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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깥 온도와의 차이가 40도 정도 되어 노약자에게는 보온용 겉옷을 입게 했다. 옆의 동물은 물범인지 모르겠다>
별로 할 일이 없어진 우리는 유빙관 바깥에 나와 무료하게 앉아 있다가 버스 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내리막길이니 아바시리 감옥 박물관까지 걸어가서 타자는 안 선생의 꼬임에 넘어가 그 후 20분 동안 다리 아프게 걸어야 했다. 물론 차비는 한 사람당 90엔씩 절약했지만. 걸어가면서 나는 내가 찍기를 원하던 장면을 얻을 수 있었으니 그건 바로 이 장면이다.
<야생 머위 잎을 챙이 큰 모자와 비교해보면 그 크기가 얼마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홋카이도 대학 연못가에서 발견한 야생 우엉 잎. 참나물 비슷한 것도 눈에 띄었다>
<대학을 나와 주택가 길가에서는 어성초도 소담스레 자라고 있었다>
<이런 때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면 언제 훼손해 보겠는가, 세 장만 있으면 우산으로 사용할 수 있겠다. 총무로서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평상시 장롱 안에 있던 구찌 전대를 찬 필자와 이를 전혀 몰라 주는 회계와 인솔책임자>
<사진으로는 작아 보이지만 아주 잎이 큰 머위들이 눈 가는 곳마다 널려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도시나 농촌, 산골과 길가를 가리지 않고 가장 많이 본 식물이 야생 머위였고, 그 크기도 엄청났기에 과연 우리처럼 식용하는지 궁금했다. Lavender Farm 임시 역에서 라벤더를 파는 아주머니에게 논둑에 있는 머위를 가리키며, 머위를 먹느냐고 물었더니 봄철에 먹는다고 한다. 위의 사진을 찍을 때 절단면의 냄새를 맡아 보았더니 머위 향이 났다.
아바시리 역 앞으로 돌아온 우리는 아바시리 시내를 이리저리 배회하다가 무슨 호텔 부속 식당에서 ‘부타동’과 ‘소바’를 곁들인 점심을 먹었는데 ‘부타동’은 신도쿠 역 앞 식당만 못하였다. 일찍 역에 들어와 지정석을 알아보니 없었다. 우린 개찰구 맨 앞에 줄을 서서 좌석 확보에 최선의 노력을 했지만, 승객이 없어 텅 빈 기차여서 또 헛짓.
13시 29분 발 삿포로행 기차를 타고 보리밭, 밀밭, 감자밭, 메밀밭, 옥수수밭, 그리고 가끔 논들이 펼쳐진 농촌의 풍경을 보며, 18시 47분에 삿포로에 도착함으로써 5시간 20분 정도의 긴 여정을 아주 마쳤다. 이 여정의 기념비적 특징은 첫째, 중국인 승객이 없어 조용했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원생화원, 습원, 유빙 이런 자연물에는 관심이 없었다. 두 번째 한국인들이 어젯밤 약속대로 전혀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기차간이 아주 조용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반중반일(半中半日)의 이론을 발견했다. 즉 한국인은 술을 마시면 중국인이 되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일본인이 된다는 것이 이 이론의 골자이다. 이 이론은 신선생이 최초 발견자이니 동상이라도 세워야 할 정도로 큰 발견이라 하겠다.
삿포로 도착 후 지하철을 타고 스스키노 역에서 내려 너구리 골목을 지나 Sunroute Hotel에 도착했다. 며칠 전 묶은 곳이라 편하게 느껴지고 너구리 골목도 몇 차례 다닌 곳인지라 낯이 익어 제법 지리도 익숙해졌다. 호텔 프론트데스크에 회전 스시 전문점을 물어 근처 스시집에 가 식사를 했다. 예상하기로는 한 사람당 대여섯 접시면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 집의 시스템이 회전 스시가 아니라 주문하면 내어주는 집이었다. 계산은 어둡고 일본어는 잘하는 황 선생은 메뉴판을 보다가 아는 것이나 궁금한 것이 나오면 계속시키기 시작해 결국 52접시, 즉 1인당 8접시 반을 먹게 되었다. 게다가 주문한 맥주 7병에, 호텔에 딸린 슈퍼에서 사 온 우리의 친구 ‘흑무도’까지 섞어 마셨으니 전부 숨이 가쁠 정도가 되었다.
