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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에는 남한강 여강(驪江)이 흐르고 있다. 그 여강 남쪽에는 큰 산이 없다.
여주의 진산은 북성산(275m)이다. 북성산의 한줄기 능선이 북으로 완만하게 흐른다.
이 산세가 다시 봉우리를 솟으면서 남쪽을 향하여 자리를 만든다. 세종의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은 그 품에 안겼다. 영릉(寧陵)은 북성산의 좌청룡으로 흐르는 능선
그 아래 혈(穴)자리에 둥지를 틀었다. 세종의 영릉에서 동북쪽으로 700미터 떨어진 곳이다.
좌청룡 용맥(龍脈)과 갈라져 효종의 영릉으로 가는 내룡(來龍)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내룡의 용맥은 다소 짧고 세종대왕의 영릉 용맥보다는 크기와 힘도 훨씬 작다고 보여 진다.
이 능선은 높지도 않고 수려하지 않다. 그 위세는 굳건하여 형국은 비교적 좋다고 한다.
능역에 들어서면 소나무 숲이 장관이다. 그 숲길은 걷기 참으로 좋다.
이웃해 있는 세종의 영릉에 비해서는 찾는 이가 아주 적다. 그래서 참으로 호젓하다.
왕릉 진입공간에서 늘 만나는 홍살문이다. 돌아가신 왕이 영면하는 신성한 공간이다.
밖에서 각종 사특한 기(氣)들이 능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 기를 막아내는 첫 바리케이트, 홍살문이다.
홍살문을 지나서 능으로 들어가는 길이 참도(參道)이다. 박석(薄石)이라는 납작한 돌로 길게 놓여져 있는 길이다.
산 사람의 공간은 1 3 5 7 9의 양수(陽數)를 활용해 설계를 한다. 궁궐 참도는 삼도(三道)로 구성된다.
죽은 자의 공간은 2 4 6 8 10의 음수(陰數)로 배치한다. 왕릉 참도는 바로 이도(二道)로 구성하고 있다.
참도는 왼쪽이 오른쪽 보다 넓고 높이가 한 단(5cm 정도) 더 높다. 한 단 높은 왼쪽 길은 신들만이 다닌다는
신도(神道), 신로(神路) 이다.오른쪽 길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 해서 어도(御道), 인로(人路) 라고 한다.
그 옆의 잔디는 능역안에서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능참봉길이다.
능의 진입공간 초입에 명당수 금천을 두기 마련이다.
그 금천을 건너는 금천교를 둔다.영릉은 홍살문을 지나서 금천을 냈다.
조선의 기(氣)는 물을 만나면 꼼짝 못한다.
그 기는 수영을 못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조선의 궁궐이나 왕릉 사찰 진입로에서 만나는 금천(禁川)이다.
그 위에 놓인 금천교(禁川橋)다.
수영을 못하는 기(氣)가 신성한 공간을 침입하지 못하게 막아서는
일종의 바리케이트 역할을 하는 금천이다. 금천은 속계와 성역의 경계역할도 한다.
돌아가신 선왕에 제(祭)을 올리는 제향공간 정자각(丁字閣)이다.
그 건물이 고무레 정(丁) 모양을 하고 있어 정자각(丁字閣)이라고 부른다.
왕과 신료들이 왕릉에 참배할 때 제사를 올리는 제향시설 정자각이다.
정자각의 잡상은 아주 단순하다. 삼장법사와 그 제자(손오공 자팔계) 등
잡상 셋이 단촐하게 왕릉을 지킨다. 경회루에는 잡상 11개를 올렸고 궁궐에 잡상 7~9개가 있다.
참도를 밟고 정자각에서 동쪽으로 꺽어 들면 정자각 동쪽을 만난다.
정자각으로 오르는 계단은 왼쪽과 중간 그리고 오른쪽으로 3개가 설치되어 있다.
중간 계단은 신계(神階)라 하여 혼령이 오르내리는 계단이다.
