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그라드 포위전
800여명의 훈련병 중에 약 500명이 행군하지 못하겠다고, 군의관을 찾아갔다는 것이 오늘의 우리군대입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이야기 입니다.
풍요와 사치 속에 허약하고 나태해져 극기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젊은 세대들입니다. 전략과 전술, 무기, 장비에 대한 교육과 훈련보다 정신교육이 시급한 때입니다. 이들에게 미래에 우리 땅에서 또 다시 닥칠지도 모르는 고난과 역경을 말해줌으로서 그들이 각성토록 유도하고자 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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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에 대한 고통은 경험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천재지변이나 전쟁과 같은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는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굶주림에 대한 고통을 피하지 못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쟁으로 인한 경우는 우리에게도 6,25가 가져온 쓰라린 굶주림의 과거가 있었습니다만, 오늘도 방글라데시, 아프리카 난민 그리고 세계도처에서 일고 있는 내전의 뒤안길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파키스탄의 대지진과 같이 천재지변으로 인한 사망자가 25,000이라는 수치에 대해 세계가 놀라고 있습니다만, 천재지변도 아닌 전쟁으로 인해 한 도시에서 물경 100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던 적이 있는데요.
오늘은 전쟁이라는 인재에서 비롯된 굶주림에 대한 최악의 사태라고 할 수 있는 레닌그라드 포위전에 대해 말씀드릴까 합니다.
전략적 배경
제정러시아의 수도(페테르스 브르그)였던 아름다운 도시 레닌그라드가 그 지리적 위치와 전략상의 가치 때문에 전쟁의 희생물이 된 것입니다.
1941년 6월22일 03:00시, 독일군은 소련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는데요. 레에프 원수의 북부집단군은 바바롯사계획의 일환으로 레닌그라드를 점령 하게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9월8일, 마침내 독일군이 레닌그라드와 연결된 모든 육로를 완전히 차단하게 되자, 이제 레닌그라드의 외부와의 연결은 항공편과 라도가호수의 선편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냉혹한 작전
그런데 히틀러는 레닌그라드를 무력 점령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일반적인 방법을 쓰지 않기로 결정한 것인데요.
그와 막료 장군들은 여러 가능성을 검토한 끝에 전기 철조망과 기관총좌로 시를 완전히 봉쇄한 후에 노인과 어린이만 소개시키고 남은 자들은 굶어죽게 한 다음 시를 파괴하여 핀란드군에게 인도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면 모든 보급이 차단당한 상태에서 레닌그라드는 포격과 폭격 끝에 겨우내 죽음만을 기다려야 하는 도시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냉혹한 작전 이었는데요. 겨울 동안의 포위로 적어도 100만 명은 굶어죽을 것이고, 그것은 시 자체의 항복보다도 더 강하게 러시아인의 사기를 꺾어놓을 것이었습니다.
한편, 레닌그라드의 전 시민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총 동원되어 방어진지 구축작업에 투입되었습니다.
전 시민은 8월 한 달 동안에 91만8천명이 이용할 수 있는 방공호와 개인호 67만2천개를 팠는데요. 레닌그라드는 끝까지 싸울 준비는 갖추고 있었지만 포위당했을 때,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세워 놓지 못했던 것입니다.
시 당국은 8월말이 되어서야 겨우 식량부족이 가중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던 것인데요. 만약 현행 배급량을 그대로 지속한다면, 1개월도 못가 식량이 바닥난다고 본 것입니다.
연옥(煉獄)
9월4일부터 독일군 포탄이 시내에 떨어지기 시작했는데요. 그해가 가기 전까지 3만여 발이 시내 곳곳에 떨어졌고, 독일공군의 융커기 편대가 간단없이 소이탄을 투하했던 것입니다.
이 공습으로 레닌그라드와 시민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는데요. 대부분의 식량창고가 불타버린 것입니다. 밀가루와 식용유가 전소되었고, 비축해 두었던 설탕 전량 2,500톤이 녹아서 지하실로 흘러들었지요. 이때 쯤, 레닌그라드 전선군사령관 보르실로프 대신, 쥬코프가 부임했는데요. 레닌그라드는 스탈린의 말대로 절망적이었습니다.
레닌그라드 시민이 독일군의 폭격기와 굶주림의 공포에 떨고 있을 때, 독일군은 시민들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가짜 돈 이나 가짜 배급표와 함께 ‘지도자를 죽이고 투항해오는 시민의 목숨은 살려 줄 것을 보장한다.’는 전단을 뿌렸습니다.
그러나 전단을 줍는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요, 쥬코프가 명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즉 “금후로 어떠한 도주나 퇴각도 조국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한다. 벌은 사형이다.”라고 말이지요.
아비규환(阿鼻叫喚)
한편 히틀러는 제4기갑군을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빼내어 모스크바 공격에 투입하는 대신, 레닌그라드는 히틀러 최초의 복안대로 고사시킬 작정이었습니다.
이대로라면 300만의 레닌그라드 시민은 굶주림과 추위에 의해 죽어가게 될 것입니다.
바야흐로 식량의 결핍은 절망적인 사태에 이르러 폭력사태가 발생했는데요.
한 노인이 빵집에서 빵을 사들고 나오다가 강탈을 당하는가 하면, 배가 고파 미치광이가 된 젊은이들은 다른 사람의 입에 물린 빵을 파내어 먹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가축용 사료도 사람의 식량으로 전용되었지요.
사람들은 덫을 놓아 개, 고양이, 까마귀, 쥐까지도 잡아먹었습니다. 사망자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는데요. 11월에는 11,000명, 12월에는 53,000명에 달했습니다.
시체를 매장할만한 힘을 가진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공병대가 많은 시체를 한꺼번에 매장하기 위해 다이나마이트로 얼어붙은 땅에 구덩이를 파 두었었는데요. 구덩이에 던져진 시체에는 가끔씩 살점이 뜯겨나간 것들도 있었습니다.
굶주림이 마침내 레닌그라드 시민으로 하여금 인육을 먹어야 할 지경으로 내몰아갔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많은 소련 측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런 보고에 의하면 사람고기도 처음에는 죽은 시체에 대해서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차 굶주림에 광기가돈 사람들이 고기를 먹기 위해 살인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지요.
그리고 일부 사람고기를 팔았다는 보고도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굶주림도 굶주림이지만 많은 시민들이 굶어죽기 전에 얼어 죽었던 것입니다.
천재보다 더한 인재
그해 레닌그라드에서 몇 명이 죽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공식적인 통계로는 26만 4천명이 죽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서방 학자들은 전면 포위되었던 기간 동안 기아에 의한 사망자가 100만 명을 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 수십만 명이 폭격과 포격으로 죽은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데요. 이에 비해 제2차 세계대전의 전 기간을 통한 미국과 영국의 사망자수는 80만 명 이하인 것입니다.
레닌그라드는 900일 동안 포위 되었다가 1944년 1월27일, 독일군의 포위가 풀림으로서 굶어죽는 사람도 없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