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행전 14장 19-28절. 바울이 돌에 맞아 죽었다가 살아남
19절.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Jews came from Antioch and Iconium, and having won over the crowds, they stoned Paul and dragged him out of the city, supposing him to be dead.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Ἐπῆλθαν δὲ ἀπὸ Ἀντιοχείας καὶ Ἰκονίου Ἰουδαῖοι,
came but from Antioch and Kconium Jews
‘와서’(Ἐπῆλθαν)는 부정과거로서 작심하고 왔다는 것을 뜻합니다.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καὶ πείσαντες τοὺς ὄχλους καὶ λιθάσαντες τὸν Παῦλον,
and having persuaded the crowd and having stoned the Paul
‘충동하니’(πείσα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persuaded) 격하게 충동질 한 것을 가리키고, ‘돌로 쳐서’(λιθάσαντες)도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stoned) 무지막지하게 돌로 친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11장 25절에서 ‘한 번 돌로 맞은’ 이 사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ἔσυρον ἔξω τῆς πόλεως,
they dragged [him] outside the city
‘끌어내치니라’(ἔσυρον)는 미완료과거로서(they dragged) 계속 끌고 갔다는 뜻입니다.
죽은 줄로 알고
νομίζοντες αὐτὸν τεθνηκέναι.
supposing him to have died
직역하면 ‘그를 죽은 줄로 생각하고’란 뜻입니다.
‘알고’(νομίζοντες)는 현재분사이고(supposing), ‘죽은 줄로’(τεθνηκέναι)는 완료 부정사형 동사로서(to have died) 이미 죽은 줄로 여겼다는 뜻입니다.
20절.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while the disciples stood around him, he got up and entered the city. The next day he went away with Barnabas to Derbe.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κυκλωσάντων δὲ τῶν μαθητῶν αὐτὸν, ἀναστὰς,
Having surrounded but the disciples him, having risen up,
직역하면 ‘그러나 제자들이 그를 둘러섰을 때, 그가 일어나서’란 뜻입니다.
‘둘러섰을 때’(κυκλωσάντων)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surrounded) 뺑 둘러선 모습을 가리키고, ‘일어나’(ἀναστὰς)도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risen up) 벌떡 일어난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 제자들 중에는 디모데도 서 있었습니다.
디모데후서 3:11.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그 성에 들어갔다가
εἰσῆλθεν εἰς τὴν πόλιν.
he entered into the city
‘들어갔다가’(εἰσῆλθεν)는 부정과거로서(he entered) ‘들어갔다’란 뜻입니다.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Καὶ τῇ ἐπαύριον ἐξῆλθεν σὺν τῷ Βαρνάβᾳ εἰς Δέρβην.
and on the next day he went away with the Barnabas to Derbe
‘가서’(ἐξῆλθεν)도 부정과거로서(he went away) ‘갔다’는 뜻입니다.
루스드라에서부터 더베까지는 32km 떨어져 있었습니다.
21절.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fter they had preached the gospel to that city and had made many disciples, they returned to Lystra and to Iconium and to Antioch,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εὐαγγελιζόμενοί τε τὴν πόλιν ἐκείνην
Having proclaimed the gospel to then the city that
‘복음을 전하여’(εὐαγγελιζόμενοί)는 부정과거 분사 중간태로서(Having proclaimed the gospel to) 자신을 위해 단호하게 복음을 전했다는 뜻입니다.
더베에서는 아무런 핍박을 받지 않았고,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καὶ μαθητεύσαντες ἱκανοὺς
and having discipled many
‘제자로 삼고’(μαθητεύσα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discipled) 과감하게 제자를 삼은 것을 가리킵니다.
이 제자들 중에는 더베 사람 가이오도 있었을 것입니다(행 20:4).
물론 이 더베 사람 가이오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행 19:29)나 고린도 사람 가이오(고전 1:14)와 다른 사람입니다.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ὑπέστρεψαν εἰς τὴν Λύστραν καὶ εἰς Ἰκόνιον καὶ εἰς Ἀντιόχειαν,
they returned to the Lysra and to Iconium and to Antioch
‘돌아가서’(ὑπέστρεψαν)는 부정과거로서(they returned) 다시 되돌라갔다는 뜻입니다.
