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 배치는 전쟁을 위한 것입니다.
생명을 죽이자고 하는 무기를 평화를 주장하는 성자가 나신 곳에 배치하는 것은, 평화를 위해 존재하는 종교 그 자체의 생명을 해치는 것입니다. 원불교 계명의 첫 조항은 “연고없이 살생을 말며”입니다. 이 계문을 우리의 현실에서 구현해야할 때가 온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전쟁과 평화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역사상 국가에 맞서 비굴한 자세를 취하지 않는 한 살아남은 종교는 이 지구상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국가가 영원히 존재한 역사는 없습니다. 오히려 피를 흘리며 지킨 종교가 그 패망한 국가를 넘어 영원을 향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사실(史實)을 로마 근교의 카타콤베에서 목격했습니다. 지하 무덤에 안치되었던 수많은 순교자의 그 자리,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환호하는 시민들 앞에서 사자에게 물려 죽은 시신, 검투사의 창에 찔려 피를 토하며 죽은 시신들이 그 지하로 실려 오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는 마침내 기독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의가 그저 정신적 위안만 되면 그대로 의미가 있는 것인 줄 알고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그러한 정신적 위안만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폭력을 정당화하는 국가는 모든 종교를 자신의 권력 하에 두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여지없이 탄압합니다.
중국에서 세 사람의 무(武)자 들어가는 왕과 한 사람의 종(宗)자가 들어가는 왕이 저지른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한국의 조선왕조 또한 부패했던 불교를 자신의 혁명의 정당성을 위해 희생시켰습니다. 일본 또한 메이지 신정부의 권력의 정당화를 위해 폐불훼석(廢佛毁釋)을 단행하여 불교를 국가신도의 발아래 두게 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자신의 백성을 청일전쟁 이후 십년 단위의 대외전쟁에 전쟁터로 내몰았습니다.
국가를 넘어서 있는 것이 종교입니다. 종교는 국경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국가의 이익보다도 전 중생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간파한 사람이 바로 일본 조동종의 조사 도겐(道元)입니다.
무사계급의 장군이 전국의 패권을 차지한 후, 이 선종이 잘 되는 것을 보고, 땅을 주기 위해 기진장(寄進張)을 하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자랑스럽게 이 기진장을 들고 온 제자를 도겐은 멸빈(滅擯)시키고, 그 앉은 자리의 땅을 파버렸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민중 속에서 일본 제2의 종단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계승되어, 일제 강점기가 막 시작하려는 즈음, 천황을 전쟁 책임과 중생을 도탄에 빠지게 한 죄목으로 고발한 조동종의 승려 우치야마 구도(内山愚童)가 천황에 대한 불경죄라는 죄목으로 1911년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아시아의 수많은 민중의 피를 본 100년 뒤에야 비로소 이분은 복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드 위기를 원불교의 존재 의미를 비로소 세계에 선포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슬로건에 합당한 우리의 사명감과 정체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의 역사에서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불교 출현의 근본인 소태산 대종사님이 이 땅에 출현한 시대가 바로 이 역사상의 모든 고통이 집약된 시대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식민지의 고통은 물론, 제1차 세계대전 2천만 명, 제2차 세계대전 5천만 명, 6·25남북전쟁 400만 명의 사망자와 천만 명의 이산가족, 일본 자신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으로 일본국민만 300만 명이 죽었습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1-2억 명이 한 세기에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의 시대 혹은 그 어떤 시대도 이보다 비참할 순 없었습니다.
제국주의와 전쟁을 뒷받침한 것이 바로 물질이며 과학입니다. 총, 폭탄, 레이더, 전함, 전투기, 원자 및 수소폭탄을 비롯하여 지금도 인류는 사람을 죽이기 위한 군대를 보유하며, 하루에 수천 억 원을 쓰고 있습니다. 개성공단 전체 1년치의 임금이 천억 원인데 사람 죽이는 F35전투기 한 대 값이 천 3백억 원, 스텔스기 한 대 값이 천 5백억 원에 해당합니다. 사드는 이보다 더 천문학적인 비용입니다.
