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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겨울 볕 아래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 북설악
1. 일자: 2017. 1. 7 (토)
2. 장소: 상봉(1242m)
3. 행로 및 시간
[화암사 일주문(09:22) -> (수암/쌀바위) -> 성인대(10:27) -> 낙타바위(10:44~50) -> 성인재(11:07) -> 전망바위(12:37~13:27) -> 대간 갈림(14:02) -> (너덜) -> 상봉(14:48, 화암재 0.8km) -> (험로) -> 화암재(15:50, 1100m) -> 화암사 일주문(17:35)]
< 북설악 비경 산행을 준비하며 >
“어둠 속에서 샘터가 목격되고 곧 너덜이 시작된다. 한바탕 돌과 싸움을 벌이고 나니 길은 이내 순해지고 상봉에 도착한다. (중략) 상봉 하산 길은 고난이었다. 북사면이라 눈이 녹지 않은 험로, 발 디딜 곳조차 마땅치 않은 얼어붙은 밧줄 4곳을 지나 화암재까지 0.8km는 무척 길게 느껴졌다. 한참을 또 치고 오르자 평지가 나타난다. 표지기가 어지럽다. 직감적으로 우측으로 갔다 돌아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일행들은 좌측으로 내려간다. 맞겠지 하고 의심 없이 전진한다. 가파른 내리막이 이어진다. 순간‘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나만이 아니었다. 너무 많이 내려와 버렸다. 진행 방향으론 산이 없다. 확실하다 신선봉을 지나쳐 와 버렸다. 우려가 현실이 되자, 걱정은 농으로 변한다. 개근 종주자들에게 줄 선물이 남게 생겼다는 대장님, 신선봉을 갔다 오지 않으면 종주를 인정할 수 없다는 채왕님, 선물 대신 달라는 옥혜님…. 그 틈에서 상황을 부추기며 나름 즐거움을 찾는 나, 지나친 신선봉은 많은 유쾌한 이야기를 만들어 주었다. 헬기장에 도착했다. 지나쳐 온 신선봉의 모습이 선명하다. 후미가 막 신선봉에 도착했다는 무전이 온다. 신선봉을 배경으로 선두 단체사진을 찍는다. 신선봉 정상석 사진은 후미에게 부탁하자!”
벌써 20개월 전 그날의‘신선봉 사건’은 288 동지들의 넉넉한 마음씀씀이를 보여주는, 다시 생각해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즐거운 추억이었다. 실수는 누구나 하는 법, 지치고 힘겨운 상황에서 누구 하나 짜증내지 않고 실수를 내 탓으로 여기고, 함께 웃으며 남은 길을 이어가던 일은 어쩌면 백두대간 산행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그 현장에 다시 발을 들여 놓으려 한다. 묵은 숙제를 하러 간다.
갈 길의 대강을 살핀다. 화암사 일주문~성인재 갈림 90분, 성인재~상봉 2시간 반, 상봉~신선봉 60분, 신선봉~화암사 2시간. 거리는 11.5km로 그리 길지 않지만 눈 내린 겨울임을 감안하면 식사와 여유시간 포함 8시간의 긴 산행이 예상된다. 랜턴과 스피츠, 클램폰을 배낭에 생겨 넣는다.
< 오른 자들이 찍은 신선봉의 여명 / 지나친 자들은 신선봉을 배경으로 >
< 희망사항 >
산행 몇 주 전 늘 그렇듯 산거북님의 전화가 온다. 유박사님이 저렴한 가격에 28인승 버스를 예약 가능하니 확인해 보라 한다. 몇 통의 전화 후 밴드에 정기산행 공지를 한다. 그날이 12월 16일. 이후 참석인원의 변동은 있었으나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되어 갔다.
● 288 신년산행 공지 ●
1. 일자: '17. 1. 7(토)
2. 산행지: 북설악 성인대+신선봉
3. 시간 계획(잠정)
- 복정 06:10 ~ 동서울 06:30 ~ 화암사 09:00 ~ 산행 ~ 17:00 화암사 ~ 18:30 척산온
천 ~ 20:00 뒤풀이. 귀경
4. 참석자 14명
- 바람님, 해운님, 산거북님, 산수담님, 유박사님, 다정이님, 현철님, 다리님,
옥혜님, 아이넷님, 명동. 여행사랑님, 아카님, 돈도니님.