<접시의 색깔에 따라 감색(150엔), 백색(190엔), 적색(250엔), 물(水)색(290엔), 회색(380엔), 금색(360엔)이었는데 감색에서 회색까지는 스시가 2점, 마지막 금색은 1점에 360엔(3,370원)으로 가장 비싼데 고기는 참치다>
스시는 살짝 된밥을 뭉친 것이므로 위장에 들어가서 풀어지며 붓기 때문에 배부를 만큼 먹으면 안 좋다. 게다가 붓기 좋게 간한 맥주까지 곁들였으니 숨을 헉헉대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숨을 헉헉대는 것과 하루를 결산하는 술자리와는 상관이 없으므로 다시 맥주와 소주를 사서 안, 황 선생이 묵고 있는 방에서 한잔하며 오늘 무주일을 제대로 지킨 것을 자축했다.
<흑무도 _ ‘검은 안개 섬’이라는 근사한 이름의 25도, 720mL, 일본 소주. 가격은 1,027엔이므로 우리 돈으로 9,600원 정도. 일본에서 이 술을 6병, 옥수수 소주(990엔-9,250원) 1병, 보리 소주(1027엔-9,600원) 1병, 총 8병을 마셨다. 가져간 18도 참소주가 19병이니 적당히 마신 듯>
23일 결산
토쿄인 호텔 → 유빙관 : 버스 1,980엔
유빙관 입장료 : 3,240엔
형무소 전시관 앞 → 아바시리역 앞 : 버스 1,440엔(540엔 절약/90원씩)
아바시리역 근처 호텔 부속 식당 : 점심 5,220엔
역내 매점 : 물2병 240엔
지하철 삿포로→ 스스키노 : 6명×200 = 1,200엔
스스키노 호텔 마트 : 소주 1,027엔
저녁식사(회전 스시) : 18,975엔
스스키노 호텔 마트 : 맥주 3캔 876엔
계 34,198엔
♠ 제7일 (2015.7.24.금) : 전일 삿포로 시내 관광
여행을 다니면 몸이 항상 삼쾌(三快)를 유지해야 한다. 여기서 ‘쾌‘는 ’유쾌한‘이란 뜻과는 조금 거리가 있으니 ’일정한 정도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 듯하다. 괘식, 쾌변, 쾌면이 그것이니 이 중 한 가지라도 어긋나면 우리 몸은 토사곽란(吐瀉癨亂- 토사는 上吐下瀉의 준말로, 위로는 토하고 아래로는 설사한다는 뜻이고, 곽란은 급성 위장병으로 속이 뒤집어진다는 뜻)이나 두통, 멀미 등으로 신호를 보내게 된다. 그래서 여행은 다니는 것 이상으로 쉬는 것도 중요하다. 틈이 있을 때마다 편한 자세로 쉬거나 결식, 폭식하지 않는 것, 될 수 있으면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날 것, 하루 한 번 화장실에 갈 것 등은 여행 다니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 중 제일 중요한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쾌변을 꼽겠다. 그것은 쾌식과 쾌면의 결과로 쾌변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쾌변 관계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는데 설사하는 사람이 시간에 맞추어 여행하는 자체가 죽을 맛이 아니겠는가? 이는 몸을 무리했거나 함부로 굴렸기 때문이다.
오늘은 온종일 삿포로 관광에다가 쇼핑만 하면 되기에 그리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지만 전부 잠이 없는 사람들인지라 7시에 호텔의 아침 뷔페를 먹었다. 시간이 넉넉하기에 방에 들어와 잠시 쉬다가 9시에 로비에 모여 관광을 시작하기로 했다. 일정은 시계탑, 홋카이도 대학과 홋카이도 구청사 정도였다. 오도리 공원과 맥주 박물관도 계획에 들어 있었지만 마침 오도리 공원에서 맥주 축제를 하는 까닭에 이 둘을 한 몫 처리하기로 했다. 그것보다 반드시 처리해야 할 문제가 황 선생의 책을 운반할 가방을 다이소에서 사는 것이었다.
