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인생 나의 문학
최원현
1. 기억의 문
사람은 때로 생각지 않은 곳에 가게도 되고 생각지 않은 만남도 갖는다. 그런데 그것이 그 사람의 삶을 크게 변화시키기도 하고 더러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게도 한다.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절망의 늪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얘기지만 지나고 보면 그 또한 은혜였고 예정된 어떤 힘의 작용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어느새 나이 칠십에 다가가면서 지금까지 내 인생을 지탱하고 끌어준 두 개의 힘을 발견케 되는데 하나는 신앙이고 하나는 문학이다.
나는 동란 중에 태어나 조실부모(早失父母)하여 외조부모님 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세 자매 중 맏이였는데 내 형을 낳고 산후경과가 좋지 못해 아주 고생을 하셨다고 한다. 형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버렸고 그 형이 가버린 1년 후 태어난 나를 혹시라도 나도 그렇게 될까봐 어머니는 당신과의 철저한 격리 속에 살게 하여 한 번도 당신 품에 나를 안지 않으셨다고 한다. 어머니의 품이란 아기에겐 우주고 세계고 최고의 평화가 아닌가. 그런데 그런 품을 잃어버린 아기도 아기지만 그런 품을 내줄 수 없던 엄마의 슬픔과 마음은 또 오죽 했겠는가.
내가 세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할머니 방과 엄마의 방이 동과 서로 떨어져 있었고 내가 어쩌다 무릎걸음으로 기어서 어머니가 있는 방 쪽으로 가기라도 할라치면 누군가가 달려와 나를 번쩍 들어 반대로 돌려놓던 기억인지 들은 얘기인지 어렴풋한 기억만 있다.
2. 할머니의 노래 그리고 하나님
돌 달에 아버지를, 세 살 때 어머니를 조실부모한 내게 외할머니는 그냥 어머니였다. 그럼에도 어린 가슴 속에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었던 어머니의 빈자리는 나이가 들어가고 생각이 깊어가도 그야말로 메꿔 지지 않고 메꿀 수도 없는 큰 구멍이었던 것 같다.
육이오라는 민족상잔의 아픈 상처가 누구에게나 자리하고 있던 너무나도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다른 사람의 사정을 살펴볼 겨를도 없을 때였지만 그래도 외조부모님의 큰 그늘이 있어 시골인심은 부모 없이 외톨이로 외가에 사는 내게 너나없이 사랑을 베풀어주었다. 동란 중에 아버지를 잃고 뒤따라 어머니까지 잃은 아이의 삶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을 것 같지만 거기도 내가 미처 모르던 그 어떤 큰 힘이 나를 보호하고 감싸주고 있었던 것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는 딸만 셋인 외조부모님의 맏이였다. 열여덟에 시집을 가서 스무 살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을 결핵으로 잃어버린 어머니는 당신마저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에 다시 얻은 나는 당신으로부터 완전 격리시켜 버렸던 것이다. 그 어머니까지 내 나이 세 살 때 어머니의 나이 스물아홉에 내 곁을 떠난 것이다.
졸지에 천애고아(天涯孤兒)가 되어버렸지만 외가에서 태어났던 나는 그대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막내이모에 의해 길러졌고 그렇게 내 유년은 겉으로는 불행해 보였지만 안으로는 세 분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비교적 평안하고 따스한 유년기로 자랐다.
내가 입학하던 해 봄 막내이모가 시집을 갔다.(어머니의 바로 밑 동생인 큰이모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시집을 갔다.) 나는 그때부터 순전히 외조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그 전부터였지만 나와 할머니에겐 노래가 있었다. 하나는 ‘동짓달 열이틀 저녁밥 먹는시’라는 근본도 모르는 내가 될까 봐 내 생월생시를 주입 시키는 노래였고 또 하나는 당신이 작사 작곡 한 ‘우리 원현이 초등학교 졸업이라도 하는 것 보고 죽어야 할 틴디’ 였는데 시도 때도 없이 주문처럼 외우게 하고 기도처럼 읊어댔다. 할머니의 노래는 6년이 지나자 ‘우리 원현이 중학교 졸업 하는 것이라도 보고 죽어야 헐 것인디’로 바뀌었다.
아들이 없는 외조부모님은 작은할아버지댁의 큰 외숙을 양자로 들였다. 들였다기보다는 밀고 들어왔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텐데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 외숙 네가 새로 지은 집으로 들어오면서 나에겐 위기가 왔다. 나를 내 피붙이랄 수 있는 큰아버지 댁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말 중에 ‘외손자를 이뻐하려면 경상도 방아 코를 이뻐하라’는 말이 있을 만큼 외손자는 키워봐야 아무 소용없다고 할 때인데 부모도 없이 자란 내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가 있다 해도 어린 것이 눈칫밥 먹는 것은 싫다며 외조부모님은 급기야 큰 결단을 내리시게 되었다.
