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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는 물이다
-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오카리나/ 김가령
한 줌의 심장/박시영
회전 초밥/Daisy Kim
‘시는 물이다.’라는 소제목을 이번 달의 주제어로 선택했다. 시는 물이다 라는 말은 자칫 시쳇말로 ‘물로 본다’ 혹은 ‘물로 보냐!’는 오해의 소지를 충분히 담지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망설이기도 했지만, 시는 물이다라는 논리의 귀결점이 시를 쓰기 위한 ‘어떻게?’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를 원자라고 한다.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하를 띤 원자핵과 원자핵 주위를 돌고 있는 [-] 전하를 띤 전자로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물체는 모두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원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소는 금, 산소, 수소 등과 같이 원자로 이루어진 물질을 말한다. 또한 만물의 근원이 되는 항상 변하지 않는 구성 요소를 원소元素라고 한다. 시로 말하면 시를 구성하는 모든 형태적인 것들의 대상이나 목적물 모두를 원소라고 지칭해도 될 것 같다. 시를 논하는 자리에서 뜬금없이 과학, 그것도 원자, 원소라는 설명이 무엇에 소용되는가? 는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원소기호라는 것이 있다. 중, 고등학교 과학시간에 배운 ‘원소 주기율표’를 회상해 보자. 주기율에 따라 원소를 분류한 표다. 다시 말하면 원소를 기 약속된 일정한 기호로 한눈에 알 수 있게 표시한 도표다. 수소라는 원소가 있다. 원소기호는 H다. 수소는 냄새와 맛이 없는 기체 원소이며 원자 중에서 가장 간단한 구조다. 같은 공기 무게의 1/14 정도이며 가장 큰 특징은 작은 불꽃만 주어지면 즉시 폭발할 정도로 불이 잘 붙는 원소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원소기호는 O다, 산소라는 원소다. 무색, 무취, 무미의 안정된 기체다. 덧붙여 사람이 가장 쾌적하게 느끼는 산소의 농도는 숲이나, 바다 등의 자연환경에서 느껴지는 약 21.9% 이상의 산소 농도라고 한다. 참고로 대기 중 산소 농도는 20.9% 정도인데 이 농도가 7% 이하로 떨어지게 되면 4분 이내로 사망하게 된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불은 산소가 있어야 발생하거나 더 크게 타오를 수 있는 원소라는 것이다.
수소와 산소, 수소는 불만 닿아도 폭발하고 산소는 불을 지피기 위해 가장 필요한 원소라는 점이다. 하지만 둘이 결합하면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하나가 결합하면 H2O라는 원소 기호가 되면 이는 우리가 가장 잘 아는 ‘물’이다. 시는 물이다.’라는 글제의 핵심 소재인 물의 중요성에 대한 설명을 잠시 인용해 본다.
물의 중요성
*물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액체일 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이 존재하고 번성하는 거름이기도 하다. 인간의 몸은 약 70%가 물로 구성되어 있고, 사람은 매일 2.5L의 물을 여러 형태로 섭취하며, 사람의 수명이 70년이라고 할 때 평생 동안 마시는 물의 양은 약 60톤에 이른다고 한다. 물이 부족하면 몸의 특정 부위에서 문제가 생긴 다기보다는 몸 전체의 생리 과정에 이상이 발생한다. 몸에 필요한 거의 모든 성분은 물에 녹은 형태로서만 흡수되고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물은 노폐물을 배출할 때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 주위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물로 가득 차 있다고 볼 수 있다. 공기는 물론이고 우리의 눈동자도 수분이 촉촉이 젖어 있어 윤활 작용을 한다. 인간뿐만 아니라 단세포 생물에게 있어서도 물이 있어야 탄생, 생존, 진화가 가능하다. 인간을 구성하는 60조 개의 세포는 인체에서 필요로 하는 600여 가지의 효소를 생산한다. 이 효소의 생산 원료는 섭취하는 음식물에 함유되어 있으며, 세포질 속의 물이 회전하여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한다. 인간은 호흡을 통하여 산소를 공급받는데, 부족한 산소는 대체 산소로서 공급받아야 하는데, 이 역할을 하는 것도 바로 물이다. 모든 질병도 인체 내의 물과 깊은 관련이 있다. 세포 내의 건강한 물은 세포의 생리 활성을 정상적으로 유지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반대로 건강하지 못한 물은 세포의 생리 활성을 저하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생체와 성질이 잘 맞는 물을 섭취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는 암이나 당뇨병과 같은 난치병을 비정상 세포 주위의 물 구조를 바꾸어 줌으로써 치료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출처- 다음 백과사전 일부 인용」
‘시는 물이다’라는 글제를 다시 생각해본다. 시는 전혀 다른 원소와 원소가 만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물이라는 것을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만 보면 폭발하는 수소와 불에 꼭 필요한 산소가 만나, 물의 특징 중 하나인 불을 끄는 물이 된다는 것. 동시에 생명을 유지하는데 가장 필요한 물이 된다는 것. 시가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현상을 보고, 본 현상에 다른 현상을 이입해 또 다른 전혀 다른 현상을 만들어 내는 것. 어쩌면 창작이라는 과정이나 결과물이라는 것이 (시에서 통칭하는 시적 창작에 국한하여도,) 그러한 생소한 것과 생경한 것의 조합이라는 생각이다.