이제 원불교는 성숙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웃 종교인이 이야기했듯이, 원불교야말로 시련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 이 과정을 통과해야할 시기가 올 것이라고 한 예언이 맞아떨어졌습니다. 이 시련은 원불교가 세계적인 보편종교로서 나아가는 길에 결정적인 사건이 될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원불교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나올 것입니다. 그는 그야말로 20세기 세계의 신학을 바꾼 사람입니다. 관념적 신학에서 실천적 신학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그는 1945년 히틀러가 자살한 그 해에 몇 달 앞서 히틀러의 명령으로 감옥에서 순교했습니다. 그는 “달리는 기차에서 뒤로 뛰어간다고 해서 그 열차를 멈추게 할 수는 없다”고 하며, 히틀러를 암살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그 열차, 국가라는 열차, 자본이라는 열차, 그리고 욕망의 열차, 공멸의 열차에 타고 있습니다. 이 열차를 멈추게 하지 않는 한, 지구는 더욱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성주의 사드 배치는 결코 한 종교의 성지를 파괴하는 것에만 국한하지 않고, 선한 모든 종교의 궁극적 가르침을 파괴하게 될 것입니다.
원불교는 이제 종교로서의 시련을 겪어야 할 시점에 와있습니다. 우리가 내건 평화가 말로만 지켜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아랍에서, 아프리카에서, 아시아의 곳곳에서 남들이 죽어갈 때, 그들을 구하기 위해 진정으로 노력해 왔는지 반성해야합니다. 방송과 신문에서 오늘도 먼 곳에서 사람들이 전쟁으로 죽어간다고 할 때, 우리가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주의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해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이러한 참회를 자신의 마음 언저리에 놓아야 합니다. 그 참회가 진정으로 이루어질 때, 원불교 존재의 대전제인 사무여한의 정신이 하늘에 다시 통할 것입니다. 천권(天權)을 부여받은 후예들이 무엇이 두렵습니까. 이 굴욕의 역사는 반드시 바뀔 것이며, 훗날 역사가들이 평가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들이 순교해야할 때가 온 것입니다. 물론 1963년 틱광둑(Thich Quang Duc) 스님이 사이공(호치민)에서 불교 탄압과 전쟁 반대를 외치며, 기름을 붓고 소신(燒身)했던 행위를 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의 후손이 제게 한 말을 잊지 못합니다. “상대방이 밉다고 해서 죽일 수가 있는가. 내가 죽어서 그 사람의 잘못을 깨우쳐 준다면 이야말로 부처와 보살의 정신이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제2의 틱광둑 스님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불교의 순교는, 위대했던 어느 선진이 말씀하신 것처럼, 죽지 않으면서 죽을 각오를 하고 세상의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이제 원불교의 순교 정신을 회복할 때가 된 것입니다.
온 국민과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제2의 법인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물러설 수 없는 기회, 원불교가 세계를 향한 길목에 서 있습니다.
첫댓글 () 잘 읽었습니다. 원 교무님과 소견이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만
말씀하시는 의미는 많이 공감합니다.
누군가를 죽이자는 것이 아니라 방어용 무기라고 '주장'하는 터라,
순교라는 말까지 거론되는 것은^* 알맞지 않다고 봅니다.
그리고 진리적 종교를 표방하는 원불교가, 성인의 '탄생지'라는 이유로
성지수호를 주된 이유로 삼는 것도 덜^* 진리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영적인 스승인 성인의 고향은 한 지역이 아니라, 전 지구이며 우주입니다.
게다가 원불교는 처처불상을 천명하고 있으니, 성지수호 구호는 퍽 유교적이거나, 적어도 물질적 신앙입니다.
해외교화를 할 때 우리가 성지 운운하면 아마 '진리적' 종교를 의심 받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