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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천정씨 생원공파 원문보기 글쓴이: 오천백로(永埰)
* 소 재 지 :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161번지 *임고서원에는 전적이 약 200책 소장되어 있는데 조사된 전적은 신편음점성리군서구해(新編音點性理群書句解) 등 42종 186책이다. 그 중에서 전적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는 10종 25책만을 선별 지정하였다. 간본은 정충록 등 임고서원 내사본과 임란 이전본으로 3종 12책이다. 그리고 필사본은 심원록, 임고서원고왕록, 장학계안 등 선조조에서 조선조 말기에 이르는 임고서원과 관련된 자료들로서 7종 13책이다. 이들 간본은 낙질(落帙)이 있기는 하지만 조선전기 간본으로 서지학연구(書誌學硏究)에 도움이 되는 자료이며, 필사본은 비록 창건 당시부터의 것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온 것은 아니나 임고서원의 운영 족적 및 이에 관련된 그 시대의 사회, 경제적인 일면을 살필 수 있으며 또한 조선조 유교문화와 관련된 학술자료의 하나로서, 서원제도(書院制度) 연구에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 | |
소 재 지 :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161번지 임고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영정은 3본(本)으로 그 전체적인 모습은 매우 비슷하나 제작 연대, 필자, 세부의 묘사 등은 각각 다르다. 동일본(同一本)에서 중모(重模)되어 내려온 모본으로 모두 오사모, 청포단령, 각대를 착용한 모습을 보여주며 포석과 배경은 묘사하지 않았다. 숭정기사 모본은 견본 채색에 169.5 × 98cm의 크기이며 김식(金埴)의 작품으로 전해지는데 그림의 오른쪽 아래편에 “숭정기사모본(崇禎己巳摹本)"이라고 묵서(墨書)되어 있어 1629년 중모 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오사모에 담청색의 단령포를 입고 있는 전신교의상으로 좌안팔분(左顔八分)의 안모(顔貌)를 하고 있고 연폭의 비단에 그려져 있는데 의습도 먹선이 아닌 청색선으로 묘사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훼손이 심한 편이나 고격(古格)을 지니고 있으며 현존 작품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 |
*연 대 : 조선시대(1700~1800) *소재지: 영천시 임고면 삼매리 1020번지 / 소유자: 정재영 [설 명] 이 고택은 18세기 중엽 정재영씨의 10대조 되는 매산(梅山) 정중기(鄭重器 1685~1757)선생이 짓기 시작하여 그의 둘째 아들 정일찬(鄭一鑽)이 완성한 것이라 한다. 3칸의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약 1.5m 높이의 기단 위에 본채가 서 있다. 본채의 건물은 안동(安東) 지방의 전형적인 ‘ㅁ’ 자형 평면인데 여기에 사랑채 누마루를 사랑방과 직교되게 덧붙이고있다. 안채의 대청은 두리기둥을 쓰고 머리에는 초익공의 공포를 짜는 등의 장식을 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법으로 금하던 것이었다. 현재는 본채·대문간채 그리고 사당만이 남아 있으나 원래는 아랫사랑·고방채 등 여러 부속채들도 있었다고 한다. | |
*연대 : 조선 영조(1725년) *소재지: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131번지 (소유자: 정대준) [설 명] 이 고택은 현 주인 정용준씨의 8대조가 조선 영조 원년(1725)에 건축한 것으로 본채와 정자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사랑채와 문간채가 일자형(一字形)으로 합쳐 있고, 문을 들어서면 ‘ㄱ’자형 평면의 안채와 곳간채, 그리고 아래채가 있어 전체적으로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방주(方柱)와 납도리로 결구(結構)한 3량가구(三樑架構)의 소루수장 물익공(勿翼工)집이다. 본채와 50여m 떨어진 냇가의 정자는 건축직후 옆의 연못에서 저절로 연꽃이 피어나 연정(蓮亭)이라고 편액(偏額)하였다 하며, 이병헌, 수애 주연의 영화 여름이야기 촬영배경이기도 하다 | |