수소 / 불 = 폭발
산소 / 불 = 필수존재
수소2 + 산소 = 불을 끈다/ 생명유지 및 존속에 가장 필요하다.
시에 있어서 수소는 이미지가 될 수도 있고, 산소 역시 주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결합하는 것은 화자이며 시인이다. 어떤 것을 수소의 자리에 놓더라도 논리는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두 가지 이상의 원소가 합쳐져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것이다. 풍경과 배경을 놓고 생각해 보자. 눈에 보이는 것은 풍경이라고 할 때, 눈에 보이는 것이 풍경의 전부가 아닐 것이다. 그 자리에 그 풍경이 만들어진 동기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지금 노을이 있는 자리에 노을이 있는 이유는 가장 단순하게 시간이 오후, 노을이 져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시인의 눈은 노을을 본다. 동시에 시인의 가슴은 노을을 느끼는 것이다. 느낀다는 것의 속성은 사람마다 매우 다를 것이다. 힘들고 지친 사람에게는 노을이 쉼터로 가는 등불 같을 것이며, 방금 이별한 사람에게는 큰 상처의 흔적으로 보일 것이며, 가슴이 따듯한 사람에게는 곧이어 다가 올 달의 향연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느낌이라는 것은 개별 사람이 살아온 자취나 경륜이나, 연륜, 관계, 나이, 등등에 따라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시가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는 본 것 혹은 보이는 것을 눈으로만 해석하는 것이 아닌 작품이다. 작품은 예술 창작의 결과물이다. 예술은 현상에서 나오는 것도 있지만 좀 더 깊게 생각하면 현상의 배후에서 나온다. 같은 풍경을 보고 사실주의 그림이 나올 수도 있고, 좀 더 그로테스크한 추상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세상의 모든 수소를 품에 안고 세상의 모든 산소를 끌어 모아 전혀 성질이 다른 물을 만드는 연금술사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수소와 산소를 결합하는 과학적인 방법은 필자도 모른다. 하지만 대단히 위험한 작업이라는 것이 상식이다. 단순하게 수소 두 개와 산소 한 개를 한 통에 섞어 흔든다고 물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칫 폭발의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물은 화합물이다. 과학적인 화합물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화합물(化合物, 영어: compound 또는 chemical compound)
두 종류 이상의 화학 원소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순수한 화학 물질이며, 화학반응을 통하여 더 단순한 물질로 분리해 낼 수 있다. [1] 이를테면 물(H2O)은 하나의 산소 원자마다 두 개의 수소 원자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물질이다. 화합물은 고유의 화학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은 화학 결합으로 하나가 된 일정한 비율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2] 화합물은 공유 결합에 의하여 하나로 된 분자 화합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염은 이온 결합에 의하여 하나로 되고, 금속 간 화합물은 금속 결합에 의하여 하나로 되며, 배위 착염은 배위 결합에 의하여 하나로 되는 분자 화합물이다.
