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깨달았다란
인간 생각에 상대가 모르는것을
내가 알게 되었다라는 것이며,
자연의 기준에서는
지극히 정상으로 되었다는 말이다.
어떻게~ 하다보니
볼 수 없는 전체 속에서
아주 쬐끔 찾을 수 있게 되어
써 먹는 게 현재의 과학이기도 하다.
인간 몸기계의 수명이 다하는 한,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이어야 하며,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해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며,
에누리도 없다는 말이며,
완벽하게 돌아가는 시스템 속에 있다는 말이다.
이 세상 모든 삼라만상은
지극히 정상적으로 작동되어왔으며,
그렇게 나타나고 있으며, 그렇게 되고 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고,
사랑에서 사랑으로 전해지는 것이라고
말은 잘 하면서,
작동되는 몸의 시스템과 근본 이치를 모르고
직접 몸과 마음으로 체득이 안되니,
모르는 글귀를 자꾸 외우거나 써면서,
뭘 돌리거나 두드리면서
자기의식 속에 자기체면을 건다.
(개체나 집단 귀신들림)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올 법한 주문을
아직도 써 먹고 있다.
근데 그게 가능하기도 하다.
그것도 역시 자연의 이치로 돌아가기때문이다.
그것의 진위여부는
본인은 잘 알 수는 없으나,
삼자가 보면 바로 알아차릴 수도 있다.
결과는 반드시 모두 다 내탓으로
돌아온다는 사실과 현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인간이 깨달아야하는 이유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면
한평생 기도하고 진심으로 믿는다지만
자칫 허상과 착각,
무지와 욕심만 비추어지기 쉽게 된다.
부처님 하느님은
기도한다고해서 복을 주시고,
아픈 사람 낫게 해 주시는 분도 더더욱 아니시다.
줄 이유도, 명분도 없기때문이다.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내가 있기에
나와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기에
각자가 만들게 되는 것이며,
각자가 해결해야 하며,
전부 자기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뭘 두드리고, 주문을 외우면서
복을 달라, 일이 풀리게 해달라,
아프지않게 해달라 함은,
지독한 "인간의 무지와 욕심"일 뿐이다.
부처님하느님 따르는 길과 정반대의 길에서 서서
기도하면서 한평생 최선을 다하는 모양새가 된다.
죽은 자나 산 자나 다 하늘의 것이며,
물이나 돌. 나무나 동물
모두 다 자연의 기준에서는
그 무게가 다 똑같다.
인간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나타나든
자연은 있는 그대로이며, 말이 없다.
전부 다 내가 만들고,
내가 그 안에서 뒹글다
몸기계의 수명이 다하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서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든,
우리가 알 수없고 보이지 않는
그 어떤 이유가 있기에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이며,
그렇게 되도록 가고 있다.
그게 하늘의 법도고, 계획이다.
자연이 순리라서
거기에 순응하면 된다.
사이비는
자꾸 자기에게 오라고 하고,
자기를 믿으라, 따르라, 자기말을 들어라,
돈을 내고 자꾸 뭘 해라고 주문을 한다.
최고의 사이비는
항상 완벽하고 박식한 이론 속에 있기에
가진 자나 지식인들이,
각자의 무지와 욕심으로,
오히려 더 잘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삶의 바른길에서
일상생활 속 진리란
지극히 상식적이며, 간단하며, 복잡지않다.
사이비가 최고의 군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들과 상황들을
내가 이해할 수 있고, 나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것이 가능할 때
이제 인간 삶 속에 비교적 정상이 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모든 것들은 일상생활 속 상식에
잦대를 두면 거의 정확하다.
즉 새빨간 거짓말과 사이비의 허상이
눈에 보인다는 것이며,
그때가 되면
알고도 거짓말 속에 함께 줄을 설 수도 있고,
내가 피해갈 수도 있다.
알면 종이 한 장 차이다.
모르면 평생가도 모르며,
하늘 땅만큼 차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온 궁극적 목적을 모르니,
죽을 때 가져갈 게 없는 것으로 깨닫게 되니
결국 갈 때 밥공기와 숟가락만 남기려한다.
때로는 인간의 삶 자체가
비극적이라고 하고, 고에 빠져있다고도 한다.
인간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어놓고
하느님 탓을 하는 것이 된다.
인간 몸기계는
두 가지 시스템으로, 즉 좋고 나쁨, 사랑과 미움 등으로
만들어져 작동되고 있다.
인간의 삶의 본질 자체가
비극적이니 고에 빠졌니 하는 것들은
여전히 인간 몸 시스템을 모른다는 것이며,
자기 우물 속에 갇혀서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 놓고
자기 탓임에도 남을 탓하는 것과 진배없는 것이다.
그래도 요즘은 앉아서 죽는다는 사람
안보이니 다행일까.
그것은 인간 최고의 무지와 욕심만
쌓다 가는 것 뿐이 안된다.
인간이 아무리 깨달아가면서 최선을 다하나,
자기우물 속에 갇혀 있다면
한평생을 다 바쳐봐도
자기 욕심과 무지만 보이게 된다.
부처님하느님의 가르침은
생활 속 실천에서
스스로 절이 되고,
교회가 되는 것이다.
의식이 한참 뒤쳐진 빈곤한 나라에 갈수록
인간의 무지와 욕심이 만들어내는
여러가지 상황을 쉽게 접한다.
절이나 교회의 크기나 불상의 크기,
불상에 금딱지 붙히는 등이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마음의 절과 교회를 스스로 키울 수 있어야
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베풀어가면서
잘 살수 있으며,
죽어서도 좋은 성적을 가지고,
다음 여정을 위한 좀 더 좋은 티켓이 주어진다.
전부 다 자동이다.
시스템이 그렇게 돌아간다는 것이며.
그렇게 프로그램화 되어 있다는 말이다.
사는 동안
내가 나타내는 "한 자락의 마음"이
인간 삶의 핵심이고 요체다.
즉 "마음심보"에 달렸다.
그것을 몸으로 알게 되어
육체의 나와 마음의 나를
바른 길로 몰고 갈 수 있게 되어서야
비로소,
화가 좀 나더라도,
좀 불편해도,
좀 어렵고 힘이 들어도
결국 모든 게 내 탓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에 이른다.
그게 생각을 바꾸어야
내가 산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상대를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마음가짐의 시작이 되며
그게 깨달아가는 삶의 기본바탕이 된다.
즉 무지와 욕심 속에 빠질 수 있는
새빨간 거짓말과 허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올바르게 직시할 수있게 된다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