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
전장운 요 한 |
상인 |
1866.3.9 |
성 전장운 요한(Joannes)은 서울 애고개라는 곳에서 태어났고, 그의 또 다른 이름은 승연이다. 착한 성격을 지닌 그는 열심한 신자인 어머니로부터 영세를 받았고, 부친을 잃은 후에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농사를 짓는 한편 가죽부대와 담뱃대 만드는 일로 가족의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으나 신앙이 굳지 못하여 감언이설에 빠져 배교하고 풀려 나왔었다. 이때부터 전 요한은 언제나 깊은 참회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전 요한은 실망하지 않고 1845년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 신부가 입국하자 즉시 회개의 성사를 받고 자기의 열성과 신심을 되찾아 열심히 살았다. 이 때문에 많은 교우들도 그의 열심에 감복하여 그를 존경하였다. 그 후 전 요한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고 살았다.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는 그의 참된 신앙생활을 보고 그에게 세례를 베풀 권한을 주었으며, 1866년에는 최형 베드로(Petrus)와 함께 교회서적을 출판하는 직무를 맡겼다. 그래서 출판에 종사하던 임 요셉으로부터 집을 샀으나, 아직 목판의 인수인계가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고 박해가 일어났다. 전 요한은 피신도 하지 않고 목판을 사수하였다. 신자들이 그에게 피신을 권유하자 그는 “내가 어디에 간다 하더라도 천주님이 부르시면 나는 체포될 것입니다. 여기서 체포되나 다른 곳에 피했다가 체포되나 무엇이 다릅니까? 그러나 여기에는 교우들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귀중한 물건들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이 목판이 교회에 매우 유익하다고 믿기에 어떠한 불행이 닥친다 하더라도 달게 받으며 여기를 지키렵니다.” 하고 말했다.
1866년 3월 1일 포졸들이 와서 집을 지키던 그에게 “이 집은 천주교도의 집인 줄 알고 있는데 당신도 천주교도요?” “그렇게 물을 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틀림없는 천주교도입니다. 나를 체포해서 가겠다는 말씀이신 모양인데 기다리고 있던 참이오. 자, 앞장서십시오. 나 기꺼이 따라 가리다.” 이리하여 그는 순순히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지만 ‘예수 마리아’만을 부르면서 갖은 고통을 다 참아 받았다. 3일간의 고문과 심문이 끝나고 1866년 3월 9일 사형선고가 내렸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전 요한의 목을 베는 희광이는 전에 신자였고 잘 아는 사이인 고성철이란 사람이었다. 그가 “내 어찌 차마 자네 목을 벨 수 있겠소?” 하며 거절하려 하자 전 요한은 “당신은 임금께 복종하고 나는 하느님께 복종하는 것뿐인데 무엇을 꺼리는 거요?” 하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의 칼에 목이 땅에 떨어지니, 때는 1866년 3월 10일이요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87 |
최형 베드로 |
회장 |
1866.3.9 |
성 최형 베드로(Petrus)는 일명 최치창으로도 불렸다.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와 함께 수원으로 이사했다가 1863년에 또다시 서울 석정동으로 이사하였다. 20세 때 영세 입교한 그의 부친은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는데, 최 베드로의 동생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는 최초의 유학길에 오른 3명의 신학생중 한 명이었고, 그의 형인 최수 요한은 순교자이다. 어려서부터 한문을 잘 배워 익힌 최 베드로는 집이 넉넉지 못해 집안일을 도와 농사일이나 수공업 등의 손일을 통하여 가계를 도왔다.
1836년 모방(Manbant, 羅) 신부가 입국한 이래 베드로는 모방 신부의 복사로 일하였는데, 그의 재주와 신심이 크게 돋보였기 때문에 모방 신부는 자신이 순교한 1839년까지 그를 자기 옆에 있게 하였다. 1845년 유학길을 떠난 김대건 신학생이 부제가 되어 돌아오자 김 부제를 도와 조선 입국을 기다리던 페레올(Ferreol, 高) 주교와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를 모셔 들이는데 많은 힘을 썼다. 그는 사공 하나 없는 배를 타고 상해로 건너가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 부제의 서품식에도 참석하였다.