그때는 중학교도 시험을 봐야 들어가는 때였는데 광주로 목포로 유학을 못 가면 30리나 떨어진 유일한 중학교로 가게 되는데 여럿이 시험을 봤지만 나와 친구 하나만 합격을 했다. 외조부모님은 내가 중학교라도 나온 후에 큰아버지께 가면 조금은 더 마음이 놓이겠다 싶으셨는지 새로 지은 집을 양아들한테 물려주고 엄동설한에 학교가 조금은 가까워지게 한다고 산 너머 마을에 토담집을 지어 나 때문에 분가 아닌 분가를 하셨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그렇게 한겨울에 집안 일가친척이며 동네 사람들까지 말리는데도 고집스레 이사를 나온 덕에 나는 그렇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다시 셋이 살게 되었고 그곳에서 3년의 중학교를 마쳤다.
중학교 2학년 초였다. 일요일이었는데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갈 곳이 있다고 했다. 졸래졸래 따라간 그곳은 20여 리나 떨어진 면 소재지에 있는 교회였다. 그때까지 할머니도 교회란 가본 적도 없었을 텐데 그런 할머니가 나를 교회로 데리고 간 것이다. 그리고 그날부터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나를 데리고 교회에 가셨다. 신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할머니만 따라다녔던 것이어서인지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2년이나 할머니를 따라다녔으면서도 그 교회에 대한 기억은 없다. 다만 성탄절에 성탄 송을 위해 허리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우리 집 하나를 보고 이십 리나 헤쳐 와서 새벽 송을 하던 형들과 누나들만 생각난다. 나는 그렇게 중학생 때 할머니에 의해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그 신앙이 오늘까지 이어오게 되었다. 아마도 하나님은 할머니를 통해 내 신앙의 길을 예비하셨던 것 같다. 일찍 세상을 떠난 부모로 하여 늘 외로워하던 나 또한 거부감 없이 할머니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맞이하게 되었고 그 하나님은 나만 아니라 할머니의 삶 마지막까지도 인도하셨을 것이다.
몇 년 전 돌아가신 막내 이모 말씀을 들으면 “네 할머니가 너 혼자 놔두고 갑자기 세상이라도 뜨게 되면 너는 천지간에 의지할 곳 하나 없게 될 테니 어찌 살 것이냐고 하시면서 너를 교회에 맡긴 거란다” 하셨으니 절에다 이름을 팔고 띠도 판 나를 그렇게까지 하셨을 때는 참으로 오랜 시간을 두고 온갖 생각을 다 하신 결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보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신앙을 갖게 된 셈이다. 하지만 그게 어찌 거저 된 것이었겠는가. 세밀하고 정확하게 계획된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사랑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큰아버지 댁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다행히 사촌 형들도 다 교회를 다니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내 신앙도 이어졌고 그것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찌 생각하면 할머니의 결단 같아 보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외곬로 몰아 나를 이끌어 내신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예정하심의 사랑에 놀라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3. 문학의 문
남들은 당연히 다 가진 것을 나만이 갖지 못한 것에서 오는 소외감 열등감 박탈감 그리고 자격지심은 어린 나에게 늘 큰 부담이었고 콤플렉스였던 것 같다. 그런 마음을 무언가로도 표현하여 나타내 보고픈 욕망이 있었으나 그 또한 생각만 앞섰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이 진주처럼 내 안에서 서정과 서사로 자라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걸 꺼내볼 여유와 기회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내가 훗날 문학을 하게 된 단초가 되지 않았나 싶다.
내게는 문학에 대한 몇몇 기억들이 있다. 초등학교 때 아무것도 모르는 채 특활시간에 문예반에 들어갔던 것과 중학생 때 경주까지 선생님과 함께 백일장에 참가했던 기억이다. 특별히 소질이 있었다기보다는 무언가 분출해 보고 싶다는 욕망 같은 것이 있었는지 초등학교 때는 웅변대회에도 나갔었고 큰 수상기록은 없었지만 나름 글쓰기는 내게 무언가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는 일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부모도 없이 홀로 살아가야 하는 내게 세상은 만만치 않았고 늘 힘겨운 삶의 언덕을 오르내리며 스스로를 지탱하기조차 어려웠던 내게는 기회조차 와 주지 않았다. 그런데 가정을 갖고 직장생활을 하던 80년도 중반 신문광고 하나가 눈을 끌었다. 문예진흥원에서 덕수궁 석조전에 문학 강좌를 연다는 것이었다. 시간을 보니 직장 근무를 마치고 가도 될 만한 시간이었고 거리도 내가 근무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서 마음 변하지 않겠다고 급히 등록을 해버렸다. 거기서 시인 성춘복 선생님과 수필가 서정범 교수님을 만났다. 원래 시를 쓰고자 했고 습작도 주로 시로 하고 있던 차라 시를 하려고 했었는데 시와 수필강의가 교대로 이루어지는 그곳에서 마침 수필 강좌 시간에 서정범 교수님이 수필 한 편씩을 써오라는 숙제를 내셨다. 나는 <봉숭아>란 글 한 편을 써서 내게 되었는데 다음 시간에 오신 서교수님이 그걸 다시 주며 읽어보라 하셨다. 그리곤 봉숭아 대신 <발뒤꿈치>로 제목을 바꾸자시며 그걸《한국수필》이란 잡지에 초회(初回) 추천(推薦)을 하겠다고 했다. 초회가 뭔지 추천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로 나는 그렇게《한국수필》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조경희 선생님을 알게 되었고, 이철호 이숙 송도 선생님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후로 자연스럽게 수필을 쓰고 공부하게 되었다.
