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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로 명문이란 소리를 듣는 우리 가문이 왜놈의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이어간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다 하겠습니까.
그리하여 우리 형제는 당연히 죽고 사는 것을 따지지 말고 나이 든 이와 젊은 이,어린이들을 인솔하여 중국으로 망명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식구들을 먼저 옮기고 나서 나는 동지들과 상의하여 국경 부근에 흩어져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모으려 합니다.
그리하여 먼 훗날 하늘이 우리를 도와 왜적이 파멸하고 조국이 광복되도록 목숨을 비칠 것입니다.이것이 대한의 민족 된 사람의
신분이요,또한 왜적과 피 흘리며 싸운 백사 이항복 공의 후손된 도리라고 믿습니다.원컨대 형님들과 아우님들은 제 뜻에 거스름이
없으시다면 우리 형제 모두 날을 잡아 하루라도 빨리 떠났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세","형님.그렇게 하십시다." "그럼 각자 재산을 처분하는 대로 떠나기로 합시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삼한갑족(三韓甲族)의 명문가 여섯 형제들은 네째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의
비장어린 호소에 일제히 동의를 한다.누구 하나 머뭇거림 없었다.모두가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고 흔쾌히 동의한 것이다.
첫째 이건영(李健榮·1853~1940), 둘째 이석영(李石榮·1855~1934), 셋째 이철영(李哲榮· 1863~1925),
넷째 이회영(李會榮· 1867~1932), 다섯째 이시영(李始榮·1869~1953), 여섯째 이호영(李頀榮·1875~1933).
이렇게 6형제들은 왜에게 강탈당한 대한제국을 되찾기 위해 만주로 망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6형제의 우애도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제자인 이관직(李觀稙)의 다음 증언이 이 사실을 짐작케 한다.
"선생의 집안은 6형제로 번성한 가족이었다. 형제 모두가 화합하고 즐거워하여 그 형제간의 우애가
마치 악기를 서로 맞춰 연주하듯 즐거웠고, 산앵두나무의 만개한 꽃과 같이 화사하였으니,
온 집안이 즐거운 기운이 가득 찼고 형제간의 우애의 소문이 온 서울시내에서 으뜸이었다.”
"우당 형제들은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여섯 형제의 절의는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월남 이상재
KEB하나은행 동쪽 '명동 우당길' 입구이다.삼한갑족이라고 존경 받아온 우당 이회영의 저택이 있던 곳이라 '우당길'이란다.
YWCA 주차장 일대가 우당 이회영의 저택이 있던 곳이다.그곳에 우당 이회영의 동상과 집터 표석이 자리하고 있다.
명문가의 여섯 형제들은 모두 가산을 정리하는데 나섰다.적지 않은 이들의 가산이었다.물론 이 저택도 서둘러 처분했다.
이 집은 육당 최남선(1890~1957)에게 넘어간다.우당 이회영이 육당 최남선을 상당히 아낀 나머지 집을 헐값에 팔았다.
집안 대대로 내려온 수많은 고서들도 육당 최남선에게 모두 주었다고 전한다.
이회영 형제가 재산을 정리해 마련한 자금은 40만 냥이었다고 한다.당시 쌀 한 섬이 3원이었다.
2000년대 쌀값 기준으로 600억원이나 되는 거금이었다.참고로 당시 서울역 역사를 짓는데 180만 냥이 들었다고 한다.
이들 형제가 이렇게 거금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둘째 이석영의 동참이 결정적이었다.
“우리 시숙 영석장(이석영)은 우당 둘째 종씨인데 백부 이유원 댁으로 양자가셨다. 양가 재산을 가지고 생가 아우들과 뜻이
합하셔서 만여 석 재산과 가옥을 방매해 가지고 경술년 12월 30일에 대소가가 압록강을 넘었다.”
“세상에 우리 시숙 같으신 분은 금세에 없으신 분이지만 어느 누가 알리오.”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여사의 <서간도 시종기>에서
그는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귤산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갔다.이유원은 우당 이회영의 방계 숙부다.
이유원는 양주에서 서울까지 80리 길을 남의 논두렁이나 밭두렁을 밟지 않고도 서울까지 올 수 있었을 정도로 재산이 막대했다.