한편, 순수한 화학 원소는 이것이 단일 원소(H2, S8 등)로 된 여러 개의 원자만 포함하는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화합물로 간주하지 않는다.[1] 화합물은 오직 두 종류 이상의 원소들로 결합한 형태의 물질들을 이르기 때문이다. 참고로, 위의 단일 원소(H2, S8 등)는 홑 원소 물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출처 - 다음 백과사전」
여기서 주목할 것은 화합이라는 단어다. 과학적인 의미의 물질과 물질의 화합보다는 문학적 의미에 가치를 둔 화합和合이다. 화합은 글에서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될 것이다. 글(시를 포함한)에는 당위성이 있어야 한다. 글의 형태가 관념적, 피상적, 본질적, 등등의 어떤 형태를 갖고 있다 해도 문장과 문장이 화합하지 않으면 글은 생명력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죽은 글이 되는 것이다. 필자는 글의 논리를 화합이라고 말하고 싶다. 논리적이라는 말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타당성을 담보할 때 가장 빛이 나는 것이다. 시에서 시적 구성이나 시적 논리라고 흔히 말하는 것은 문장과 문장의 화합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글은 절대 중언부언이나 교언영색이 되어서는 안 된다. 환언하면 문장과 문장의 흐름이 단단한 얼개를 갖춘 조직적이며 치밀한 ‘사유’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말하는 대로 들리는 대로 보이는 대로를 표현하는 것은 최소한 시에서는 예의가 아닐 것이다. 보이는 것이 왜 보이는 것인지? 들리는 것이 왜 들리는 것인지? 상대가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은 나의 말에 대한 반사신경 같은 작용 혹은 작용 반작용의 결과물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성찰하지 않으면 시는 급속도로 그 생명력을 잃게 된다.
어느 때, 나는 안이면서 바깥이기도 할 때가 있다. 존재이면서 존재의 바깥에 있기도 하다. ‘나’이면서 사물이기도 하고, 사물이면서 ‘나’이기도 하다는 생각의 배후에는 ‘사유’가 존재한다. 사유는 생각하고 판단하는 힘이면서 동시에 어떤 현상에 대한 개념, 구성, 판단 등을 하는 인간의 지적 작용을 의미한다. 동시에 같은 것을 보면서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이며 시인이 가져야 할 가장 기초적인 소양일 것이다. 안과 밖, 어쩌면 그것은 수소와 산소의 결과물로 추적해 볼 때, 안이 바깥이 되며 바깥이 안이 되는 역발상의 동기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과 밖에 대한 사유의 결과물에 대한 정용화 시인의 좋은 시 한 편을 소개한다.
바깥에 갇히다
정용화
우리 집 현관문에는 번호키가 달려있다 세 번, 비밀번호를 잘못 누르면 가차 없이 문이 나를 거부한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지갑도 휴대폰도 없이 제대로 바깥에 갇히고 말았다
안과 밖이 전도되는 순간
열리지 않는 문은 그대로 벽이 된다
계단에 앉아있는 30분 동안
겨울이 왔다
바람은 골목을 넓히려는 듯 세차게 불고
추위를 모르는 비둘기는
연신 모이를 쪼아댄다
내 것이면서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이
어디 문뿐이겠는가
낡을 대로 낡아버린 현수막이
바깥에 갇힌 나를 반성도 없이 흔든다
걸터앉은 계단이
제멋대로 흩어지는 길 위의 낙엽이
새들이 자유롭게 풀어놓은 허공이
나를 구속하고 있는 바깥이라니!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나는 지금 바깥이다
*정용화 : 충북 ,동대 대학원 문창과,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바깥에 갇히다]외 다수
정용화 시인의 바깥에 갇히다라는 시 속의 바깥은 어쩌면 내가 내게 숨겨놓은 ‘안’이거나 그 ‘안’의 바깥은 어쩌면 ‘안’이라는 두 개의 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시는 물이다. 바깥은 안이다. 안은 바깥이다. 나는 나의 바깥에 있다. 너는 나의 ‘안’에 있다. 우리는 우리의 바깥에서 우릴 보고 있다. 아니, 우리의 안에서 우리의 바깥을 보고 있다. 그, 경계는 ‘문’이다. 번호키가 달려있는 것이 문이라면 그 바깥과 안의 경계는 다만, 번호키의 위치와 방향에 달려있는 단순 반복이라는 ‘의식’ 아닐까? 어저면 그 경계를 허무는 것이 시에서 흔히 말하는 ‘경계 너머’ 혹은 ‘인식 파괴’라는 결과물, 화합물이며 동시에 시는 물이다에 가장 적합한 말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모던 포엠 2019년 08월호 에서는 위 필자의 논리에 부합하는 세 편의 작품을 선별해 소개해 본다.