어느덧 수필은 내 삶이 되었고 나는 어느새 수필가로만 30년을 넘게 살아왔다. 1987년 나의 초회 추천작 <발뒤꿈치>를 발표한 후 추천 완료도 되기 전 한국수필가협회 회원이 되면서 나는《거목문학》《수필문학》등에 글을 실었다. 그리고 <책방 나들이>란 작품으로 추천 완료가 된 후에는 한국수필 등단작가 모임인 한국수필작가회(당시는 한국수필추천작가동인회였다)에서 활동하며 91년부턴 고동주 회장, 이정원 부회장과 함께 제3대 총무(지금의 사무국장)로 동인회 살림을 살았다. 그때까지 동인지가 네 번 나왔었는데 내가 5호와 6호를 발간하면서 출판사 섭외를 하여 5호《그래도 사랑하는 사람들》(1991)은 호암출판사에서, 6호《바람 부는 날에는 그리워하리》(1992)는 대림기획에서 판매할 수 있는 책으로 전액 출판사 부담의 출판을 시도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지금까지의 30년 작가회 역사에도 오직 나만이 해냈던 일이기도 해서 뿌듯한 마음을 갖는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셨다. 이것은 위로받을만한 일이 있어야 위로를 받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 어린 날의 외로움과 슬픔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은 내 수필들 속에 담겨있는 애잔한 서정들을 이쁘게 봐 주셔서 1989년을 전후하여 KBS라디오에서 이규항 아나운서와 서정범 교수님이 진행하던 ‘시와 음악과 수필과’란 방송프로에 수필들이 방송되게 하셨고 그것들을 묶은 방송수필집《아침무지개가 말을 할 때》(대림기획)가 출간되게 하셨다. 그로부터 나의 수필문학 활동도 본격적으로 더 활발해졌다.
4. 수필문학 그리고 나의 삶
내가 그리도 많이 들었던 외할머니의 노래는 당신의 희망가로 바뀌어 내가 결혼하는 것을 보고 죽는 것이 되었고, 결혼을 하게 되자 손주도 보고 싶어 했다. 그 기도가 이루어져 할머니는 외증손주 남매를 안아 보시고 여든일곱의 나이로 하늘나라로 가셨다. 일찍이 참판 댁 장손녀로 태어나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양반집 도령을 찾아 나주 임씨가로 시집을 간 것으로부터 어려움은 시작되었다. 바람처럼 떠돌길 좋아하는 남편에 아들 없는 딸만 셋인 아낙으로의 한도 한이지만 큰 사위 둘째 사위 셋째 사위까지 너무나 허망하게 잃어버린 데다 큰딸에 큰 손주까지 잃어버렸으니 그 황망함을 어디다 비길 수 있었겠는가.
내 수필 속엔 그런 할머니의 한과 안타까움에 조실부모한 내 빈 가슴의 서정이 어우러진 글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이 되어 외할머니께 갔다가 막내 이모네 들러 올라가겠다고 했더니-막내이모는 담양의 송강 정철 후손에게 시집을 가서 성산별곡 속 환벽당 취가정이 나오는 지실 마을에 살고 있었다-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시는 거였다. 내가 영문을 몰라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네 이숙 죽었다” 하시는 게 아닌가. 그 이모부는 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채워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찾아가면 넉넉한 용돈도 쥐어주고 말은 별로 없으면서도 자상하게 나를 이뻐해 주시던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분이었는데 돌아가셨다니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그때 이모부는 그곳 농협조합의 일을 맡고 계셨는데 추석 전날 조합 돈을 사무실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나서 오토바이를 타고 그걸 가지러 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사고가 났다고 한다. 오토바이와 사람이 20미터 간격으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봐서 튕겨져 나간 것 같다고 하는데 겉으로는 상처가 하나도 없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내가 이모 댁에 가니 생후 3개월 되었다는 유복녀가 윗목에서 울고 있고 이모는 정신이 나간 채 멍하니 초점 잃은 눈으로 창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이모!’하고 불렀더니 나를 한 번 쳐다보고 “왔냐?‘ 하더니 또 창문 쪽만 멍하니 쳐다봤다. 윗목의 아기는 얼마나 울었는지 지쳐서 제대로 울지도 못하는 것 같아 가슴에 안았더니 몸이 불덩어리였다. 나는 급한 김에 이모부 친구인 큰길가 약국으로 아기를 안고 갔는데 빨리 큰 병원으로 가보라 해서 택시를 부르고 이모도 불러 광주로 나가는데 가는 도중 아이는 내 품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동네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 땅을 파고 아이를 묻었다. 그날따라 눈발이 날리고 땅은 꽁꽁 얼었는데 안고 있던 아이를 묻을 자리에 내려놓는데 ’터-ㅇ’하는 울림이 내 온몸까지 전율하게 했다. 그때의 그 소리는 50여년이 되어가는 데도 지금도 내 귓가에 머물러 있다. 그러고 보면 나란 인간은 어쩌면 그리도 죽음과 친한지 모르겠다. 부모 형제에 두 이모부에 이종 조카까지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많은 죽음이었다.