5. 교통편: 28인승 대절 버스
6. 회비: 총비용 사용액 1/n.
7. 추가 참석자 환영합니다. ^&^
8. 좋은 의견 있으시면 반영하겠습니다.~~
여행은 모름지기 그 준비 자체가 즐거워야 한다. 밴드에 공지를 올리니 댓글이 쏟아져 들어온다. 업무는 잠시 뒷전으로 미루고 좀 더 나은 대안들을 찾느라 분주하다. 즐거운 일상이다. 새해 첫 산행에 많은 분들이 오셔서 함께 즐거운 산행을 하길 바래본다.
산행 전날 밤, 버스기사에게 전화가 온다. 일정과 타고 갈 버스 사진을 주고 받고 나니, 정말로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가자는 최종 14명 당초보다는 줄었으나 이 한겨울 험한 산에 동참하는 인원들 치고는 결코 작지 않은 숫자다. 일기예보를 살핀다. 기온 따스하고 바람도 없다. 강수확률 20%, 이 숫자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현장에서 확인해 볼 일이다.
(여기까지는 산행 전 준비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실제 산행은 이와는 달랐다.)
< 화암사 가는 길에 >
좌석버스를 타면 도속도로를 경유해 바로 복정에 가지만 아무래도 토요일 첫차 출발시간이 불안하다. 산수담님께 복정에서의 인원 확인을 부탁하고 강변역으로 향한다. 여유롭게 출발했는데도 시간이 빠듯하다. 복정에서 버스가 출발했고, 강변역에 일찍 도착한 일행들에게서 연락이 온다. 허겁지겁 역에 내려 겨우 버스에 탑승한다. 버스 안이 환하다. 이제껏 보지 못한 럭셔리 리무진이다. 어제 밤 기사가 버스가 마음에 들 것이라 말해 반신반의했는데 기대 이상이다. 반가운 얼굴들과 인사하고 자리에 앉는다. 현철님과 돈도니님은 참 오랜만이다. 버스 우측 맨 앞자리 산악회 대장들만 앉는 자리라 어겼고, 무척 편할 줄 알았는데, 시야가 확 트인 것 빼고는 다른 게 없다. 오리려 앞 공간 여유가 더 없다. 버스 TV 스크린에‘힐링영상’이 조용한 음악과 함께 방영된다. 화질이 무척 선명하고 내용도 훌륭하다. 무언가 대접받는 느낌이다. 참 편하다. 내가 모르는 이리 고급스러운 버스 안 세상도 있었구나 하고, 또‘아니 이 버스 그 H사 차란 말인가’하고 또 한번 놀란다.
< 버스 안 모습 >
차 안은 이내 조용해지고, 미끄러지듯 고속도롤 질주한다. 날이 밝아오자 숨었던 풍경이 하나 둘 살아난다. 땅에는 서리가 내렸고 야산 나뭇가지에는 상고대가 일었다. 자욱한 안개를 보며 오늘 날이 맑으려나 하는 희망을 읽는다. 미시령 터널을 지나 속초로 접어든다. 차창으로 본 울산바위는 아! 하는 탄성을 자아낸다. 9시 15분, 화암사 일주문이 보이는 공터에 선다.
< 화암사에서 성인재 >
새해 첫 산행을 한다. 설렌다. 금강사 화암사 일주문을 배경으로 288 13명이 도열한다. 깨끗한 날씨만큼이나 환한 미소를 사진에 담고 길을 나선다. 시작고도가 300미터가 되지 않는다. 상봉이 1242미터이니 비고 1000미터를 이겨야 한다. 화암사를 향하는 도로 길은 워밍업 하기에 그만이다.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걸으며 몸과 마음을 산에 적응시킨다. 화암사 앞 들머리에서 행장을 준비한다. 아카님과 돈도니님은 일단 성인재까지는 함께 하기로 한다. 오늘 산행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4분이나 함께했다. 그 까닭에 등로가 훤하다.