왼쪽과 오른쪽 계단은 왕과 제관이 오르내리는 계단이다.
이 계단은 오른 발을 먼저 내딛어 올랐다고 한다. 동쪽은 시작과 탄생, 즉 양(陽)을 뜻한다.
가운데 계단은 수려한 구름무늬를 새긴 소맷돌(난간)과 삼태극 무늬의 고석(鼓石·북 모양의 둥근 돌)을
화려하게 꾸몄다. 다른 계단은 소박한 계단만 갖췄다. 여기에도 신성한 세계와 세속 세계를 구분하는
원리가 숨어 있다. 화려한 계단은 선대 임금의 영혼이 땅을 떠나 구름을 밟고 하늘로 올라가는 상징이다. .
홍살문 정자각 능침은 직선 위에 놓였다.
정자각에서 참도를 따라 바라본 능역의 진입공간이다.
정자각의 기둥 아래쪽은 하얀 칠이 되어있고 푸른 선도 윗 부문에 그어져있다.
모든 기둥 밑부분이 흰색에 푸른색으로 띠를 두른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주근도배(柱根塗褙)를 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백색화지를 바르고 청색 화지로 띠를 둘렀다고 한다.
멀리서 보면 마치 기둥이 공중에 떠 있어 정자각도 하늘위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구름 위는 신들이 노니는 공간으로 정자각이 천국에 있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정자각에 그냥 서서는 왕릉의 봉분을 볼 수 없다.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춰 예를 갖추면 비로소 능침을 대할 수 있다.
정자각에서 제향을 받으신 조상들은 능침으로 돌아간다.
이때 정자각 뒷쪽에 놓인 돌다리를 밟고 신성한 능침으로 올라간다.
조선 왕릉의 표석 중 최초로 건립된 효종 영릉의 표석이다.
이곳 표석은 조선후기 왕릉상설제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16세기 이후 왕릉의 신도비 건립이 중단된다. 조선후기로 가면 신도비를 대신해서
표석을 만드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곳 비석을 계기로 왕릉표석의 기준이 마련되었다.
영릉은 독특한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제도를 취하고 있다.부부가 따로 봉분을 갖는 쌍릉형태이다.
두 봉분을 좌우로 나란하게 배치한 것이 아니다. 같은 언덕(同原) 아래 쪽에 부인의 묘를, 위에는 남편의
묘를 비스듬하게 두는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이다.
밑에서 보면 왕의 능은 상단에서 약간은 좌측에 위치하며 인선왕후는 아래에서 약간은 오른쪽으로
치우치게 배치하였다. 남우여좌(男右女左)의 형태를 따랐다. 조선의 능(陵)중에서 유일하게 아래위에
상하장으로 모셨다. 그 후 경종의 의릉이 동원상하릉제를 취하고 있다.
이렇게 부부의 능을 특이하게도 아래와 위쪽에 둔 것은 왕성한 산 혈맥의 생기를 모두 고르게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풍수가들은 말한다..
풍수에서 땅은 살아있는 생명체로 인정한다.
땅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숨을 쉰다고 인식한다.
땅이 살아 있기에 인간도 그 위에서 목숨을 이어간다.
신토불이(身土不二), 사실 땅과 인간은 하나인 것이다.
땅과 사람은 서로 호흡하고 연관되어 상호작용하는 유기체인 것이다.
효종이 여주 땅으로 오는데는 사연이 참으로 기구하였다.
그의 삶이 거칠고 어렵고 힘들었듯이 죽어서 영면하는 길도 역시 평온치 않았다.
1659년 5월 4일 효종의 얼굴에 난 종기가 심하게 부어서 안포(眼胞·눈가)에 산침을 놓았다.
그러나 혈락(血絡)을 찔러 피가 멈추지 않은 채 효종은 창덕궁 대조전에서 41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의료사고로 추정된다. 이 일로 의관들은 국문을 당하고 유배됐다.
