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볼 수 있는 미래 영화는 대부분 디스토피아적이다. 과학기술적으로 매우 발전된 사회인 것은 변함 없는데, 영화로 나타나는 인간의 미래가 우울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요즈음의 영화는 그걸 인간 외부의 무엇에 의한 위협에서 찾지 않는다. 인간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문제로 본다. <슬립 딜러>(Sleep Dealer, Alex Rivera, 2008)도 그런 영화 중 하나다.
기술의 발전, 특히 정보기술의 발전에 따른 인간의 미래에 대해 기술결정론은 낙관적인 태도를 보인다. 기술의 발전에 의해 사람들은 힘든 노동에서 벗어나 보다 안락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기술이 사람과 사회를 변화시킬 것이라는 전형적 태도다. 하지만 <슬립 딜러>는 그러한 낙관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 어느 때의 멕시코. 황량하고 외진 곳에서 한 가족이 살고 있다. 이곳이 처음부터 거칠고 메마른 땅은 아니었다. 미국의 다국적기업이 강을 댐으로 막고 물을 상품으로 팔기 때문이다. 작은 땅이나 재산으로 지키고 옥수수를 키우기 위해서는 댐에 가서 감시카메라와 기관총의 조준을 받으며 물을 사와야 한다.
미국의 다국적기업이 어떻게 멕시코의 강까지 '민영화'했는지는 설명이 없다. 영화에는 아예 정부가 등장하지 않는다. 기업의 지배만 보일 뿐이다. 이들은 물의 해방을 요구하는 '테러리스트'로부터 자신의 재산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직접적인 공격을 서슴치 않는다. 이러한 합법적 공격은 어린아이도 볼 수 있게 생중계된다.
다국적기업이 지배하는 세계는 첨단 기술이 활용되는 곳과 전통적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공존한다. 미래적이지 않은 어법으로 말하자면 중심부와 주변부가 존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을 결정하는 기술은 접속이다. 그것은 인체의 신경계를 직접 외부의 기계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인체가 기계를 그리고 기계가 인체를 조종한다.
기업의 폭격기도 접속을 통해 원격조종되며, 노동 역시 접속으로 이뤄진다. 접속으로 이뤄지는 노동은 다국적기업으로서 매우 진보적인 기술이다. 그것은 멕시코의 노동자들을 국경을 넘지 않도록 하면서도 미국에서 일할 수 있게 한다. 멕시코의 공장에서 미국 본토에 있는 로보트를 조종하여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더 이상 이주노동자 문제는 없다.
그럼 접속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은 어떤가. 국경수비대나 이민국의 감시에 신경쓸 필요 없고 육체노동의 고됨도 없다. 하지만 그들의 심신은 피폐해간다. 일을 하다 기절하기도 하고 반복된 접속노동으로 환각작용을 일으키거나 끝내는 눈이 멀기도 한다. 물론 접속을 원하는 노동자들은 많으니 기업 입장에서는 별 문제가 아니다.
정보사회의 특징을 사이보그(cyborg)라 할 때, 영화는 그것을 비관론적으로 보여준다. 사이보그가 인간의 몸과 마음을 기능적으로 확장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은 인간의 자아 분열과 심신의 파괴로 귀결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그래서 영화에서 접속노동자의 눈에 비치는 캘리포니아의 하늘은 검붉은 빛을 띤 채 음울하기만 하다.
접속은 기업이 지배하는 미래 세계에서 '미래인'(근대인처럼)으로 사는 방식이나. 그것이 누구에게나 허용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미래도시에서도 암시장 역시 첨단화되지 않고 번성한다. 이곳에 더 넓은 세상을 알고 싶어 불법 접속을 했다가 기업의 폭격을 받아 아버지를 잃은 한 사내가 찾아온다. 그리고 그의 신경계를 세계경제시스템에 연결시킨다.
그는 미래도시의 시민이 되었다. 그는 노동자들이 '슬립 딜러'라 부르는 곳에서 일을 한다. 그는 화려한 도시의 변두리, 접속노동자와 장님이 된 퇴직자들이 모여 사는 빈민촌에 기거한다. 그는 고향의 가족에 월급을 송금한다. 이런 그의 삶은 현재 혹은 과거의 노동자와 다를 게 없다. 기술이 진보했음에도 노동자의 삶은 왜 진보하지 않는가.