잔설이 남아있는 등로 클램폰을 미리 찬 이와 나중에 찰 사람들이 뒤엉켜 서로가 잘 했다며 가벼운 농을 주고받는 사이 수암에 도착한다. 갈 길이 먼지라 그냥 지나친다. 다만 ‘수’의 의미가 ‘쌀’을 뜻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시루떡 바위를 지나며 비탈이 시작된다. 평지에 익숙했던 종아리에 무리가 온다. 잠시 숨을 고르며 바라다본 속초 시가지와 멀리 바다의 모습에 내가 설악에 들어와 있음을 실감한다. 산에서 바라본 바다는 언제나 아스라한 추억을 떠올린다. 시원(始原)의 흔적 때문인지 모르겠다. 나뭇가지에 막혔던 시야가 트이자 우측으로 눈의 농담으로 더욱 골격이 분명한 산군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정점에는 가야 할 상봉과 신선봉이 있다. 그 높이와 우람함이 감탄을 자아낸다. 저길 가야 한다 말인가? 헐~~~
< 들머리에서 / 올려다 본 상봉 >
10시가 지난다. 시간에 대한 감이 없다. 좌우로 펼쳐지는 초반 풍경이 시간을 잊게 한다. 새로 놓인 계단을 지나 오늘의 일차관문 성인대에 당도한다. 성인대/신선대/신선암/성인암 등 지명이 헷갈린다. 지도에는 어찌되었건 현지 표지판은 신선대라 칭한다. 기이한 바위가 있고 주변이 확 트여 최고의 조망을 보여준다. 삼삼오오 모여 사진 찍기에 분주하다. 평소 사진 촬영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산수담님도 휴대폰 카메라를 든 걸 보며 예사로운 곳이 아니다. 만만치 않은 비탈을 치고 온 보람을 이국적이고 확 트인 풍경에서 찾는다. 북설악 최고의 조망터란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산거북님이 일행을 출입금지 금줄 너머로 인도한다. 몇 걸음 걷지 않아 헉! 하는 신음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이곳이 진짜배기다. 햇살이 내려앉는 하늘 밑에 거대한 암괴 덩어리가 떡허니 버티고 있질 않은가? 울산바위가 거대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역광으로 빛나는 광채가 그 존재감을 더 크게 한다. 한 마디로 ‘오늘 땡잡았다.’놀라운 것은 주인공이 따로 없을 만큼 화려한 풍경들이 도처에서 목격된다는 사실이다. 속초로 이어지는 야산과 들녘과 먼 바다, 흰 눈을 안고 거대하게 서 있는 북설악의 연봉들, 그리고 무엇보다는 눈 길을 잡아매는 성인암의 평탄한 마당바위…. 설악에 이런데도 있었나 할 만큼 색다른 비경이다. 여기저기서 오길 잘 했다는 칭찬이 이어진다.
후미에 서 옥혜님, 아이넷님, 아카님과 여유롭게 풍경을 즐기며 연신 셔터를 누른다. 역광으로 반사되는 울산바위를 배경으로 한 옥혜님의 모습이 멋져 멀리 두고 잡아본다. 눈으로 본 감동이 사진에 고스란히 담긴다. 지나온 미시령 터널이 바로 눈 아래 있다. 도로가 구불거린다. 이 역시 색다른 풍경이다.
< 성인암에서의 풍경과 즐거운 어울림 >
성인암 풍경의 정점, 낙타바위 앞에 일행들이 다시 도열한다. 그 형상도 낙타를 닮았지만 바위의 색감이 영락없는 낙타 색이다. 단체사진을 찍고도 또 흩어져 모습 담기에 여념이 없다. 미녀 사총사의 모습을 담는다. 288의 보석들이다. 그들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한 모임이겠는가? ㅎㅎㅎ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기다 다시 신선대로 돌아온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바위 앞에 서 있다. 젊은 처자들을 보자 총각 아이넷님은 자긴 여기 남겠다 농을 한다. 보아하니 학생들 같은데 조교가 되어 출석점검 해야겠단다. 특유의 느릿한, 썰렁한 유머가 오늘도 빛을 발한다.
11:07, 출입금지 팻말이 선명한 성인재에 도착했다. 당초 이곳이 목적지였던 아카님과 돈도니님이 생각이 달라지나 보다. 점심은 먹여야 하지 않겠냐며 함께 가 보겠단다. 역시 타고난 산꾼들이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눈 밭 속으로 들어선다. 잎을 떨어 낸 참나무 군락이 도열해 있고, 그 밑은 짙은 눈밭이다. 클램폰에서 전해오는 눈 밟는 소리가 뽀드득 하며 경쾌하게 전해져 온다. 제대로 된 겨울 산행을 해 보자!