<홋카이도 대학의 초대 학장이었던 클라크 박사>
지하철로 키타쥬니죠역에 하차해, 먼저 홋카이도 대학에 가서 초대학장이었던 클라크 박사 동상을 찾았는데 이 사람은 “Boys be ambitious!”라는 흔한 말 한마디로 동양권에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아직도 교과서에 이 말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나도 어린 시절, 이 말을 듣고 야망을 품을 뻔 했다. 그 시절은 그렇게 순진한 시절이었고 야망을 품어도 될 시절이었으니까. 그러나 요즘 이 말을 청소년에게 한다면 “야망요? 헐! 소용없어요.”라 할 것 같다. 그래서 시대에 맞게 내가 흔한 명언 하나를 남겨야겠다. “Boys have the job!”
넓은 대학 캠퍼스에 오래된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유수의 대학처럼 보였고 군데군데 보이는 교실에서는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을 보고 손 선생이 지나치듯 한 마디 명언을 날렸다. “열심히 해 봐, 잘 안 되겠지만.” 이게 이 시대의 명언이다.
대학 정문 곁에 대학에서 운영하는 카페가 보였다. 어제 아바시리 감옥 박물관부터 아이스크림 하나 먹자고 하던 노친네들 생각이 나서 얼른 들어갔다. 어제는 아이스크림 사 먹을 곳이 없어 못 먹었기에 아이스크림 하나씩 빨며 다음 갈 홋카이도 구청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등을 의논했다. 남문으로 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일단 출발을 했다.
<대학 남문을 나서자 정면에 붉은 관공서 같은 건물이 보여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홋카이도 구 청사는 양 옆에 호수가 있어 공원화되어 있었다. 호수를 향해 머리를 감는 듯한 부러진 소나무도 신기했지만 난 그 앞 오른쪽 바위에 수도를 어떻게 뚫었을까가 더 궁금했다>
<어떤 아줌마가 과자를 비둘기에게 주는 것을 보고 손 선생이 빵을 사와 주기 시작하더니 싫증이 났는지 나에게 주어 졸지에 새들과 교감하는 장면을 연출하게 되었다>
<시계탑에서 한 컷. 1878년에 건축된 것이라 한다>
<일본에서 본받아야 할 교통문화 중 하나. 주차할 공간이 있어야 자가용을 살 수 있으니 자가용보다 주차 공간 확보가 더 큰 문제라는 일본, 그래서 길가에 세워둔 차가 없다. 또한, 차보다 사람이 우선이란 의식이 철저해 이 선생이 차에게 길은 양보하니 차 운전사가 어리둥절해 하며 차를 움직여 오히려 사람 우선이란 인식으로 길을 건너던 다른 일행이 다칠 뻔한 일이 있다>
드디어 다이소를 발견한 우리는 엄청 살 것처럼 들어갔지만 6명 중 황 선생이 19.5kg의 책이 들어갈 만한, 천막 천으로 만든 가방 2개, 그리고 가방이 찢어지는 것을 방지할 튼튼한 테이프 1개와 컵 2개, 신 선생이 발뒤꿈치 굳은살 벗기는 것 등 몇 개만 사고 에어컨 바람만 쐬다가 나왔다. 손 선생은 선물을 사가면 집에서 욕만 얻어먹어 안 산다고 하더니 어디서 보았는지 선크림을 세 개나 들고 왔다. 보니까 SPF 15짜리였고, 저걸 들고 가면 또 욕을 얻어먹을 것이 분명해, 사지 말라고 했고 당연히 손 선생은 그 이유를 몰랐다. 그래서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SPF 50짜리를 사용한다고 했더니 그런 것도 있느냐 하며 물건을 제자리에 두고 왔다. 이로 볼 때, 모든 일은 인과 관계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분명하다.