그런 삶과 죽음의 거리가 내 삶과 문학 속에 그대로 자리하게 되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런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한 채 안타까움, 그리움, 사랑에 대한 굶주림을 넘치고 흘러나오는 대로 글 속에 담게 되었다.
1995년 문예진흥원으로부터 창작기금을 받게 되었다. 그 기금으로 낸 책이《날마다 좋은 날》(도서출판 유정)이었다. 그리고 그 책으로 1997년 제5회 허균문학상을 받았으며 다음 해엔 제1회 서울문예상을 받았다. 또 하난 1997년부터 기독교세진회가 내는 제소자들을 위한 잡지 계간《새 생활 안내》에 ‘안으로 띄우는 편지’를 7년간 연재했는데 그걸 모은《살아있음은 눈부신 아름다움입니다》(2001)를 도서출판 내일에서 냈는데 그게 문예진흥원의 첫 번째 우수문학작품으로 선정되어《날마다 좋은 날》과 함께 전국의 모든 도서관에 소장되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 뿐아니라 월간《건강과 생명》편집위원,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이사,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강남문인협회 사무국장.상임이사 등으로 활동하면서 1998년부터 5년간 서울특별시 서울이야기 수필공모전 심사위원, 서울특별시 공무원체험수기 심사위원, 월드컵조직위원회 문예작품 심사위원 등으로도 참여했다.
2002년 수필집《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범우사)를 출간 했는데 이것이 또 문예진흥원 우수문학도서로 선정 되었고, 2003년에는 한국현대수필작가 대표작선집 146《숨어있는 향기》(교음사)가 출간 되었으며, 2004년에는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금을 또 받게 되어 그 지원금으로《서서 흐르는 강》(선우미디어)을 출간했는데 그걸로 제20회 동포문학상 대상(2005)과 제23회 현대수필문학상(2005)를 받게 되었고, 그 해에 산문집 최원현의 맑은 이야기 샘《기다림의 꽃》(선우미디어)도 출간했다.
내 삶 속에 와 준 문학 그리고 문학과 함께 한 나의 삶은 그냥 문학이고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삶의 고비마다 보내주신 위로와 격려로 수필집과 문학상을 허락해 주셨고 나는 그 위로와 격려의 힘으로 다시 삶을 열곤 했다.
5. 내 삶 속에 함께 해 주신 그 분
나는 지금까지 수필집 12권, 수필선집 4권, 작가 인터뷰 1권, 문학평론집 2권 등 19권의 수필 관련 책을 냈다. 문학상도 제5회 허균문학상(97), 제1회 서울문예상(98), 제20회 한국수필문학상(2002), 제20회 동포문학상 대상(2005), 제23회 현대수필문학상(2005). 제7회 구름카페문학상(2011), 한국크리스천문학 우수작품상(2011), 제1회 현석김병규수필문학상(2014), 제3회 월간문학상(2014), 제36회 조연현문학상(2017), 제23회 신곡문학상 대상(2018)까지 참 많은 상을 받았다. 뿐인가. 문예진흥원의 우수문학도서 선정이 3권, 문예진흥원 창작기금 받은 것이 2건이고, 한국비평문학회의 2000년, 2001년, 2002년, 20006년을 대표하는 문제수필 선정, 중학교 교과서《국어 1》(비상교과서.2011)에 수필 <햇빛 마시기>가, 중학교 교과서《도덕2》(디딤돌.2011)에 수필 <기다림의 꽃>, 중국 동북3성《중학생 작문》(2009.연변교육출판사)에 수필 <행복한 책임감>이 등재 되었으며, 고등학교 교사지도서《문학》(천재교과서.2012)에 <기행수필의 맛과 멋 내기>, 고등학교《국어 하》(천재교육.2012)에 <수필문학의 특성>이 등재 되었으며, 대학수능 실전모의고사《언어영역》(메가북스.2010)에 수필 <땅 따먹기>, 대학수능 매가스터디《언어영역 문학 375제》(메가북스.2011)에 수필 <살아보기 연습> 등재 및 문제로 출제 되었다. 또한《한국의 좋은 수필》(2012.서정시학)에 수필 <어깨 너머>,《한국현대수필 75인선》(2012.미리내)에 <누름돌>,《한국현대수필 100년》(2014.연암서가)에 <내버려둠에 대하여>가 실렸다.
월간《건강과 생명》에 ‘최원현의 살며 생각하며’와 월간《행복한 우리집》에 ‘최원현의 살며 사랑하며’를 각각 15년째 연재하고 있으며, AK문화아카데미, MBC아카데미, 평창문예대학에서 수필 강의를 하고 있다.
무엇보다 감사하고 기쁜 것은 내가 70년대를 전후하여 문학공부의 스승으로 삼고 있던 범우문고에서 ‘범우문고 305‘로 내 수필집《누름돌》이 나온 것이다.
