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시산맥 작품상 후보 ‧ 진혜진
조롱박
조롱박은 연리지의 반대말
한 몸으로 태어난 두 개의 몸
미처 몰랐던 반쪽의 반쪽
생으로 쪼개질 때 당신에게 흘러드는 나를 보았다
내게서 등 돌리는 소리
한때 우리는
덩굴손에 매달린 요가 자세처럼
어느 수행자의 허리춤에서 물구나무로 서 있기도 했지
조롱이 조롱조롱
어떻게 매달려 살거니 어떻게 견딜 거니
받아 삼키면 아픈 말들
달을 퍼 담던 약수터에서
막걸리집까지 걸어 나간 표주박
엇갈린 길
우리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목이 탄 햇살의 눈총이 카톡 알람처럼 쏟아지는 약수터
당신은 평생 약수에 젖고
나는 어느 저잣거리에서 술에 절어 늙어 간다
우리는 헛 몸
언제 한 몸이었던가
텅 빈 속을 채우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위아래가 사라진 표주박, 맞닿으면 몸이 뚜껑일 수도 뚜껑이 몸일 수 있다
추천사유 · 강시일
2006년 『현대시문학』으로 등단.
우유부단한 성격을 가진 이에게 최고를 가리라는 주문은 형벌일 수 있다. 그러나 해야 하는 일이고, 그것도 객관식 선다형 질문에 답을 고르는 일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유행을 따라 휘몰이 하는 풍토적 습성을 가진 몰개성의 시대에 그래도 변종 하나쯤은 있을 법하니 대중과 다른 심미안을 가졌다 하여 몰매를 맞을 일도 아니라는 생각에 주관적인 입맛으로 편안하게 음미해 보는 것도 짜릿한 쾌감이다.
이쯤에서 좋은 시란 어떤 것일까 라는 통속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지만 의미가 있을까 싶다. 운문과 산문의 경계가 모호해진 지도 오래고, 신춘에 낙점된 글들과 그에 대한 해설이 구미에 맞지 않았다. 분명 좋은 시는 읽기에 편하면서 아름다운 표현으로 의미 깊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글이라고 일반적인 기준을 둔다.
요즘 시를 읽으면서 난해하거나 비슷한 표현들에 식상하다. 하여 시집이나 시 잡지를 받아드는 날에는 한꺼번에 통독하는 버릇이 생겼다. ‘시산맥’ 여름호를 받아들고 고민을 하며 낚시질 했다. 습관적으로 달리던 눈길에 브레이크를 거는 글을 만나버렸다. ‘조롱박’이다.
“조롱박은 연리지의 반대말”이라는 생경스런 주장이 산만한 눈길을 퍼뜩 잡아챈다. “한 몸으로 태어난 두 개의 몸”이라며 연리지와 반대적 성격을 가진 조롱박을 설명해 궁금증을 바로 해소하는 친절함이 고맙다. “생으로 쪼개질 때”의 아픔을 아련하게 자극하며 달아나려는 산만함을 집중시키는 전개의 기술도 괜찮다.
최근 불국사 연리지 뿌리를 잘라버린 모진 손길을 원망하며 백 년이 넘은 소나무의 뿌리가 팽나무의 몸을 관통하고 있는 우악스런 사랑을 목도한 지라 ‘조롱박’이 ‘연리지’의 반대말이라는 명제가 처음부터 시선을 끌었는지도 모르겠다.
“한때 우리는/ ....... / 어느 수행자의 허리춤에서 물구나무로 서 있기도” 하고, “어떻게 매달려 살거니 어떻게 견딜 거니” 구직난의 실업시대 아픔이나, “엇갈린 길/ 우리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별리의 고통이 더욱 깊게 파고들기도 한다. “카톡 알람처럼” 현대적 시점에서 “표주박”과 “저잣거리에서 술에 절어 늙어”가는 시대를 넘나드는 정서적 경계를 아울러 진부한 시대의 ‘조롱박’ 제목이 주는 지루함을 털어내는 장치를 설치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오늘날 청년들이 고민하는 삶의 형태를 잘 설명하는 것 같아 공감하며 아픔을 곱씹는다.
“우리는 헛 몸/ 언제 한 몸이었던가/ 텅 빈 속을 채우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이라며 표주박으로 갈라졌다가 간절한 사랑으로 맞닿아야 하는 사랑학의 실체를 읽는다. 사랑이 삶의 목표이자 수단이고 전부라는 것이 신화에서나 드라마, 주변 사람들의 생활에서 사실로 노출되고 있다. 아름다운 사랑, 멋진 삶을 지향하는 노래 같은 시라면 누구나 반기는 글이 되지 않을까.
‘조롱박’은 표주박이 되어 약수터와 저잣거리 술집에서 생업에 몰입하다 연리지로 돌아오는 오늘날의 주말부부를 연상시킨다. 요즘 시대 세상 흐름을 아프게 대변하는 듯 행간에서 읽히는 정서가 안타까우면서도 아름답게 돋보인다.