니조 시장에 들러 점심을 먹을까 해 니조 시장으로 가던 나의 눈에 번쩍하고 꽂히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정말 튼튼하게 생긴 가방이었다. 짊어지는 것과 손에 드는 것 중 황 선생은 1,300엔짜리 손에 드는 것을 선택했는데 그건 일본 철도역의 후진성을 고려하지 못한 데서 온 실수였다. 우리나라 모든 역의 경우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 하다못해 가방을 끌 수 있는 슬로프가 있는데 북해도에서 제일 큰 삿포로 역만 해도 지하철에서 내려 적어도 2번은 계단을 이용해야 했고 바닥도 고르지 않아 19.5kg의 책을 넣은 가방을 캐리어에 올리고 끌 경우 끌리지 않거나 중간중간 책가방은 책가방대로 캐리어는 캐리어대로 따로 끌어야 했으니 하는 말이다. 어쨌든 좋은 가방을 샀으니 이제 고생 끝이라 생각했다. 캐리어 위에 책가방을 올리고 끌면 졸졸 끌려 올 줄만 알았지 뭐.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가 그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듯 19.5kg의 마음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후진 일본 역의 가파른 계단을 힘겹게 올라가는 황 선생>
< 예천 용문사 계단에도 차길을 겸해서 슬로프가 있어 짐을 끌기에 편하게 배려해 두었다 >
니조식당에 들러 양고기나 생선구이나 점심이 될 만한 것을 찾았지만, 생선 가게가 대부분이고 식당은 스타일이 우리 취향에 맞지 않아 결국 우린 본거지인 너구리 골목으로 회귀했다. 그리고 삿포로에서 첫날 점심을 먹은 ‘타누끼마쯔리’에서 우동과 규동(손 선생)으로 점심을 때웠다. 그리고 호텔로 돌아와 15시까지 휴식 후 본격적으로 선물 구매에 나섰다. 먼저, 면세 약국에 들러 학교의 여선생에게 부탁받은 트란시노(기미 제거), 각종 피부 트러블에 좋다는 마유크림과 콘택 600(감기), 청패탕(기관지 기침약), 태전위산(위장약) 등의 의약품을 샀다. 다시 슈퍼마켓에 들러 자바 카레(8개)와 후리카게(와사비 맛) 작은 것을 하나 사서 호텔로 돌아와 가방을 대강 정리하고 다시 휴식 후 5시 30분에 오도리공원의 맥주 축제에 참여하기로 했다. 물론 소주를 생수병에 든든히 넣은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앞에 앉은 애들 탁자 위의 물병은 자리에 사람 있음을 나타내는 용도와 함께 미즈와리용 물일 가능성이 크다. 우린 소주를 섞어 도수를 올리는데 얘들은 물을 섞어 도수를 낮춘다>
삿포로 맥주 축제는 거의 7월 한 달 간 계속되는 듯했는데 각 맥주 브랜드별로 구역이 정해져 있었다. 일단 자릴 잡고(자기 물건을 탁자 위에 두어 예약되었음을 표시한다) 표를 산 후 그 표로 음식을 주문하는 듯 했다. 왜 추측성 발언이냐고? 자리가 있어야 앉고 앉아야 표를 사고 표를 사야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오늘이 불금인지라 벌써 자리는 만석이었다. 게다가 일본인의 술 습관이란. 쯧쯧, ‘미즈와리’라고 해서 ‘미즈’는 물이고 ‘와리‘는 ’와리깡‘의 그 ’와리‘(나눌 割)인데 술에 물이나 우유나 차를 섞어 마시는 것으로 술 한 잔 주문해서 계속 물을 섞어 마시니 한 잔이면 한두 시간 마신다. 그러므로 지금이 시작이므로 기다려봐야 앞으로 최소 1시간 내에는 자리가 없는 것이다.
저녁은 먹어야겠고 마지막 날이니 술도 한잔하고 싶고 해서 어딜 갈까 빙빙 돌아 다녀 봤지만 결국 우리의 본거지인 너구리 골목으로 돌아왔다. 문득, 신 선생이 어제부터 먹고 싶다던 중화요리가 생각나서 중화식당 ‘왕장’을 찾아가 ‘부추돼지고기’, ‘닭튀김’, ‘목이버섯과 메추리알이 들어간 요리를 시켜 맥주와 소주를 간하여 마셨다. 나중에 밥과 마파두부까지 시켜 먹고 나니 지금까지 먹던 일본 음식과 비교될 정도로 식탁이 푸짐한 느낌이었다. 그래봐야 4,521엔밖에 되지 않아 상대적으로 싼 기분이 들었다. 일본의 밑반찬은 없거나 아주 조금, 그것도 손톱 크기로 썰어 낸다. 그래서 보기에도 간이 오그라드는 느낌이다.