더베에서 32km 떨어진 루스드라로 걸어갔다가, 또 루스드라에서 64km 떨어진 이고니온으로 걸어갔다가, 또 이고니온에서 96km 떨어진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걸어갔다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버가까지 험한 지형을 일주일간 걸어갔다가, 버가에서 26km를 걸어서 항구 도시인 앗달리아에 갔다가, 앗달리아에서 배타고 선교여행의 출발지인 수리아 안디옥에 도착했습니다.
22절.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strengthening the souls of the disciples, encouraging them to continue in the faith, and saying, "Through many tribulations we must enter the kingdom of God."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ἐπιστηρίζοντες τὰς ψυχὰς τῶν μαθητῶν,
strengthening the souls of the disciples
직역하면 ‘제자들의 영혼들을 굳세게 하여’란 뜻입니다.
‘굳게 하여’(ἐπιστηρίζοντες)는 현재 분사로서(strengthening) 계속 굳세게 격려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παρακαλοῦντες ἐμμένειν τῇ πίστει,
exhorting [them] to remain in the faith
‘머물러 있으라’(ἐμμένειν)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로서(to remain) 계속 머물러 있으라는 뜻입니다.
‘권하고’(παρακαλοῦντες)는 현재분사로서(exhorting) 계속 권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καὶ ὅτι διὰ πολλῶν θλίψεων δεῖ ἡμᾶς εἰσελθεῖν εἰς τὴν βασιλείαν τοῦ Θεοῦ.
and that through many tribulations it behooves us to enter into the kingdom of the God
직역하면, ‘많은 환난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들어가는 것이’(εἰσελθεῖν)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enter) 당당히 들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마땅하다’(δεῖ)는 현재형으로서(it behooves) 올바른 사실을 가리킵니다.
23절.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hen they had appointed elders for them in every church, having prayed with fasting, they commended them to the Lord in whom they had believed.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χειροτονήσαντες δὲ αὐτοῖς κατ’ ἐκκλησίαν πρεσβυτέρους,
Having chosen now for them in every church elders
직역하면 ‘각 교회에서 그들을 위해 장로들을 택하고’란 뜻입니다.
‘택하여’(χειροτονήσα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chosen)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택한 것을 가리키며, 손으로 표시하여 선택한 것을 가리키고(to elect by show of hands), ‘임명하다’는 뜻이고(appoint), 교회에서 투표를 통해서 선출한 것이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가 선출해서 임명한 것을 뜻합니다(Here the selection was made by Paul and Barnbas).
‘장로’라는 말과 ‘감독’이라는 말은 서로 교차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행 20:17, 28: 디도서 1:5,7).
넓은 의미에서 목사도 장로라고 했습니다.
금식 기도 하며
προσευξάμενοι μετὰ νηστειῶν
having prayed with fasting
직역하면 ‘금식하면서 기도하여’란 뜻입니다.
‘기도하며’(προσευξάμενοι)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prayed) 정신 차리고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παρέθεντο αὐτοὺς τῷ Κυρίῳ, εἰς ὃν πεπιστεύκεισαν.
they committed them to the Lord, in whom they had believed
직역하면 ‘그들이 믿는 주님께 그들을 위탁했다’는 뜻입니다.
‘믿는’(πεπιστεύκεισαν)은 대과거(pluperfect)로서(they had believed) 이미 과거에 믿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위탁하고’(παρέθεντο)는 부정과거 중간태로서(they committed) 자신을 위해서 그들을 주님께 위탁했다는 뜻입니다.
24절.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ey passed through Pisidia and came into Pamphylia.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καὶ διελθόντες τὴν Πισιδίαν, ἦλθον εἰς τὴν Παμφυλίαν,
and having passed through the Pisidia, they came to the Pamphylia
‘가운데로 지나서’(διελθό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passed through) 통과했다는 뜻입니다.
‘이르러’(ἦλθον)는 부정과거로서(they came)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25절.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hen they had spoken the word in Perga, they went down to Attalia.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καὶ λαλήσαντες ἐν Πέργῃ τὸν λόγον,
and having spoken in Perga the word,
‘전하고’(λαλήσα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spoken) ‘말하고’란 뜻입니다.
이전에 버가에서는(행 13:13-14) 마가 요한이 선교팀에서 탈락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렸기 때문에, 바울이 속이 상해서 버가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귀환 길에 버가에서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κατέβησαν εἰς Ἀτταλίαν,
they went down to Attalia
‘내려가서’(κατέβησαν)는 부정과거로서(they went down) ‘내려갔다’는 뜻입니다.