기술의 발전은 노동방식을 바꾸고 나아가 기업과 정부의 조직방식을 바꿀 수 있다. 그렇게 사회구조의 원리까지도 바꾼다고 기술결정론은 주장하지만 70년대 평화시장 미싱사와 미래도시 접속노동자의 삶의 형태가 다르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건 기술이 누구의 것인가의 문제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술은 자본의 이윤을 위한 것이다. 아무리 선진적 기술일지라도 이윤확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버려진다. 기술의 발전은 시장원리에 종속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손'이란 기실 이윤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런 구조에서 기술의 발전은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기보다는 심화시킨다.
생존에 필수적인 자원이 사유재산이 되고 인간의 신경계까지 착취하는 기술에 지배되는 미래는 기술의 발전이 부족하거나 넘쳐서가 아니라 그 기술이 시장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이윤확대 수단으로서 기술이 발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술에 의한 변화란 사람들이 구매하는 상품의 변화, 그들이 상품이 되는 방식의 변화에 불과하다.
기술결정론과 대립하는 사회결정론은 기술 그 자체로는 사회적 관계나 제도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본다. 정보사회 역시 자본주의 사회란 점을 빼놓고 이해할 수 없으며, 자본주의 계급 불평등이 정보의 불평등을 낳고 그것이 다시 계급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것으로 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술은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는 것이다.
<슬립 딜러>는 국가 수준의 무장력까지 갖춘 다국적기업의 존재를 통해 기술의 배후에 있는 사회구조의 문제를 드러낸다. 이는 묵시록적 분위기를 풍기며 결국 기계(물화된 기술)와의 투쟁에 몰두하는 <매트릭스>와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슬립 딜러> 역시 기술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태도가 있지 않나 싶다.
영화에서 사람들은 접속을 통해 세계 어느 곳과도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현실적 시공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는 사람들 사이의 장벽은 접속으로도 넘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접속으로 사람들의 관계가 더 넓고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고립적이 된다. 노동자들은 한 공장라인에 있음에도 그들의 노동 과정은 서로 단절되어 있다.
접속시대의 섹스 역시 기계적이고 건조한 느낌을 준다. 성기 결합을 통한 감각의 공유만이 아니라 신경계를 연결해 기억까지 공유하는 섹스로 진보했음에도 그것이 연인들의 관계를 더 단단히 하지는 않는다. 예술활동 역시 변질된다. 작가는 자신의 기억을 기억마켓에 올린다. 그러나 대상에 대한 독특한 기억 그 자체 즉, 표현되지않은 감정이 예술일 수는 없다.
사회결정론은 기술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는다. 자본에 저항하는 기술적 가능성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슬립 딜러>는 그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까. 영화에는 다국적기업에 대한 저항이 나타나고, 이는 접속의 기술을 활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저항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투쟁이 아닌 개별적 테러로 국한된다.
접속이 자본의 기술을 넘어 저항의 사회적 연대를 만들어 나가는 기술로 확장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영화에 사회운동적 인식을 요구하는 것이 과할 수도 있다만, 그건 영화의 그러한 인식이 낮아서라기보다 기술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과 사회가 기술과 맺는 관계이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다.
SF영화라면 액션 블록버스터가 되어야 이목을 끄는 게 극장가 현실인데, <슬립 딜러>는 그런 호쾌한 액션과 현란한 CG도 할리우드적인 결말도 없다. 다만 사회의 구조적 변화 없는 기술적 진보란 현실의 미래적 확장에 불과함을 차분히 얘기한다.
자신의 존재성마저 기계로 대체하는 인간의 기계중독을 다룬 <써로게이트>, 비정규직 노동자를 아예 '비정규적 인종'으로 대체시킨 <더 문> 등과 함께 보는 것도 괜찮다.
첫댓글 ‘sleep dealer'가 어떤 의미인가요?
직역하면 '수면판매자' '수면유통자' 쯤 되겠지? 잠을 포기해야 일 할 수 있는 곳이란 의미일 듯...
"사회의 구조적 변화 없는 기술적 진보란 현실의 미래적 확장에 불과함"에 공감합니다. 영화평론 하셔도 되겠어요. 처음 들어본 영화인데 사이버펑크 분위기에 그림으로 봐서는 인디영화 같군요. 범초야. "더문"하고 "써로게이트"는 복사한 하드에 있으니까 꼭 봐라. 특히 "더문"이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