*연대: 조선 선조 32년(1599) *소재지: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 78번지(소유자:정재중) [설 명] 이 건물은 조선 선조 32년(1599)에 의병장 정세아(鄭世雅)가 임란후 고향에 돌아와 자호(紫湖) 언덕에 정자를 짓고 여러 교우와 학문을 강론하였던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양래간(兩來間)은 방이고 중앙칸과 전면 퇴간은 누마루 형식이며 기둥은 원주(圓柱)로 되어있는 익공계(翼工系)의 삼량(三樑)집이다. 1974년에 영천댐 공사로 수몰됨에 따라 용산동 751번지에서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 |
*연 대 :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78번지 *소재지: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78번지 (소유자:정남식) [설명] 이 가옥은 임진왜란때 의병의 활약으로 영천, 경주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정세아의 넷째 아들인 수번이 그의 셋째 아들 호신의 분가주택으로 조선 광해군 12년(1620)경에 건립한 것이며 묘우(廟宇)는 효종 6년 (1655)에 세워졌는데 영천댐 건설공사로 1977년 3월에 현 위치로 이전·복원하였다. 주택은 정면 5칸, 측면 1칸의 가적지붕이고, 묘우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 |
*연 대: 조선 인조 15년(1637) *소재지: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 78번지 (소유자 : 정재종) [설명] 이 묘재는 오천정씨(烏川鄭氏) 문중의 묘소와 강의공(剛義公) 정세아(鄭世雅)의 신도비를 수호하기 위하여 진주목사인 정호인(鄭好仁)이 조선인조 15년(1637년)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강의공은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논공행상에 참여하지 않고 강호정사에서 제자를 기르며 학문을 닦아 덕망이 높았던 선비였다. 현재의 건물들은 후대에 중건된 것으로 보이며 영천댐 수몰지구로 편입되어 1976년 7월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경내에는 추원당(追遠堂), 신도비각 등의 건물이 있는데 모두 단순하고 소박하게 짜여져 있다 | |
*연 대 : 조선 영조 2년(1726년) *소재지: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78번지 (소유자:정찬식) [설명] 이 건물은 조선 영조 2년(1726)에 정중호(鄭重鎬) 중기(重岐), 중범(重範), 중락(重洛) 4형제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자양면 삼귀리에 건립한 것인데 건물이 쇠락하여 순조 2년(1802) 자양면 용산리에 옮겨 지었다가 영천댐 건설로 1977년 3월에 현재의 장소로 이전 복원(復元) 하였다. | |
*연 대 : 조선 인조 13년(1635년) *소재지: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 78번지(소유자:정남식) [설 명] 이 건물은 삼휴 정호신(鄭好信 1605~1649)이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조선 인조 13년(1635)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정호신의 자는 덕기(德基), 호는 삼휴(三休), 본관은 오천(烏川)으로 17세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형 섬기기를 부모처럼 하고 스승을 예우함이 모범되었다고 한다. 조부인 호수 정세아가 살았던 곳에 정자를 짓고 그 풍경을 바라보면서 ‘삼휴(三休)’란 시를 지었는데 이를 정자이름으로 삼아 삼휴정이 생기게 되었다. 삼휴정은 소박한 구조의 건물로 전면에만 난간(欄干)을 시설하였는데 영천댐 건설공사 1977년 3월 현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 |
*연 대 : 조선 영조 3년(1727년) *소재지: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78번지 (소유자:정남식) [설명] 이 건물은 오회당 정석현(五懷堂 鄭碩玄)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영조 3년(1727) 관찰사 권대규의 후원으로 건립하였으며, 영천댐 건설공사로 1977년 3월 현 위치로 이전·복원하였다. 소박하게 짜여진 건물로 지붕의 형태는 맞배지붕 좌우에 눈썹지붕을 덧달아 마치 팔작지붕처럼 보이게 하였는데 이런 형태는 이 지역에는 흔히 볼 수 있다 | |
