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완성
롬 11장 25-32절
오늘 말씀은
개인구원의 차원을 넘어서서
온 인류의 구원을 완성한다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피를 흘리시고 살을 찢기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결코
개인적인 구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구원은 개인적 구원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우주적인 구원으로 완성됩니다.
마지막 조각이 들어갈 때
구원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조각은
이스라엘의 회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2천년 동안
온 이방인을 구원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이 복음은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뻗어 나갔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우리에게 한 비밀을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구원의 완성
예루살렘의 회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고
구원을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개인의 구원을
이야기 할 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온 인류의 구원의 핵심에는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25절을 보시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구원은 비밀스럽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알면 비밀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비밀을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비밀을 아는 사람은
입가에 미소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어떤 사람에게
사랑의 고백을 받았다고 합시다.
그는 하루 종일 미소를 짓고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고백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비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비밀을 주셨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천국의 비밀을 깨달은 자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천국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모든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비밀을 아는데
내 사랑하는 민족, 골육의 친척,
이스라엘은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박해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사도 바울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이 비밀은 무엇입니까?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과 같은 조상도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본 적도 없습니다.
우리는 귀신의 이름만 불렀던 이방인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성경도 없고, 선지자도 없었습니다.
약속도 없는
캄캄한 그런 절벽 속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빛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 복음의 빛이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이것이 25절에 나타난 비밀입니다.
이스라엘이 더러는 완악해졌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잘 안될 때도 있습니다.
하고싶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문이 닫히는 것 같은 경험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어딘가에 문이 열렸다라는 말과 통합니다.
문이 닫힌 것만 보는 사람은
절망하고 좌절하지만
열린 문을 보셔야 합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주기 위하여
문을 열어놓으셨고
이방인들을 향한 문을 열기 위해
이스라엘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복음을 거부했고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들은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예수를 거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지렛대로 물건을 들기 위해서는
지렛대 아래에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그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이방인을 움직이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을 버리지 않으시고
선택받은 이스라엘만
구원을 받게하지도 않으시며
모든 열방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여러분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가족까지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전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탕자를 찾으십니다.
타락한 자녀를 회복하기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들어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이방인을 찾으십니다.
그런데 정하신 숫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숫자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2천년 동안 찾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이 충만한 숫자가 돌아오기까지
이스라엘을 희생양처럼 사용하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실패입니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실패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실패는
나의 구원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우리를 위하여 희생을 했다면
이제는 우리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희생할 차례입니다.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보지 말고
성경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구원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영원히 희생시키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반드시
다시 찾으시고 회복하십니다.
26,27절입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이스라엘은 이방인을 위하여
희생을 당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방인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방인도 사랑했다면
이스라엘을 왜 사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랑은 희생입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희생해야 합니다.
용서하고 기다려줘야 합니다.
따지고 대가를 받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척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켰고
이방인을 구원하기위하여
이스라엘을 희생시키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저는 이스라엘이 반드시 구원될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지금이 그 때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난 2천년 동안
큰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메시야를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성령이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성령을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건입니다.
그런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의 예언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26, 27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에스겔에 나타난
예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회개하는 마음을 주셔서
돌같이 딱딱한
그들의 마음을 녹여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이방인들이 돌아오고
이스라엘이 돌아오면
구원은 끝이 납니다.
역사는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대 드라마입니다.
그들이 비록 복음을 거부했고
복음을 죽였지만
복음과 원수된 관계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들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고
회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2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배신했습니다.
메시아를 거부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도
내 배신과 함께 끝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실수하고
실패하고 배신해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배신당한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자식이 잘못되었을 때
부모는 얼마나 괴로워합니까?
그렇다고 부모가 자식을 포기합니까?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여러분을 구원하고
복을 주실 것입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사도 바울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으로
유대인의 마음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복음은 이방인에게로 갔습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사도 바울은 계속 눈물을 흘립니다.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는데
자기 민족 유대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바울이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큽니까?
자기 자식을 죽이면서까지
남의 자식을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3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방인들에게도 긍휼을 주셨는데
하물며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선택하신 것에 대하여
후회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탕자가 돌아오는 것,
자기가 사랑한 사람이 돌아오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찾으러 다니는
목자의 마음입니다.
한 마리 양의 가치가 문제가 아닙니다.
양한마리가 얼마나 하겠습니까?
이 목자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이 양이 얼마나 외로울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지
양의 가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찾으시는 것은
나 한사람 구원받았다고 해서
큰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셔서
돌아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꺼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어주신 것입니다.
32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구원의 완성은
여러분의 구원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구원하신 것은
여러분의 가정을 구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예수를 믿지 않는 가족이 있다고 합시다.
왜 그 사람중에 나를 택해서
그 가족에게 가게 하셨습니까?
그 가족 전체를 구원하라는
사명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방인이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32절입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 은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 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반드시 그런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변이 변하고야 말것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셔서
구원을 완성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복이
이 말씀 위에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합시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찢기시고
돌아가신 예수님,
오늘 저희들이
이 구원의 감격을 되새깁니다.
주님, 제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