1910년 12월, 이회영 혛제 일가는 마침내 국경을 넘어 만주 땅으로 들어간다,
이회영이 서른 살 때 <독립신문> 사설을 보고 가슴이 끓어올라 지은 시(詩)다.
세상에 풍운은 많아 일고
해와 달은 사람을 급히 몰아치는데
이 한 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할 것인가
어느새 벌써 서른 살이 되었으니
전 가족 40여 명과 기타 일꾼 등 총 60여 명이 1910년도 12월,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정든 고향 서울을 떠나 북으로 향했다.
신의주에 도착한 그들은 1911년 1월 영하 30-40 도의 극심한 추위에 마차 10대에 나눠타고 압록강을 건너 사방이 꽁꽁
얼어붙은 만주로 향했다.
60명 가운데는 데리고 있던 노비들도 일부 포함되었다. 진보적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이씨 형제들은 노비들에게도
반말을 하지 않고 ‘하소’를 했다고 한다.이들은 망명하기 전에 노비들이 각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신분해방을 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명의 노비들은 행동을 같이 하였다고 전해진다.
60명 대인원이 서울에서 만주로 갈 때 사용한 교통수단은 말이 끄는 마차였다고 한다. 마차는 12대였다.
우당 일가족이 두만강을 배로 건널 때도 일화를 남겼다고 한다.
두만강을 건네준 뱃사공에게 아주 후하게 뱃삯을 지불하였던 것. 뱃삯이 10원이었는데 그 두 배인 20원을 지불하였다.
그리고는 고마워 어쩔줄 몰라 하는 뱃사공에게 우당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게 고마워하지 말고 한 가지 일을 해 주시오.”
“무엇이든 해드리겠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일본 경찰이나 헌병에게 쫓기는 투사가 돈이 없어 헤엄쳐 강을 건너려 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배로 건너게 해주시오.”
“어른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제 힘이 닿는 한 독립군들을 배로 실어 나르겠습니다.”
그 두만강 뱃사공은 약속을 지켰다. 그 사실은 탈출하는 투사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우당 일가족이 정착한 곳은 서간도(西間島) 유하현(柳河縣)의 삼원보(三源堡)였다. 일제하 실향민의 터전이요,
독립운동의 전진기지는 그렇게 마련되었다.
삼원보 인근의 은양보(恩養堡)에는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였다.
자력으로 독립운동을 유지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일하고(耕), 한편 배우고(學),
한편으로 무장한다(武)는 3가지 원칙을 천명한 것이다.
그후 경학사는 재만주(在滿洲) 교민 자치기관 겸 항일 독립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망명지에서 이회영은 이동녕, 이상룡 등과 함께 이주동포들의 정착과 농업 지도를 돕기 위해 '경학사'라는 자치기구를 만들었다.
부설기관으로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도 설립했다. '신흥'이란 신민회의 '신(新)'자와 부흥을 의미하는 '흥(興)'자에서
따온 말이었다.
신흥강습소는 일제의 눈을 피하고 중국 당국의 양해를 얻기 위해 강습소라 불렀다.실제로는 독립군을
양성하는 곳이었고 후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됐다. 학교의 교주(校主)는 둘째 이석영이 맡았고
안동에서 온 석주 이상룡이 교장이 되었다.학생들을 가르칠 교수는 이동녕 윤기섭 이관직 여준 등이었다.
학비와 숙직은 모두 무료였다.우당 이회영 집안이 망명하면서 가지고 온 재산에서 충당되었다.
신흥무관학교는 청년들에게 군대 전술과 총기 사용, 게릴라 전술을 훈련시켰다.
1920년 폐교하기까지 10년간 약 3,000여 명의 항일 전사를 길러냈다.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김좌진과 이청천, 이범석 장군도 생도 혹은 교관으로 이곳을 거쳐갔다.
이들은 1920년 일어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1931년 만주사변 이후의 항일투쟁,
1940년 중경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활동 등 맹활약을 펼쳤다.
1905년 일본 군인들의 위협적인 포위 속에 중명전에서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우당 이회영은 이 치욕의 을사늑약을 좌시할 수 없었다.이회영은 이동녕 이상설 등과 함께 상소로 격렬한 항의를 했다.
그 늑약 체결 당시 외부 교섭국장으로 있던 다섯째 이시영은 항의 표시로 사표를 내고 관직을 떠났다.