*연 대: 조선 광해군 5년(1613) *소재지: 영천시 대전동 52번지 (소새지:정현목) [설 명] 조선 광해군 5년(1643)에 해남현감(海南縣監) 정호례(鄭好禮)가 ‘工’자 형으로 건립한 전통양식의 한국식 건물이다. 정호례 현감은 1592년 임진왜란때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장손(長孫)이다. 이 건물 북쪽 약 200m지점에 정세아 장군의 위패를 봉안한 환고사(環皐詞)가 있다 | |
*연 대: 조선 영조
*소재지: 영천시 녹전동 519번지 [설명] 정간(鄭幹)은 조선조의 문신으로 자는 도중(道中), 호는 명고(鳴皐) 이다. 영조 원년(1725) 증광문과에 급제, 청양군수, 경주부윤, 선천· 동래부사 등을 역임. 청백리로 녹선되고 영조33년(1767) 승지에 이르렀다. 그는 탁월한 학문과 국론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 투철한 청백리로서의 처신, 효우(孝友)와 의리에 있어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으며, 왜인들마저도 송덕비를 세울만큼 선정을 베풀었다 한다. 이 영정은 오사모에 단령을 입고 호피의자에 앉은 전신좌상으로서, 전체적인 상용형식은 숙종 영조때의 양식을 보여준다. 정면관(正面觀)을 비롯하여 높은 사모, 공수자세(拱手姿勢)로 인해 밑으로 불거진 좁고 긴 소매, 족좌대의 한껏 벌린 발사이로 보이는 호랑이의 코 모습 등은 18세기 초엽 정장 관복을 입은 사대부상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밑에 깔린 돗자리는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 |
*연 대 : 숙종42년(1716) *소재지: 영천시 화북면 횡계리 439-3번지 (소유자: 정극,정철검) [설명] 이 건물은 조선 숙종때 성리학자인 훈수(塤叟) 정만양(鄭萬陽)(1664-1732)선생과 지수(篪叟) 정규양(鄭葵陽)선생 형제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숙종42년(1716)에 세운 정자이다. 두 선생은 이 곳에서 학문을 연구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영의정 조현명, 형조참의 정중기, 승지 정간 등 많은 명현과 석학들을 배출하였다. 그 후 나라에서 수차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일생동안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 정자는 정면3칸, 측면4칸반의 “ㄱ"자 형태누각 건물로 창호구성 방법 등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건물이다 | |
*연 대:영조6년(1730) *소재지: 영천시 화북면 횡계리 457-3번지(소유자: 정극, 정철검) [설명] 이 건물은 숙종시 성리학자인 지수(篪叟) 정규양(鄭葵陽)(1667-1732)선생이 숙종27년(1701)대전동에서 이곳으로 이사하면서 집을 짓고 태고와(太古窩)라 하였으나 영조6년(1730)문인들이 개축하여 모고헌이라 하였다. 선생은 형인 훈수 정만양(鄭萬陽)선생과 이곳에서 옥간정을 왕래하면서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하는 뜻으로 훈(塤)과 지(篪)로서 호(號)를 삼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 건물은 정면2칸, 측면2칸 팔각지붕으로 사면에 툇간을 돌린 정방형 평면을 하고 있는 독특한 건물이다 | |
*연대:고려공민왕 4년(1355) *소재지: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1044-5번지 [설명] 이 비는 정몽주(1337-1392)선생의 출생지에 세운 유허비이다. 고려공민왕 4년(1355) 부친상을 당하여 묘소에서 3년상을 지내고 그 후 1365년 11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역시 묘소에서 3년상을 지냈다. 그의 지극한 효성이 조정에 보고되어 그의 출생지인 우항리에 ‘효자리’라 새긴 비가 영주(현 영천)수령 정유에 의해 공양왕 원년(1389)에 세워졌다. 조선 성종때 경상감사 손순효의 현몽에 의하여 잃었던 비를 땅 속에서 찾아내어 다시 세우고 비각도 함께 건립하였다. | |