버가에서 앗달리아까지는 26킬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26절.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rom there they sailed to Antioch, from which they had been commended to the grace of God for the work that they had accomplished.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κἀκεῖθεν ἀπέπλευσαν εἰς Ἀντιόχειαν,
And from there they sailed to Antioch
직역하면 ‘거기로부터 그들은 아디옥으로 항해했다’는 뜻입니다.
‘항해했다’(ἀπέπλευσαν)는 부정과거로서 ‘배타고 어디로 떠나갔다’는 뜻입니다.
이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ὅθεν ἦσαν παραδεδομένοι τῇ χάριτι τοῦ Θεοῦ, εἰς τὸ ἔργον, ὃ ἐπλήρωσαν.
from where they were having been committed to the grace of the God, for the work, that they fulfilled
직역하면 ‘이곳으로부터 그들은 그들이 이룬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위탁받았었다’는 뜻입니다.
‘위탁받았었다’(ἦσαν παραδεδομένοι)에서 앞의 동사(ἦσαν)는 미완료과거이고(they were), 뒤의 동사(παραδεδομένοι)는 완료분사 수동태로서(having been committed) 과거에 위탁받았던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이룬’(ἐπλήρωσαν)은 부정과거로서(they fulfilled) 과거에 확실하게 성취한 것들을 가리킵니다.
27절.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hen they had arrived and gathered the church together, they began to report all things that God had done with them and how He had opened a door of faith to the Gentiles.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Παραγενόμενοι δὲ καὶ συναγαγόντες τὴν ἐκκλησίαν,
Having arrived now and having gathered together the church
‘이르러’(Παραγενόμενοι)는 부정과거 분사 중간태로서(Having arrived) 확 도착한 것을 가리키고, ‘모아’(συναγαγό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gathered together) 전체를 다 소집한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보고하고
ἀνήγγελλον ὅσα ἐποίησεν ὁ Θεὸς μετ’ αὐτῶν,
they began declaring all that did the God with them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것을 보고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행하신’(ἐποίησεν)은 부정과거로서(did) 과거에 분명하게 행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보고하고’(ἀνήγγελλον)는 미완료과거로서(they began declaring) 보고하기 시작했다는 뜻인데, ‘보고하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다’는 뜻입니다(report, carry back good tidings).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καὶ ὅτι ἤνοιξεν τοῖς ἔθνεσιν θύραν πίστεως.
and that He opened to the gentiles door of faith
직역하면 ‘그가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었다는 것을’이란 뜻입니다.
‘여신’(ἤνοιξεν)은 부정과거로서(He opened) 과거에 활짝 여신 것을 가리킵니다.
28절.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they spent a long time with the disciples.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διέτριβον δὲ χρόνον οὐκ ὀλίγον σὺν τοῖς μαθηταῖς.
They remained then time no little with the disciples
직역하면 ‘그리하여 그들은 제자들과 함께 적지 않은 시간 머물렀다’는 뜻입니다.
한글 성경에 ‘오래’라는 말은 의역입니다.
‘있으니라’(διέτριβον)는 미완료과거로서(They remained) 머물렀다는 뜻이고, 원형(διατρίβω)은 ‘체제하다, 계속하다, 머무르다’(tarry, continue, stay in a place)는 뜻입니다.
바울의 1차 선교여행은 AD 45년 3월에 시작되어서, 1년 반의 선교사역을 한 후, 46년 7월에 마쳤다고 봅니다. Ramsay. by Baker.
바울 사도가 1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와서 체류한 기간은 47-49년이었습니다. Baker.
-설 교-
19절.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1. 사도행전 13장 50절에는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여 쫓아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4장 5절에는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고 돌로 치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지역의 유대인들이 70킬로나 떨어진 루스드라에까지 와서 사람들을 충동질해서 바울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리고 시외로 끌어내서 버렸습니다.
2. 방금 전까지 만해도 사람들은 바울을 신으로 생각해서 제사를 하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금방 유대인들에게 충동질 당해서 이번에는 바울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사람들이란 이렇게 변덕스럽고 믿을 만한 존재가 못 됩니다.
바울은 세 가지 면에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3. 육체적 고난을 그가 겪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7.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의 위험과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런데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하심이라’고 했습니다.