효종은 즉위한지 10년만에 41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상이 침을 맞고 나서 침구멍으로 피가 나오니 상이 이르기를,
“(신)가귀가 아니었더라면 병이 위태로울 뻔하였다.”하였다. 피가 계속 그치지 않고 솟아 나왔는데
이는 침이 혈락(血絡)을 범했기 때문이었다. 제조 이하에게 물러나가라고 명하고 나서
빨리 피를 멈추게 하는 약을 바르게 하였는데도 피가 그치지 않으니, 제조와 의관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상의 증후가 점점 위급한 상황으로 치달으니, 약방에서 청심원(淸心元)과 독삼탕(獨參湯)을 올렸다.
백관들은 놀라서 황급하게 모두 합문(閤門) 밖에 모였는데, 이윽고 상이 삼공(三公)과 송시열과 송준길
약방 제조를 부르라고 명하였다. 승지ㆍ사관과 제신(諸臣)들도 뒤따라 들어가 어상(御床) 아래 부복하였는데,
상은 이미 승하하였고 왕세자가 영외(楹外)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승하한 시간은 사시(巳時)에서
오시(午時) 사이였다.」 (『효종실록』, 효종 10년 5월 4일)
효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현종은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을 산릉(山陵)의 일을
총괄지휘 할 총호사로 임명하였다. 심지원은 능지(陵地)를 찾아 나서면서 전 참의 윤선도(尹善道)와
동행 할 것을 요청하여 승낙을 받았다. 윤선도는 효종의 사부(師傅)였다.
당시에는 파직 중에 있어 군직(軍職)을 붙여 관원으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총호사 일행은 현재 영릉(寧陵)의 자리인 홍제동(弘濟洞)과 융릉(隆陵)이 있는 수원읍치의 산을
쓸 만한 능지로 추천하였다. 이때 예조판서 윤강(尹絳)은 홍제동은 산이 멀리서 왔고 힘이 있어
그 역량이 매우 크다고 풍수가들이 말을 하고 있으나 혈(穴)이 제대로 맺히지 않은 가화(假花)일뿐더러
산줄기 역시 1백여 보(步)에 불과하고 나약하여 힘이 없기가 마치 두렁이의 모양과 같아 홍제동 산은
세종(世宗)의 능인 영릉(英陵)을 만들고 난 나머지 기운이 만든 곁가지에 불과하여 능을 조성할 만한 자리가
아니라고 평하였다.
윤선도는 “수원의 산은 눈에 번쩍 뜨일 정도로 상격(上格)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내룡(來龍)이
영릉(英陵)에 비해 조금 못하지만 진정 천리(千里)를 가도 그러한 곳은 없고 천 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곳으로, 비록 도선(道詵)이나 무학(無學)이 다시 살아난다고 하여도 다른 말이 없을 곳이다.
이는 내 소견만 그런 것이 아니고, 윤강·이원진(李元鎭)과 다른 여러 풍수가들도 문제점을 전혀 말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입이 마르도록 찬사를 연발하며 모두가 나라를 위해 축하를 한 자리다.”라고 밝히면서
수원의 산을 강력하게 추천을 하였다.
현종은 부왕(父王)인 효종이 홍제동 산을 멀어서 싫어했던 점을 감안하여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수원의 산을
장지로 정하도록 하여 능지 조성을 시작하였다.
판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이 극렬하게 반대를 하자 그 주변 인물들이 합세를 하여 논란이 이어졌다.
결국 효종이 승하한지 2개월 8일이 지난 7월 11일에서야 건원릉 우측 곧 현재의 원릉(元陵, 英祖 무덤)의
자리로 결정이 되었다.