*연대: 1553년(명종 8) *소재지: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462외 12필지 (면적: 9,299㎡) [설명] 1553년(명종 8) 영천시 임고면 고천리 부래산에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이후 1603년(선조 36)에 다시 지었으며, 이때 임금으로부터 이름을 하사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거되었다가 1965년 정몽주의 위패만을 봉안하여 복원하였고 2001년에는 황보인의 위패도 다시 배향하였다. 경내에는 묘우 표충사, 내삼문 유정문, 강당 흥문당, 정몽주신도비, 유물보호각 삼진각, 문루 영광루, 서재 함육재, 동재 수성재 등이 들어서 있다 | |
*연대:1923년 *소재지: 경북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626외 2필지 면적: 1,189㎡ [설명] 구한말(舊韓末)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 순국(殉國)한 산남의진(山南義陣) 대장(大將) 정환직(鄭煥直:1854∼1907)과 그 장남인 용기(1862~1907) 부자의 충효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1923년 건립한 것이다. 이 사당은 당시 전투에서 살아 남은 의사들이 정환직 부자의 애국정신과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검단동(檢丹洞)을 충효동(忠孝洞)으로 개칭하고 건립한 것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주위에 난간을 돌렸다. 1987년 보수·정화하였다. 정원에는 유허비가 있고 창구동 문화원 경내 조양각(朝陽閣) 앞에는 1963년 건립한 산남의진비가 있다 | |
*연대: 1777년(지정연도:1990년 8월 7일) *소재지:경북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768 (소유자:정현목) [설명]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천의병장으로 활약하여 전공을 세운 정세아와 아들 의번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777년(정조 1) 서재 뒤쪽에 충현사(忠賢祠)를 지어 배향하고 학문을 닦는 도장으로 사용하였다. | |
*연대:1640年창건 1700년대이후 중건(지정일:1990년 8월 7일) *소재지:영천시 대전동 7번지 [설명] 조선 중기의 문신 양계(暘溪) 정호인(鄭好仁)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이 지은 정사로, 정호인과 그의 아우 어봉(魚峰) 정호문(鄭好問)이 함께 학문을 닦고 공부하던 곳이다. 1640年에 창건되고 그후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중건하였다는 중재(中齋) 이호대(李好大)가 쓴 중건기문이 있다. |
*연대:1779년(정조 3)중건 *소재지:경북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203-2 [설명] 임진왜란 때 영천의병장으로 활약한 정세아(鄭世雅:1535~1612)의 현손인 정석달(鄭碩達:1660~1720)이 1702년(숙종 28) 학문을 토론하고 연구하기 위해 소재(小齋)를 지은 것이 안락재(安樂齋)이다. 그후 1779년(정조 3) 손자인 정일찬(鄭一鑽:1724~1797)이 중건하여 함계정사라고 하였다. 정석달의 본관은 오천(烏川)·자는 함계(涵溪)이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제자로서 인품과 덕망이 높았으며,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과 학문을 강론하면서 일생을 보낸 성리학자로 저서에 《가례고증(架禮考證)》이 있다. | |
*연대:1614년(광해군 6) 지정일: 2007. 4. 30. *소재지:영천시 성내동 9-2 숭렬당 내 [설명] 이 현판은 이 현판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인 복재(復齋) 정담(鄭湛, 1552∼1634)이 1614년(광해군 6)에 從高祖인 정종소(鄭從韶)의 榮川(오늘의 영주) 향규(鄕規)를 참고하여 작성하였으며 가로 126㎝, 세로 32.5㎝의 크기로 총 1,091자가 음각되어 있다. 향규는 전문과 규약 10조 및 후기(後記)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17세기 초 영천 사림이 전란 후의 사회기강을 확립하려는 의도를 집약하고 있으며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조선시대 향촌사회가 변화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고려하여 文化財資料로 지정되었다 | |