우당 이회영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길은 무장투쟁 밖에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단군 조선과 고구려가 대국을 꾸려가던 만주에 무력항쟁의 기지를 마련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우당 이시영은 이상설과 이동녕과 함께 만주로 갔다.간도 용정에 머물면서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해 첫 기지를 마련한다.
귀국해서는 서울 상동교회 지하에서 전덕기 목사 양기탁 이동녕 등과 함께 신민회를 결성했다.
일제에 빼앗긴 이 나라의 독립전쟁을 위한 비밀조직 신민회를 결성한 것이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이회영은 고종에게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할 것을 제안했다.
일제의 침략성을 폭로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인 이상설을 특사로 추천했다.
'헤이그 특사 3인'(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러시아 공사관 서기 이위종)이 구성됐다.
그들은 가까스로 헤이그에 도착했지만 일제의 방해와 각국의 외면으로 회의 참석은 끝내 불발되고 말았다.
1918년, 이회영은 오세창, 한용운, 이상재 등과 은밀히 고종의 해외망명을 계획했다.
1919년 이회영은 고종을 베이징으로 망명시키기 위해, 조선을 찾았다.얼마 안돼서, 고종은 의문의 죽음을 맡게 된다.
고종을 중국으로 탈출시켜 독립운동에 가담하도록 하자는 구상이었으나 결국 실패하고만다,
곧이어 일어난 3.1운동으로 전국이 ‘만세’의 함성으로 들썩이던 그때, 이회영은 중국으로 두 번째 망명을 떠난다.
3.1만세운동은 해외망명인사들을 고무시켰고 각지에 흩어져있던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정부수립을 의논하기 위해 상하이로 모였다.
회의에는 이회영, 그리고 그의 동생인 이시영도 참가했다.
일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이회영의 형제와 가족들은 굶어 죽거나 병사하는 등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회영은 이상설, 이동녕과 함께 국외에 독립운동 근거지와 군대를 만들어 결정적인 시기에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 나라를
되찾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마흔이 되던 해, 가족들과 만주로 떠난 이회영은 만주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건설하는 일에 착수했다.
만주에 도착한 그는 함께 온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오늘부터 당신들은 종이 아니라 독립군'이라며 그들을 독립군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1925년 경 중국에서 독립운동 자금이 바닥이 나고, 모을 방법이 없어지자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은 자금을 마련하려고 국내로
잠입했다.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자금을 어렵게 마련해야 했다.
당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해 주다 발각되면 일본 경찰에 의해 목숨이 달아날 정도로 고문을 받아야했으므로 자금 모금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또한 이은숙은 공장에서 일하고, 때로는 유곽 기생들의 옷을 수선해주며 돈을 벌어 중국으로
자금을 보냈다. 자신은 한산 이씨 양반 사대부의 딸로 태어났고 남편은 조선 최고 귀족이며 갑부였다.
남편이 조국을 위한 독립운동으로 전 재산과 모든 것을 바쳤고 부인은 온갖 고생을 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
그녀는 남편과의 독립운동 생활을 <서간도 시종기>라는 책으로 저술하였다.
1932년 11월. 당시 중앙일보(中央日報) 사회면에 실린 3단짜리 기사가 피압박 한국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大連 水上署 留置中
怪! 縊死한 老人
배에서 나리자 경찰에 잡혀서 취조중
류치장 창살에 목매죽은 리상한 로인』
이같은 기사는 즉각 확인되지 않았다. 간악한 일경(日警)이 사실을 은폐,
『그 노인이 이회영(李會榮) 선생』이라는 당시 소문을 극구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후 이회영의 죽음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이회영이 유치장 안에서『빨랫줄로 목을 매어 자결했다』는 일경의 발표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고문에 의해 순국해 일제에 의해서 서둘러 화장까지
되었다.일(日)군국주의 서곡인 소위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난지 1년만의 일이다.
고통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별 하나를 잃고 땅을 치며 통곡했다.
이회영은 그간 대련수상경찰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1932년 11월 22일 동아일보는 “이회영씨는 상해를 떠나 모 방면으로 여행하다가 대련경찰서에
인치되어 취조 중에 별세했다는 부고가 장춘에 있는 씨의 친녀 이경숙씨에게 속달되었다”면서
장춘의 이경숙은 부고를 접하고 18일 밤 장춘발 열차로 대련으로 향했다 한다고 전하고 있다.
