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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납치(拉致)
취화비도가 예의 그 싸늘한 눈으로 다른 세 사람의 면면을 훑어 갔다.
자객의 눈은 자객의 가장 중요한 무기다.
그것으로 그는 사람을 꼼짝 못하도록 만들어야 하며,
때로는 기세만으로 죽이기까지 해야 한다.
비록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무공이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엇비슷하다고 하지만,
취화비도가 마음먹고 날리는 이 안공(眼功)의 한 수는
모두의 숨통을 적당히 조이며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모든 시선을 모은 뒤에야,
비로소 취화비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그 동안 부당한 대접을 받아 왔다."
아무도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하나 모두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겉으로 표는 안 냈어도,
용호교접도의 제안을 받은 이래로 이 자리에있는 인물들은
모두 그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말은 이어졌다.
"소위 정파의 인물들에게는 쓰레기 취급을 당했고,
사파인들에게는 경멸을 받아 왔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소!"
탐서랑이 무릎을 치며 맞장구를 쳤다.
지난 몇 달 간 남궁세가의 인물들에게 당한 수모가
문득 그의 가슴을 울린 것이다.
그는 내친김에 자신의 생각을 우르르 털어놓았다.
"사실 우리가 색을 밝힌다, 음양의 도리를 깬다 말이 많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결국 세상 사람들 모두가 하는 일일 뿐이오.
우리를 멸시하는 자들도 다 그 부모들이 방사를 즐겼기 때문에 태어난 것이며,
그들 역시 밤에는 남의 눈을 피해 그 일을 탐하지 않소?
세상 사람들 모두가 하는 일을 단지 숨어서 하지 않았다고,
또는 조금 거칠게 했다고해서 욕을 먹는 것은 너무나 부당한 일이오!"
혼음사의가 예의 중얼거리는 말투로 덧붙였다.
"그렇지! 그렇게 즐거운 일을 못하게 말리는 것이 오히려 나쁜 짓이야."
만음요화도 어느새 취화비도에 대한 적개심을 잊은 듯 끼여들었다.
"정파의 계집들이 고결한 척하는 것도 더 이상 못 봐주겠어요.
비구니니 여도사니 하는 것들이 밤에는 푹 젖은 속곳을 내다 빨면서
낮에는 여자의 계율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꼴이란!"
그것이 시작이었다.
세 사람은 다투어 그 동안 색마라고 수모를 당해야 했던
억울한 사연들을 털어놓았다.
강호의 일류고수들에 비해 무공이 결코 뒤쳐지지 않으면서도
그들은 고수다운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
차라리 산천초목을 떨게 만드는 마두(魔頭) 취급이라도 해주면 좀 나을 테지만,
색마에 대한 세간의 평이란 언제나 그보다 한 급 아래였던 것이다.
"본 의원이 전에 건드린 그 아미파의 계집도
처음에는 좋다고 내 수염을 잡아당겨 놓고..!"
"개방의 거지 자식들은 또 뭐람!
사제(師弟)가 줄을 서서 한번만, 한번만 하고 조를 때는 언제고 또 이제 와서..!"
"남궁세가만 해도 그렇소!
딸년을 시집 보내기 전에 어차피 가르쳐 주어야 할 일,
내가 시간을 쪼개 가르쳐 주었으면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
악다구니를 써대는 세 사람을 보며 취화비도의 차가운 눈이 슬며시 웃고 있었다.
한참을 떠들어대고 나서야 세 색마의 기세가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가슴에 품은 분노는 아직 식지 않았으나,
더 이상 정파의 인물들에게 퍼부을 욕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기 적절한 순간,
취화비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와 용양도인도 그대들과 마찬가지. 해서 그가 이 모임을 주창한 것이다.
더 이상 색마라고 무시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말끝을 채며 만음요화가 물었다.
"무슨 뾰족한 방법이라도?"
취화비도가 천천히, 그러나 강한 힘을 실으며 대답했다.
"색, 마, 영, 웅, 회(色魔英雄會)!"
그 말은 듣는 이들의 가슴팍에 날아가 박힐 것처럼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한참 만에야 탐서랑이 느릿느릿 되물었다.
"색마영웅회라고..?"
"그렇다. 우리들도 정파에서 위기가 닥칠 때마다 결성하는
무림맹이나 흑도의 녹림맹 같은 모임을 결성하자는 말이지.
뭉쳐 있으면 결코 무시당하지 않는다!"
"하나 우리 다섯 명으로 어떻게 회를..?"
"아니, 다섯뿐이 아니다.
사실 강호를 뒤져 보면 색을 밝힌다는 죄로 쫓겨다니거나
숨어 사는 무림인이 적지 않다.
우리는 그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말하자면 대표적인 인물들일 뿐이다.
