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달걀
카톡에 난센스 퀴즈가 올라왔다. ‘삶은 달걀’을 영어로 맞히기다. 학교 다닐 때 영어실력으로 ‘보일드 에그(Boiled egg - 삶긴 달걀)’라고 답한다. 웃자고 하는 질문에 시험지 답안 같은 대답이 된다. 이때 ‘라이프 이즈 에그(Life is egg - 인생은 달걀이다)’ 정도로 답하면 우스개로써 그럴싸한 화답이 된다.
44도 열탕에 몸을 담그고 앉아있자니 내가 ‘삶긴 달걀(Boiled egg)’ 신세가 될 것 같은 열감으로 노글노글해진다. 달걀에서 닭으로, 닭에서 달걀로 순환하는 라이프사이클이 ‘유레카’처럼 똬리를 튼다. ‘삶-은 달걀(Life is egg)’ 이라는 난센스가 수증기와 함께 슬금슬금 몸을 감싼다. ‘너는 이 말을 우스개로만 여겨서는 안 돼.’ 어디로 부터 들려오는 속삭임인지 이명耳鳴을 따라 귓전을 맴돈다.
6·25 동란은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렸던 시절이다. 기억력이라는 뇌 장치가 기능을 발휘한 최초의 일인 셈이다. 피란 중 다른 형제들보다 융숭한 보호를 받았던 기억. 삶은 고구마를 다른 사촌들보다 우선하여 넘겨받았던 기억. 쌀 알갱이가 한 낱이라도 더 섞인 주먹밥을 배분받았던 기억 등이다. 동란이 끝나고 초등학교에 다닐 때 어머니는 도시락에 달걀 프라이를 얹어 점심시간을 빛내주셨다. 소풍 가던 날 가방에 ‘삶긴 달걀’을 넉넉하게 넣어 주셨던 기억도 잊을 수 없다.
외갓집에 가는 날에는 잘익은 달걀 몇 개와 소금을 약봉지처럼 싸서 함께 주셨다. 그 때는 귀하디귀하던 달걀이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인기 만점 식재료가 되었다. 농촌근대화 정책으로 양계장이 대형화 되었다. 나환자들을 집단수용하는 과정에서 양계를 소득수단으로 삼도록 했던 정책이 달걀 대중화에 한 몫 한 옛일이다. 최근 조류독감이 번지니 달걀 값이 치솟는다. 소비를 자제하면 피할 수 있는 뻔 한 이치를 실행하지 못하는 세태가 이상하다.
정초가 되면 ‘금년은 좀 괜찮겠습니까.’라며 신세 한탄 겸 위로를 받고 싶어 오는 어른들이 늘어난다. 자식을 도와줄 경제력도 없으면서 도와야 한다는 걱정만 품고 사는 어르신들이다. 젊었을 때는 보듬어 줄 짬이 없었고, 살림 낼 때 집 한 채 못 사준 것이 죄밑으로 남아있는 사정을 무어라 탓할 수는 없다. 아들 돌잔치 때나, 손자 돌잔치 때나, 넉넉잖기는 마찬가지다. 그래도 해가 바뀌었으니 조금 나아지려나, 애절함과 미련, 희망과 막연함으로 위로를 받고자 온다. “줄 것도 없으면서 걱정만 태산이시네. 이제 자식에게 짐이 안 되도록 하셔야지요. 자식을 걱정하면 올가미가 됩니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자식을 돕는 일이예요. 이제 아들 내외 팔자대로 살도록 놓아주세요. 부모가 자식을 위하는 최선책은 방목입니다.”
‘삶-은 달걀’이라니. 누구나 병아리 시절을 겪는다. 병아리는 줄탁동시 하여 알을 깨는 일 부터 스스로 해결한다. 어미와 새끼가 동시에 껍질을 쪼아 세상 빛 아래 나오는 작업을 거친다. 암탉은 제비처럼 먹잇감을 새끼 입에 밀어 넣어 주지 않는다. 날지 못하는 새끼에게 일찍부터 모이 쪼는 학습을 시킨다. 날짐승 중에서 유독 닭이 그렇다. 아이들은 먹고, 입고, 살아가는 자초지종을 여러 해에 걸쳐 부모에 의지한다. 병아리보다 허약하다. 박혁거세를 난생卵生으로 묘사한 전설 속에 무언가 깨우칠 일이 있다.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도 알에서 태어난 전설을 가지고 있다.
햇수가 될 만큼 된 암탉은 산란한 자리를 뜨지 않은 채 알을 품는다. 그런 사실을 아는 영악한 악동은 암탉이 울면 지체 않고 닭장으로 달려간다. 녀석은 눈을 말똥거리며 접근하는 손을 쪼려 한다. 알을 지키겠다는 본능이다. 사람에게는 한 입 식재료에 지나지 않지만 닭은 생명 승계라는 우주적 본능으로 알을 품는다. 자식이란 스물이 넘으면 하루빨리 독립시키는 것이 좋다. 취업, 혼인, 주거. 부모로서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헛수고요 공염불일 뿐이다. 취업도, 혼인도 대신 해 줄 수가 없다. 다른 나라 부모들이 자식 키우는 방식을 눈여겨 본적이 있다. 어느 나라도 우리나라 부모님들처럼 심각하지 않다.
친구 하나는 마흔 넘은 아들 고시 공부 뒷바라지를 자랑삼았다. 결국 로스쿨이 고시를 대신했다. 결혼시킨다며 초대했다. 며느리는 5층 건물 하나 안 주느냐고 신혼 재미 삼아 다투더니 석 달을 못 채우고 줄행랑을 쳤다. 이 친구 소문내지 말아 달라 당부를 거듭 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자식에게는 빌딩보다 사회성 함양이 더 큰 유산이다. 자식에게 돈을 풍족하게 베풀면 자식의 삶은 ‘삶긴 달걀(Boiled Egg)’이 되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면 ‘삶-은 달걀(Life is Egg)’이 된다. 달걀이 병아리 되고 병아리가 커서 알을 낳는다는 인생 사이클을 가르쳐야 한다.
삶이란 생명 순환에 근본 가치가 있다. 생명 있는 것은 다 죽는다. 그러나 또 하나 가치를 남긴다.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가치 있는 죽음도 무가치한 죽음도 된다. 내 자식도 순환하는 생명 법칙을 알아서 가치 있는 죽음을 준비할 줄 아는 존재가 되기를 소망한다. 열탕에서 몸을 녹이며 노닥거리는 나는 누구인가. 마음이 없어서 안 준 게 아니라 가진 게 없어서 못 줬다. 있었더라도 빈손으로 독립시킨 건 잘했다. ‘자식은 일찍 독립시켜야 잘 산다.’는 말이 나를 위해 만들어진 인생론 같다. 문제를 혼자 해결하는 적막한 외로움도 일찍 경험해야 한다. 지독한 고독에 몸부림치며 삶이라는 쓴맛에서 성취라는 단맛을 추출하는 경험을 가져야 한다. 황량한 들판에서 비바람과 맞서며 부대껴 보아야 한다. 걸림돌을 디딤돌 삼을 줄 알아야 ‘삶긴 달걀’이 아닌 ‘삶-은 달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