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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막 14:3-7)"
만약 어느 교회에서 이 말씀을 가지고 부흥회 설교를 한다면 부흥사는 어떤 의도로 설교할 것이며, 또 사람들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까? 아마도 다음과 같지 않을까? 주님의 몸 된 교회가 필요로 한다면, 그 일에 헌금하거나 헌신하는 것을 아까워 해서는 안 된다. 향유 부은 마리아처럼 무리를 해서라도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것을 주님은 이렇게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마리아의 이 일을 얼마나 귀하게 보셨으면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일을 말하라고 하셨겠는가! 자신의 여력에 비해 좀 더 힘에 부치도록 헌금하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대출을 받거나 빚을 내어 헌금한다면 그 얼마나 귀한 헌신이라 하겠는가! 바치라. 주님을 위해 바치라. 주님은 기억하시고 반드시 갚아 주신다.
옳은 말씀이다. 주님께 드리는 것에 인색함이 없이 자원하여 드리는 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천성을 향하여 가는 길에 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드리지 못할 일이 무엇인가? 모든 것이 주의 것이니 주께서 원하시는 일에 아낌없이 드리는 것이 어찌 더욱 권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 헌신의 대상을 오해하는 것과 믿음의 분량을 넘어서서 드리는 것이 문제이다. 첫째로 믿음의 분량을 넘어서서 드린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마도 아나니아와 삽비라일 것이다. 그들은 자원하여 믿음의 분량대로 드려야할 헌물에 있어 그 믿음의 분량을 넘어서서 남에게 보이기 위해 드리고도 회개의 기회를 놓쳐 모두 죽고 말았다. 두려운 일이다.
또한, 헌신의 대상이신 예수님을 대신하여 섬김을 받는 가장 큰 대상은 아마도 교회 건물일 것이다. 주님의 몸 된 교회인 그리스도 공동체를 교회 건물로 대치 시키고,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인 우리의 몸을 교회당으로 바꾸어 버렸다. 따라서 교회 건물을 신축하거나, 증축하거나, 비품을 교체하거나, 새로 구입하거나, 건물을 유지 보수하는 것들에 헌금과 재정이 집중되어 있는 것에 비해 전도나 구제, 선교나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일에는 교회 건물에 들어가는 재정에 반의 반도 미치지 못하더라도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는 것이다. 혹여 때에 따라 교회를 신축, 증축해야 할 필요가 있을 수도있고, 교회에 필요한 물품들을 새로 사거나 더 좋은 것으로 바꿀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오늘 이 말씀은 그것을 위한 말씀은 아니다. 교회 건물에 과감히 투자하라는 의미라기 보다 더 본질적인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말씀에서 한 구절만 떼어내어 내게 유리한 대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말씀을 묵상하다가 한 구절을 떼어 내어 그것이 나를 향한 말씀이라고 생각할 때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면, 자칫 내 생각과 내 욕망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말씀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건축하고자 하는 교회의 일부 리더들 중에는 아마도 묵상하는 말씀이 교회 건축을 축복하고 인도하는 말씀으로 보여질 것이고 자신의 계획이 하나님의 계획으로 확증되는 말씀으로 묵상되지 않겠는가?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묵상하기 보다, 지금 구상중인 자신의 계획의 정당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유혹에서 그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만약 예수님이 더 이상 이 땅에 사는 우리와 실제로 어떤 모습, 어떤 모양이든지 함께 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오늘 이 말씀을 바라볼 때 어떻게 묵상하고 적용할 것인지를 대강 유추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아마도 그는 오늘 7절 말씀의 하반절만을 떼어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 오늘 말씀을 보라. 예수는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셨다. 성경은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다. 이제 이 땅에 사는 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죽어서 천국에 가야지만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누가 믿을까 싶겠지만,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여러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믿는 사람들이 아닌가? 믿음을 이성과 분리시키고, 신앙을 상식과 괴리시키는 사람들은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다. 믿음을 믿을 수 없는 것들을 믿는 것이라고 믿는, 이런 바 믿음 있다하는 사람들 중에는 생각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고 성경 말씀을 덮어 놓고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믿음이란 이성과 상식, 나아가 성경의 문맥도 떠나 있다 보니 말씀 가운데서 교훈과 가르침을 구하기 보다 한 구절, 한 구절의 말씀 그 자체를 신성시 해 버리는 것이다. 비근한 예로 오늘 나에게 말씀을 달라고 기도한 후에 성경을 펼쳐서 딱 눈에 들어오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믿었다는 웃픈 이야기도 있고,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신년 첫날에 제비 뽑듯이 말씀카드를 뽑고는 그 말씀에 온갖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한 뒤에 부적처럼 들고 다니는 일도 있다. 