각각의 휘하에 있는 세력들, 그리고 모을 수 있는 강호상의 인물들!
게다가 어쨌거나 방술과 장생불사술(長生不死術)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색마영웅회의 깃발 아래로 들어올 수 있다.
더구나.. 신비에 싸인 무산음호와 몽중마령까지 끌어들인다면..!"
냉랭한 취화비도로서는 드물게 긴말로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도 빠른 계산이 오갔다.
'만음요화의 화금궁과 용양도인의 풍월도문은 결코 세력이 적지 않다.'
'잘만 하면 전중원의 기루와 유곽들도 손에 넣을 수 있다.'
'은둔한 사람들과 전대의 고수들까지 끌어들인다면..
무림맹이나 녹림맹을 능가하는 것도 결코 꿈이 아니다..!'
여섯 개의 눈동자가 번뜩이는 것을 본 취화비도가
다시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어떤가? 해볼 텐가?"
"나는 좋다!"
제일 먼저 대답한 것은 혼음사의였다.
언제나 몽롱하던 눈에 총기(聰氣)마저 반짝거리면서.
"나 역시 찬성이오."
두 번째로 말하게 된 것이 서럽다는 표정으로 탐서랑도 대답했다.
"만음요화, 그대는?"
취화비도의 물음에 만음요화는 배시시 웃었다.
"나 만음요화가 빠지고서 어떻게 색마영웅회가 결성될 수 있겠어요?"
"그럼 모두 찬성이군!"
도장을 찍는 듯한 취화비도의 말 뒤에 잠시 침묵이 지나갔다.
앞날이 무궁한 거대 조직 하나가 방금 결성되었다는 감격에 겨운 그런 침묵이었다.
이윽고, 탐서랑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자아, 희대의 모임이 만들어진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내가 한잔 사겠소!
진회하에서 제일 유명한 기루로 갑시다!"
뒤따라 몸을 일으키는 혼음사의의 입가에는 벌써 침이 잔뜩 고여 있었다.
"잠깐!"
취화비도가 두 사람을 제지했다.
"뭐요?"
"아직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무슨?"
"조직에는 우두머리가 있어야 하지!"
그렇다.
그것은 중요한 이야기였다.
아직 그들은 색마영웅회를 결성하자는 이야기만 했지,
그 외에 중요한것들,
총회(總會)는 어디에 설치하며 분회(分會)는 어디어디에 둘 것인지,
누가 사람들을 모을 것이며,
누가 법을 세울 것인지,
자금을 어떻게 끌어들일 것인지 하는 이야기들은 꺼내지도 않은 것이다.
그 중에서도 우두머리를 뽑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일어섰던 탐서랑이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주(會主)를 뽑아야 한다는 말이로군요."
입가의 침을 닦으며 혼음사의가 말했다.
"회주라고 하는 것은 너무 평범하군.
색마들의 모임이니 색존(色尊)이라 부르는 것이 어떨까?"
색존.
그 말은 듣는 색마들의 귀를 매료시켰다.
탐서랑이 눈을 좌우로 굴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색존은 당연히 우리 다섯 사람들 중에서 나와야 하지 않겠소?"
취화비도가 차갑게 그 말을 잘랐다.
"색마영웅회가 진정 힘을 발휘하려면,
회 안의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강한 자가 색존이 되어야 한다!"
혼음사의가 중얼거렸다.
"강한 걸로 따지자면 무산음호나 몽중마령을 당할 사람이 있을까?"
그 말은 좌중에 다시 침묵을 가져 왔다.
'일껏 회를 결성해 놓고 정작 옥좌는 다른 사람에게 준단 말인가..!'
색마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 있다면 바로 죽 쒀서 개 주는 일이었다.
기껏 꼬셔 둔 여자나 남자가 다른 사람의 것이 되는 것만큼이나
울화통 치미는 일이 어디에 또 있을 것인가?
탐서랑이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그가 가장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색존은 색존다운 방식으로 선출되어야 하오!"
여섯 개의 눈이 그를 향해 쏠렸다.
그러자 탐서랑은 더욱 굳게 외쳤다.
"그저 무공이 강하다고 해서 뽑혀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오.
물론 무공도 중요하지만, 뭔가 다른 것이 하나 더 있어야 하오.
보시오, 협의를 표방하는 무림맹 놈들이라면,
그 맹주는 반드시 협의에서 으뜸이라는 자를 뽑을 것이오.
녹림맹도 마찬가지요. 가장 도둑다운 자가 맹주가 되는 거요.
하니 우리 색마영웅회도..!"
"가장 색마다운 색마가 색존이 되어야 한다?"
만음요화가 두 눈을 반짝이며 그의 말을 대신해 주었다.
탐서랑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혼음사의는 고개를 갸웃갸웃하고 있었으나,
탐서랑의 말을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취화비도는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냉정한 눈으로 탐서랑을 쏘아보며 물었다.