그 후 36세쯤에 결혼하여 서울 남쪽 교외로 내려가서 틈틈이 종교서적을 번역하고 묵주도 만들어 팔아가며 생활하였다. 1856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입국하자 모든 교회 서적의 정리를 단행했는데, 이 일의 책임자로 최 베드로가 임명되자 그는 기꺼이 이 일을 맡아 여러 가지 어려움과 장애를 이겨 나가며 4년 동안 교회 서적을 많이 출간하였다.
1826년 2월 23일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자 사태가 위태롭게 전개됨을 알고 피신하였으나, 이선이라는 밀고자가 그의 집을 알려주었다. 포졸들이 그의 집에 들이닥쳤으나 그가 피신하고 없었으므로 그의 아내가 문초를 받아 피와 살이 범벅이 되고 말았지만 끝까지 남편의 거처를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 베드로의 집에 사는 14세 된 하녀가 밤중에 몰래 집을 빠져 나가는 것을 보고 포졸들이 붙잡아 곤장을 쳐서 베드로가 숨어 있는 곳을 알아내었다.
포졸들은 3월 1일 최 베드로를 체포하여 온 몸에 석회를 뿌리고 주먹으로 마구 친 다음 포청으로 데려갔다. 그는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죄와 사악한 책을 출판했다는 죄 그리고 다른 신자들을 선동했다는 죄 등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형 선고문에는 “혹심한 곤장에도 굴하지 않고 쇠나 돌같이 고집이 세어 사교를 단념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다. 또 진리를 고백하면서 사형 선고문에 직접 서명까지 하였으니 이에 국법을 따라 마땅히 사형에 처하노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최 베드로는 그의 성실한 벗 전장운 요한과 함께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때가 1866년 3월 9일이며,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88 |
정의배 마르코 |
회장 |
1866.3.11 |
성 정의배 마르코(Marcus)는 서울 창동의 어느 양반집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천성이 어질고 진실하며 행동이 신중하였다. 그러나 그의 집은 유학을 숭상하였기에 오로지 사서오경을 외우며 과거공부에만 전념하였다. 과거 공부를 마친 후 서울의 어느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며 살다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자식도 없이 홀로 생활하였다.
1839년에 그는 우연한 기회에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와 모방(Manbant, 羅),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순교하는 모습을 새남터에서 보게 되었다. 이역만리 낯선 땅에 와서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전하며 모욕과 멸시와 학대를 달게 받고 있으니 그들은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바라고, 누구를 사랑하는 것인가? 자기들을 죽이려고 날뛰며 악의에 찬 조소를 퍼붓는데 오히려 웃는 낯으로 불쌍히 여기지 않는가? 이처럼 그의 의문은 끝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천주교 서적을 구해 읽기 시작하였고, 자기가 닦아온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제껏 나는 천주교 신자가 되면 착한 일을 할 수 없는 자로 보았었지만, 이제 알고 보니 진정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천주교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영세 입교하여 조선 교회의 훌륭한 일꾼이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1845년에 입국한 페레올(Ferreol, 高) 주교는 그를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였는데, 죽는 날까지 모든 열성과 신심을 다해 임무를 수행했기에 ‘산 성인’이라 할 정도로 신자들을 잘 이끌고, 예비자들을 잘 준비시키며, 병자들을 방문하고, 먹을 것조차 없어 고생하면서도 버려진 고아들을 데려다가 도와주기도 하였다. 그의 생활은 매우 검소하였는데 그에게 값진 옷이라곤 한 벌도 없었고, 군데군데 깁고 또 기운 헌 옷을 입었고, 조금 들다가 그만 밥상을 물리곤 하였다. 그는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를 자기 집에 모셔 들여 조선말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는 자주 “순교한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로다. 반면 자기 집에 앉아 안일하게 죽는 것은 진정 두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1866년 2월 25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처음에는 감옥에 갇혔으나 의금부로 넘겨졌고, 3월 5일에는 사형선고가 내려졌고, 같은 달 11일에 처형되었다. 사형 길에 나선 정 회장은 눈을 내리 뜨고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이윽고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가 1866년 3월 11일로 바로 그의 72회 생일날이었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89 |
우세영 알렉시오 |
역관 |
1866.3.11 |
성 우세영 알렉시우스(Alexius, 또는 알렉시오)는 세필이라고 불렸는데, 황해도 서홍 땅에서 대대로 선비생활을 하던 양반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난 그는 16세가 되던 해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그는 우연히 만난 김 요한이라는 전교회장을 통해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삶의 의의와 보람을 느끼게 되어 천주교에 입교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을 외면한 채 집을 나와 몇몇 예비신자들과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찾아갔다. 그를 만나본 베르뇌 주교는 그의 학식과 신앙과 열성은 대견스러우나 아직 나이가 어리고 주위 환경이 너무 어려워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선뜻 세례를 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간청하였고, 결국 그는 정의배 마르코(Marcus) 회장의 인도를 받아 알렉시우스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즉시 집으로 돌아갔다.