첫 번째 작품은 김가령 시인의 [오카리나]라는 작품이다.
오카리나
김가령
거침없이 소리가 구멍을 밀어내고 있다
손가락을 갖다 대면 낮은 자리에서부터 경사진 지층이 생긴다
딱딱한 감정 안에서 내 소리는 칼끝처럼 차갑다
심장을 쪼아대며 음역대를 넓힌다
나만 아는 주파수에서 새소리가 들린다
새를 품은 말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자리를 옮기는데
아무리 힘껏 불어도 숲은 돌아오지 않는다
손끝에 힘을 준다 나와 새 사이에 음이탈이 잦아진다
리듬을 껴입지 못한 소리들이 웅크리고 있다
나는 어느 주파수에 붙들려 있는 것일까
몸속에 있던 녹슨 새장 하나 꺼내 활짝 연다
오래된 깃털이 날아가는 대로
바람의 연주곡이 흐르는 대로
한참을 내버려 둔다
울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끝까지 살아있었다는 걸까
멀리서부터 떼울음이 들려온다
비로소 새가 나를 놓아준다
오카리나는 맑고 고운 음색을 내는 이탈리아의 전통 관악기다. 시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오카리나라는 악기에 대한 해설을 인용해 본다.
19세기 말 토기로 만든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사육제 호루라기에서 발전해 나왔으며 흔히 새 모양으로 되어 있고 1~2음만을 낸다. 진흙이나 금속, 혹은 장난감일 경우 플라스틱으로 만든 달걀 모양의 통으로 플래절렛이나 마개 플루트의 원리에 따라 소리를 낸다.
보통 8개의 손가락 구멍과 2개의 엄지손가락 구멍이 있으며, 조율 피스톤이 있는 것도 있다. 1930년대 미국 대중음악의 화성에서 다양한 크기의 이 악기가 사용되면서부터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널리 알려진 유럽의 공 모양 플루트인 이 악기는 고대와 근대의 여러 문화권에서도 나타난다.
「출처 - 다음 백과사전」
김가령 시인은 오카리라를 연주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입으로 불어 낸 바람이 오카리나 속에 들어가 오카리나의 구멍을 통해 어떤 음색으로 변화하는지, 변화된 음색이 세상으로 나가 또 다른 어떤 변화를 세상에 주는지? 혹은 변화라는 옷을 입는지 세밀하게 관찰하고 사유했다. 소리와 구멍의 역학관계를 통해 세상을 보는 다른 눈을 정밀하게 갖다 대 보았다. 입을 통해, 입에서 만들어진 바람을 나만 아주 주파수라는 개념으로 또 다른 화합물을 만들었다. 소리가 리듬이 되는 것은 바람과 구멍이라는 조합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그 소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것은 독자의 몫이면서 동시에 화자의 유연한 사고의 결과물로 손색이 없다.
거침없이 소리가 구멍을 밀어내고 있다
손가락을 갖다 대면 낮은 자리에서부터 경사진 지층이 생긴다
딱딱한 감정 안에서 내 소리는 칼끝처럼 차갑다
심장을 쪼아대며 음역대를 넓힌다
나만 아는 주파수에서 새소리가 들린다
새를 품은 말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자리를 옮기는데
아무리 힘껏 불어도 숲은 돌아오지 않는다
다만 호흡에 불과한 만들어진 소리가 구멍을 밀어내고 있다는 것은 호흡이 호흡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오카리나의 소리에 빗대 말할 수도 있고, 삶의 모든 구멍(부정적인 의미의)을 구멍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중의적인 첫 연을 앞에 두었다. 단순한 묘사라고 읽을 수도 있고 동시에 깊은 사유의 결론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하한 경우든 소리가 구멍을 밀어내고 있다. 구멍이 소리를 받아들이고 있을 수도 있는, 오카리나 = 삶이라는 등식은 다음 연의 단어에서 추정해 볼 수 있다.
