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는 중매의 달인
이OO님 (경기 이천시)
친절~~~
입대 날짜는 2000년 4월 20일로 충북 증평에 있는 사단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입대 전 동네 형님의 말을 들으니, 그 사단은 반 이상이 전경으로 차출되는 사단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고, ‘내가 뭐 전경 가겠어?’라고만 생각했는데, 결국 전경으로 차출되었습니다. 좌절했습니다.
전경이라 함은 데모진압을 해야 하는 그런 운명이지 않습니까?
저는 그렇게 6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충주 중앙경찰학교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저랑 같이 입대해서 훈련소에서도 서로 의지하던 친구2명이 있었는데, 한 친구는 훈련이 끝나기도 전에 기무대에 뽑혔고, 또 한 친구는 3군 사관학교 조교로 복무했습니다. 왜 나만 전경인건지, 씁쓸하더군요.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중앙경찰학교에서의 2주간 훈련은 천국이었습니다.
먹는 것도 맘대로, 마트도 언제든지, 고된 훈련 뒤 만끽할 수 있는 담배 한모금의 자유도 모든 것이 훈련소와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2주간의 교육이 끝나고 전라도 순천의 전투경찰대로 가게 되었고 본부 소대에서 1주간 대기하는 동안 주로 숙지하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전경이나 의경은 무전기를 다루기 때문에 무전기음어를 알아야 했습니다.
도청을 대비해 통상적으로 쓰는 말은 쓰지 않고 무전기음어를 사용하는데 무전기음어라는 게 한두 개도 아니고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전화는 연줄, 연락은 비연, 팔팔은 위치, 조명은 확인, 이런 식으로.
예를 들어 ‘각 삼오지 팔팔조명’하면, ‘각 근무지 위치 확인’이 되는거죠.
여기서 잠깐! 전,의경의 차이는 확실히 구분하시죠?
물론 전,의경다 국방의 의무를 마친 건 같지만 다른 점 몇 가지가 있습니다. 전경은 전투경찰의 줄임말로 현역으로 입소했다가 훈련소에서 자대배치 받을 때 차출되어 전경으로 빠지게 됩니다. 여기서 가장 큰 차이가 납니다. 의무경찰로 지원한 게 아니고 현역으로 입소했다는 거.
또 계급장의 차이도 있습니다. 의경은 이파리만 있지만 전경은 작은 이파리 밑에 짝대기가 있습니다.
일반 현역을 국방부소속, 의무경찰은 내무부(현재는 행정안전부죠) 소속이지만 전경은 그 어느 소속도 아니었습니다. 국방부와 내무부를 반씩 걸친 상태였죠. 그렇다 보니 먹는 거, 입는 거 등등 미흡했습니다.
전역할 때 전역증을 받으니 육군참모총장 직인이 찍힌 것을 보고 전경은 육군이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이야 전경 주특기번호 1119가 생겨서 있지만 제가 전역할 때에는 모두가 1111 보병으로 주특기를 받았었죠. 의경은 예나 지금이나 1111로 알고 있습니다. 전경과 의경을 같이 보는 게 내심 기분 상했습니다.
저희 27명은 각 소대 배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1,2,3소대는 진압소대, 5소대는 교통소대였습니다
소대배치는 군번 순으로 자르는 형식이었고, 예정대로라면 저는 진압소대로 가게끔 되어있었는데 저보다 군번이 늦은 동기가 데모진압하는 소대, 부소대장님 눈에 띄어 차출되는 바람에 제가 진압소대에서 교통소대로 가게 되면서 제 인생 일대의 전환점이 될 줄 몰랐습니다.
교통소대 배치 후, 소대에서도 본부소대 대기할 때처럼 오로지 무전기음어와 차 번호, 가장 중요한 도로교통법을 숙지하는 일에 하루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교통소대 특성상 도로교통법 숙지는 기본이었는데 법과 관련이 있다 보니 너무 힘들었습니다. 물론 가장 많이 딱지를 끊는 도로교통법을 주로 외우지만 신병들에게는 모두 외우라고 시키더군요.
또한 수신호도 암기해야 했습니다. 수신호를 쓰는 경우는 많이 없지만 신호기가 고장났다던가 러시아워 시간에 수신호로 신호기를 대신 했기에 수신호 암기는 필수였습니다. 저는 소대 내 전령으로 뽑혀서 다른 동기들보다 조금은 편하게 소대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그만큼 고참들 갈굼을 동기들보다 심했습니다.
제가 상경 6호봉인 2001년 11월경 분기별로 소대소식지를 만들어 제출하라는 중대장님의 명령이 떨어져 소대 이모저모 행사, 소대자랑 등. 다양하게 꾸며졌고 1등한 소대에겐 하루외출의 특권이 부여했기에 소식지에 목숨 걸고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엔 엑셀이나 한글 등의 프로그램을 다루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에 그래도 컴퓨터 전공이고 시간이 제일 많이 남는 전령인 제가 투입되게 되었습니다. 또한 컴퓨터가 보급되어 있는 게 아니라 하루가 멀다 하고 PC방으로 가서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던 중 컴퓨터 전공자가 신병으로 들어와 제대를 7개월 정도 남겨둔 저는 소대소식지에는 관심이 없어 신병에게 가이드라인만 잡아주고 저는 주로 게임과 채팅을 하며 2시간을 놀다가 복귀하곤 했습니다.
한번은 말년수경이 자기를 데리고 나가라기에 하는 수없이 고참과 동행했고 전세가 뒤바뀌어 고참은 놀고 저는 2시간 내내 작업을 했습니다.