4. 그러나 바울은 이런 육체적인 고난만 겪은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정신적인 고난이 더 컸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8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받은 육체적인 고난을 다 열거하고 난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을 고사하고 날마다 나에게 눌리는 일이 있으니 그것은 내가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지상의 교회는 항상 편안하지가 않습니다. 여러 가지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교회들을 생각해 보면 사도 바울이 가슴이 눌린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8-9절에 보면 '내가 받는 정신적인 고통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살 소망이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5. 그러나 이런 정신적인 고통보다도 더 큰 고통이 사도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영적인 고난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하노라'
나는 복음을 전했고 다른 사람은 구원했지만 내가 버림을 받을 수도 있다는 이 위기감이 바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더 놀라운 영적인 고민을 하나 하게 되는데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노라'
나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내 민족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가슴이 찢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이 고난을 쉽게 이길 수가 있었을까요. 두 가지입니다.
6. 그것은 사도 바울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위대해서 고난을 견디어내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가지고 있는 복음 때문에 이 모든 고난을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로마서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분명히 복음 때문에 고난을 겪지만 그러나 복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영광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이것은 야만인에게도 복음이며 지성인에게도 복음입니다.
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이 복음에 있는 능력과 그 영광 때문에 이 모든 고난들을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터키에서 선교하는 <김주천 선교사>는 경찰에 끌려가서 얼마나 맞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하나도 안 아프더랍니다.
그래서 ‘아, 이래서 사도들이 돌을 맞을 수가 있구나’ 하고 깨달아지더랍니다.
20절.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1. 바울이 돌에 맞아 죽어서 성 밖에 버려졌는데, 며칠 전에 바울의 전도를 통해서 예수 믿은 제자들이 바울의 시신 주위에 둘러섰습니다.
그 때 바울이 살아나서 일어났습니다.
이 때 바울이 완전히 죽었더라면, 루스드라 교인들은 실망하고 아마 교회가 없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이 다시 살아남으로써 루스드라 교인들은 다시 새 힘을 얻고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지고 힘차게 신앙생활 했을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음으로써 바울이 신이 아니고 피도 흘리고 죽을 수도 있는 인간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2. 그런데 바울은 죽었다가 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회복되어 다시 성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고 제자들을 보살폈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이튿날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3. 그런데 사도행전 16장 1절에는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라는 제자를 얻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앉은뱅이 기적을 일으키고, 죽었다가 살아난 기적을 보였을 때, 그 모습을 본 제자 중에 디모데라는 훌륭한 제자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 디모데는 바울의 후계자요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즉 바울이 목숨 바쳐 전도한 결과로 제자가 된 디모데는 죽음을 각오하고 바울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의 체험을 통해서 자기는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3:10-11.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라.
21절.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바울은 지금까지 복음 전도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다시 복음을 전했습니다.
참으로 복음에 미친 사람 같습니다.
마치 연애하는 청년들이 부모도 잊어버리고 연애에 미친 것처럼, 바울은 예수님과 복음에 미쳤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예수와 복음에 미치니까, 바울이 가는 곳마다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가 변하여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2. 더베에도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성령과 말씀으로 변화된 더베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바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3. 이처럼 더베까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설립한 바울과 바나바는 다시 더베에서부터 거꾸로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으로 되돌아가면서 교인들을 심방하고, 교회마다 장로님을 세워서 조직교회로 견고하게 했습니다.
이전에 돌에 맞는 핍박을 당했던 곳들이지만, 다시 죽을 각오를 하고 교회들을 심방했습니다.
이처럼 복음 신앙은 천국 부활을 믿기 때문에 담대해집니다.
그리고 죽을 고생을 해서 교회들을 설립했기 때문에, 그만큼 애착을 가지고 귀한 교회들에 장로들을 장립시켜서 굳건하게 만들어놓는 것입니다.
이처럼 목회자는 복음 전도한 후에 평신도 지도자들을 세워서 교회가 자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혼자서 장기 집권해서는 안 됩니다.
평신도 지도자들을 많이 세워야 합니다.
22절.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1.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바울은 핍박 속에서 결실한 제자들에게 핍박을 무서워하지 말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믿음 생활 하라고 격려했습니다.
2.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바울은 제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버리지 말고, 기독교 신앙 가운데 머물러 있으라고 당부했습니다.
골로새서 2:6-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이것이 양육입니다.
3.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더베는 1차 전도 여행의 마지막 코스입니다.
갈 때는 전도 여행이었고, 돌아올 때는 양육 여행 겸 심방 여행이었습니다.