1. 나만 아는 주파수
2. 새소리
3. 새를 품은 말
4. 숲은 돌아오지 않는다
시인은 본 것과 느낀 것을 적절하게 섞어 숲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문장에 대한 당위성을 확보한 것 같다. 동시에 소리가 갖고 있는 또 다른 소리의 속성을 고민해 보는 것이다. 소리를 낸 것은 ‘나’이지만 그런 소리의 근원조차 소리에 붙들려 있는,
나는 어느 주파수에 붙들려 있는 것일까/
나만이 아는 주파수에서 나는 어느 주파수에 붙들려 있다는 아이러니, 위에서 소개한 정용화 시인의 [바깥에 갇히다]와 사유의 폭과 깊이가 비슷한 무게를 갖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삶의 소재와 동기와 원천은 비슷한 방식의 안과 밖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다. 김가령 시인은 오카리나와 소리와 구멍과 그것들의 자유스러운 혹은 부자연스러운 양상에 따라 달라지게 되는 삶의 이중적 모럴이다. 살다 보면 그 이중적인 잣대의 바깥에서 잣대의 안을 생각하기조차 싫을 때가 있다.
오래된 깃털이 날아가는 대로
바람의 연주곡이 흐르는 대로
한참을 내버려 둔다/
어쩌면 이런 마음이 사람의 속성인지도 모른다. 포기, 체념이 아닌 말 그대로 ‘내버려 둔다.’에 그 방점이 있을 것이다. 내버려 두는 것이다. 소리도, 구멍도, 리듬도
결국, 내가 나로부터 자유스러워진다는 것은 나의 문제였다는 것을 시인은 말한다.
울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끝까지 살아있었다는 걸까
멀리서부터 떼울음이 들려온다
비로소 새가 나를 놓아준다/
필자가 주목한 것은 [비로소]라는 부사다. 이전에도 어떤 달의 평론에서 비로소라는 부사에 대하여 주목한다는 말을 한 기억이 난다. 비로소는 어떤 일이나 현상이 다른 어떤 계기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깊은 말이다. 그 깊이는 이것과 저것의 무게를 더해 ‘지금’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김가령 시인의 시는 이 모든 속박이나 질곡이나 가둠에서 나를 벗어나게 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차분하지만 하고 싶은 말을 오카리나 불 듯 정성스럽게, 담백하게 이야기하는 좋은 작품이다.
두 번째 소개할 작품은 박시영 시인의 [한 줌의 심장]이라는 작품이다. 달을 보며, 그 달을 우주를 떠도는 한 줌 심장으로 보는 시인의 한 줌 심장이 어떤 모습인지? 곰곰 생각해 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작품의 전반은 담백하다 못해 조곤조곤하다. 조곤조곤이라는 부사는 말이나 행동 따위를 은근하고 부드러우면서도 하나하나 꼼꼼히 빼먹지 않고 하는 모양을 말한다. 아무것도 아닌 척 하지만 결국 그 아무것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게 만드는 시의 문장이 공감의 영역을 가일층 넓히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한 줌의 심장
박시영
어스름 국도를 지날 때 보았지
푸르스름한 하늘에 뜬
둥글고 흰 달
빠르게 지나가는 검은 구름
우주를 떠도는 한 줌 심장들이지
바람의 이빨을 지닌 날카로운 순간들
차창너머 소리 없이 떠가는 풍경이나
삶은 닭을 뜯고 있는 식탁의 침묵 속으로
고양이처럼 얼굴을 묻지
어스름 국도를 지날 때 보았지
저물녘의 맥박을 닮은 것들
뒤척이는 자에겐 유효한 길이 되는
차가운 피가 온몸을 감싸고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우주 한 모퉁이의 무너짐처럼
그것들, 꽃이 될 수 있는지
물렁한 한 움큼의 심장에
손을 대 볼 때마다
한 줌이라는 말은 주먹 하나에 들어갈 정도의 아주 작은 단위를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심장의 병리학적 크기가 한 줌일 수도 있겠지만, 시에서 한 줌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단위를 의미하고 있는 듯하다. 어쩌다 우연히 마주친 달, 구름, 그리고 하늘 그 모든 것들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면서도 어느 순간 시인의 눈에는 만물의 심장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심이면서 동시에 중심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정을 성립하기 위해 [한 줌]이라는 수식어를 부여한 시인의 사유가 깊다.