수 많은 말씀 중에서 그 한 구절의 말씀만이 한 해 자신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이루질 것이라고 믿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를 곰곰히 생각해 본다면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그 한 구절의 말씀만이 아니라, 신구약의 성경 전체를 나를 위한 말씀으로 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텐데도, 일부 성도들은 새해 말씀 카드를 아주 귀중히 모시어 두고는 보고 또 본다. 어느 구석진 곳에서 성경은 먼지가 쌓여 가는데도 말이다. 물론 모든 말씀이 다 소중하므로 그 가운데서 특별히 주시는 말씀이라 생각하고 그 말씀의 본래의 교훈과 뜻대로 살려고 하는 순수한 의도라면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함이 아니라 그 말씀이 어떻게 자신의 일, 자신의 한 해 소망 가운데 성공과 형통으로 이루어 질까를 고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딘가 무속적 신앙과 닮아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바로 나의 성공과 번영, 축복을 주는 신을 만족시켜 자신의 유익을 구하고자 하는 발상과 너무나도 닮아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下)"
성경 말씀에 모순된 말씀이 있을 수 있는가? 사람은 말에 실수가 있고 어제의 생각과 오늘의 생각이 달라 질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진실하신 분이시다. 그 하나님과 한 분이신 예수님께서 어제는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하셨다가 오늘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결코 그럴수는 없다. 이 말씀은 서로 모순되는 말씀이 아니라 같은 말씀이다. 곧 말씀의 전후 배경과 문맥상에서 그 말씀을 바라보고, 또 전체 성경 말씀 안에서 가르치는 분명한 원리 안에서 연역적으로 이 말씀을 상고한다면, 문자상으로 서로 반대되어 보이는 말씀이라 해도 그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마리아(라고 추정되는)가 향유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깨뜨려 부을 때의 상황은 어떤 상황인가? 예수님은 8절에서 그 여인이 자신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의 잔을 홀로 받아 마시기 전 괴롭고도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곧, 이는 인류 전 역사 상에서 단 한번 뿐인 특별한 상황이었다는 사실이다. 특별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을 일반화하여 오늘 우리의 상황에 적용할 수는 없다. 주님의 말씀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막 14:6-7)
이 말씀은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 아니다. 주일날 예배하러 교회에 가는 길에 길가에 쓰러진 취객을 만났을 때, 거룩한 교회당 안에서 드리는 거룩한 예배 시간에 늦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니 지금 여기 세상에 취해 밤새 술에 쩔어 쓰러진 한낱 걸인은 못 본척 지나치라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을 나는 특별화와 일반화의 두 가지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반화의 측면에서는, 항상 해야하고, 늘 해야하는, 우리의 삶에서 일반화 해야 될 일은 그 비싼 향유를 곧 무너져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교회 건물을 위해 쏟아 붓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사용 되도록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의 이해이다(막 13:2). 우리의 곁에는 항상 가난한 자들이 있기에 우리는 항상 그들을 돌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말씀을 하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외면하고 손가락 질하던 나병 환자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고, 이 말씀은 예수님의 양과 염소에 대한 심판의 교훈(마 25:35-36) 직후인 것을 감안할 때 분명 가난한 자에 대한 사역을 얕게 생각하여 하신 말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마실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35-40 중에서)"
특별화의 측면에서는, 그러나 바로 그때의 그 시간만큼은 비싼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보다 예수님이라는 살아있는 성전의 무너짐을 준비하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는 측면에서의 이해이다(요 2:19). 향유 부은 마리아를 책망한 제자는 가룟 유다였다. 그는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한 순수한 마음으로 마리아를 책망한 것이 아니라 돈에 욕심이 나서 한 말이었음을 요한은 밝히고 있다.(요 12:4-6) 그러나 비록 순수한 마음으로 그 여인을 책망하였더라도 주님은 가만히 두라고 하셨을 것이다. 왜냐면, 그 날, 그 시간 만큼은 그것이 더욱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인의 사랑의 이유로, 부지 중에 행한 그 일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할 대속물(ransome)로 준비되어 짐이 합당한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확증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향유 옥합을 부은 이 사건은 예수님의 장사(葬事)를 준비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것임과 동시에 구약 시대로 부터 기름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의 머리에 부어졌음(anoint)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christos)라는 말은 히브리어인 마쉬아흐(메시아,Messiah)에서 왔으며 메시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이다. 곧, 예수님이 메시아(그리스도)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물이 되어 죽음을 맞이할 것임을 말해주는 사건인 것이다.