같은 신문은 이틀 후 “17일 오전 5시 20분 유치장에서 ‘삼로끈’으로 목을 매어 자결했다 한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공개된 중국측의 기록에는 이회영의 순국지가 대련 수상경찰서가
아니라 여순감옥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또한 이회영이 일본군이 점령한 만주로 간 이유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이회영의 아들 규창은 자서전에서 “(이규숙이) 안면을 확인할 때 선혈이 낭자하였고 따파오에도 선혈이 많이 묻어 있었다고 한다.”
면서 역시 일제에 의한 고문사임을 전하고 있다. 이회영은 11월 13일 대련수상경찰서에 체포되었고, 11월 17일 여순감옥에서
교형(絞刑:사망)당했다고 전하고 있다. 의용군 측에서는 자신들의 감옥 내 조직망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아낸 후 김효삼(金孝三)이
신경(新京)에 있던 이회영의 딸 이규숙에게 통보했다고 전한다.
1932년, 일본에 엄청난 충격을 준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모든 독립운동가들을 고무시키며 들끓게 하였다. 윤봉길 의사가 일본의 최고 사령관을 처단한 것이다.
이것은 이회영에게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66세의 이회영은 일본 관동군 사령관이 만주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사령관을 암살하기로 결심한다.이회영의 며느리 정문경씨가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젊은 분들이 만류를 하는데도 아버님이 나는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까.. 거기로 가서 내가 하던 일을 마저 끝을 맺어야겠다고
하시고 상하이에서 떠나셨죠.”그것은 최후의 사명을 띠고 가는 그의 마지막 여정이었다. 불행히도, 만주에서는 일제 지하조직이
정보를 입수하고 그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고 ‘따리앤 항’에서 이회영을 붙잡고 잔혹한 고문을 가했다.
결국, 우당 이회영은 안중근 의사가 교수형을 당한 그 자리서 똑같이 처형됐다. 나흘 동안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한마디도 발설하지 않고 끝내 순절하고 말았다.
다섯때 이시영 부통령
이회영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했던 형제들도 모두 비참하게 죽었다.
만주로 떠나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6형제 중 오직 살아남아 조국 땅을 밟은 분은 이시영 한 명 뿐이다.
맏형인 이건영과 그의 둘째 아들인 이규면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병사하였고,
둘째 형인 이석영은 중국 빈민가를 전전하다가 80세의 나이에 굶어 죽었다(餓死)고 한다.
셋째 형인 이철영은 신흥학교 교장을 맡아 일하다 병사하였고 넷째 이회영은 독립운동을 하다 모진 고문 끝에 숨을 거둔다.
막내였던 이호영 역시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3년 소식이 끊기며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형 회영에 비해 동생 시영은 일찍이 관직에 나가 젊은 나이에 촉망 받는 관료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시영은 김홍집(金弘集)의 딸과 결혼했다가 김씨가 죽자 반남(潘南) 박씨(朴氏)와 재혼했다.
그는 1885년에 증광(增廣) 생원시(生員試)에, 1891년에 증광 문과에 합격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16세 때 동몽교관(童夢敎官)으로 입사한 후 10년간 승진이 순조로워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승정원(承政院) 부승지(副承旨)·
궁내 참의 등을 역임했다. 1894년 나이 26세 때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나자, 이시영은 고종의 명을 받고 관전사(觀戰使)로
3개월간 요동반도에 파견되었다. 고종이 이시영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 것으로 보아 그는 상당한 국제적 식견을 가진 외교 관료로
신망을 받은 것 같다. 이시영은 전황을 시찰하고 돌아와 국왕에게 그 상황을 자세히 복명하였다. 중국의 육해군이 군인 수나
장비 및 무기 면에서 일본에 비해 우세하나, 명령 계통이나 통솔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고 개탄한 것으로 보아
그는 외교와 군사 방면에 나름의 식견과 통찰력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은 이승만, 내무총장에 안창호, 의정원 의장에는 이동녕이 자리했다.
이시영은 초대 법무 총장에 임명된다. 이시영은 몇몇 임정 요인들과 정부건립 정례를 행하고
조소앙, 남형우, 신익희 선생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 헌법인 10개조의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면서 임시정부 활동에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후에 이시영 선생은 재무총장에 선임되기도 했다.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고 임시정부의 활동을 하기에 재정을 조달하기 어려웠다.