~~ 이면서 ~~ 가 아닌은 문장에서 삶에서 의식에서 동시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두 개의 눈을 갖고 살기 때문이다. 한 개의 눈은 냉정하지만 다른 한 개의 눈은 따듯하기 때문이다. 지나간 것은 날카로울 수도 있고 부드러울 수도 있다. 그 결정은 ‘지금’이라는 눈의 환경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시인의 어떤 날은,
바람의 이빨을 지닌 날카로운 순간들/
바람은 실체가 있으면서 동시에 없다. 물론 이빨도 없다. 바람에 실체를 부여하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 이빨을 부여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는 말이다. 그 바람의 무게에 따라 순간은 영원도 될 수 있고 순간은 날카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그 바람을 내 유의식의 기저에 무엇으로 두고 보고 꺼내는 순간 시인은 바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본 한 줌의 심장, 그 배후를 잠시 살펴본다.
차창너머 소리 없이 떠가는 풍경이나
삶은 닭을 뜯고 있는 식탁의 침묵 속으로/
두 가지 풍경은 현재형이며 과거형이다. 다시 말하면 일관성 있는 ‘지금’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단서는 다음 5연에서 짐작할 수 있다.
고양이처럼 얼굴을 묻지/
고양이가 얼굴을 묻는 행위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본능이다. 무엇으로부터 나를 묻어놓는다고 해석하면 적절할 것이다. 달과 바람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검은 구름이 상징하는 것들에게서 얼굴을 묻는, 그러면서도 시인은 또 하나의 (맥없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전제한다.) 미래를 짐작해 낸다.
뒤척이는 자에겐 유효한 길이 되는/
우주 한 모퉁이의 무너짐처럼/
결국, 그 가정은 가정에 불과하다는 다소 자조적인 의문을 진지하게 자신에게 묻어두는 시인의 심상이 같이 아릿하다.
그것들, 꽃이 될 수 있는지/
박시영 시인의 글을 소개하는 서두에서 필자는 조곤조곤이라는 표현을 했다. 꽃이 될 수 있는지라는 가정 혹은, 의심의 의문은 부정을 앞에 둔 긍정이며 바램이다. 그런 시인의 마음을 필자는 조곤조곤이라는 부사로 대신했다. 차갑게 잃다 부드럽게 무너지게 만드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 역시 시인이 말하는 대로, 한 줌의 심장의 결구처럼 가끔 이렇게 나를 일깨워보자.
물렁한 한 움큼의 심장에
손을 대 볼 때마다/
마지막 소개할 작품은 속이 읽히는 작품이다. 속이 읽힌다는 말은 가볍다는 말이 아니다. 세상엔 속이 안 읽히는 작품이 더 많고, 속이 읽힌다는 말은 작품이 신선하다는 말이며, 작품이 신선하다는 것은 시인이 그렇게 쓰기 위해 면면부절 흐르는 불면의 강을 수없이 도강했다는 말이다. Daisy Kim 시인의 [회전 초밥]이라는 작품 속 갑과 을의 속성, 갑은 언젠가 을이 되기도 하고, 을은 영원히 을이 아닌, 그 위치의 속성과 을이 된 을의 감정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좋은 작품이다.