*연대:미상(최근에 다시 지었음) *소재지:영천시 금호읍 원제리(고수곡) [설명] 판서공 정광후(鄭光厚)의 배위인 익양군부인(益陽君夫人) 이씨(李氏)와 큰아들 사정공(司正公) 정위(鄭瑋) 부부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하여 건립된 재사이다.재사는 정면 4칸, 측면 1칸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인데 주위에는 방형의 블럭 담장을 두른 후 전면에는 사주문을 세워 재사로 출입하게 하였으며 마당 우측에는 삼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인 숙수당(菽水堂)을 배치하였다. 평면은 2칸 규모의 마루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식 연접시킨 후 전면에는 반칸 규모의 퇴간을 두었으며 대청의 전면에는 각 칸마다 사분 합문을 설치하여 마루방을 이루게 하였다. | |
*연대:1974년 *소재지:영천시 화산면 당지리(당지리 신화저수지 아래 소재 [설명] 지암정은 조선 선조때 수직으로 가선대부를 제수받은 지암(芝庵) 정호현(鄭好賢)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정자이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팔작기와집인데 주위에는 방형의 블럭담장을 둘렀으며 우측담장 사이에는 철대문을 설치하여 정자로 출입케 하였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연접시킨 후 전면에는 반칸 규모의 퇴간을 두었다. 가구는 오량가의 소로수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참고)정호현(1635. 11. 10.~1717. 2. 16. 세계도에는 운현으로 되어 있음) | |
*연대 :1764년(1923년 중건) *소재지 : 화북면 횡계리 457-3 [설명] 횡계서당은 조선 영조때의 학자인 훈수 정만양과 지수 정규양 형제를 향사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당이다. 서당은 강당과 동재가 "ㄱ" 자 형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전면 계곡쪽에는 모고헌(경북 유형 제271호)이 자리잡고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2칸 규모의 팔작기와지붕이다. 평면은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연접시켰는데 대청의 전면에는 각 칸마다 삼분합문을 설치하였으며 주위에는 쪽마루를 설치하였다. 가구는 오량가의 소로수장집이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 |
*연대 : 1614년 *소재지 : 영천시 화남면 사천리 (대구-포항 고속도로 북영천 ic 에서 청송방면 1km 지점 도로변 우측) [설명] 조선시대 효자인 정억(鄭嶷)의 효행을 칭송하기 위하여 건립한 효자각이다. 정억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지성으로 모셨는데 아버지 상을 당하자 임진왜란의 병란속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의례를 행하니 왜군들도 손을 맞잡고 경의를 표하였다고 하며 여막살이 중에는 호랑이도 감응하여 여막앞에 노루를 잡아놓기도 하였다 한다. 정려각은 단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인데 비각의 4면에는 홍살을 세워 내부의 비를 볼 수 있게 하였으며 비각의 뒤에는 3칸 규모의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참고: 정억( 2파 설천공 문중 17세) | |
*연대 : 1975년 *소재지: 영천시 화남면 안천리 [설명] 봉릉재는 조선 인조때 학자로 성현찰방을 역임한 溪菴 鄭克讓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재사이다. 재사는 정면 5칸 반,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 기와지붕인데 주위에는 붉은 벽돌로 방형의 담장을 둘렀으며 전면에는 2짝 철대문을 달아 재사로 출입케 하였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온돌방 2칸을 우측에는 온돌방 1칸과 반칸 규모의 퇴간을 연접시킨 후 전면에는 반칸 규모의 퇴간을 두었으며 퇴간의 전면에는 유리창문을 설치하였다. 주) 정극량(1632-1690) : 2파 화은공 차성의 5세손(19세) | |