"색마다운 색마를 무슨 방법으로 뽑는단 말인가?"
탐서랑은 그 얼음칼 같은 눈에 속으로 찔끔했으나,
겉으로는 한치도 물러섬 없이 대답했다.
"우리가 오늘 머리를 합해 본다면 분명 좋은 방법이 생각날 것이오."
좋은 방법.
하나 탐서랑도 말을 뱉은 다음 순간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세상에는 구름처럼 많은 색마, 색한, 색녀들이 있고,
그들의 특기는 또 뭇별처럼 그 가짓수가 다양하다.
그들 다섯 사람만 하더라도
누구는 여자를 용모와 말재주로 현혹하여 취하는 것을 장기로 삼고,
누구는 취한 뒤 살해하는 것으로 이름을 날렸다.
여자도 있고, 의원도 있으며,
심지어 남색가까지 끼어 있는 판에 그것들을 다 한꺼번에 잴 수 있는
절묘한 자[尺]를 어디에서 구한단 말인가?
네 색마는 일제히 입을 다물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일견 공정해 보이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잣대를 세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빠져 든 것이다.
온 동네에 색마들의 모임을 소문이라도 내듯
요란하고 뻑적지근한 용양도인의 행렬이 도착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용양도인의 뒤를 따라온 진설영은
귀회루 담 앞까지 와서야 한 떼의 거지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용양도인을 쫓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이 거지들도 위험한 자들인지,
아니면 위험한 것은 안에 들어간 무리들뿐이고
이 거지들은 그들의 적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할까? 그냥 들어가서 사형만 구해서 나와야 할까?'
하나 거지들을 제외하고서라도 적이 너무 많았다.
비록 어린 아가씨지만,
진설영은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
'상황을 살피면서 좀더 기다려 보자!'
용양도인은 입맛이 썼다.
본래 숨기고 숨겨야 할 모임이라는 것은 뻔히 알고 있었다.
하나 오늘 색마들의 모임을 주최하면서
그의 욕심은 색마영웅회의 회주, 즉 색존의 자리에 있었다.
이야기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갈 것은
취화비도와의 사전 모의로 뻔히 짐작하고 있었고,
해서 이토록 거창한 행차를 준비한 것이다.
취화비도가 운을 띄워 놓은 뒤,
어떤 색마에게도 뒤지지 않는 위용을 보이며 자신이 등장한다면
회주 자리는 따놓은 당상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
그의 용렬하고도 용렬한 속셈이었다.
신중해야 할 회합을 사방에 소문낸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 행동이
얼마나 멍청해 보일 것인가 하는 점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 용양도인이었다.
한데,
그 뻔뻔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게 뭔가?
자신이 위엄있게 등장했는데도,
색존의 자리는 그 조건을 따지며 허공에 뜬 상태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 늦은 것이 죄니 어쩔 수 없었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적당한 기회를 보는 것이 상책일 것 같았다.
그러지 않으면 저 독살스러운 만음요화의 입이 무슨 핀잔을 줄지 몰랐다.
안 그래도 들어오자마자
'아주 적당들을 끌고 오지 그랬어요?' 하고 욕을 먹지 않았는가 말이다.
용양도인에게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것이 있다면 다름아닌 여자였다.
'여자가 좋다고 하는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군..
세상에 저렇게 매력적인 것들을 제쳐 두고 말이야!'
그런 생각을 곱씹으며,
용양도인은 열려진 문밖에 다소곳이 시립하고있는
마흔 명의 미동들을 흐뭇한 마음으로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와장창!
별안간 바깥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표창이 창문을 뚫고 날아들었다.
불시의 기습이긴 하지만,
그것은 색마들이 일제히 몸을 날려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뭐냐?"
탐서랑이 누구에게랄 것 없이 외쳐 물었다.
대답은 바깥쪽에서 돌아왔다.
"와아아아아아!"
"색마들은 무릎을 꿇어라!"
"강절행성 개방 분타가 너희들을 징벌하기 위해서 왔다!"
수십 명의 거지들이 바깥에서 목청을 돋우어 외치는 소리였다.
멀리서 지켜보던 진설영은 다급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피식 웃음을 흘릴 뻔했다.
'저 거지들은 안에 있는 사람들의 적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들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보군.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저렇게 밖에서만 소리를 지르고 있다니.'
개방의 거지들이 우습기는 색마들이 더했다.
강절행성 개방 분타라니!
개방 총타에서 왔다면 모를까,
일개 분타의 거지들이 감히 회합을 어지럽히다니!
가뜩이나 오랜 시간 잔머리를 굴린 탓에 짜증이 나 있던 색마들의 눈에 살기가 떠올랐다.
탐서랑이 비웃음을 흘리며 모두에게 물었다.