이렇듯 구속의 역사 가운데 특별한 의미를 나타내시기 위해 일어난 사건, 그 특별한 허비의 순간이 말하는 의미는 보지 않고 나타난 사건만을 일반화하여 마치 오늘 우리도 마리아처럼 자기의 거의 모든 재산을 갖다 바치라고 말해서야 되겠는가? 정녕 이 말씀이 주님의 그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이미 은혜의 때를 사는 우리로 하여금 언제까지나 여전히 주님의 장례를 준비할 목적으로 주님이 피흘려 사신 교회 건물(?)을 위해 헌금하고 봉사하라는 의미로 해석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주님은 무슨 뜻으로 '그녀를 기억하라'고 하시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일을 말하라고 하셨을까? 그 의미를 밝히는 곳에서 비로소 우리가 일반화하여 교훈으로 삼아야하는 말씀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 여인이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할 의도를 가지고 향유를 붓지 않았다고 이미 언급했다. 그 여인(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로 추정되는 여인)은 다만 예수님께 받은 사랑이 너무 커서 그 사랑에 보답할 목적으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 그 시대 처녀의 결혼 자금이었던 값비싼 나드 한 옥합을 아낌없이 주님께 쏟아 부어드렸던 것이다. 향유 옥합을 부은 행위는 사랑의 행위였다. 그 여인의 행위는 사랑은 비효율적이며 손해보아도 아깝지 않은 것이며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행위였던 것이다. 그 여인은 사랑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허비'하는 것임을 증명해 주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곧, 그 여인이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전부를 아까움 없이 온전히 허비함으로 부어 드렸듯이 우리의 사랑을 온전히 받으실 분은 예수님이어야 하며, 예수님만 순전하고 진실하게 사랑해야 함을 말이다.
그러나 주님 말씀대로 이제 더이상 우리가 '허비'의 사랑으로 옥합을 부어 드릴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여인이 한 일을 기억하여 예수님께 대하여 그 여인처럼 살 수 있단 말인가? 이 시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 하신 모든 말씀들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바라 볼 필요가 있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사복음서를 읽고 나서 주님의 말씀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나는 단언코 '사랑'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 '사랑'은 먼저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십자가 그 사랑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이제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받은 그 '사랑'을 다시 주님께 돌려 달라고 요청 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주님께서는 새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 새 계명의 핵심을 다음 말씀 가운데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시고 계신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 25:40)"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가? 하늘 보좌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히 8:1)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성도들의 모임 가운데 계신다.(마 18:20)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의 마음안에 계신다.(고전 3:16)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골 3:23)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지금 내가 대하는 그들 안에 내주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요한은 주님으로 부터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함과 같이 그 형제를 사랑하는 자여야 함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요일 4:20-21)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셨다. 말씀안에 거하는 우리 안에서 함께 하셨고 또 그와 같이 우리의 형제 안에도 그리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지극히 작은자 하나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머무셨을 것이다. 어떤 과부였을 수도 있고, 어떤 고아였을 수도 있으며, 어떤 가난한 자들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셨던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라는 말씀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하는 말씀과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하신 말씀을 서로 오버랩 시키는 것을 과도한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말씀의 과한 재단일 수는 있어도, 결국에 그 뜻이 성경의 중심 계명이요,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되는 새계명에 위배되는 해석이라 비방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의 허비(虛費)가 필요한 곳은 어디인가?
나의 허비는 누구를 향하여야 하는가?
나의 향유, 시간과 물질과 마음에 담은 나의 사랑은 오늘 누구에게, 어느 곳에 부어 드렸던가?
부디 우리의 향유가 이 땅,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안에 내주하신 주님의 머리위에 아낌없는 허비스러움으로 부어지기를, 그런 골대가 되기를 기도한다.
"우리의 오감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대상은 성찬의 빵과 포도주이고, 그 다음은 우리의 이웃입니다. 그 이웃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거의 성찬만큼이나 거룩합니다. 그 안에 참으로 숨어 내주하시는(vere latitat)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안에는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이자 영광을 받으시는 분, 영광 자체께서 참으로 숨어 계십니다." <c.s.루이스, 영광의 무게 중에서>
첫댓글 아멘~~^^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한분께 향하여 있으며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님께서 그분이 살아가신 그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것 같습니다~^^
아멘. 귀한 깨들음들을 나눠주어 고맙습니다.
제 별명이 너무 좋네요. 감당할 수 없을만큼... 흐나우 글의 매력이 듬뿍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 향유부음이 있기를... 회의 한번 하는게 좋겠습니다. 어떻게 사랑하고 나누고 섬길까요? 이런 고민들 더 나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