<닭튀김, 부추돼지고기>
방에 들어와 다시 한잔하다가 박소영 선생 친구가 트란시노 하나를 부탁한다는 카톡이 와서 신 선생과 함께 저녁에 갔던 약국이 들러 50g짜리를 사고, 30g짜리 트란시노를 나도 하나 샀다. 외국에 와서 살 때는 별것 아닌 것 같아도 가지고 가면 예상외로 오랜 기간 추억으로나 쓸모에 있어 값어치가 있는 경우가 많다. 이 기미약은 집사람에게 좋은 선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 호텔로 돌아와 다시 한잔 더 하며 마지막 밤을 기념하였다.
24일 결산
지하철 스스키노 → 삿포로 : 1,200엔
홋카이도 대학 내 카페 : 아이스크림 1,560엔
이소대로 점심 : 우동 2,680엔
패밀리 마트 : 소주 1,076엔
중국 요릿집 왕장 : 저녁 4,521엔
패밀리 마트 : 소주와 안주 2,320엔
패밀리 마트 : 소주 1,101엔
계 14,458엔
<붙임> 일본의 동전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알루미늄으로 된 일 엔, 노란색 황동으로 된 구멍 뚫린 5엔, 시뻘건 구리로 된 10엔, 그리고 구멍 뚫린 백동화 50엔 그리고 100엔, 500엔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은데 뭘 그리 대단 한 것처럼 이야기하느냐 하겠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다. 이 동전들이 모두 사용이 된다는 점이다. 우리의 경우 일 원, 오 원 십 원, 오십 원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십 단위 이하는 절사”라고 각종 공과금 종이에 적혀 있지 않은가. 정부에서 일 원과 오 원은 아예 돈의 단위에서 자격을 박탈해 버린 것이다. 슈퍼마켓에 가면 계산대 옆에 동전함이 있다. 무겁기만 하고 쓸데없는 십 원이나 오십 원은 여기 “버리고” 가라는 주인의 배려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아이들도 길에 떨어진 십 원짜리 동전을 보고도 줍지 않는다. 결국, 우린 6종류의 동전 중 두 종류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일본 측 계산을 한 번 다시 보라. “패밀리 마트 : 소주 1,101엔, 패밀리 마트 : 소주 1,076엔, 중국 요릿집 왕장 : 저녁 4,521엔”
1엔도 실제로 사용이 되는 것이다. 총무가 되다 보니 돈 계산은 내가 하는데 며칠간 한국에서 하던 습관대로 지폐 위주로 지불하다 보니 나중에는 동전이 엄청나게 모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동전이 다 떨어질 때까지 계속 동전으로 계산했는데 어떤 경우 20원을 주어야 할 경우 10원짜리는 두고 1원짜리 20개로 주었는데 상점 아가씨는 당연하다는 듯이 “하이, 하이”하며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절까지 하는 것이었다. 전차에서 본 어떤 양복 입은 신사는 차장이 차비를 달라고 하자 양복 윗도리에서 동전 지갑을 꺼내더니 일 엔, 오 엔, 십 엔의 차례로 계산해 차비를 주었고 차장 아가씨는 그동안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의 일 엔은 살아 있는 일 엔이었다.
♠제8일 (2015.7.25.토) : 귀국
일어나 짐 정리부터 하고 깨끗이 샤워를 했다. 이제 일본의 북해도와 “사요나라”할 때가 된 것이다. 7시에 호텔 뷔페에서 북해도 마지막 아침을 먹었다. 오늘 할 일은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8시 40분에 로비에 모여 호텔 Check-out 후, 짐을 끌고 정들었던 너구리 골목을 거쳐 스스키노 역에서 지하철로 삿포로 역까지 왔다. 다시 신치토세 공항으로 가는 열차표를 6,420엔(1인 1,070엔)에 끊고 열차에 타니 기차는 만원이라 설 자리도 잘 없었다.