나는《누름돌》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그동안 교과서에도 대입 수능문제집에도 대학교재에도 내 수필들이 실렸고 권위 있는 좋은 상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범우문고로 내 수필집이 나온다니 그 기쁨을 도저히 억제할 수가 없다.’라고. 그러면서 ‘내가 범우문고에 각별한 애정과 감사를 갖듯 문학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나의 문학 친구들에게도 이 수필들이 자신감을 주고 작은 용기와 격려라도 되었으면 싶다. 평생을 그래 왔지만 또 사랑의 빚을 지고 만다. 영원히 갚을 수 없이 쌓여만 가는 이 사랑의 빚을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이 수필들이 아주 작은 갚음이라도 되어주었으면 참 좋겠다. ’고 했다.
돌아보면 내 삶의 9할은 사랑의 빚이다. 내 삶 속에 함께 해 주신 주님의 사랑이 전부이지만 그 사랑 안에서 또 수많은 사랑들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 아무도 눈여겨 봐 주지 않아 잡초처럼 버려질 수도 있던 삶을 잡초가 아니라고 약초라고 우기며 뽑아버리지 못하게 하고 거름을 주고 흙을 북돋아 주며 가꿔주신 사랑들이다.
나는 1983년 지금 사는 도곡동으로 왔다. 나와 아내의 직장 중 아내 쪽으로 온 것이다. 85년 청운교회에 등록하여 95년에 안수집사가 되었고 안수집사 18년 만에 장로가 되었다. 아내도 2006년 권사가 되었다. 나는 우리 가정 신앙의 시조다. 두 남매에게서 다섯 명의 손녀를 보았다. 단 하나 남겨진 핏덩이가 열한 명의 가족에 세 가정을 이룬 것이다. 다들 열심히 자기 일에 충실하고 신앙생활도 잘 한다. 내가 좋아하는 말씀인 역대상 4장 10절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소서’ 하는 야베스의 기도는 내게 주신 기도는 오히려 그보다 더 많이 주신 것에 감사하고 감격할 따름이다.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시고 세워주신 하나님께서 나의 펜 끝에서 펼쳐지는 문학의 세계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고 확장 시키는 작은 도구가 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위로와 사랑과 평안을 얻는 글들이 되길 또한 기도한다.
내 삶 속에 함께 하시고 내 삶을 인도해 주신 내 하나님의 사랑이 외롭고 슬프고 아프고 안타까움이 많은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에게 더욱 넉넉히 넘치도록 임하길 간절한 맘으로 손을 모은다.
크리스천문학나무. 2018년 봄호. 나의 인생, 나의 문학
최원현 nulsaem@hanmail.net
수필가·문학평론가.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한국수필가협회사무처장. 한국문인협회·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작가회장·강남문인협회 회장(역임).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현석김병규수필문학상·월간문학상·조연현문학상·신곡문학상대상 등 수상,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그냥》등 17권, 문학평론집《창작과 비평의 수필쓰기》 2권, 중학교《국어1》《도덕2》고등학교 《문학 상》《국어》등에 수필 작품이 실려 있다. AK문화아카데미·MBC아카데미·평창문예대학에서 수필강의.
사랑 가계부家計簿
최원현
nulsaem@hanmail.net
아내는 가계부를 쓰지 않는다. 그 일로 결혼하면서부터 한 십 년은 상당히 여러 번 다투었지만 아내는 끝끝내 가계부를 쓰지 않았다. 결국 내가 먼저 아내의 가계부 쓰게 하기를 포기해 버렸다.
내가 생각하는 가계부 쓰기는 돈의 수입과 지출을 기록한다는 것보다는 그걸 통해 우리 가정의 역사가 남겨지길 바랐던 것이었는데 아내에게 가계부란 그저 금전출납부란 생각만 먼저 들었었나 보다.
가계부란 기본적으로 수입이 지출보다는 많아야 그래도 들고 나는 것을 기록할 수나 있을 텐데 당시엔 그것이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 그건 외상 장부 아니겠느냐는 항의였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갑자기 다시 가계부 생각을 하게 된다. 경조비에 대한 기록만은 갖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하도 결혼식이 많고, 상(喪)을 당하는 일도 많아 자칫 잘못하면 내가 인사를 했는지 아니 했는 지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인사를 못 했을 경우 나중에 만나면 거기에 맞는 인사를 해야 하는데 그 내용들을 제대로 기억할 수가 없다. 갔을 때는 당연히 했겠지만 못 갔을 경우 축의금이나 부의금만을 보냈는 지 조차 헛갈린다. 특히 서로 때가 비슷하면 더욱 그랬다. 해서 실수를 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참 사랑의 빚을 많이 졌다. 그만큼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이요 그것은 곧 내가 갚아가야 할 사랑의 빚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랑의 가계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야 잊어버리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빚을 갚아갈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다. 그런데 사랑의 가계부는 일반 가계부와는 분명 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일반 가계부는 수입을 중심으로 하여 지출을 기록해 가는 것이지만 사랑의 가계부는 그런 법칙으로는 쓸 수 없는 가계부일 것이다. 무엇보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많아야 될 것이고, 얼마든지 많이 주면 줄수록 좋을 것이다.