취침점호가 끝나고 PC방에 동행했던 고참이 부르더니
선임 - "털래미,내가 pc방에서 채팅해서 번호를 몇 개 따왔는데 오목해서 니가 이기면 번호하나 줄게. 네가 지면 라면에 만두 쏴라~!"
이러는 겁니다.
참고로 제가 몸에 털이 많아 별명이 ‘털래미’였습니다.
그렇게 오목내기는 시작되었고 3:0으로 싱겁게 이겨버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 - "번호 하나 주지 말입니다"
하는 동시에 고참은 도망가 버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번호를 얻어낼까 고민하다 그날 밤 고참이 잠든 사이 관물대를 습격해 그 많던 번호중 하나의 번호를 재빨리 접수했습니다.
사실 이제야 말이지만 군복무중이지만 사회에서 군복무를 하다 보니 짬이 되면 휴대폰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그날 밤 바로 번호의 주인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녀는 흔쾌히 즉석만남에 응했고 다음날 바로 약속을 잡고 시간과 장소를 정했습니다.
01년 11월 27일 저녁 7시, 장소는 순천대 근처의 커피숍이였구(장소와 시간은 기억하는 건 바로 제 22번째 생일 다음날이었기에 기억할 수 있죠)
약속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떨림과 불안함이 공존했고 ‘날보고 싫다하면 어쩌지? 어떻게 생겼을까?’등 생각을 하며 하루일과가 끝나기만을 기다렸고 어느덧 시간은 6시30분이 되어, 사복으로 갈아입고 신고를 마친 후 저도 모르게 다리는 뛰고 있었습니다. 먼저 PC방에 들러 후임에게 오늘 처리해야할 부분을 정해주고 pc방을 나와 커피숍으로 향했습니다. 자리를 잡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를 기다리는데, 드디어 그녀가 나타났습니다.
당시 제 이상형은 긴 생머리에 통통하고 저보다 작은 여성이었는데 딱 그녀가 그런 스타일인 겁니다.
만남 전 미리 의상과 인상착의를 서로 공지했기에 단번에 그녀인줄 알았습니다. 약 한 시간가량 이런저런 대화를 했구, 그녀도 저를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던 걸로 보였기에 커피숍을 나가기 전 애프터 신청을 했고 그녀는 흔쾌히 허락을 했습니다. 그리곤 그녀와 3일간 한 시간가량의 비밀스런 데이트를 시작했습니다.
01년 12월 01일 그녀와의 진정한 연애를 시작하게 된 것이죠.
물론 후임은 간식과 편한 근무지로의 배치로 입막음 시킬 수 있었습니다.
전투경찰대의 특성상 진압소대의 주 임무는 대모진압이지만 데모가 없는 그 외 나날들은 순천일대의 방범이 임무였기에 방범대에게 걸리지 않게 골목 이곳저곳을 피해 다녀가며 둘만의 사랑을 키워갔습니다. 견장을 달은 수경시절부터는 대놓고 연애를 하기도 했고, 약 2년을 소대장님의 수발이 되었기 때문에 나름이 특권이 주어졌기에 2001년12월부터 제대하기 전까지 매주 면회, 외박을 하게 되었고, 행사가 있는 날(크리스마스,12월31일등)에도 면회를 했습니다. 제가 봐도 도가 지나치도록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저희 부대는 딱 3번 주어지는 정기휴가 이외의 휴가가 또 있었습니다.
각 소대별로 한번에 2명씩 3박4일간의 휴가를 로테이션으로 주어지고 있었습니다. 짧게는 한 달에 한번 휴가가 돌아오는 경우도 생겼고 15일 정기휴가를 다녀와서 일주일 뒤 4일짜리 휴가를 가는 경우도 생겼으니 부모님들과 여자친구는 "너 군대 간 거 맞냐??" 라고 묻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매주 면회외박하고 4일짜리 휴가에 군 생활하는 동안 그녀를 원없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전령을 놓게 되면서 직속후임에게 물려주고 근무를 나가게 되었는데 그 또한도 저의 데이트로 생각하며 즐겁게 근무를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근무 장소와 시간이 정해지면 근무가 종료되기 전 꼭 한번은 간식을 사들고 찾아와 주었고 말년이 되면 근무 나가기 싫어지는데 저는 오히려 그녀와의 만남이 기다려져 근무도 더 많이 자주 나갔습니다.
사실 당시 여자친구는 순천의 연향동이란 곳에 직장이 있었는데, 부사수에게 근무를 무조건 연향동 근처로 빼게끔 만든 것이죠.
그렇게 견디기 힘들었던 말년 수경 시절도 즐겁게 견딜 수 있었고 동기들은 시간이 안 간다고 난리였을 때도 저는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그리도 바라고 바라던 2002년 6월 9일이 다가왔고 9박10일간 군에서의 마지막 휴가가 끝이 나면 6월 19일부로 사회인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내심 고민이 많았습니다.
당시 저는 인천에, 여자친구는 순천에 너무도 먼 거리이기에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대신고를 마치고 영등포행 무궁화를 타기 위해 순천역으로 향했고 개찰구를 나가기 직전에 결심을 했습니다. 그녀의 눈물을 보고 말았습니다. 마치 평생 함께 하자고 말하는 듯 보였고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헤어져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한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그래, 비록 26개월 기다려준 건 아니지만 내 군 생활에서 이 여자 빼면 뭐가 남겠냐? 그깟 장거리 연애 뭐 문제겠어?’ 라고 속으로 말하곤 그녀에게 다가가 “다시 데리러 올께”라는 말과 함께 꽉 껴안아주고 개찰구를 빠져나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