양육 가운데 중요한 것은 만사형통이 아니라, 환난과 핍박에 대처하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이고, 복 받고 기쁘고 편안하고, 건강하고 부자 되고,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만 가르쳐주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천국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하리라고 가르쳤습니다.
시련에 부딪혔을 때 믿음을 잃지 않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하늘 영광을 얻기 전에 이 땅에서 여러 가지 환란과 고난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23절.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1. 바울 사도는 양육을 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행정적인 조치를 취했습니다.
즉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를 세워서 그들에게 목회할 수 있도록 위임을 한 것입니다.
장로들을 뽑아 택하여 그들에게 몇 가지 훈련을 시켰는데 이것이 개척교회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2. 택하여 ① 금식하고 ② 기도하고 ③ 주님을 바라보도록 만든 것입니다.
사람 바울을 바라보도록 하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도록 했습니다.
그때 이 사람은 홀로 서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 바울과 바나바는 모든 일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갑니다.
24절.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1. 비시디아 지방을 지나서 밤빌리아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이 밤빌리아 지방의 버가에서는 전에 마가가 전도 일행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린 곳입니다. (행 13:13)
25절.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1. 전에 밤빌리아 지방 버가에서 마가가 중도 탈락해서 바울이 전도를 잘 못했는데, 되돌아오면서 밤빌리아 지역의 버가에서 바울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전에는 마가 때문에 괴로웠지만, 되돌아오면서 다시 힘을 내서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런 바울 사도의 열정을 마가는 모르고 찬물을 끼얹는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바울은 마가를 2차 전도 여행에 데리고 갈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26절.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1. 거기서 배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제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선교 출발지인 수리아 지방 안디옥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2. 이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이 안디옥 교회는 두 사도가 전도하여 교회를 설립하는 선교사역을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했던 곳입니다.
즉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하는데, 선교비나 정치적 도움이나 군사력으로 전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던 곳입니다.
그리고 단지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만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두 사도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전도가 잘 되게 해주시고, 건강과 생명을 지켜주시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없게 해주시고, 많은 결실을 맺어서 교회들이 잘 설립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로 부탁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은 돈이나 권력이나 기술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27절.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1. 그들이 이르러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 이르렀습니다.
실로 만 2년 만의 귀환입니다.
주후 45년에 출발해서 47년에 도착했습니다.
2. 교회를 모아
안디옥 교인들을 모아놓고 선교 보고를 했다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선교사 파송을 했기 때문에, 두 선교사가 선교 보고 대회를 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하나님이 함께 행하셔서 복음 전도를 잘하게 해주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서 믿게 해주시고, 특별히 구브로에서 박수 엘루마를 장님으로 만들고,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온 성 사람들이 반응한 것과, 이고니온에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신 것과, 루스드라의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바울이 죽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과, 유대교인들이 심하게 반대하고 돌을 집어 던졌으나 하나님이 보호하신 일 등을 보고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이 함께 행하셨기 때문에 이루어진 놀라운 일들이었습니다.
4.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주신 것을 보고했습니다.
아무리 바울이 설교를 잘하고, 기적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고 병자들이 치료받았어도, 하나님이 사람의 믿음의 문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이나 감정으로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5. 이처럼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 보고를 한 것은 특별히 자기들의 노력이 아니고,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기도를 많이 해주어서 하나님이 이루어주신 기적적인 성과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함입니다.
정말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해놓고, 얼마나 애타게 기도했겠습니까?
28절.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1. 주의 종들에게는 기도해주고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교회에서 오랫동안 안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즉 영적인 전투를 겪은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안식이 필요합니다.
제자들과 함께 잠깐 있다가 떠난 것이 아니라, 충분히 휴식하고 위로받고 격려받고 다시 떠난 것입니다.
선교사들이나 목회자가 일반 성도들처럼 남이 해주는 설교와 기도와 물질적인 후원을 받으며, 안식년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가끔 장로님들이나 안수집사님들이 설교도 해주고, 기도도 해주고, 권사님들이 심방도 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목사도 재충전을 받고, 다시 힘차게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회만 되면 쫓아내려고 하면, 목사가 지쳐서 성도들에게 유익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 사도가 돌에 맞아 죽었다가 살아나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귀한 영혼 구원의 열정을 본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도 기도하고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전하여 많은 결실을 맺고, 주의 교회를 잘 섬길 수 있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