문제는 황 선생의 책 보따리였다. 저 책이 무사히 한국의 새 거주지에 안착하기까지 엄청난 땀과 고통을 요구할 것이 분명했다. 황 선생이 캐리어 위에 책 보따리를 실으니 캐리어의 작은 바퀴가 고장 날 지경이었다. 조금만 턱진 곳에는 바퀴가 다 걸리니 황 선생이 책을 들면 신 선생이 캐리어를 끌고 또 조금 평평한 곳에서는 캐리어에 책을 올려 끌고 그러기를 여러 번 반복해야 했다. 제일 심한 것은 앞의 사진에서 본 계단 오르기, 그야말로 황 선생은 이리저리 책에 부딪힌 타박상에 온몸 구석구석 안 아픈 곳이 없을 지경으로 책 보따리와 싸워야 했다. 안 그래도 어젯밤 과음으로 숙취에 시달리던 황 선생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마음의 양식을 나사렛 예수 십자가 나르듯 고통 속에서 날라야 했다. 땀을 얼마나 흘렸던지 생수 2통을 거의 혼자서 다 마셨다. 아마 삿포로 역 생기고 역내에서 땀을 제일 많이 흘린 사람이 아닐까 한다.
겨우 공항에 도착해 짐을 부치고 출국 수속을 밟는데, 황 선생은 19.5kg이나 되는 무거운 책 보따리를 부치고 캐리어를 비행기에 가지고 탈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문제는 어제 먹다가 남은 우리의 즐거운 친구 “흑무도”를 캐리어에 넣어왔던 것. 통과된다는 황 선생과 내기 만 원 됐냐는 안 선생, 그래서 일단 나에게 돈 만 원씩 맡기라고 했더니 두 사람 모두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결과는 100cc가 넘어서 통과되지 않음. 그런데 안 선생은 안 선생대로 황 선생에게 100엔을 주고 다시 산 비닐가방 속 마유가 220g이어서 통과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술과 마유를 따로 포장해서 비행기 짐칸으로 부쳤다. 우여곡절 끝에 면세점에 들어와 남은 돈으로 마유 화장품, 마유 원액, 치즈 대구포 2개, 초콜릿 3개 등을 샀다.
신치토세 공항에서 12시 35분 출발한 비행기에서 제공되는 기내식을 먹고, 맥주 1캔을 달래서 마시고, 커피까지 마시고 김해공항에 15시 15분에 무사히 착륙했다.
<기내식으로 제공된 소고기 볶음에 밥>
<기내식 닭고기 튀김국수 _ 먹을 만했음>
입국 수속 후 짐을 찾고 마일리지 적립 후 리무진 벤를 6명이 타고 구포역에 도착해 차표를 끊으니 17시 35분 발 열차에 좌석이 있었다. 남은 시간은 역 앞 부전돼지국밥 식당에서 돼지고기 수육과 술국을 안주로 해서 손 선생과 이 선생을 위한 막걸리와 소주로 귀국주를 갈음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배추김치였다. 손바닥 반 크기의 배추 잎이 작은 접시에 소담스레 담긴 것을 보니 아! 내가 한국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 가까이 있던 것도 떠나봐야 귀함을 느끼는 법이다>
청도역에 18시 21분에 도착 후 미리 대기하고 있던 안 선생 사모님의 차로 각자 귀가하였다.
돌아올 집이 있어서 여행은 즐겁다.
25일 결산
지하철 스스키노 → 삿포로 : 1,200엔
삿포로역 → 신치토세 공항역 : 기차비 6,420엔
계 7,620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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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지출 187,396엔
1인 15,000엔씩 환급 15,000 × 6 =90,000엔
300,000엔-187,396엔-90,000엔 = 22,604엔(잔액)
잔액 한화로 환전 194,700원
김해공항 → 구포역 리무진 택시 20,000원
기차비(구포 → 청도, 경산) 27,400원
구포역 앞 귀국주(돼지국밥집) 47,000원
한화 잔액 100,300원 (8월 13일 16시 청도 수미관에세 해단주 값으로 지출)
< 끝 >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고생 많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친구분들과 좋은 시간 만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