사람은 동물 중에서 가장 욕심이 많을 것이다. 그것도 필요 이상으로 욕심을 내곤 한다. 안 해도 될 일도 하겠다고 하고, 안 가져도 될 것도 갖고자 하고, 그러면서 정작 해야 할 일은 이리저리 핑계를 대고 안 하려 하는 묘한 성격의 동물이 바로 인간이 아닐까. 그것은 부부 관계에서도 빈번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 사실 욕심만큼 무서운 것도 없을 것이다. 욕심은 지극히 자기 이기적인 것으로 일단 갖고자 욕심을 내다보면 이성을 잃게 되고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게 된다.
‘화성 남자 금성 여자’로 유명한 상담가 죤 그레이는 부부의 심리적인 유대관계 경고신호를 원망-거부-억압-파탄의 단계로 얘기하고 있었다. 부부간에도 자기 위주의 지나친 기대와 욕심은 정상적이던 관계마저 깨트린다는 것이다. 처음엔 원망의 감정이 되다가 그게 심해지면 상대를 거부하는 마음이 되고, 나중엔 억압적 마음 상태가 되어 결국 파탄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럴 때 사랑의 가계부를 쓴다면 아주 달라지지 않을까. ‘오늘은 아내에게 00을 해 주었다.‘ 그런데 ’아내는 내게 xx를 해 주었다.‘ 지극히 작은 것, 사소한 것으로부터 내가 하루 동안에 알게 모르게 받았던 그리고 내가 주었던 것을 기록해 본다면 ’아, 오늘은 아내한테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받았구나.‘ ’그런데 내가 해 준 것은 없네?‘ 하며 다음 날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될 것이다.
사랑 가계부에선 수입과 지출의 균형이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얼마나 많이 줄 수 있었는가가 더 중요하리라. 그것이 내게로 돌아올 것이건 그렇지 않건 그건 문제가 아니다. 다만 그날그날 받은 것과 준 것을 비교해 보며 받은 것에 대한 뜨거운 감사와 줄 수 있었던 것에 대한 감사가 모두 기쁨이 될 수 있으면 최고의 가계부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잘 안 되는 것이 역시 인간이 아닐까. 받는 것이 더 기쁘고 내 소유로만 채우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내 분수라는 항아리를 마치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는 요술 주머니쯤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마음도 동정의 마음도 내 욕심에 가려져 버리는 요즘 삶 속에서 문득문득 섬뜩해지곤 한다. 이기적인 생각들로 꽉 채워진 내 분수의 항아리엔 양심이나 이해심이 들어갈 자리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희망은 있다. 이제라도 사랑 가계부를 쓰는 일이다. 하루 이틀 사흘 그렇게 써나가다 보면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지도 알게 될 것이다. 내 것을 아무것도 주지 않는데 그런 나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런데도 지나고 보면 늘 나는 준 것이 없는데도 너무나도 많은 것을 받고 살아온 게 내 삶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주는 데는 인색하다. 그런 내가 가계부를 쓰는 것은 그나마 남은 내 삶의 순간순간에 보다 더 사랑을 느끼며 살고 싶음이다.
내가 먼저 가계부를 쓰면서 아내에게도 금전출납부가 아닌 사랑가계부를 써보자고 해야겠다. 그럼 아내도 분명 그러자고 할 것이다. 사랑 가계부,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이런 식으로도 철이 들어가는 것인가 보다.
오는 것, 가는 것
최원현/수필문학가. 칼럼니스트
nulsaem@hanmail.net
11월 동짓달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달이지만 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나신 달이기도 하다. 내가 태어난 날이 열이틀인데 아버지께선 내가 돌을 맞은 지 보름 후에 당신의 또 다른 나라로 가버리고 마셨다.
그래서일까. 몇 년째 11월이 오면 마음 한쪽이 한껏 비어있는 느낌이 들곤 한다. 벌써 반세기도 더 지나간 세월이건만 참으로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오는 것과 가는 것들의 정거장인 셈이다. 그 하고많은 것들 중 하나가 나인 것이다. 그 하고많은 것 중에서 인연이 되어 부부로 가족으로 부모 형제간으로 만난 것이다. 그 하고많은 것들 중에서 별나게 사랑하고 내 것이라 하는 것이다. 그렇고 보면 내게 11월은 이런 우리 삶에 살아가는 법, 살면서 지켜가야 할 생각이며 마음이며 자세를 일깨우고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달인 것 같다.
아버지께선 참 정이 많으셨다 한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당신보다 못해 보이면 심지어 입고 있던 옷까지라도 벗어주는가 하면 집으로 데려가 무엇을 찾아내서라도 주어 보냈다고 한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지만 아버지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내가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것들을 그렇게 이야기해 주곤 했다. 아버지는 이 세상에 오셨다 간 흔적을 그런 식으로 남기셨다. 하기야 이젠 아버지를 알던 분들도 다 돌아가셨으니 어쩜 아버지의 흔적이라곤 오로지 단 하나 혈육으로 남은 나뿐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 가슴 한쪽이 이리 더 아리고 허전해지는 것일까. 그것은 나도 이미 나이 들어 인생의 가을에 있다는 말하자면 뭔가에 쫒기는 것도 같고, 다가올 것에는 불안해한다는 의미도 될 것 같다.
