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B-10) 그리스도의 몸의 회복을 위한 변증/ 10-2. † 내세의 능력과 소망!
<그리스도의 몸의 회복을 위한 변증의 글로서 그동안 연재(連載)한 ‘세상이란 무엇인가?’시리즈의 마지막 글입니다. “내세의 능력과 소망(1),(2)로 이 주제를 마감합니다. 그동안 가톨릭 홈페이지와 가톨릭수호닷컴에도 연재한 바, 많은 호응을 보내주신 형제자매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아멘>
<* 10-1에서 계속되는 내용임>
<하느님의 새 창조>
사탄은 우리 몸에서 더 이상 어떤 권리도 없다! 그러나 이것은 소극적인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적극적인 것은 무엇인가? 하느님은 옛 창조를 끝내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셨다! 또한 그분은 새 창조, 곧 그분의 새사람을 이끌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뜻을 이루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얻으셨다!
로마6,9절은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라고 말한다. 창세기 1장에 계시되었다가 창세기 3장에서 상실된 하느님의 뜻은 결코 영원히 상실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첫 번째 사람의 몸에서 얻으실 수 없었던 것을 두 번째 사람의 몸에서 얻으셨다! 이 두 번째 사람은 보좌 위에 계신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담대하게 다시 한번 시편8,4-5절의 말씀을 인용한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그는 시편의 말씀을 이같이 인용하고 이어서 외쳐 말하되 “오직 우리가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시편8,4-5; 히브2,6-9)라고 했다.
만일 인류가 피조된 것이 하느님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오늘날 이 필요는 결국 만족되었다! 하느님은 그분의 사람들을 얻으셨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시편 8편, 히브리서 2장은 독특하게 연결된 것이다! 물론 시편 8편은 시(詩)로서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노래한 것이며, 그 가운데 요점은 비록 사람이 타락했지만, 시편을 노래하는 사람(다윗)은 여전히 하느님의 계획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창세기 1장의 처음의 계획, 곧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시편8,6-8)를 재확인할 뿐이었다. 하느님의 계획에는 변함이 없다. 또한 그의 노래는 찬미의 환호로 시작할 뿐만 아니라 찬미의 환호, 곧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로 끝맺는다. 대적은 이미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고, 사람은 이미 그의 함정에 빠졌으며, 그는 심지어 하느님을 모독했다.
만일 내가 이 시편을 썼다면, 8절 이후에 틀림없이 탄식의 소리를 내며, “그러나 애석하게도 사람의 타락으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라고 절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를 쓴 다윗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완전히 타락의 일을 잊어버린 것같이 언급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상(詩想)은 구속의 전체 역사를 뛰어넘어 환호하기를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노래하였다!
아담과 하와는 타락했지만 그들은 결국 사람을 통해 사탄을 패배시키려는 하느님의 뜻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분의 뜻은 요지부동하여 그분의 아름다움이 알려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에 알려지는가? 바로 온 땅이다!
<하느님은 아들들을 통해 이루신다>
이 정하신 뜻은 예수님은 통하여 실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아들들에게도 실현되어야 한다. 곧 영광 안으로 이끌어 들일 “하느님의 많은 아들들”에게서도 실현되어야만 한다! 시편 기자는 심혈을 기울여 이 사실을 강조한다.
비록 사탄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지만, 사람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가 얻은 권리는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 가운데는 여전히 사탄이 만질 수 없는 무리가 있다! 시편8,2절은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와 보복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군대 장관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린아이, 심지어는 젖먹이로 대적의 모든 군대를 능히 굴복시키실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미 히브리서 2장의 영감이 시편 8편에서 얻은 것임을 보았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시편의 영감에서 진일보하였는데, 한 면에서는 하느님께서 창조 안에서 정하신 뜻과 그것이 가리키는 목적을 재확인하면서, 동시에 몇 가지의 추가적인 말씀을 더한 것이다.
곧 히브리서 2장은 실제적으로 타락한 사람의 흑암의 역사를 회고하고 나서, 하느님께서 구속과 회복 안에서 정하신 뜻은 동일한 목적을 지향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구속으로 말미암아 산출된 모든 새로운 환경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계획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분의 목표를 포기해 본 적이 없으시다!
동시에 히브리서 기자는 십자가의 승리의 관심에서 시편 기자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긍정한 것을 다시 한번 자신 있게 긍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하느님은 모든 것을 잃은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목적을 이루셨다.