회전 초밥
Daisy Kim
뭍으로 헤엄쳐 나온 싱싱한 바다와 살점,
해풍을 타고 온 맛이 접시에 담겨 회전한다
노란 조명을 따라 회전하는 이 방식은 누군가의 눈에 선택되어야 하차할 수 있다
한때 회전하는 문을 열고 출근하던
비정규직 시절이 있었다
갑의 입맛으로 선택되기 위하여 한 자밤 밥알 위에 차려진 고명, 허기진 눈빛을 자극하고
식감을 살려 싱싱하다
한 무더기 하얀 생기를 얹은 붉은 혀 끝에 푸른 단맛이 차려진다
선택받지 못한 을, 다시 빙글빙글 돌고 날것의 상처가 삶의 바닥에서 퍼덕거릴 때
한 점의 입맛이 되기 위해
얇게 저며지고 단맛 신맛에 버무려졌다
어쩌면 회전은 바다가 견뎌야 할 태풍 같은 것
레일을 회전하는 바다는
출렁, 똑 쏘는 삶의 매운 그물을 입 속으로 던진다
시를 읽으며 회전초밥집의 갑과 을은 누구일까?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초밥 집 사장, 초밥을 만드는 요리사, 접시 위의 초밥, 초밥을 만들기 위한 재료가 된 싱싱한 바다와 살점들, 맛있는 초밥을 선택하기 위한 손님, 어쩌면 그 모두가 갑이면서 을이 될 것이다. 바다와 살점들의 입장에서 을이 다를 것이며 손님 입장에서 을이 다를 것이며, 요리사 입장에서 을이 다를 것이며 접시 입장에서 갑이 다를 것이다. 경우에 위치와 환경에 따라 갑과 을의 변화는 말 그대로 변화무쌍이다. 그 모든 것이 레일 위에서, 접시 위에서, 초밥 집을 들어가는 회전문에서, 초밥 위 레일을 따라 돌아가는 노란 조명 아래서 한 편의 단막극처럼 막을 올리고 내리고, 관객이 되었다 주연이 되기도 한다.
노란 조명을 따라 회전하는 이 방식은 누군가의 눈에 선택되어야 하차할 수 있다
누군가의 선택에 의해서 비로소 하차할 수 있는 레일 위, 삶이라는 레일을 하루라는 접시에 담겨 빙글 돌다 보면 결국은 내가 아닌 타인의 선택에 의하여 내려올 수 있는 ‘을’
을은 반드시 갑과의 관계가 고정적일까? 아니 레일이 아닌, 삶이라는 레일 위에 놓인 ‘을’은 그 회전 방식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인지?
Daisy Kim의 작품은 회전 초밥집의 일상을 비교적 담담하게 건들면서도 회전 초밥이라는 작품의 레일 위에 바다와 살점을 놓아두면서도 자연스럽게, 슬금슬금 비정규직이라는 초밥 한 접시를 올려 두었다. 선택은 젓갈을 잡은 독자의 몫이라는 것을 레일 아래 숨겨 두었다.
선택받지 못한 을, 다시 빙글빙글 돌고 날것의 상처가 삶의 바닥에서 퍼덕거릴 때
한 점의 입맛이 되기 위해
얇게 저며지고 단맛 신맛에 버무려졌다/
어쩌면 회전은 바다가 견뎌야 할 태풍 같은 것/
현대사회의 풀기 힘든 문제, 비정규직, 그들의 무게는 날것의 상처/ 삶의 바닥 퍼덕/ 한 점의 입맛이 되기 위해/ 속에 다 담겨있다. 세상을 보는 눈이다. 어디서든, 무엇에서든, 시인이 조합한 화합물의 결과가 마음을 아릿하게 한다. 그것은 ‘시는 물이다’라는 필자의 관점에 정확하게 일치한다. 두고두고 시의 결구가 눈길을 잡는다.
레일을 회전하는 바다는
출렁, 똑 쏘는 삶의 매운 그물을 입 속으로 던진다/
여름이 왔다. 무성하게 왔다. 열정적인 삼바 춤처럼 열기가 춤을 춘다. 이 글을 쓰는 어제가 초복이라고 한다. 중복을 넘어 말복까지 뜨거운 레일을 회전하기 위해, 갑의 선택을 받기 위해, 복달임을 위해, 닭 한 마리 고아 먹고 싶다. 그래야 제법 근사한 ‘갑’의 선택을 받지 않을까 싶다. 독자 제현의 건강을 기원 드리며 맺는다.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