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놀뫼신문
2022-07-25
전광정(全光正, 82세) 교장선생님의 삶과 꿈(1)
주민들과 동고동락한 섬마을 선생님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선생~님....”
1960-70년대를 살았던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도 따라부를 수 있는 국민가요인 이미자의 섬마을선생님. 문희와 오영일 그리고 김희갑이 나온 영화로도 제작되어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았었다. 그래서 우리는 ‘섬마을’ 하면 ‘총각선생님’이 떠오른다. 총각은 아니지만 충남 보령시 오천면 효자도라는 섬마을에 가족을 이끌고 들어가 그곳 분교에서 학생들과 그리고 주민들과 수년간 함께 생활하며 겪은 전광정 선생님의 재미난 이야기를 직접 들어본다.
(효자도선착장전경(2014년11월촬영)_출처 보령시청)
대천 앞바다 효자분교로 발령
1985년 3월 1일 이른 아침, 대전에서 직행버스를 타고 대천에 도착하여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도착한 대천어항은 바닷바람이 쌀쌀했지만 항구에서 멀리 바라본 탁 트인 푸른 바다는 가슴을 시원하게 했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여객 중에는 녹도, 호도로 가는 교사들과 원산도 광명국민학교로 부임하러 가는 교감선생님도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여객선에 올라 40여분 바닷길을 헤쳐 원산도 선촌 선착장에 하선하였다. 20여분을 걸어서 교사로서 마지막 근무지인 광명국민학교에 도착하였다.
교무주임에 의하면 광명국민학교는 본교 7학급, 효자분교장 3학급, 추도분교장 2학급, 월도분교장 2학급 총 14학급의 규모였다. 분교장에는 주임교사를 임명하여 분교장 교내장학지도를 하게 하고, 예산도 별도로 배부하였다. 학교장은 한 학기에 1~2회씩 분교장을 방문하여 현장장학지도를 하였다. 대천교육청에서는 ‘광명호’라는 장학선을 직할 운영하여 추도분교장과 월도분교장에 인근 섬 학생들을 등하교시키고 있었다.
해 질 녘에 나는 효자분교장 주임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효자도는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속으로 서쪽에 0,8km의 좁은 수로를 끼고 원산도가 있고 북쪽으로 약 2km 거리에 안면도 남단인 고남리의 영목포구가 있다. 예부터 효자가 많이 살아 효자도라 이름 붙여진 작은 섬이다.
나는 대전에서 온 젊은 교사와 여교사와 함께 私船(사선)을 대절하여 원산도에서 500여 미터 떨어진 효자도 선착장에 도착하였다. 마중 나온 학부모 회장의 안내로 학부모들이 기다리는 방에 들어가 보니 해물 반찬을 푸짐하게 차린 저녁상을 차려놓고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자모회장은 “사모님도 같이 와서 사시게 되나요?”하고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하였더니 “우리 학교에 사모님과 함께 이사 오시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라며 손뼉을 치며 모두들 좋아했다.
그동안 분교장 주임교사들은 토요일에 육지에 있는 집으로 귀가하였다가 월요일 아침 배로 출근하고, 혹 월요일에 폭풍경보가 내릴 때면 대천어항 여인숙에서 하루 이틀씩 묵었다가 들어오는 때도 있었다고 했다. 저녁상을 물리고 깜깜한 밤길을 학교 기능직 신형우씨의 안내를 받아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분교장 관사를 찾아가서 첫날밤 잠을 청했다.
가족들과 함께 시작한 섬마을 생활
이튿날부터 전교생 31명의 학생들을 맞은 교사 3명은 이제 ‘섬마을선생’이 되었다. 교사들은 3개 교실에서 각각 인접 2개 학년 복식수업을 시작했다. 처음 경험하는 복식수업이라 당황해하면서 선행 연구를 참고하여 복식 교육과정 편성 운영, 복식 교수-학습 방법 등 복식학급 운영에 대하여 동료들과 함께 연수하고 지도계획을 수립하여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한글 미해독자와 연산능력 부진아들을 지도하는 것이 제1순위 과제였다. 그래서 교사들은 방과 후 학습부진아 지도에 집중 노력하였다.