"어떻게 혼을 내줘야 할까?"
혼음사의가 별안간 무릎을 탁 쳤다.
"그렇지! 마침 잘됐군."
"무슨 소리요?"
용양도인이 볼멘소리로 물었다.
혼음사의는 다른 색마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어떤 방법으로 색공을 겨룰까 고민을 하지 않았소?
지금 마침 제물들이 제 발로 걸어왔으니,
저 거지들을 상대로 한 번 색공을 겨루어 봅시다."
혼음사의의 제안에 반색을 한 것은 만음요화와 탐서랑이었고,
무덤덤한 것은 취화비도였다.
용양도인은 아예 얼굴을 찡그렸다.
"거지들을 상대로 색공을?"
그들의 반응이 그렇게 각자 다른 이유는,
무공이 아닌 색공의 방면에서 자신이 있고 없고의 차이였다.
취화비도 쪽은 색공이라기보다는
그저 잔인한 음행으로 색마의 명성을 얻었다는 쪽이 맞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용양도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미동들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을지 몰라도 저런 거지들은 다른 문제였다.
그런 이유로 찜찜한 표정을 짓는 용양도인을 만음요화가 밀쳤다.
"자신이 없으면 저리 비켜요!"
용양도인은 발끈해서 외쳤다.
"그대는 무슨 특별한 색공의 재주라도 가지고 있는가?"
만음요화는 코웃음을 치고는 모두에게 물었다.
"내가 가장 먼저 재주를 펼쳐도 되겠지요?"
그녀는 굳이 동의를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만음요화가 나타나자 뜰을 메우고 있던 개방 사람들은 일제히 조용해졌다.
기껏 쫓아와 시비를 걸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다섯 색마의 위명은
개방의 일개 분타가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컸던 모양이었다.
만음요화는 그들을 훑어보고는 빙긋이 웃으며
긴 소맷자락에 덮인 옥수(玉手)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는 손을 내민 채 용양도인을 향해 끈쩍끈쩍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미동들이 조금 타격을 입어도 괘념치 않으시겠지요?"
아무리 절세가인이라 하더라도 여자가 자신을 향해 웃을 때면
용양도인은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하나 그는 목젖까지 올라온 그것을 간신히 집어삼키며
여유 만만한 표정을 가장하여 대답했다.
"우리 애들은 색공이라면 이골이 난 몸들이다.
웬만한 것으로는 결코 타격을 입지 않을 터."
만음요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그녀는 한 발 앞으로 나서더니 진기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바닥이 투명해지더니,
다시 핏물이 비치듯 빨갛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방의 거지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서는 가운데,
만음요화의 손바닥에서 마침내 불그스름한 연기가 솟아 나와
손 주위를 감도는 것이었다.
붉은 연기는 마치 똬리를 틀고 혀를 날름거리는 한 마리 독사와도 같은 형세였다.
만음요화의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한소리 날카로운 외침이 튀어나왔다.
"타!"
쐐애애앵!
그 소리와 함께 붉은 연기가 느닷없이 수십 갈래로 갈라지며 허공 중으로 퍼져 갔다.
진회하의 짙푸른 밤하늘에 그것은 마치 불꽃놀이처럼 영롱하게 퍼져갔다.
바로 만음요화의 독문 무공인 혼혼색수(昏昏色手)였다.
"커허어억!"
"으으으으음..!"
그 순간,
귀회루의 정원 안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잔뜩 긴장해 있던 개방의 거지들이 별안간 병기를 떨구고
땅바닥을 뒹굴며 몸을 비비 꼬아대기 시작한 것이다.
독에 당했다거나 괴로워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자 개방의 거지들은 말할 것도 없고
뒤에서 구경하던 용양도인의 미동들까지 흐느적거리며 주저앉고 있었다.
거지들은 그래도 정파의 인물들이랍시고
이를 악물고 땅바닥의 풀을 쥐어뜯으며 어떻게든 참아 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하나 미동들은 모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서는,
바닥을 기어 다른 미동들을 향해 움직이려고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저어대는 것이었다.
그리고 입으로 온갖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아아, 이, 이리 와! 어서 이리 와."
"아니야, 나한테로 와! 날 좀 쓰다듬어 줘..!"
"으응, 못 참겠어! 문주 어르신! 문주 어르신! 저 좀 어떻게 해주세요."
그리고 신음하는 그들 위로
만음요화의 손바닥에서 나온 붉은 연기가 안개처럼 깔렸다.
그것은 분명한 최음약(催淫藥)에 의한 중독증세였다.
하나 예사로운 최음약은 분명히 아니었다.
색공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다른 네 명의 색마들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몸이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게 된 것이다.