딸아이가 아이를 낳았다. 내겐 첫 손주다. 이제 백일이 갓 지났는데 아무리 바라봐도 싫증이 나지 않고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온통 행복이다. ‘손녀 예쁘지요?’ 하고 물어오는 사람에겐 괜히 멋쩍어지면서 빙그레 웃음으로 답을 한다. 그 웃음 속엔 참 많은 뜻이 담겨있음을 그들도 알리라. 이미 손주를 본 사람쯤 되면 ‘잘 알잖어?’가 될 것이고, 아직 그 맛을 모를 사람에겐 ‘나중에 할아버지 되어 봐!’일 것이며, 더러는 어떤 광고 카피처럼 ‘너희가 이 맛을 알어?’도 될 것이다.
오고 만나고 맺던 것들이 어느 날 홀연히 떠나버리고 풀어지고 없어져 버려 아픔이고 슬픔이 되는 것은 생명 있는 것들에 지극히 자연한 현상이련만 그걸 수용하고 인정하는 데까진 만만치 않은 삶의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해마다 5월이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병을 앓았었다. 그런데 나이가 더 들어가면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뒤켵으로 밀려나 있던 아버지의 존재가 조금씩 실체를 더해 가는가 싶더니 그것은 어느새 나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뿐아니라 그저 내 눈으로만 바라보던 세상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거꾸로 생각을 하게 된다. 하기야 손녀를 본 반가움과 기쁨 한쪽에 벌써 너희 세상이 시작되는구나 하는 쓸쓸한 퇴장의 뒷맛이 느껴지던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시골에 가서 살고 싶다던 아내가 얼마 전 시골 텃밭에 심어놓았던 고구마 몇 줄을 캐왔다. 그러고선 끙끙 앓는 것을 보면서 마음은 그대로일지 몰라도 몸이 받쳐주지 못하니 결국 하고자 하는 것도 마음 뿐이 될 수밖에 없음을 실감했다. 그랬다. 고구마 다섯 고랑을 심는 것도 거두는 것도 그렇게 벅찰 수가 없었다. 일도 해 본 사람이 한다고 오랜 도시 생활에 젖어있던 손과 발이 하루아침에 무슨 농사일을 제대로 해내겠는가. 농사일이 어디 그냥 힘으로만 하는 일이던가. 그 또한 수많은 시행착오와 각고의 노력으로 이뤄지는 결실 아니던가.
내가 할아버지가 되면서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더 생각나고, 맞이하는 기쁨 속에서도 내가 떠나야 할 길을 생각하는 것도 세상의 모든 것이 오는 것이 있으면 가야 할 것이 있고, 만나면 헤어져야 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자연의 섭리요 질서임을 말하는 것임이리라.
그러고 보니 시골에서 가지 채 꺾어다 걸어놓았던 두 개의 감이 그땐 가장 파란 것으로 골라 꺾었었는데 어느덧 예쁜 감빛으로 익어있다. 저 또한 오고 감의 이치 속에 시간이 흐르자 제빛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그래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시대가 우리 시대를 밀어내고 있을 게다. 우리가 버티고 있을 수 없는 것이요 또 사랑이란 내 자리를 내어줄 줄 아는 것 아니랴.
오고 가는 것들 속의 지극히 작은 한 존재일 나이지만 나만의 흔적을 위해 남은 삶을 보다 열심히 살아야겠다. 두 개의 감이 나를 바라보며 저희는 가을이라며 활짝 웃고 있다. 하지만 바깥 날씨는 벌써 겨울임을 어쩌랴.
행복한 우리집 [살며 사랑하며] 2008.11
감자꽃 향기
최원현
“할무니, 왜 이쁜 감자 꽃을 다 따분당께라우?” “꽃을 따내줘야 밑이 쑥쑥 든다고 안 그러냐?”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이었을까. 할머니를 따라 밭엘 나갔다. 할머니는 밭을 한 바퀴 휘 둘러보시더니 감자밭으로 가 감자 꽃을 따기 시작했다. 꽃은 꽃이고 밑은 밑일 텐데 어린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니 어미가 감자 꽃을 참 이뻐했느니라.” 하시더니 눈물을 훔쳐내셨다. 엄마가? 순간 흐린 기억으로 어머니가 감자 꽃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당 가 화단에 부러 감자를 심었단다.” 감자를 수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감자 꽃을 보기 위해 심었다는 말로 들렸다.
어머니는 내 나이 세 살, 서른도 안 된 젊은 나이로 돌아가셨다. 결핵이었다. 형도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단다. 어머니는 나를 당신 근처엔 얼씬도 못 하게 했단다. 하나 있는 핏줄인데 얼마나 안아 보고 싶었으련만 그걸 막아야 하는 마음은 오죽 했겠는가. 하지만 이미 한 자식을 당신이 앓고 있는 병으로 잃어버린 입장이니 눈앞의 자식을 바라보면서도 살을 깎는 아픔으로 그걸 참아냈을 것이다.