좁은 교무실 1실, 3개 교실, 작은 도서실, 창고 1동과 몹시 낡은 관사 두 동에 세 가구가 살도록 마련되어 있었다. 관사 천장에서는 가끔 한밤중에 커다란 지네가 이불 위에 뚝뚝 떨어져 깜짝깜짝 놀라곤 하였다. 한 달여 동안 혼자 자취를 했는데, 어느 날 연탄가스가 새어 들어와 가스 중독으로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하였다. 즉시 교육청에 관사 보수비를 요청하였고 그 후 학부형들의 도움으로 관사를 수리하였다.
첫 딸아이를 대전에서 유치원을 보내겠다고 완강히 우기는 아내를 간신히 설득하여 네 살짜리 아들과 함께 데려온 것은 부임하고 한 달 반 뒤의 일이었다. 도시에서 자란 아내는 틈틈이 관사 주변의 땅을 일구어 각종 채소 씨앗을 뿌리고 새싹이 자라는 것을 매우 신기해하였다. 어느 날 아내가 가꾸는 채소가 28종이나 된다고 말하며 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아이들과 아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아주 낡은 재래식 화장실 사용하는 것이었다. 나는 가끔 아내와 함께 인분을 퍼내는 일을 해야만 했다. 또 여름이면 커다랗고 알록달록한 꽃뱀들이 자주 관사 주변에 소리 없이 나타났고 심지어 부엌에까지 나타나 아내와 아이들을 놀라게 했다.
섬마을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아내는 가끔 물을 데워 몸이 몹시 불결한 한 가정의 세 남매를 씻겨주곤 하였다. 얼마 후 그 가정을 방문해보니 그들은 작은 움막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주위를 돌아보면 온통 어려운 사람들뿐이었다.
아찔했던 순간들이 이제는 추억으로
어느 날 방과 후에 1학년 딸아이가 그네를 타다 떨어져 기절하였다. 놀란 아내를 달래며 급히 추도에 정박 중인 장학선 ‘광명호’를 무전으로 호출하여 효자도 선착장에 접안시키고, 교육청에 전화하여 바다 건너 송도에 택시를 대기시켜달라고 요청하고 대천 아산병원으로 후송하였다. 응급조치 후, 다음날 아내와 딸아이는 대전 충남대학교 병원으로 가서 입원 치료 후 무사히 퇴원하였다. 다행히 그 후 딸아이는 별 이상 없이 무탈하였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일이었다. 이 무렵 병원선이 월 1회씩 섬들을 순회하며 주민들을 진료하여 주고 있었다.
또 한 번은 여름 어느 일요일 아내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학교 아랫마을 학부형의 작은 배를 타고 대천시장에 장을 보러 나갔다. 정오 무렵부터 바람이 심하게 몰아치더니 마침내는 강풍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한 나는 학교에서 선착장을 여러 차례 내려가 봐도 배는 보이지 않았다. 저녁때는 가까워오는 데다 몹시 초조하고 불길한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억수로 퍼붓는 비를 맞으며 선착장에 서서 기다리는데 마침내 멀리서 작은 배가 보일 듯 말 듯 시야에 들어왔다. 잠시 후에 물에 빠진 생쥐 같은 몰골로 아내와 아들이 부들부들 떨며 새파랗게 질려 하선하였다. 나는 아내와 아들을 부둥켜안고, 우리 세 식구는 모두 엉엉 울었다.