용양도인은 저도 모르게 이마의 땀을 훔쳤다.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이 만음요화의 혼혼색수로 인해 벌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싫어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강호에는 최음약이나 사람의 정신을 혼란하게 만드는 온갖 술수가 있지만,
그 효능이라는 것은 알려진 것처럼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최음약들은 한 사람을 지독하게 중독시키거나,
또는 여러 사람의 마음을 가볍게 흥분시키는 정도이지,
이렇게 많은 사람을 지독하게 중독시키는 술법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일이 없었다.
더구나 중독된 자들이 누구인가!
개방의 거지들은 그렇다고 쳐도,
색공이라면 남부럽지 않게 익힌 용양도인의 미동 부대가 아닌가!
오십 평생을 색공에만 몰두해 온 용양도인으로서도
지금 당장 만음요화의 수법을 능가할 어떤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하, 하지만 어떻게든.. 계집 따위를 색존으로 모실 수는 없다.'
용양도인은 꽁무니에 불이라도 붙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까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색존이 되고 싶었지만,
지금은 만음요화만 아니라면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쪽 옆에서 넋을 잃고 자기 사타구니를 만지고 있는
저 얼빠진 탐서랑이나 혼음사의라고 해도 말이다.
'어쩌지? 어쩌지?'
뒤통수로 용양도인의 표정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만음요화가 문득 뒤를 돌아보더니 그를 향해 빙긋이 웃었다.
'이젠 내가 색존이다'라는 표정이었다.
용양도인에게 독약보다 무서운 것이 있다면 바로 여자의 웃음이었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허리를 숙였다.
무공이 얼마나 높든,
체면이 아무리 소중하든 지금은 무조건 토하고 싶었다.
혼혼색수에서 흘러나온 적색무(赤色霧)는 소운비에게도 뻗어 갔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꼴을 보고 그것을 들이마시지 않으려고 애를썼다.
하나 가빠 오는 호흡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왈칵.
"으으윽!"
한 모금 가득 적색무를 들이마신 소운비는
마비되었던 온몸에 찌르르한 고통이 스며드는 것을 느끼고 몸을 비틀었다.
그것을 신호로 삼기라도 한 것처럼,
한 개의 인영이 바람처럼 만음요화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사형! 정신차려요!"
적절한 틈을 기다리다 못해 뛰어든 진설영이었다.
소운비는 가물가물해져 가는 의식을 가까스로 붙잡고,
진설영이 만음요화를 향해 번개처럼 검을 휘두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맹렬하면서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설영..! 많이 늘었구나.'
위급한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소운비는 어쩐지 흐뭇해졌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마비되었던 몸이 조금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 현상이 시작된 것은,
만음요화의 적색무를 들이마신 직후부터였다.
촤라랑!
만음요화의 몸 주변으로 격렬하게 검을 휘두른 진설영이
몸을 허공에서 뒤집어 뜰에 내려섰다.
그와 함께 잘려진 소맷자락 하나가 땅에 떨어졌다.
진설영은 비록 만음요화를 뚫지는 못했지만
대신 소맷자락 한 귀퉁이를 베어 낸 것이다.
만음요화의 눈이 표독스럽게 빛났다.
소맷자락을 잘렸대서가 아니었다.
"네년은 어떻게 그렇게 멀쩡히 서 있을 수가 있지?"
사방에 자욱하게 깔린 혼혼색수의 적색무 속에서도
어떻게 나뒹굴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진설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만음요화가 혀를 찼다.
"간교하게도 숨을 멈추고 있구나!"
용양도인이 뒤에서 외쳤다.
"하, 하하! 만음요화. 그대의 색공도 저 소녀에게는 쓸모가 없군.
그래가지고는 어디 색존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겠나?"
만음요화는 방향을 바꾸어 용양도인에게 대꾸했다.
"나의 색공이 고작 이 정도인 줄 아시나요?
방금 보여 준 것은 최하급의 수법이며,
이런 발칙한 계집을 위해서는 따로 준비해 둔 것이 있지요."
한껏 독기가 오른 만음요화는 진설영을 향해 한껏 가슴을 내밀며 쏘아붙였다.
"덤벼라, 계집. 제 손으로 옷을 찢어발기고 가랑이를 벌리며 흐느끼게 만들어 주마."
그리고 그녀는 다시 한번 진기를 끌어올려 혼혼색수를 전개했다.
"타!"
그러자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적색무가 빠른 속도로 폭사되어 갔다.
그 목표는 당연히 진설영의 가슴팍이었다.
진설영은 몸을 가볍게 흔들어 그것을 피하려고 했다.
한데 진설영의 바로 앞까지 쏘아져 나갔던 적색무가 별안간 기세를 꺾더니
그녀의 주변으로 짙게 퍼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진설영은 별다른 타격을 주지 않은 그 공격에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비틀..!
진설영이 몸을 휘청이더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만음요화가 신이 나서 웃어젖혔다.