막상 집으로 돌아와 보니 천대가 대단할 뿐 아니가 수개월 동안 계속되는 저주와 악담까지 참아 받아야만 했고, 마침내 남의 구설수에 오르기가 두렵고 부끄럽다는 이유로 그를 감금하기까지 하였지만, 그는 모든 것을 양순함과 인내로써 잘 이겨냈다. 그 후 그는 “차라리 네가 집에 없으면 죽은 것으로 여겨 위안이 될지 모른다.”는 부친의 말을 듣고, 집을 떠난 서울의 정 마르코 회장 집에 일 년 동안 머물며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집안 식구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면서 한편으로는 교리서 번역과 십이단 편찬에 전력하였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아버지도 아들이 믿는 천주교에 관심을 보였으므로, 그가 차근차근 천주교 진리를 설명해 드린 결과 온 가족들과 이웃 등 20여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가 있었고, 정부에 대한 고발 소동이 일어나자 하는 수없이 모든 가산을 버리고 평안도 논재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 후 1866년 정초에 알렉시우스는 정 마르코 회장을 찾아가 세배를 하였는데,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그와 정 회장을 잡아갔다. 처음 심문과 고문은 잘 참아 받았으나, 두 번째에는 위협에 못 이겨 배교하였다. 그러나 곧 참회와 식음을 전폐하는 극기를 통해 마음을 다시 굳히고 포도청으로 나아가 옥중에 있는 베르뇌 주교에게 지난 일들을 사죄받았다. 이윽고 그는 평온한 마음을 되찾고 용덕을 더욱 발휘하여 모든 고문을 잘 참아 견디었으며, 혹심한 곤장과 많은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신앙을 용감하게 고수하여 기다리던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이윽고 우 알렉시우스는 1866년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고, 이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90 |
다불뤼 안토니오 |
주교 |
1866.3.30 |
성 마리 니콜라 앙토안 다블뤼(Marie Nicolas Antoine Daveluy) 주교의 세례명은 안토니우스(Antonius, 또는 안토니오)이고, 한국명은 안돈이(安敦伊)이다. 그는 1818년 3월 16일 프랑스 아미앙(Amiens)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그 당시 프랑스의 전통적인 가정답게 모범적인 신앙생활과 덕행의 꽃을 피웠던 집안이다. 부모는 그의 억세고도 침착하지 못한 성격을 고치려고 다소 완고한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그는 사제직에 뜻을 두고 1834년 10월 파리(Paris) 교외의 잇시(Issy) 신학교에서 입학하여 2년 동안 철학을 공부하였다. 이어 1836년 10월 파리 생 쉴피스(Saint Sulpice) 신학교에 진학하여 5년 동안 신학을 배운 다음 1841년 12월 18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 서품 후 르와예(Roye) 본당의 보좌신부로 20개월 동안 사목하다가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전교신부로서의 뜻을 펼치기 위해 1843년 10월 4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 극동 선교사로 임명되어, 2월 20일 브레스트(Brest) 항구를 출발하여 8월 24일 외방전교회의 마카오 대표부에 도착하였다. 그때 마침 제3대 조선 교구장에 임명되어 조선으로의 입국을 시도하고 있던 페레올(Ferreol, 高) 주교의 권유를 받아들여 조선 선교사를 지원하였다. 그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1845년 8월 초 상해로 가서 8월 17일 금가항(金家巷) 성당에서 거행된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한 후, 8월 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橫塘) 소신학교에서 첫 미사를 집전한 김대건 신부를 보좌하였다. 그리고 8월 31일 페레올 주교, 김대건 신부와 함께 상해를 출발하여 어려운 항해 끝에 10월 12일 저녁 8시경 충남 강경 부근 황산포(黃山浦)에 상륙하였다.