< 성인재에서 상봉 >
또 시간이 잊혀져 간다. 긴 비탈을 오르느라 힘겨움이 배가 된다. 화려한 풍경은 사라지고 된비알만이 쭉 이어진다. 말수가 적어진다. 오직 가야 할 눈 덮인 길에 신경을 집중한다. 작은 전망 쉼터에서 바라 본 울산바위는 거대한 잿빛 암괴다. 성인암이 저만치 멀어져 있다. 한 시간 이상을 아무 잡념 없이 걷기만 했다. 눈을 헤치며 올라설 때는 허벅지에 묵직함이 전해오고, 비탈을 내려갈 때는 온 신경이 발끝에 모아진다. 가파른 경사를 내려갈 때 엉덩이를 땅에 붙여 미끄럼을 타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렇게 웃고 떠들며 험한 길을 슬기롭게 헤쳐 나온다. 후미로 오는데도 이리 힘든데 앞서가며 러셀하며 걷는 산거북님과 산수담님의 수고는 오죽 하겠는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꾸벅!!
< 눈을 헤치며 / 식당 터에 모여 있는 선두 >
고도를 서서히 높여간다. 높이에 비례하여 눈 양이 눈에 띄게 많아진다. 12시가 막 지난다. 다시 능선에 선다. 시야가 확 트인다. 울산바위와 성인대, 속초 바다가 이젠 멀어져 있다. 발 아래 미시령 옛 도로가 구불거린다. 한 때는 겨울 낭만을 즐기려 길을 나선 나들이 객들로 붐비던 도로는 흰 눈에 덮인 채 정적만이 감돈다. 길에도 운명이란 게 있나 보다. 미시령에서 상봉 가는 길에 한번쯤 지나온 등로를 되돌아 보라 했다. 뱀처럼 구불거리는 미시령 옛 고갯길 넘어 황철봉, 울산바위, 그리고 동해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라 했다. 컴컴한 밤에 지나쳤던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명품 풍경에 빠져든다.
지능선 눈 덮인 북사면을 지나 주능선에 들어서니 주변이 훤해져 좋다. 겨울 산의 몸통들이 여실히 드러난다. 상봉이 눈 앞에 바로 보인다. 볼수록 험악한 암괴다. 후미에 처져 걷는다. 선두와는 거리가 꽤 나나 보다. 제법 험한 바위 길을 돌아든다. 원래라면 암릉과 해산굴을 지나 신선샘쯤을 지나야 하는데, 큰 암릉도 없었고 더구나 굴은 분명 지나지 않았다. 예정된 등로와는 다르게 가고 있나 보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발 아래 평탄한 바위에 일행들이 서 있다. 아마도 그곳에서 식당을 차릴 모양이다. 해가 아주 잘 드는 양지 바른 곳이다. 먼 샸으로 사진 한 장 찍고는 나도 그리로 내려간다. 가면서 보니 이곳은 너덜지대 바로 위다. 부서진 바위 돌 위로 흰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따스한 겨울 햇살이 눈을 녹이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기억에 신선샘은 너덜 전에 있으니 우회 길로 왔나 보다. 덕분에 덜 힘겹게 올라왔다. 실제가 아니라 해도 그렇게 믿어야 한다. (다시 기억을 더듬이 보니 해산굴을 지났다. 바위 틈에서 배낭까지 벗고 아이넷님 손을 잡고 겨우 올라온 기억이 뒤늦게 났다.^^)
바위 위 작은 공터에 풍성한 식당이 차려진다. 좁지만 전망이 기가 막히고 볕이 좋은 명당이다. 바람님, 해운님, 옥혜님, 아카님과 함께 자리했다. 해운님이 싸온 맛 난 음식이 탐이 나서 옆에 앉는다. 물이 끓여지고 바람님표 부산오뎅과 아카님의 만두가 투하된다. 보글보글 라면이 끓는다. 만두가 더해진다. 허겁지겁 음식을 흡입한다. 배 부르지, 몸 따스하지, 좋은 분들과 즐거운 이야기 하지, 음식 맛나지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다. 눈 덮인 북사면을 치고 오르며 잠시 가졌던,‘미쳤지 한 겨울에 설산, 그것도 비탐구간을 오나니’하며 후회하던 순간의 기억은 멀리 날아가 버린다.
