만들어내지 못했던 데 비해 독일 대학의 강좌제는 볼만한 계보를 그려낼 수 있을 정도의 엄격한 사제 관계를 창출했다.
19세기 정신질환의 발견은 프랑스처럼 대학과 큰 병원의 교류가 이어진 곳이나, 크레펠린처럼 정신병원과 대학 양쪽 모두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손으로 이뤄졌다. 19세기 후반에 정신의학은 내과보다 더 분화해 의학의 한 분과로 대학에서 시민권을 갖게 되지만, 많은 대학교수들은 정신병원에 있으면서 다만 강의를 위해 대학에 출강하고 있었던 듯하다. ‘정신병원장의 의학’ 속에서 발견된 파과병, 긴장병은 대학교수가 된 크레펠린에 의한 조발성치매, 함께 근무한 블로일러의 분열병으로 종합되는데, 필자가 그 발견의 장을 문제 삼은 것은 거대 정신병원의 쇠퇴와 함께 우리는 다시 질환 형태의 다양화라는, 18세기에 본 것과 같은 사태를 맞이하게 되기 때문이다. 거꾸로 19세기부터 20세기 초의 가장 큰 정신의학적 발견은 분열병의 ‘발견’인데, 이것은 고대 이래의 조병, 울병이라는 양대 분리 체계를 뒤집은 것일 뿐만 아니라 정신의학 그 자체의 분위기를 일변시켰다. 그것은 전염병을 극복하려던 19세기부터 20세기 전반기에 걸친 시기의 의학적 과제를 대신해서 20세기 후반 의학의 최대 문제가 됐으며, 또한 철학자, 사회학자, 대중의 눈이 다시 정신의학에 쏠리게 만든 원인이 됐다. 이 ‘발견’이 점차 그 문제성을 드러내게 됐기 때문이다. (p.196-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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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의 나이팅게일이라고나 해야 할 메리 딕스에 의해 수도 워싱턴에 최초의 서구형의 ‘근대적’ 정신병원이 개설되는데, 일반적으로 태머니 홀【역주; 179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쳐 존재했던 미국 민주당 내 파벌 관련 기관. 자선단체 대머니협회가 그 전신】과 골드러시 시대인 19세기 후반의 미국은 유럽과 마찬가지로 우승열패의 사상 아래 정신병자들을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중략) ... 의학 측면에서는 19세기 전반기의 퀘이커 이사 벤저민 러시를 대표로 하는 (전근대적) 일원론적 미국 의학을, 그리고 세기 후반기에는 교육 기술 정도가 제각각인 각양각색의 의사의 범람을 야기해 의사의 신용이 급속히 저하했다.
여기서 미국의사회는 자율 규제를 통해 의사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고자 저급한 의사의 정리와 속성 의학교 폐지를 감행함으로써... (중략) ... ‘기초의학은 독일에서, 임상의학은 영국에서’ 그 모델을 찾는다는 테제 하에 의과대학 모델로 존스홉킨스대학을 볼티모어에 세웠다. 스위스 출신의 아돌프 마이어는 츠빙글리파의 목사한테서 “사변으로 흐르지 말고 실천을 중시하라”라는 격려를 받고 유럽 각지의 대학, 특히 스코틀랜드(글래스고)에서 공부하고 정신병원 부속 병리해부학자에서 임상정신과의가 된 의사였는데, 초빙을 받아 초대 정신의학 교수가 된다. 미국 정신의학은 마이어의 근대 일원론적 정신생물학을 출발점으로 해서 구미 유학 의사들을 제 1세대, 마이어 등으로부터 배운 의사들을 제 2세대로 해서 1920년대에 역동 정신의학을 중심으로 점차 미국적 정신의학으로서의 자각을 명확하게 해간다. 설리번도 그 중의 한 사람을 가르쳤을 것이다. 정신병원에서 정신분열병에 대한 정신요법을 시도한 것은 그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좋다. (p. 20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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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8세기에는 정신병에 대해서는 의사가 아니라 철학자가 이를 맡아야 한다는 주장이 존재했다. 이 암투는 프랑스혁명에 의해 거의 종언을 고했다. (최후의 주장자는 아마도 칸트였을 것이다.) 이것은 16세기의 신학자와 의학자 간 항쟁의 재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학자와 달리 철학자들은 권력과 결합하지 않고 조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의학에서도 철학에서도 학회는 나중에야 등장했다.) 패배한 쪽은 철학자들이지만, 예컨대 독일 대학생들의 주요 취직처는 귀족이나 부르주아지의 가정교사였기 때문에 철학자의 주장이 그만큼 비실천적인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철학자의 곁가지인 임상심리학자가 미국에서 정신요법의 주류를 점하고 있는 것을 보라. (p.194-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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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중심의 서구 공식 정신의학]
“19세기 후반을 통해 정신의학은 대학의 전문 과목이 되고...” 이런 내용이 이어지는데, 제가 여기까지만 요약을 해뒀습니다. 아마도 이후의 내용은 제가 아는 내용이라고 생각해서 요약발췌를 생략한 듯합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내용은 이 책이 아니고는 접하기 힘든 내용들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이 이 글을 통해 정신의학 그 자체, 질병분류방식, 치료방법, 환자에 대한 처우방식 등이 결코 순수 학문적 차원에서만 발전해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시기를 바랍니다. 즉 시대별, 국가별, 사회분위기, 가치관, 정치권력 등에 의해 매우 다른 모습을 보였다는 점을 인식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정신과 영역은 순수학문적인 또는 순수과학적인 분야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정신과 영역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즉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무엇이 질병인지, 무엇이 질병이 아닌지가 규정되며, 또한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가 결정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자본주의의 논리와 모순이 만들어낸 대표작"이 정신병이라는 진단이지나 않은지? "자본주의적 취향을 가장 잘 반영하는 해결방식"이 약물처방이라는 해결방식이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 글이 "정신의학의 발달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또한 정신병이란 무엇인지? 최선의 해결책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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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제가 쓴 글을 엄청나게 열심히 읽고 계시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