이시영은 재무총장직을 맡으며 어려운 재정을 꾸려나가셨다고 한다.
임시정부 초기에 활동이 활발했던 이유가 바로 이시영 선생이 주선한 독립자금 모금운동의 결실이 좋았기 때문이라고도 전해진다.
이시영은 이처럼 30여년을 중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힘썼다. 그의 나이 77세가 되던 1945년 이시영 선생은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광복 소식을 접한다.
여섯 형제 중 유일하게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은 다섯째 이시영이었다.
그는 해방 후 초대 부통령까지 지냈다.이승만의 전횡에 반대하며 결국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이시영은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권력에 대한 야욕을 느끼고 사직서를 제출한다.
< 국민에게 고한다>라는 사직서에는 왜 그가 부통령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탐관오리는 도처에 발호하여 국민의 신앙을 실추하며 정부의 위신을 손상하고 신생 대한민국의 장래에 암영을
던져주고 있으니, 누가 참다운 애국자인지 흑백과 옥석을 가릴 수가 없게 되었으니,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한 나인지라 이번에 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이대통령에게 보좌를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며,
과거 3년 동안 아무런 공헌이 없었음을 사과하는 동시에 일개 포의(布衣)로 돌아가 국민과 더불어 고락과 생사를 같이하려 한다.
나 이시영은 본시 노치(老齒)인 데다가 무능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선량 여러분이 돈독한 중의를 모아 부통령으로 선출해 준 데
대해 과분하고 또 참괴한 일로 생각했으므로 사퇴할까 했으나 외람되게 대임을 맡았던 것이다. 취임 3년 동안에 아무런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시위(尸位)에 앉아 소찬(素餐)을 먹는 격에 지나지 못했으므로 이 자리를 물러나서 국민 앞에 무위무능함을
사과함이 도리인 줄 생각되어 사표를 내는 것이다. 선량 여러분에게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국정감사를 더욱 철저히 하여
이도(吏道)에 어긋난 관료들을 적발·규탄하되, 모든 부정사건에 적극적 조치를 취해 국민의 의혹을 석연히 풀어주기 바란다.”
제2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입후보, 낙선했다.1953년 4월 17일, 부산광역시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서울 정릉에 묻혔다가 뒤에 수유리 북한산 기슭에 이장됐다.
그는 해방 이후 원래 이시영 가문의 중구 저동 땅 2만 평을 찾게 해주겠다는 이승만의 말에 “내 땅 찾으려고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라는 말로 거절 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었다.
조선 중기의 명신 백사 이항복(1556∼1618)이 살던 필운대(弼雲臺)이다.'필운'은 그의 호이다.
서울 종로구 필운동의 배화여자고등학교 뒤뜰에 있는 큰 암벽 주위가 필운대다.
고려말의 대학자 익재 이제현의 후손이며 참찬 이몽량(1499∼1564)의 아들이다.
그는 오성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세간에서 흔히 '오성대감'이라 불렀다.
특히 죽마고우인 한음 이덕형(1561∼1613)과의 기지와 작희(作戱)에 얽힌 일화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항복은 권율(權慄·1537∼1599) 장군의 딸과 결혼했다.
권율 장군과의 감나무 일화는 유명하다.그의 인연으로 그의 사위가 된다.
이항복의 집 마당의 감나무가 이웃해 있던 권율 장군의 마당으로 가지를 뻗자
세도 등등했던 그 집 하인들이 허락도 없이 감을 따 갔다.
이에 이항복이 권율이 기거하는 방문에 창호지를 뚫고
‘이 팔이 누구의 것입니까?’라고 물으니
장군은 ‘당연히 네 것이 아니냐?’라고 답했다.
다시 이항복이 ‘저 마당의 감나무는 누구의 것입니까?’라고 물으니
장군은 ‘그것도 당연히 네 것이 아니냐?’라며 소년의 재치에 탄복했다고 한다.
"항복은 호걸스럽고 시원한 성품에 넓은 아량과 풍도(風度)가 있었다.
젊어서는 이덕형과 나란히 이름을 날렸으며 문학으로 두 분이 함께 진출하여 현달했다.
정철은 항상 상서로운 기린과 봉과 같은 사람이라고 칭했다."
광해군 일기에 나타난 백사 이항복이다.이항복은 말년에 크나큰 어려움을 맞이하였다.