그 후에 선장의 말을 들어보니 자기 생전에 그런 폭풍우는 처음 만났었다고 했다. 그는 그날 어항을 벗어나자마자 폭풍우가 쏟아지고 엄청난 파도가 밀려오기 시작해서 다시 어항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배가 파도에 휩쓸려 전복될 것 같았고, 그래서 곧장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심한 파도에 밀리는 배의 키를 죽을힘을 다해 꽉 붙잡고 효자도를 향해 항해하는 긴 시간의 사투였다고 전했다.
잊지 못할 여러 도움의 손길들
나는 분교장의 작은 도서실을 정비하기 위해 전임학교인 대전중앙국민학교와 대전신흥국민학교에 도서 수집을 요청했다. 두 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도서를 수집하여 도서실을 정비하고 독서교육 시범학교를 운영하였다.
책 상자들을 수차례에 걸쳐 대전의 두 학교에서 버스터미널까지 나르고 다시 직행버스로 운반하고 어항에서 배로 옮겨 싣고, 효자도로 운반하고 또 선착장에서 학교까지 가져와서 학부모의 도움을 받아 책을 정비하여 비치하기까지 참 어려움이 많았다. 이무렵 평소 교분이 두터웠고 자상했던 공주교육대학교 사회과 송인국 정치학 교수가 이곳까지 어려운 발걸음을 해주어 격려해주고 돌아간 일을 지금도 나는 잊을 수 없다.
또 어느 날 서울에 있는 모 잡지사 기자에게서 낙도 벽지학교의 애로사항을 극복하고 교육하는 체험담을 써 보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글 쓰는 솜씨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학교 일이 바빠서 도저히 쓸 수 없다고 극구 사양했으나, 여러 차례 다시 연락이 와서 결국 체험담을 써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내 글이 실린 잡지를 받아보았다. 그 후 어느 날 간첩으로 의심되는 낯선 두 사람이 나타나 주민의 신고가 들어왔는데, 그들이 학교 방향으로 간다는 초소장의 전화를 받고 크게 놀랐다. 사연인즉 서울에 있는 건설공제조합에서 낙도벽지학교를 지원할 대상학교를 찾던 중 잡지에서 효자도 분교장 주임교사의 글을 읽고 기차, 버스, 정기여객선, 사선을 갈아타고 먼 길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들은 선풍기, 난봉 등 운동기구와 학생들의 학용품 중 필요한 품목을 말하라고 하였다. 나는 효자분교장에 시청각 기구가 없어서, 텔레비전과 녹음기를 설치해 줄 것과, 테니스부를 운영할 수 있도록 라켓 등 운동기구 시설과 선수 복장 그리고 전교생들에게 체육복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분들은 돌아가서 얼마 후 내가 요청한 모든 물품을 보내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물품들은 우리 학생들의 시청각 재활용 수업에 유용하게 사용했다. 학생들은 처음 해보는 시청각 수업을 신기해하였다. 또 테니스 선수들은 그들이 보내준 유니폼과 라켓으로 학교 대항 테니스 선수로 출전하기도 하였다. 그해 추석날 가을 운동회에 복식학급 학생들은 모두 멋진 유니폼을 뽐내며 효자도민 축제를 열었다.
효자도 주민들과 함께 한 행복한 날들
효자도 분교장은 전통적으로 가을 운동회 날을 추석날로 잡았다. 이장님의 안내 방송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학교에 올라와서 참가하는 마을축제 한마당이었다. 이 날 운동회는 전교생 31명의 다양한 경기와 무용 등의 프로그램은 물론 학부모와 노인, 청장년이 참가하는 다양한 마을대항 프로그램과, 본교와 3개 분교 대항 달리기 대회, 졸업생 경기 등 각종 프로그램으로 흥겨운 운동회를 하였다.
운동회를 참관하신 본교 교장 최창호 선생님은 본교보다 훨씬 나은 효자도민과 본교와 분교를 잇는 축제의 날이라고 강평해 주셨다. 해마다 운동회 지도에 지친 선생님들은 학부모 회장이 마련해준 배를 타고 어항까지 와서 각자 고향에 다녀오곤 했다.