하얀 감자 꽃을 좋아하셨다는 어머니는 하얀 옷을 즐겨 입으셨단다. 어머니는 당신이 감자꽃이란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러고 보면 감자 꽃에서 어머니 모습만이 아니라 어머니 냄새까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어머니의 모습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예쁘진 않지만 함초롬히 무리 지어 큰 송이처럼 피어나면서도 개체로 외로워 보이는 꽃,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꽃의 화려함이 아니라 소박한 아름다움에 왠지 슬픔의 냄새가 풍겨나는 감자꽃은 오히려 빈약해 보이는 것이 어울리는 것 같았다. 감자 꽃은 자신을 아름다움으로 피워 올리기보단 저 아래 땅속 열매가 튼실해지기만을 바라며 그곳으로 모든 것을 보낸다.
나는 어머니 모습만큼 냄새도 기억 못 한다. 외할머니와 이모의 품에서 자란 내게 어머니의 냄새는 할머니의 냄새고 이모의 냄새였다. 헌데 문득 어머니의 냄새는 감자꽃 향기가 아닐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이 들었다. 감자 꽃향기, 내 어머니의 냄새.
감자는 뿌리식물이라기보다 줄기식물이라고 한다. 땅속의 줄기가 뿌리 열매인 감자가 된단다. 자신의 몸을 땅속 깊이 묻어 땅속 열매로 키우는 사랑, 그렇기에 꽃에서 받아 써야 할 양분도 가급적 억제하고 땅속으로 보내다 보니 피어난 꽃조차 여리고 힘이 없어 보인 것 같다. 영양이 될만한 건 모두 다 땅속 자식들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노랗게 말라가는 하얀 감자 꽃, 내 어머니의 삶도 그런 감자 꽃이었다.
할머니를 따라 나도 감자 꽃을 땄다. 똑똑 목을 부러뜨려 따다가 손에 든 감자 꽃을 코끝에 대보았다. 풋내 같기도 한 연한 라일락 향기가 났다. 할머니의 앞치마에 손에 든 걸 버리고 다시 할머니를 따라 꽃을 땄다. 그런데 다시 꽃을 따려는데 감자 꽃의 목이 부르르 떠는 것 같다. 순간 내 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아무 말도 못하고 목숨을 빼앗기는 참담이 어린 나를 통해 저질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해서 “할무니, 이 꽃 안 따면 안 돼?” 했더니 “따줘야 밑이 잘 든다잖냐?“ 하신다. 난 꽃 따기를 그만두었다. 꽃이 불쌍했다. 아니 내가 무서워졌다. 손에 쥔 꽃들의 목에서 퍼런 피가 흘러나와 끈적대고 있었다. 퍼런 감자 꽃의 풋내 같은 피 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들어왔다. 엄마의 냄새 같다는 감자 꽃향기, 난 엄마에게 크게 못 할 짓을 한 것 같아 눈물이 나왔다. 손에 묻은 감자 꽃 진도 어서 씻어내고 싶었다.
난 그날 이후 감자 꽃을 따지 않았다. 할머니도 그 후로 감자 꽃을 따는 것을 보지 못 했다. 마당에 병든 딸이 좋아한다고 꽃을 보기 위해 심었던 감자 꽃인데 그 딸이 가버리고 없다고 수확을 올리겠다며 퍼런 피 흘리게 그 꽃의 목을 꺾는 이율배반적 행위가 바로 인간의 삶이었다.
얼마 후면 감자꽃이 필 것이다. 시골에 있는 작은 땅뙈기에 무얼 심을까 걱정을 했더니 후배가 씨감자를 보내왔다. 그걸 아내와 둘이서 심었다. 어떤 감자가 열릴지 모르겠다. 어머니가 좋아하셨다는 흰 꽃이 피려면 두백감자여야 한다. 감자 꽃의 꽃말은 자애,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한다.
5월이면 유난히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난다. 감자 꽃이 피는 때다. 감자 꽃은 씨가 맺혀도 그 씨를 심지 않는다. 결국 꽃이 필요 없는 식물이다. 그래선지 어떤 것은 아예 꽃이 없는 것도 있다. 씨는 씨이되 씨의 역할을 못하는 감자 꽃의 씨, 대신 씨감자의 싹들이 생명의 씨가 된다. 그러나 감자꽃의 꽃말처럼 자애로 넘치는 어머니의 사랑 같은 꽃, 땅속 결실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감자 꽃의 사랑이야말로 어머니의 희생이다.
우리 엄마는 감자꽃이다/맛있는 건 모두 다/땅속에 있는 동글동글한 자식들에게 나눠 주고/여름 땡볕에 노랗게 시들어 가는/하얀 감자꽃이다/ -이철환의 <보물찾기> 중-
그러고 보면 나도 어머니처럼 흰 감자꽃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보고파지면 어머니 대신 볼 수 있는 꽃, 연한 라일락 내 나는 하얀 감자꽃 향기가 진짜 어머니 냄새일 것 같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