"어린 계집아! 중독이란 호흡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공(毛孔)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는 법이야."
그녀는 계속해서 이죽거렸다.
"너는 내 색공에 중독되었다.
이제 일 각 내에 남자 생각이 나서 피가 끓어 견딜 수가 없게 될 것이다."
"흐읍..!"
진설영은 온몸으로 퍼지려는 그 기운을 재빨리 내공으로 억제했다.
그녀의 내공이 정순하여 즉시 억제는 되었으나,
몸 밖으로 몰아 내기 위해서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운기(運氣)를 해야 했다.
적과 대치한 상황에서 대책이 없는 곤란을 당한 것이다.
'실수다..! 강호는 온갖 음모와 계략이 난무하는 곳이라고 했는데,
내가 그만 방심했구나..!'
진설영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계집! 아직 아랫도리가 근질근질하지 않느냐?
네가 원한다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내들로 하여금 너를 범하게 만들 수도 있다!"
만음요화는 흐뭇한 표정으로 진설영을 뜯어보았다.
진설영이 온갖 힘으로 버티고 있을 뿐,
어떤 발작 증세도 보이지 않자 만음요화는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네가 아직 처녀라서 그 맛을 모르는 모양이구나. 이 언니께서 몸소 네 옷을 벗겨 주마."
그녀가 막 진설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디려는 순간이었다.
터억..!
바닥으로부터 한 개의 손이 올라와 그녀의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부인, 내 사매를 괴롭히지 마시오."
옷자락을 잡힌 만음요화도,
지켜보던 다른 색마들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 죽어 가던 소운비였다.
"이놈이?"
만음요화는 바로 아래의 그를 향해 혼혼색수를 날렸다.
퍼엉!
"으음..!"
적색무에 가슴을 맞은 소운비는 충격으로 몸을 떨었으나,
그 충격은 곧 가시고 오히려 아까보다 더 힘이 났다.
그는 만음요화의 치맛자락을 잡고 일어났다.
"아니!"
만음요화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다른 사람들은 나뒹굴기 바쁜 혼혼색수에 격중당하고도 오히려 일어나다니..
소운비는 비틀비틀 뜰로 내려섰다.
그가 내려가는 것을 아무도 제지할 수가 없었다.
만음요화는 너무나 놀라서였고,
다른 색마들은 내심 만음요화가 색공으로 독주하는 것을 견제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이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소운비는 약간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그 와중에서도 진설영으로 부터 세 걸음을 떨어지는 것은 잊지 않고 있었다.
"부인, 이 사람은 내 사매입니다. 사매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만음요화의 귀에는 소운비의 그와 같은 말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혈도를 제압당해 꼼짝못하던 사람이 자신의 혼혼색수에 격중당하고 오히려 움직이다니!
당황하는 만음요화의 귓가에 좋아하는 용양도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통하지 않는군 그래!"
"이익!"
만음요화는 악에 받쳤다.
이 청년을 제압하지 않고서는 색존의 자리도,
자신의 자존심도 없어진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온 힘을 끌어 모아 앞으로 쭉 내밀며 외쳐댔다.
"타! 타! 타! 타!"
혼혼옥잡으로부터 연기들이 무수히 뻗어 나왔다.
그것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소운비의 가슴에 격중되었다.
소운비는 붉은 연기들에 격중될 때마다 비틀거리면서도 여전히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이곳은 우리들의 집입니다."
퍽!
"어서 물러가십시오."
퍽!
"어서요!"
혼혼색수에 담긴 힘을 빨아들이기라도 하듯 오히려 점점 더 힘을 얻어가는 소운비.
순간,
만음요화는 소운비에게 참을 수 없는 살의를 느꼈다.
'이번에는 죽여 버리겠다..!'
색공으로 제압하는 것을 포기한 만음요화는
암암리에 살기를 실은 공력을 운행했다.
이것에 격중된다면 비록 색공으로 제압하는 것은 아니나
이 괴물 같은 청년은 죽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며 만음요화는 가까스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외쳤다.
"타아!"
소운비는 자신의 앞으로 쏘아져 오는 붉은 연기는 아예 볼 수조차 없었다.
그러니 자신의 목숨을 앗아 갈 뻔했던 그 연기가
각각 다른 방향에서 날아온 네 개의 장력에 맞아
중간에 방향을 트는 것 역시 볼 수 없었다.
그저 막연한 느낌으로,
무엇인가 무시무시한 것이 쏘아져 오다가 중간에 사라진다 싶더니
엉뚱하게도 십 장 밖에 있는 아름드리 나무둥치가
반으로 쪼개지는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을 뿐이었다.
"무슨 짓이에요!"
만음요화가 눈을 까뒤집으며 다른 네 명의 색마들을 향해 외쳤다.