효자도 학부모와 주민들은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분교장 주임교사인 나에게 도움을 청했고, 주민들의 결혼식, 생일, 제사, 돌잔치, 풍어제, 당산제 등 각종 마을 행사에 초청하고 같이 즐겼다.
또 여객선이 효자도에 닿도록 하기 위해 주민들과 함께 군산 항만청에 다녀오고, 국회와 청와대에 청원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또 효자도 주변 바다 밑에는 대형 홍합이 대량 서식하는 수산자원의 보고였으나, 채취 허가를 내지 못하여 이미 채취 허가를 가진 다른 고장 오천면 사람들에게 홍합 자원을 빼앗기고 있어서 홍합 채취 허가 신청서를 작성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무렵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다 밤늦게 관사로 돌아오는 일이 잦았다. 아내와 아이들은 토요일과 일요일에 이웃 관사를 비우게 되는 날 교사 뒤 언덕에서 솔바람 소리가 ‘우... 솨 솨…’ 크게 울릴 때 매우 무서움을 호소하였다. 요즘도 아내가 남매들 앞에서 “당신은 학교 일 밖에 모르는 냉정한 사람이었어요. 그때 우리는 얼마나 무서웠는데...” 하며 핀잔할 때 나는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한다.
성공적인 효자도 섬마을선생
부임한 지 3년째 되던 해, 교육부가 한국교육개발원 사업으로 교육의 질적 평등이 가장 심각하게 깨어지는 교육현장의 하나인 도서 벽지학교 복식학급 교육의 불평등을 개선하고자 시범사업을 실시하는데 본교에서는 복식학급 시범운영을 하였다. 복식수업 상황에 적절한 교수-학습 자료를 개발하여 교사에게는 교수 자료를, 학생에게는 학습 자료를 제작 활용함으로써 복식수업을 효율화하는 교사용 지도서와 간접 학습을 효율화하는 학생용 배움책을 개발하여 3, 4학년 국어과에 적용하였다.
시범운영 주제는 ‘복식학급 수업 효율화를 위한 국어과 교수-학습 자료의 개발과 운영’이었다. 운영 보고 후 한국교육개발원, 충청남도 연구원 및 충청남도 15개 시군 복식학급에 보급하였다. 낙도에서 교사 3인이 7종의 자료를 개발하고 시범운영을 하고 보고하기까지는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이때 아내까지 원고를 검토하는 등 밤새워 나를 도왔다.
본 분교장의 복식학급 시범운영 보고회장에는 충청남도 교육위원회 초등교육과 과장과 한국교육개발원 선임연구원, 16개 시·군 장학담당 장학사, 도내 복식학급 담임교사, 본·분교 교직원과 학부모 임원 등 회원 100여 명이 참석하였다. 섬사람들은 넥타이를 맨 신사들이 가장 많이 온 날이라고 했다.
보고회가 끝나고 학부모들이 푸짐하게 장만한 싱싱한 횟감을 맛본 회원들은 그 후에 다시 만나는 사람마다 그때의 추억을 이야기해 주곤 했다. 복식학급 열린 수업 연구는 그 후 1994년 초임교장 발령으로 소규모 학교인 서천 지산초등학교에 재직 시 1997년 서천교육청 지정 소규모 학교 시범운영으로 ‘인접 학년 복식교수-학습 자료 개발 적용을 통한 복식수업의 효율화’로 이어졌다.
1988년 3월 1일 자로 교감 승진 발령을 받고 효자도를 떠났다. 2월 말 햇볕 따사로운 날 나는 아내와 3년 동안 훌쩍 큰 두 남매와 함께 학부모들이 마련해준 작은 배에 이삿짐과 선물 받은 커다란 김 상자를 싣고 학부모와 섬사람들, 그리고 사랑하는 고사리손들의 배웅을 받으며 정든 효자도를 떠나왔다.
*효자분교 |
편집 주 : 놀뫼신문에서 복사하였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