이때부터 1866년 3월에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그는 당시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되었으며, 아울러 조선의 언어와 풍습에도 능통하게 되었다. 조선에 입국한 이듬해인 1846년부터 전교활동을 시작한 그는 갖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7백여 명의 교우들을 돌보았고,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자 일단 활동을 중단하고 습기가 심한 불결한 방에 숨어 살았으며, 그러면서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다. 1848년 박해가 뜸해지자 건강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전교활동을 시작하여 1850년에는 생명이 위험한 지경까지 갔다. 이에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 신부로 하여금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전교활동을 금하였고, 그래서 그동안 다블뤼 신부는 신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하고 틈틈이 “나선소사전”(羅鮮小辭典)을 편찬하는 등 교우들이 손쉽게 볼 수 있는 신심서 및 교리서를 번역 저술하기도 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성교 요리 문답”(聖敎要理問答), “천주 성교 예규”(天主聖敎禮規), “천당직로”(天堂直路) 등의 번역서라든가, “신명초행”(神命初行), “회죄직지”(悔罪直指), “영세대의”(領洗大義), “성찰기략”(省察記略) 등의 저서들은 모두 그의 노력에 의한 것들이다. 특히 한국 천주교회사와 순교사의 정리는 그의 두드러진 업적들 중의 하나이다. 조선 교회사 편찬을 위해 조선사에 관한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에 대한 비망기를 저술하여 모두 1862년 파리(Paris)로 보냄으로써 후대의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이것을 기초로 달레 신부가 “한국 천주교회사”를 저술했기 때문이다.
그는 1861년에는 경상도 지방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1865년부터는 내포 지방에서 전교활동을 시작했었는데, 1866년에 병인박해가 더욱 가혹해져 마침내 같은 해 2월 23일에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잡혀 3월 7일 참수 치명하였다. 그래서 보좌주교였던 그가 주교직을 계승하여 제5대 조선 교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곧 체포되어 당시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고 있던 위앵(Huin, 閔) 신부와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 의금부에 갇힌 다블뤼 주교는 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천주교에 대한 훌륭한 호교론을 펴기고 했다. 그러나 3월 23일 그가 사형에 처해질 것이 결정되어 충청도 보령(保寧) 수영(水營)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죄수복을 입고 고문으로 상한 다리를 질질 끌면서 이송되는 도중, 처형 예정 날짜인 3월 30일 성 금요일에서 처형일이 다소 연기될 기미가 있음을 알고 “성 금요일에 죽게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의 소원대로 3월 30일에 성 금요일에 다블뤼 주교는 사형을 받게 되었다. 처형이 시작되자 맨 먼저 다블뤼 주교가 칼을 받았다. 이때 희광이들이 다블뤼 주교의 목을 칼로 한 번 내리친 다음 그대로 버려둔 채 처형의 품삯을 흥정하기 위해 한참동안 꾸물거리다가, 흥정이 결정되자 다시 다블뤼 주교의 목을 두 번째 내리쳤다고 한다. 그 후 그의 시신은 얼마동안 군문효수 되었다가 교우들의 손에 의하여 홍산 땅에 안장되었다. 현재 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지하성당에 모셔져 있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