오랜만에 참 맛나게 산에서 식사를 했다. 커피와 다리님이 준비한 보약까지 얻어 먹고 다시 길을 나선다. 내리막 험로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 눈이 덮인 희미한 암릉 길을 산거북님은 잘도 찾아 낸다. 덕분에 알바의 공포에서 벗어나 한가롭게 걷는다. 험로를 벗어나자 이번에는 긴 오르막이 나타난다. 고도는 1000미터를 넘어선다. 사방이 고요하다. 적막감 마저 든다. 지도를 살핀다. 머지 않아 미시령에서 올라오는 백두대간 길과 마주한다. 그 전까지 한참을 치고 올라야 한다. 점심으로 먹었던 음식이 에너지를 보태주지 않았다면 무척 힘겨웠을 길이다,
< 상봉 가늘 길에서 본 전경 >
12시가 막 지난다. 대간 길과 만난다. 특별한 이정과 마주한다. 일종의 무인 감시탑인데 경고문 만이 보인다. 이제부턴 경험했던 곳을 걷게 된다는 사실이 조금 위안이 된다. 햇살이 무척 따갑다. 계절은 소한 지나 대한으로 향해 가는 일년 중 가장 춥다는 이 시기에 날이 이리 눅어도 되나 모르겠다. 덕분에 최상의 조건에서 겨울 산행을 한다. 고마울 따름이다. 이제 금방이면 상봉에 닿겠지 하는 기대는 착각이었다. 고도가 순해져 이제 걸을 만 하겠구나 하는데 난데없는 너덜지대가 나타난다. 처음엔 신기해 걷는 재미가 있었으나 이내 흉기로 변한다. 발을 헛디뎌 돌 틈으로 빠졌다 힘겹게 나온 후로는 온 신경이 발 밑에 모아진다. 30여분 너덜과 사투 끝에 마침내 상봉에 당도했다. 모든 게 발아래 존재한다. 시간은 14:48.
< 북설악 상봉에서 >
북설악의 으뜸지에 올라섰다. 지난 대간에서 동도 트기 전에 올랐다는 사실만이 가물거리는, 시각적 기억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이곳에 오늘은 훤한 대낮 그것도 볕 좋은 날에 왔다. 확 트인 사위가 엄청난 개방감을 준다. 오늘은 그 흉물스러운 북설악 바람마저 없다. 서둘러 단체사진을 찍는다. 3시로 향해가는 시간이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래도 눈에 사방으로 돌려 머리와 가슴에 상봉의 기운을 담아둔다. 가야 할 신선봉을 바라본다. 아무래도 이번에도 그분과는 인연이 아닌가 보다,
< 상봉에서 화암사 >
이제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그 내리막이 보통 험하지 않다. 첫 내리막 밧줄을 잡는 순간, 어둠 속 밧줄 4개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난다. 다행히 오늘은 날이 밝아 주변 위험을 감지할 수 있다. 밧줄 매듭을 단단히 잡고 천천히 내려선다. 앞서가는 아카님도 힘겨워하면서도 잘 간다. 후미는 아이넷님이 든든히 받쳐준다. 험로를 내려서면 잠시 쉬었다 다시 밧줄이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이 순간 이미 가 보았다는 사실은 그래서 길을 좀 안다는 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밧줄지대를 벗어나 이제 좀 쉽겠지 했는데 웬 걸 아카님이 돌 틈에 빠졌다. 상체가 완전히 바위 틈에 들어가 힘겹게 올라온다. 미안했다. 성인암만 간다고 꼬드겨 왔는데 이 험지로 유인했으니 말이다. 다행히 씩씩하다. 이제 웬만한 비탈은 크지 걱정하지 않을 만큼 험로에 익숙해져 갈 무렵 일행들의 웅성거림이 들린다. 화암재다. 이정표는 없지만 너른 공터가 갈림이 있음을 알린다. 상봉~화암재 0.8km를 1시간에 내려왔다. 이런 속도로 신선봉까지 가려 했으니, 스스로를 알지어다. ㅎㅎ
화암사까지의 거리는 4km가 조금 넘을 것 같다. 길 사정이 크지 어렵지 않다 하나 눈 쌓인 사면을 내려가는 건 만만치 않고, 더구나 화암재의 고도가 1100미터 임을 감안하면 길의 가파름을 예상할 수 있어 걱정이 되었다. 무엇보다 어둡기 전에 내려가야 한다. 예상대로 초반 비탈은 가팔랐다. 그래도 조심스레 내려가니 갈 만하다. 중 후미로 쳐져 홀로 눈 길을 헤쳐간다. 다정이님 일행 4분이 무슨 재미난 이야기를 하며 앞서가는 모습이 보인다. 산에선 조용하던 다리님이 오늘은 무척 신나 보인다. 벗이 함께 한다는 건 무척 기분 좋은 일이리라.
