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회 진압군 재배치 / 각본대로 공수부대 잇따라 증파
80년 5월 18일 밤 9시께 鄭雄 31사단장은 31사단 상황실에서 작전평가 회의를 열고, 7공수여단 33,35대대 병력을 도청을 중심으로 주요 시설및 교 차로등 거점에 배치해 시위대가 집결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에따라 이날 밤10시 30분부터 밤 11시 20분사이 7공수 33대대는 경찰 지.파출소와 도로 교차점을 중심으로 한 17개 거점에 배치됐으며, 35대대는 19개 거점에 배치됐다. 각 거점에는 장교 1명,사병 10명으로 구성된 공수부 대 1개 지대와 경찰 2개 분대 24명씩이 배치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11공수여단의 추가 투입으로 진압군은 다시 배치돼야만 했다.
이날 밤 11시 40분 작전회의에서 鄭雄 31사단장은 7공수여단 33,35대 대 배치거점을 11공수여단에 인계토록 지시했다.
다음날인 19일 새벽 4시 7공수여단 33,35대대는 11공수여단 61대대에 거점을 인계하고, 33대대 는 전남대로 35대대는 조선대로 각각 복귀했다.
11공수여단이 光州에 도착한 시각은 19일 새벽 0시 50분이었다. 11공수 여단 62,63대대는 31사단의 작전통제하에 새벽 2시 10분께 조선대로 이동했 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11공수여단의 추가투입이 의미한 것이 무엇이 냐는 점이다. 즉 光州항쟁 초기 소요 악화에 대한 대비책으로 공수부대를 추가투입했다는 당시 신군부측의 주장과는 달리 7공수-11공수-3공수로 이어지는 연속적 증파는 신군부 쿠데타 성공을 위한 치밀한 사전계획이란 점이 검찰수사등을 통해 거의 정설화하고 있다.
지난 88년 12월 9일 국회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선 崔雄 당시 11공수여단 장의 증언을 통해 당시 투입과정을 살펴보자.
(崔雄증인) 80년 5월 18일 새벽,당시 11여단은 서울에 있는 동국대학에 주둔했다.
주둔을 하고서 숙영편성을 거의 마칠 무렵인 오후 3시쯤됐다. 참 모로부터 光州지역으로 증원준비 지시가 내려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질문)그때 증파이유는 무엇이라고 했나?
(증언)숙영편성을 하다 다시 거둬들이는 상황에서 그 당시 鄭鎬溶 특전사 령관이 동국대학으로 왔따. 와가지고 하는 얘기가 광주에 7여단 2개 대대 가 계엄군으로 나가 있는데 소요 진압작전을 못하고 매우 고전하고 있다.
그 러니 崔장군이 지휘하는 11여단이 거기에 나가게 되었으니 가서 임무수행 을 잘하도록 하라고 한 것으로 기억한다.
(질문) 그때 특별하게 다른 얘기는 없었는가? 가령 현지에서 어떤 유언비 어가 있고...
(증언)좋지 않은 유언비어가 있는데 경상도 사람들이 와서 光州사람을 괴 롭힌다는 내용이었다.
崔 11공수여단장의 증언은 정호용특전사령관을 만나 光州 투입 사실을 전 해들은 시각은 증파 이유와 光州상황과는 맞지않아 증파 각본이 이미 결정 돼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말해 崔여단장이 증파 지시를 전해받은 18일 오후 3시 光州에는 별다른 상황이 없었다.
전교사 작전상황일지를 통 해 보면 18일 오후 3시 50분에 7공수 33,35대대는 경찰과 함께 최초로 시위 진압에 나섰다는 점과 차이를 두고 있다.
鄭사령관이 7여단 2개 대대가 소 요 진압작전에 고전하고 있다는 말은 그런 점에서 맞지 않다고 보여지며, 따라서 증파결정은 사전에 나 있었음을 판단할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증파된 11공수여단은 19일 오전 6시 30분 7공수여단 35 대대를 배속받아 光州 동구권 지역을 담당하고 7공수여단 33대대는 31사단 예비대로 배속 전환하라는 사단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이에따라 도청및 光 州 남부지역은 경찰이, 光州 서부 일부및 북구권은 31사단 96연대가 담당하 게 됐다.
19일 기존 7공수여단과 증파된 11공수여단의 光州진압상황을 특전사 전 투상보를 통해 시간대별로 옮겨본다.
<7공수여단> 04:00 거점 인계(33,35대대-11여단 61연대에). 11:00 33대대 1중대 광주 제일고앞 출동,그러나 첩보불량으로 즉시 복귀.
31사단장 35대대 방문.
금남로 3~4천여명 시위중 출동준비하라.
15:04 35대대 출동준비 완료.
15:15 35대대 출동(충장로,금남로).
15:40 33대대 출동 개시(31사단장 의명).
15:55 33대대 30(장교수)/250(사병수) 출동.
35대대는 도청에서 금남로쪽으로 진압.
33대대는 계속 기동하면서 진압.
16:20 35대대 도청방향으로 재배치.
17:00 도청앞 재집결.
18:30 전남대 복귀완료 전과:35대대 X 33대대:9명 체포,31사에 인계. 20:00 31사에서 작전회의(출동준비 재점검).
21:00 33대대 광주역 점령.
21:20 35대대 광주 종합터미널 점령.
22:50 33대대 전남대 복귀.
덧붙여 11공수 전투상보에 나타난 작전개요부분은 구체적으로 19일 11공수의 활약상을 설명하고 있다.
19일 광주로 이동한 여단은 04:00시부터 7 여단 33대대의 임무를 인수하여 시내 주요파출소및 목진지를 점령 소요사 태 예상지역을 거부하고 2개대대는 동일 10:00부터 시내 주 도로에 무력시 위를 위해 차량 30대로 출발하였음.
10:40분경 충장로 일대에 학생 2백여명이 집결하여 경계근무중인 계엄군에게 투석전과 화염병을 투척,이를 제지하자 소요군중은 순식간에 2천여명으로 증가되어 무력시위중인 62,63대대가 현장에 중원되어 소요를 진압.
14:50분경 금남로 한일은행앞에 군중 1천여명이 집결하여 계엄군과 대치중 15:00시경에는 2천여명으로 증가되어 여단 3개대대와 7여단 35대대가 출동 주요목을 점령후 소요군중을 해산시켰으나 16:45분경 해산된 군중이 시외버스 터미널에 재차 집결 여단은 시외터미널에 61대대,한일은행앞에 62대대,광주고교앞 63대대,광주소방서앞 에 35대대를 배치하여 소요군중 제압.
이후부터 소요군중은 폭도로 급변하여 시내 주요 관공서및 파출소에 방화를 하며 계엄군이 배치되지않은 취약지역에 테러활동을 하였으나 계엄군은 상기지역에서 계속 산발적인 소요군중은 진압하며 금남로 일대의 군중 집결을 저지시켰음.
치밀한 진압작전에 증파된 11공수여단등의 보다 참혹한 진압방법을 동원, 계엄군 철수를 외치는 시민들을 무차별 가격했다.
이러한 신군부측은 7공 수와 11공수를 光州로 끌어들인 것에 만족하지않고 19일 오전 9시 30분 尹 興禎 전교사령관에 의해 1개 공수여단의 증원이 또다시 요청됐다.
첫댓글 나쁜놈
나쁜새끼
찢어 죽인놈들
자한당 대표가 민주화 묘역에 온다지요
지금도 그런 정치 놀이가 통할가요?????
그놈들의 근성은 어찌할 방법이 없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