여유로운 웃음조차 보이면서 용양도인이 대답했다.
"얘기가 틀리지. 색존은 색공으로 뽑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청년을 죽이면 무엇으로 색공의 우열을 가리려고 하는 건가?"
탐서랑도,
그 옆의 혼음사의와 취화비도도 그 말이 옳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음요화는 그만 온몸의 맥이 쭉 빠지고 말았다.
"색공으로만 그 청년을 공략해 봐.
그래서 사추리를 움켜쥐고 흙바닥에 뒹굴게 해보라구.
그러면 절대로 방해하지 않을 테니."
용양도인이 채근했다.
하나 만음요화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나는 오늘은 더 이상 할 수 없겠어요."
방금의 일격으로 그녀는 더 이상
혼혼색수를 운용하기 힘들 정도로 힘이 빠져 버린 것이다.
"그래?"
별안간 몸을 날려 소운비 앞으로 떨어져 내린 것은 탐서랑이었다.
"그렇다면 이 몸이 한번 이 청년을 공략해 보기로 할까?
이 몸이 특별히 제조한 이 단약을 먹게 되면,
칠십 먹은 노인네라도 벌떡 일어나 첩 셋을 끼고 춤을 추게 되지!"
탐서랑은 약갑을 꺼내 크게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운비가 뭐라고 항변하기도 전에 번개처럼 그의 입에 그것을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바로 이어서 소운비의 몇 군데 혈도를 점하기 시작했다.
"약기운이 빨리 돌도록 좀 도와 주지!"
자신만만하게 시작한 것이지만,
결과까지 그렇지는 못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다음,
탐서랑의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졌다.
선 채로 혈도를 제압당한 소운비는 첩 셋을 끼고 춤을 추기는커녕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어허, 이상하군!"
탐서랑은 곤혹스런 표정으로 소운비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중얼거렸다.
"정말 이상한데? 이럴 리가 없는데..!"
그는 지금 인간의 색정을 자극한다는 단약의 제조에는
천하 제일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한데 소운비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아혈이 봉쇄되어 말을 못하고 있어서 그렇지,
여전히 눈은 맑고 또렷했다.
"이상하군, 이상해!
당연히 눈이 충혈되고 호흡이 가빠지고 무엇보다도 그곳에 변화가 생겨야 하거늘..!"
중얼대던 탐서랑이 갑자기 이마를 탁 쳤다.
"그렇지! 그럴 수도 있는 것을 내가 왜 확인을 해보지 않았던고?"
다음 순간 탐서랑의 손이 불문곡직하고 소운비의 바지춤으로 파고들었다.
'으웃!'
소운비의 얼굴이 처음으로 찡그려졌다.
열아홉 해를 살아 오면서 남에게 인상을 쓰거나 고함을 질러 본 일이 없는 그였다.
하나 이 일은 정말 참기 어려웠다.
'사매로부터 세 걸음 떨어져 있기가 정말 다행이로군!'
"어허, 거 참 이상하다!"
손을 빼낸 탐서랑이 더욱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상이 없는데, 이상이 없는데, 그것 참 이상하다!"
그때, 염소수염을 쓰다듬고 있던 혼음사의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내가 살펴보지! 비키게!"
탐서랑은 맥없이 물러났다.
여전히 '이상하군, 이상하군' 하고 고개를 흔들어대면서.
신중하게 소운비를 진맥한 혼음사의가 한참 만에 고개를 들더니 모두에게 말했다.
"신통하군!"
"신통하다니?"
반문한 것은 탐서랑이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 봤어.
이 청년은 본래 체질이 허약해서 양기가 다른 사람의 반밖에 되지 않아.
오래 못 살 뿐더러, 방사 같은 것은 꿈도 못 꿀 처지지. 한데..!"
한데?
"이 나이까지 살아남은 것도 신기할 뿐더러, 최근에 무슨 일을 당했어. 뭐랄까..?"
자신만이 아는 전문적인 내용을 가지고 질질 끄는 그의 말투에
취화비도가 신경질을 냈다.
"이야기를 하려면 좀 시원히 제대로 하지!"
혼음사의가 찔끔했다.
무공이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죽이는 것만을 전문으로 하는 자객이라는 존재는 늘 찜찜한 대상인 것이다.
"뭐냐면, 어떤 종류의 점혈법에 당해서 그나마 희미하던 양기가 아예 사라져 버렸어."
만음요화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렇다는 것은?"
"즉, 연장을 달고 있어도 사내가 아니며,
어떤 경우에도 방사의 욕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
하니, 다른 사람에게는 가공할 효력을 발휘할 혼혼색수가
이 청년에게는 겨우 양기를 조금 일으켜 주는 정도로 밖에 되지 않은 게야.
해서 되려 나에게 제압당해 있던 몸이 움직일 수 있게 된 게지."