송시열은 “막중한 일을 신이 맨 먼저 이의를 제기했었는데, 그 후 대신·재신(宰臣)들이 계속 상소문을 올려
지금까지도 결정이 되지 않고 있으니 신은 참으로 황공합니다. 그러나 만세 후에 오환(五患)이 있으리라는 것은
인사(人事)로 따져 보아 틀림없이 그리될 것입니다. 수원에는 언제나 6, 7천의 병마가 주둔해 있고, 지리적 여건도
3남(三南)의 요충지대에 해당되므로 만약 변란이 있게 되면 틀림없이 전쟁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수백 호의 민가를 일시에 철거하고 분묘들을 옮기고 생업을 깨뜨린다면, 그에 따른 원한과
한탄이 국가의 화기를 해칠 것입니다.”라며 수원의 산을 능지로 정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결국은 1659년 10월 29일 진시(辰時)에 건원릉 오른쪽 남동향(乾坐)의 능선에 효종을 장사지내니
그 곳이 영릉(寧陵)이다. 효종을 장사 지낸지 채 1년도 되기 전에 지대석(地臺石)을 비롯한 석물에 틈이
생기기 시작하자 현종은 영릉을 직접 둘러보고 보수를 지시하였다. 후에도 크고 작은 보수가 이어지자
송시열은 차라리 능침을 다시 쌓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급기야는
영림부령(靈林副令) 이익수(李翼秀)의 상소로 천릉(遷陵)을 하기에 이른다. 당시에 천릉을 하게 되면
유골에 문제가 있을 경우 송시열이 중벌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천릉을 하기 보다는 능침을 다시 고쳐
쌓을 것을 상언하였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렇지만 천릉을 하고 보니 광중(壙中)에 아무런 문제는 없었다.
다만 보토(補土)를 한 다음에 흙을 잘 다지지를 않는 등 부실한 작업이 문제가 되어 석물에 틈이 생기고,
빗물이 스며들었던 흔적이 있었다.
현종은 당시에 능을 조성한 책임자 들을 처벌하였으며, 효종의 국장 문제로 송시열은 현종의 신뢰를
잃게 되었다. 홍제동 산이 천릉지로 결정이 되자 쌍분(雙墳)으로 능을 조성할 경우 가운데가 정혈(正穴)인데
그 곳을 비워두게 되는 문제가 있으니 능을 위아래에 조성하기로 하였다. 홍제동 산 윗부분에 남향으로
능을 조성하여 현종 14년(1673) 10월 7일 사시(巳時)에 효종을 옮겨 모셨다.
효종의 능을 옮긴지 5개월여 만인 현종 15년(1674) 2월 23일 축시(丑時)에 경희궁 회상전에서
효종비 장씨가 승하하니 현종은 시호를 인선왕후(仁宣王后)로 하고 능지는 효종의 아래로 결정을 하였다.
이조판서 이상진은 능을 위아래로 조성을 할 경우 위의 땅을 파면 그 아래는 맥(脈)이 끊기는 법이라 하여 위아래로
능을 조성하는 것을 반대를 하였다.
현종은 당초의 계획대로 인선왕후를 아래의 자리에 모시도록 지시를 하였다.
한편 인선왕후의 상여는 1백50척의 배(舟)와 배를 움직이는 사람 3천6백90명이 동원되어
수로(水路)로 운반을 하여 같은 해 6월 4일 신시(申時)에 영릉(寧陵) 아래에 장사를 지냈다.
영릉(寧陵)은 예종 1년(1469) 3월 6일에 영릉(英陵)을 한성부원군 이계전(李季甸)의 묏자리에
천장을 하면서 청룡자락 북쪽에 있던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의 묏자리도 천장을 하도록 하였다.
현재의 영릉(寧陵)이 이인손의 무덤자리로 추정된다.
당쟁에 휘둘려 효종의 영릉은 수원읍치에서 건원릉으로 다시 여주 홍제동으로 이끌려 다녀야만 했다.
마치 그의 기구한 운명처럼.
효종(孝宗, 1619~1659)은 조선 제17대 왕이다.
본관은 전주, 이름은 ‘호(淏)’, 자는 ‘정연(靜淵)’이다.