그는 1617년 이이첨등 광해군 주변인물이 주도한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 반대했다.
이복형제인 영창대군을 죽이는 등 폭정을 일삼던 광해군에 맞섰던 그였다.
이항복은 결국 1618년 삭탈관직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당시 63세의 노 정승이던 백사 이항복이 귀양길에 오른 당시 철령을 넘으며
읊은 시는 지금까지도 신하의 충정을 담은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철령 높은 고개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외로운 신하의 원통한 눈물을 비삼아 띄워다가
임계신 구중궁궐에 뿌려본들 어떠하리"
이항복은 귀양지 함경도 북청에서 5개월 만에 병사한다.
이항복은 사후에 복관되고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평생을 학문에 힘쓰고 왜란 시에는 5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임금의 신임을 받았고,
전란 후에도 수습에 힘썼던 그의 공이 인정받은 것이다.
암벽 가운데 새겨진 시구는 이항복의 9대손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고종 10년(1873) 이곳에 들러
조상의 자취를 보고 느낌을 적은 것이라고 한다.이유원의 장기인 예서(隸書)로 새겨져 있다. 현대적인 의미로 풀이한 그의 글이다.
" 아조구거후예심 (我祖舊居後裔尋 )
우리 할아버지 옛날 살던 집을 후손이 찾았는 데
창송석벽백운심 (蒼松石壁白雲深)
푸른 돌벽에는 흰 구름이 깊이 잠겼도다
유풍부진백년구 (遺風不盡百年久)
끼쳐진 풍속이 백년토록 오래 전했으니
부로의관고역금 (父老衣冠古亦今)
부로의 의복과 모자가 옛날과 같다.
계유월성이유원제백사선생필운대
(癸酉月城 李裕元 題白沙先生弼雲臺)"
이유원은 고종때 영의정과 이조판서를 지냈다.이항복으로부터 이유원까지 8명의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이다.
이유원의 싯귀 옆 바위에는 가객 박효관(朴孝寬·1800∼1881무렵)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계유감동(癸酉監董)’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옆에는 동추(同樞) 박효관(朴孝寬) 를 비롯한 10명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이때 이 공사를 맡거나 감독한 인사들의 명단이다.박효관은 필운대에서 시·술·노래·거문고·바둑을 즐기면서 살다간 당대의
명가객으로 분재에도 일가견을 가졌다.
이항복은 율곡이 성균관에서 길러낸 인물이다.
율곡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나라의 동량이 될 것'이라며 선조에게 추천한 이항복이다.
그는 임진왜란 7년 동안 선조를 모시며 각종 외교를 성사시켜 전란을 극복하는데 탁월한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를 모시고 호종길에 나선 이항복은 37세로서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도승지였다.
원병을 위해 명나라로 간 이덕형의 외교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마침내 4만의 원군을 끌고 조선으로 왔을 때
이항복은 이들을 맞이하는 접빈사가 되었다. 먼 조선까지 행군을 하느라 피곤했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그의 군사들은
적당히 봐서 싸움을 하는 척만 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려했지 크게 싸울 의사가 없었다.
그런 마음을 읽은 이항복은 일부러 고춧가루를 싼 수건을 눈에 대고 문질러 눈물을 흘리며 조선의 다급함을 호소하여
명군을 감동시켰다. 이항복은 10여 년 전에 ‘섧지 않은 울음에는 고춧가루 싼 주머니가 좋다’고 화두처럼 율곡 이이가
남겼던 말의 의미를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호종했고 명군에게 도움을 청할 것을 적극 건의이다.
명군과의 교섭에서 능란한 외교를 벌였던 인물이다.선조가 왜군을 쫓겨 신의주에서 명나라로 가려할 때
압록강변에서 선조의 못자락을 붙들고 만류한 도승지 백사의 일화는 유명하다.
난리 후 우의정을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선정되었다.
10대조 백사 이항복 이래 6명의 정승과 2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조선 최대의 명문 거족이었다.
"우리나라에 내로라 하는 집안이 수없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우당 집안은 세간에서 ‘삼한갑족’이라고 일컬어졌다.
조선의 경반(京班:서울에 거주하는 양반)과 향반(鄕班:시골에 거주하는 양반)을 통틀어 최고 명문가라는 평가를 받았던 집안이다.