또한 시인의 사명이 느껴지는 글이다. 문인이라면 세상의 목탁이요 횃불이 되어야 한다. 시인이 넘쳐나는 문인 춘추전국시대라지만 나라를 걱정하고, 사회의 정의를 부르짖는 글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조롱박’은 마치 파도를 타듯 자연스런 리듬에 사회풍토를 걱정하는 명제를 담고 있다. 시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말을 던진 보기 드문 수작이라 선하고 싶다.
추천사유 · 김택희
2009년 『유심』으로 등단. 시집으로 『바람의 눈썹』이 있다.
여기, “한 몸으로 태어난 두 개의 몸”을 노래하는 이 있다. 아니 “한 몸”이 아니라 아예 “헛 몸”이라 부른다.
푸른 달빛 받고 곱게 자란 잘록한 몸의 조롱박을 애완이 아닌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을 모르누나”라고 읊던 신라의 제망매가보다 깊은 슬픔으로 노래하고 있다. 조롱조롱 어감조차 예쁜 조롱박이 이토록 헛헛함을 안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이 「조롱박」을 읽고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 몸이었는데 “내게서 등 돌리는 소리”를 들을 때의 심정, 이보다 더 차가운 소리가 있을지 모르겠다. 관계가 밀접할수록 그 소리는 차고 선연하게 들릴진대, 부부가 그렇겠다. 연인이 그러하겠다. 뱉어버릴 수도 없는 “받아 삼키면 아픈 말들”이다.
이 시는 인간 내면의 묵은 어둠을, 환하고 앙증스레 보이는 조롱박에서 찾아 은유화한 것이 돋보인다. 마주하고 있어도 녹이 스는 경첩보다 한층 더한 “한 몸으로 태어난 두 개의 몸”이 헛 몸으로 살아가는 슬픈 사랑이라니.
첫 연에서부터 연리지의 반대말은 조롱박이라고 설파한다. 한 몸이지만 종래 한쪽은 약수터에서 물을 뜰 도구로, 다른 한쪽은 막걸리 집에서 술을 풀 도구로 그리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 순탄치만은 않은 표정을 잘 이끌어 낸다.
큰 사건을 접하면 물론 그렇지만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상황에 더 마음 쓰일 때가 있다. 이를테면, 교통사고 현장을 보는 것도 그렇지만 가정에서 내팽개쳐진 채 소외되어 방황하는 아이를 볼 때 등이 그것인데, 그런 면에서 진혜진 시인의 「조롱박」도 간단치 않은 생활의 슬픈 내적 갈등으로 읽힌다.
실제 조롱박이 되기 위해서는 제 속을 다 버리고 끓여진 후 몸을 말려야만 한다. 그 인고의 세월을 함께 견뎌왔음에도 우리는 모두가 뿌리 내린 연리지처럼 함께 오래 서 있을 수 없는 이유는 두 발을 가졌기 때문인지 모른다. 같은 틀 안에 있다고 해서 이편과 저편이 다 같지는 않을 터, 바로 그런 심리를 찾아낸 점도 좋게 보인다.
“우리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라고 까지 읊조리고 있는데 등 돌리는 소리에 멍해져 가슴 시린 순간이, 함께 살아가면서 각각 헛 몸이라 느껴지는 순간이 왜 없을까! 지나간 좋은 시절을 돌아보면 언제 그런 적 있었나 싶을 때가 있다. 지금 헛 몸으로 생각되지만 틀림없이 한 몸이었던 것처럼, 헛 몸 또한 한 몸에서 나온 다른 한쪽임엔 틀림없다. “위아래가 사라진 표주박, 맞닿으면 몸이 뚜껑일 수도 뚜껑이 몸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때로 무늬만 같을 뿐이어도, 따로 또 같이, 그것 또한 일종의 사랑의 연속일 테다.
푸른 달빛에 젖던 시간 몸에 익히고 속을 다 드러내고 말려진 채 혼자 살아가는 조롱박을 떠올린다. 굳이 거창하게 논하지 않더라도 어차피 인생은 조롱박 같은 외로운 길인 것을. “우리는 헛 몸/언제 한 몸이었던가”라고 노래하면서도 누군가를 위한 따뜻한 시선을 버리지 않고 어느 쪽으로 흐르던지 “텅 빈 속을 채우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당신과 나를 깊이 읽는다.
첫댓글 조롱박이 제대로 한바가지 선물을 안겨주었네요
완전체 조롱박이 터지는 순간 혜진샘의 절정이 드디어 ~~~
“저잣거리에 술에 절어 늙어가는 단풍인가요
그래서 그녀가 그가 그래보였군요
조롱조롱조롱박이 진시인에게 선물을 안겨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