한동안 눈 산행은 경험하질 못했는데 오늘 한꺼번에 묵은 숙제를 한다. 5시가 가까워오자 산에 어둠이 내려앉으려 한다. 전면으로 속초 시가지의 모습이 얼핏 보이는데 거리는 아직 한참 남았다. 생각에 잠긴다. 이런 저런….
길 사정이 예상보다 험하다. 하기야 겨울 설악 어디를 간들 편한 곳이 있으련만, 비탐구간을 너무 얕잡아 본 게 아닌가 싶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좋다 하니 가보자라 한 단순한 마음이 오늘 산행을 있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일행들은 잘도 간다. 험한 사지를 넘어온 이들 같지 않게 모두 씩씩하다. 대간꾼의 저력이리라.
고도가 점점 낮아진다. 전반적 길 사정이 크게 위험하지 않아 다행이다. 고도가 600미터 대로 내려오자 눈의 양의 크게 줄어든다. 선두가 떠나며 클램폰을 벗으라 알려온다. 믿고 벗어버린다. 족쇄에서 해방된 발이 날아갈 듯 시원하다. 그 힘으로 나머지 비탈을 힘차게 내려선다. 이내 평지가 나타난다. 길에서 유원지 기분이 난다.
고단한 날개를 접을 시간이다.‘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은 등산에서도 통한다. 오늘 산행은 처음과 끝은 천국이고 중간은 고난이었다. 화암사로 향하는 넓고 편한 길을 걸으며 노곤함, 피곤함과 함께 또 무언가를 해냈구나 하는 성취감을 느낀다. 해는 지고 갈 길은 먼데가 아닌, 땅거미가 지고 사위는 적막해도 내 집이 저기 있음을 알기에 안도한다. 함께한 13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리라. 고마울 따름이다.
< 에필로그 >
땅거미가 내려앉는다. 짧은 겨울 해가 지고 있다. 금새 사위가 어두워진다. 사람이 걸어 길이 된다 했다. 산을 내려와 내 발로 넘은 봉우리들을 바라볼 때의 대견함은 귀중한 것이다. 먼저 내려온 일행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신발에 묻은 흙을 떨고 버스에 오른다. 은은한 조명이 깔린 버스 안은 아득했다. 힘든 하루 일을 끝내고 집에 들어온 느낌이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다. 맞다. 오늘도 힘든 산행이었으나 즐거운 기억이 먼저다.
겨울 산의 매력은 모든 걸 벗어 던지고 추위와 눈과 맞서는 당당함에 있지 않나 싶다. 그 험한 여정에 내 스스로를 내던진 건 잘한 선택이었다. 이 생각은 함께 한 이들도 같을 거라 감히 단언한다. 북설악에서 성인대의 화려한 풍경에 넋을 잃었고, 상봉 그 험난함에 당당히 맞섰다. 겨울 볕 아래, 옹기종기 모여 나눈 맛난 식사처럼 오늘 산행은 따스한 기억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 북설악 산행 궤적 >
첫댓글 날씨가 포근해서 땀을 많이 흘렸네요.ㅋ
지난번 폭설 뒤로 비탐구간은 산행한 사람이 없었나 봐요.
덕분에 눈구경은 실컷하고 즐거운 산행이었습니다 ^^
앞서 길 잡아 주셔서 편히 다녀 왔습니다.
봄 피는 봄엔 울산바위 부근으로 길 잡아 주십시요~~~
추위와 눈과 맞서지 못한 나는, 그래서 모든 걸 안고 가나보다.
명동님 북설악 산행 같이 못해서 아쉽고, 부럽고.
그 어려운 길 가려면 작은 산행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네. 글도 사진도 멋져.
청한님 함께 못해 아쉬웠음. 근데 갔으면 무지 고생했을 듯...
또 다음을 기약합시다.^^
산행만큼 멋진글...어케 저걸 다 기억하지?^^
기억은 무슨.
사진보고 복기하는거지.
바로 올라 오느라 늦어 연락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