*연대:미상 *소재지: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설명] 부영재는 정시희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하여 건립한 재사로 자양면사무소 옆에 위치하고 있다. 재사는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 기와집인데 평면은 좌로부터 부엌, 온돌방, 대청을 연접시켰는데, 대청의 전면에는 2짝 세살문을 설치하여 마루방을 아루게 하였으며 온돌방과 마루방의 전면에는 쪽마루를 내어 달았고 가구는 삼량가의 홑처마 지붕이다. 주)정시희(1639-1706): 2파 선무랑 차근의 5세손(19세), 삼휴공 호신의 2자 | |
*연대: *소재지: 영천시 청통면 계지리(망지동) [설명] 정치소(鄭致韶 12세 1400년경-)는 생원 문예의 넷째 아들로 영천시 대전동에서 태어났다. 국조 문과 방목에 의하면 세조8년(1462년), 식년시 정과에 합격하여 禮曹佐郞을 지냈다. 일찍 김종직선생과 교유했으며 공이 벼슬을 그만 두고 향리에 돌아올제 김선생이 시 이절을 읊어 석별의 정을 못내 아쉬워하며 그 첫편에「천리 고향 어머님 계시는 봄에 그대는 이제 자유로운 한가한 몸을 지었구나」이편 끝 편에 「나 또한 서책(書冊)을 묶어서 이로 쫓아 갈지니, 강호풍월에 옛 친구를 기다리게」하였으니 공의 문장, 행의(行義)를 가히 상상하겠다. 세거지는 북안 도천이며, 묘는 영천시 청통면 계지리(망지동) 산10번지 와곡지 안에 배위 仁同張氏와 함께 있으며, 묘소 아래에 1994년에 지은 지강재가 있고 비문은 14세손 치주가 지었다. | |
*연대: *소재지: [설명] 정석달(20세 1660-1720)이란 이름에는 함계정사가 떠오르나 함계정은 학문을 토론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고 추원당은 선생의 묘소가 있는 신방리에 소재하며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세워졌다. 정자는 정면4칸, 측면1칸 규모의 맛배기와지붕이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축에 온돌방 1칸, 우측에 온돌방 2칸을 각각 연접시킨후 전면에는 쪽마루를 설치하였는데 대청의 전면에는 사분합문을 설치하여 마루방을 이루게 하였다.가구는 삼량가의 장혀수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함계공의 장자가 매산 정중기이다. | |
*연대: 1830년경 *소재지: 영천시 자양면 신방리 966 [설명] 취성당은 조선 인조때 학자인 정시간(19대 鄭時衎 1635-1690)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인데 주위에는 기와를 얹은 돌담을 둘렀으며 전면에는 일각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케 하였다. 평면은 좌측에 온돌방 2칸을 두고 우측에는 마루방 1칸을 연접시켰는데 건물의 좌우측에는 반칸 규모의 퇴간을 달아내었으며 전후면에는 쪽마루를 설치하였다. 지붕은 가운데 3칸에는 맞배지붕을 올릳고 양측면의 퇴간 상부에는 가적지붕을 설치하였다. 가구는 삼량가의 장혀수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 |
*연대:1974년 *소새지:영천시 자양면 용산리 [설명] 용강정은 조선 숙종때 학자인 월송재(月松齋) 정석임(20세 鄭碩臨 1669-1739)과아들 인재 정중직(鄭重稷 21세 1694-1765)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인데 정면 3칸, 평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지붕인데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 담장을 둘렀으며,전면에는 반칸 규모의 퇴간을 두었는데 대청의 전면에는 사분합문을 설치하여 마루방을 이루게 하였으며,양 측면에는 쪽마루를 달았다. | |
본자료는 Daum 커뮤니티 "영일정씨 영천화수회"의 정상용종인께서 편집한 자료를 옮겨왔읍니다.
우리 영일정씨 건물유적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지역으로서
우리영일정문의 영광일 뿐아니라 우리나라 씨족사 연구에도 소중한 가치를 지닌 보물이라고 사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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