호는 ‘죽오(竹梧)’이다. 인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인렬왕후(仁烈王后)이다.
비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1619년 5월 22일 서울 경행방 향교동(鄕校洞;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종로3가 부근)에서 태어났다.
1626년(인조 4)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졌고, 1631년 12세에 장씨와 혼인했다.
효종이 태어난 날 저녁에 흰 기운이 침실로 들어와 오래 머물다 흩어졌다고 한다.
천성이 매우 효성스러워 과일, 채소 같은 흔한 것이라도 반드시 아버지 인조에게 올린 뒤에야 먹으니
인조가 늘 효자라고 칭찬하며 사랑과 기대가 높았다. 인조의 병세가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시호를 효종이라 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명으로 아우 인평대군(麟坪大君)과 함께 비빈·종실 남녀 양반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피난했다. 이듬해 강화가 성립되자, 형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척화신 등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청나라에서 많은 고생을 겪다가 8년 만인 1645년 2월 소현세자가 먼저 돌아왔다.
효종은 청나라에 머물고 있었다. 그해 4월 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뜨자 5월에 조선으로 돌아와
9월 27일 세자로 책봉되었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효종은 조정의 배청 분위기와 함께 북벌계획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청나라와 연결된 김자점(金自點) 등
친청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이완(李浣)·유혁연(柳赫然)·원두표(元斗杓) 등의 무장을 종용해 북벌을 위한
군비 확충을 본격화했다.
그의 형 소현세자와 세자 빈 강씨 그리고 조카 석철 3형제는 억울하게 죽었다.
이를 딛고 왕위에 오른 효종이다.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하는 압박감에 시달렸을지 모른다.
당파가 다른 이들을 대하고 국사를 논하고 국정을 꾸려가면서 북벌(北伐)은 크나큰 과제고 부담감이었다.
효종의 능침은 천장하면서 병풍석을 없애고 난간석을 사용했다.
이후 이러한 제도가 한동안 지속됐다. 또 동자석주에 글씨를 새겨 방위를 표시했다.
상하 능이 나란한 일자형이 아니라 약간 사선에 놓였다. 자연의 지형을 잘 이용한 곡선미와 조형미가 아름답다.
영릉의 석호들은 해학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동원상하릉은 왕의 능침만 곡장을 두르고 왕비의 능은 두르지 않았다.
정자각과 곡장 사이를 하나의 공간으로 해석해 왕과 왕비가 같은 방을 쓰고 있다는 의미다.
효종 왕릉에서 바라본 효종비 인선왕후의 능이다. 봉분 위쪽에 살짝 솟아 오른 부분이 있다.그게 잉(孕)이다.
효종비 인선왕후의 능도 병풍석을 두르지 않았다. 난간석으로 대신했다.
인선왕후 장씨는 인조 때 조선의 4대 문장가로 유명한 영의정 장 유의 따님이다.
장 유는 덕수 장씨 명문가의 후손으로 척화파로 유명한 선원 김상용의 사위이다.
병조호란 때 삼전도 치욕을 치른 뒤 청은 청나라 왕의 공덕비를 세워달라고 요청한다.
인조는 이 경석 이 경전 이 희일 장 유 등 당시 4대 문장가에서 비문을 찬술할 것을
당부했다. 이 경석과 장 유의 비문이 채택돼 청나라로 보내 결국 이 경석의 비문을 쓴다.
조선왕릉은 재실 두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6.25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재실들이 멸실되었다.
조선왕릉의 재실은 대부분 원형을 잃었다. 다행히 영릉의 재실은 기본형태를
그대로 잘 유지하고 있다. 이 재실의 공간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보물(제1532호)로
지정되었다.
이곳 재실에는 수백 년된 노거수가 남아있다.특히 화양목은 보기드문 큰 노거수로 꼽히고 있다.
화양목은 생물학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가 매우 커서 천연기념물(제495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