명문 중에서도 명문이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간단하게 그 이유를 말한다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 이래 10명의 재상을 배출하였기 때문이다.
9명의 영의정(4명의 贈領議政 포함)과 1명의 좌의정이 바로 그들이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때 우당의 동생인 성재 이시영이
부통령을 지냈으니 성재까지 영의정급에 포함시키면 도합 11명의 재상급 인물이 한 집안에서 배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당 집안은 실로 재상의 집안이었던 것이다.
경주(慶州) 이씨(李氏) 백사공파(白沙公派)인 우당 집안에는‘상신록’(相臣錄)이라고 하는 독특한 이름의 책자가 있다.
한국의 다른 집안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문건이다. 이 집안 후손들 가운데 재상을 지낸 사람들의 행장만 모아 놓은 책이다.
‘상신록’이라는 이름의 책자를 만들 수 있는 자격은 그 집안에서 재상을 10명 이상 배출시켜야만 한다.
10명 미만은 만들 수 없다고 한다. 한 집안에서 재상이 1~2명만 나와도 대단한 영광인데 10명이나 나왔으니
대단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상신록을 보유할 수 있는 집안은 우리나라에서 경주 이씨 백사공파가 유일하다는 이야기를
필자는 이 집안 종친회장으로부터 들은 바 있다.
조선시대의 재상은 아무나 하는 자리가 아니다. 학식과 인품을 검증받아야 갈 수 있는 자리가 재상 자리다.
조선시대 중급 관리까지는 연줄 따라서 또는 뇌물을 주면 가능했는지 모르지만,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는
재상 자리는 연줄이나 돈으로 어영부영 올라갈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고 보인다. 한 마디로 학식과 능력이 없는 사람이
갈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월간중앙 2003년 3월호 [한국의 名家]경주이씨백사공파(白沙公派)에서
서울 종로구 수송동 옛 각황사 터에 '신흥대학 터' 표석이 있다.여기에서 신흥대학이 출발하였음을 알리고 있다.
1945년 우당 일가가 압록강을 건넌 지 35년 뒤, 꿈에 그리던 해방을 맞았다.
하지만 이들 형제들 중 해방 후 조국 땅을 밟은 이는 부통령을 지낸 5남 이시영 뿐이었다.
이시영은 해방이 되자 국내로 돌아와 신흥무관학교의 재건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미군정 아래서 미흡한 일제 청산과 민족정통성의 회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족교육이 필요한 시기였다.
따라서 이시영은 '신흥무관학교 부활위원회'를 조직하고 1947년 2월, 신흥무관학교의 교명(校名)을 그대로 이어받아
민족교육의 상징인 신흥전문학원(新興專門學院)을 설립한다.
그리고 그해 7월 19일에는 신흥무관학교 선배들이 학교가 있던 각황사 터 (종로구 수송동)에서 모임을 가지며, 신흥전문학원이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하였음을 내외적으로 천명했다.이후 신흥전문학원은 1949년 2월 15일 재단법인 성재학원 신흥대학(新興大學)으로 인가받고 1949년 7월과 1950년 5월에 각각 1 · 2회 졸업생을 배출한다.
조국 독립을 위해 모든 가산과 열정을 바쳤던 성재학원의 신흥대학은 한국전쟁이라는 혼란기에 경영난을 겪는다.
1951년 5월 18일 조영식이 신흥대학을 인수하고 1960년 3월 경희대학교(慶熙大學校)로 교명을 바꾸게 된다.
조영식은 서울고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당시 서울고 교사가 조선의 정궁 경희궁 안에 있었다.
조영식은 '흥성(興盛)에 기뻐하다(慶)'는 뜻의 '경희(慶熙)'라는 어휘가 기존의 대학명인 '신흥(新興)'과도 그 뜻이
일맥상통하고, 이름이 세련되고 아카데믹한 이미지가 있다고 생각해, 당시 상회나 식당 이름 등으로 흔하게 쓰이던
'신흥(新興)'이란 교명을 '경희(慶熙)'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경희궁(慶熙宮)'이 정궁이었던 영조와 정조 때에는 우리 역사상 문물이 가장 융성한 시기였다고 평가된다.
그 '경희慶熙)가 학술과 문화의 전통을 길이 보존하고 창조해 나가야할 대학의 이름으로 역사적 의미가 충분히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