히브2,8절은 “만물을 그분의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습니다. 만물을 그분께 복종하게 하셨다는 것은 그분께 복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직 만물이 그분께 복종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겉으로 보기에 우리가 “만물을 그분의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습니다.”라는 사실을 시인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에 여기서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직 만물이 그분께 복종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비록 사실이 이와 같을지라도, 시편 기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즉시 의기양양하게 말하기를 “다만 우리는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님을 봅니다. 그분은 죽음의 고난을 받으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것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원문 참조, 히브2,9)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또 담대하게 “… 이것을 그분께서 죽으심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망시키시고,”(히브2,14절)라고 말한다. 사람은 땅에서 반드시 하느님을 위해 행해야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은 그것을 이미 모두 이루셨다!
여기서 “그분은 모든 것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2,9)”에서, “모든 사람”은 원문상 “만물”로 번역함이 더 좋다. 곧 예수님의 구속은 사람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위하여 성취되었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이것은 최초의 상황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으로서, 곧 사탄의 세상 체계를 완전히 뒤엎으려는 아버지의 뜻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교회의 책임과 하느님의 필요를 만족케함>
그러므로 오늘날 하느님 앞에서 교회의 분명한 책임은 바로 마귀의 근거지인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세상의 권세와 주관자들에게 주님의 증인이 되려면, 반드시 우리 마음 가운데 “그 위장하고 거짓말하는 자”인 악한 자가 차지한 근거를 주님의 십자가로 제거하고 끊어 버려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목적은 여전히 사람으로 “다스리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대적에 대한 통치권을 되찾아, 실제적으로 땅이 하느님께 돌아가게 하기를 갈망하신다! 그러므로 바오로는 로마8,19절에서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느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라고 말한다.
사람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구원의 복음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종 된 우리가 만일 다른 사람만을 위해 수고한다면, 우리는 창조 안에 있는 하느님의 원초의 목적을 소홀히 하게 된다. 우리의 수고는 사람의 필요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피조된 것은 하느님의 필요를 만족케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만일 하느님의 필요를 만족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진일보하여 우리의 삶의 배후에서 교묘히 하느님을 대적하게 만드는 영적전쟁을 바르게 인식하고, 반드시 사탄을 처리해야만 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이 영적전쟁의 인식은 물론 오히려 망각한 것 같다! 불행히도 오늘날의 교회는 영적전쟁에 무지한 무자격의 성직자들이 온통 차지하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는 반드시 하느님을 위하여 사탄에게서 그의 권세를 빼앗아 그를 그의 근거지에서 몰아내고, 그의 가산을 탈취하고, 그의 포로를 해방시켜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의 상태가 어떠한가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것을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함이 필요하다. 나는 이 주제를 확장해야만 하는 강한 부담 때문에 “마귀와 타락한 천사에 대한 연구”코너를 만들고 계속 글을 쓰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사람을 감동시킬 수는 있으나 사탄을 요동시킬 방법은 없다! 사탄을 처리하는 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보다 대가를 훨씬 더 많이 지불해야 한다. 이것을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가 영 안에서 하느님께 절대적일 필요가 있다! 곧 주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만이 효과적으로 사탄이 우리 몸에서 얻은 위치를 잃게 할 것이다!
마귀와 그의 악한 영들은 그들이 방치하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다! 곧 그들은 어떤 사람의 몸에서 자신들이 완전히 힘을 쓸 수 없는지를 간파하고 있다! 사도19,15절은 “예수도 내가 알고 바오로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마귀와 그의 악한 영들은 그들이 언제 누구에게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이 영적전쟁에서 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을 패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영을 좇아 행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곧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왜냐하면 영의 분별과 그분의 뜻에 순종함이 없으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심지어 하느님을 그분의 대적에 대하여 힘을 쓰실 수 없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당신에게 묻겠다! 당신은 이 땅에서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며 절대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인가? 당신은 현재 내세의 영광스런 능력을 맛볼 수 있는가? 우리는 그 유일한 합법적인 소유자인 하느님을 위하여 이 세상의 왕인 마귀에게서 영토를 탈환하고 있는 사람인가? 당신은 하느님이 당신 삶의 유일한 중심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고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눈물이 납니다!
이 글을 마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영광 받으소서!
알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