그제야 상황을 이해하게 된 색마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해서,
신기한 느낌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만음요화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말끝을 길게 늘였다.
"이 청년은 쉽게 말해, 우리들과는 정반대의 체질이로군요."
"그렇지. 어떤 수법에 당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제압한 사람의 수법이 하도 고강해서 우리들로서도 풀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모르겠는걸..?"
혼음사의의 말이 끝나고,
색마들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취화비도가 말했다.
"그렇게 하면 되겠군!"
"어떻게?"
용양도인이 반문했다.
"아까 우리들은 어떤 사람을 색존으로 뽑아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었나?"
다른 세 명의 색마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양도인도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우리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또 남색가도 있으니
색공을 겨룰 공정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나?"
역시 네 개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취화비도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이 청년은 어떤 색공으로도 양기를 일으키지 못할 처지에 있다.
이 청년을 색마로 만들 수 있는 색공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천하 제일의 색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혼음사의의 얼굴에 반색이 떠올랐다.
"당신의 말은 그럼 이 청년을 색마로 만드는 사람이.."
"그렇다. 그 사람이 색존이 되는 거지, 어때?"
처음엔 대답이 없었다.
모두가 그 조건이 자신에게 유리한지를 검토하고 있는 것이다.
용양도인이 물었다.
"저 청년으로 하여금 나와 같은 취미를 갖게 한다면 내가 색존이 되는것을 인정하겠소?"
취화비도의 눈이 빙그레 웃었다.
"색공에는 남녀불문.
어쩌면 여인과의 방사도 안 되는 사람을 남색가로 만든다면
그것이 더 높은 경지라 볼 수 있을 테니, 당연하지."
탐서랑은 탐서랑대로,
혼음사의는 혼음사의대로,
만음요화는 만음요화대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결론은..
"좋소!"
"나도 찬성이오!"
"그렇게 하지."
이와 같은 시합에 대해 각자 나름대로 자신이 유리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 그 의견에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까부터 무릎을 꿇고 꼼짝을 안 하고 있던 진설영이었다.
다행히 이 색마들이 자신은 이미 혼혼색수에 중독되어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진설영의 내공은 참으로 기초가 튼튼하고 정순한 것이어서,
그녀는 혼혼색수의 적색무를 쐰 직후부터
그 독이 체내로 퍼지는 것을 막고 암암리에 운기로 그것을 몰아 내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소운비는 그녀로부터 세 걸음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바로 옆에는 색마들이 등을 돌리고 모여 앉아 쑥덕공론을 하고 있었다.
'운기만 끝나면.. 맹서고 뭐고 사형을 안고 도망을 치겠어.'
그녀의 경공술로 저 다섯 사람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소운비는 자신을 둘러싼 색마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듣고
힘없이 눈동자를 굴려 자신의 사매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안타깝게 그녀에게 외치고 있었다.
'사매, 나를 구할 생각은 하지 말고 네 몸부터 지켜! 어서 달아나..!'
두 사람이 주고받는 긴박한 눈의 대화는 알지 못한 채,
색마들은 신이나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자, 그러면 언제 판정을 내지?"
"색마영웅회의 개파대전을 내년 이맘 때로 잡고, 그때까지 승부를 결하기로 하지!"
색마로 태어나 최고의 영광인 색존의 자리에 오른다는 생각만으로
다섯 사람의 호흡은 가빠지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별안간 혼음사의가 결연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일단 내가 먼저 이 아이를 가르쳐 보도록 하지!"
파아앗!
혼음사의의 자그마한 체구가 번개처럼 소운비를 향해 덮쳐 갔다.
그는 순식간에 소운비를 낚아채서는 바깥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아까부터 미리 이런 계획을 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네 색마 중 누구도 그를 제지할 수 없었다.
소운비를 낚아챈 혼음사의가 진설영의 앞을 지나갈 때,
그녀는 막 운기를 끝낸 참이었다.
"안 돼!"
그녀는 보검을 들고 그 뒤를 쫓아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파앙!
"어린 계집! 이번엔 이 정도로 끝난 것을 다행으로 여겨라!"
만음요화가 그런 그녀에게 일장을 날리고
소운비의 비파를 집어 들며 혼음사의를 뒤쫓아갔다.
"다음에 다시 와서 너를 예뻐해 주마."
탐서랑이 이죽거리며 그 뒤를 따라갔다.
이어 취화비도와 용양도인이 몸을 날렸다.
운기를 마치자마자 무리하게 움직이려던 터에
일장을 얻어맞고 만 진설영은 다시 일어나지도 못하고 안타깝게 소운비를 불러댔다.
"사형! 사형!"
혼음사의에게 사로잡혀 막 담을 넘어가던 소운비도 그녀를 보았다.
멀어져 가는 진설영의 모습은 마치 꿈결과도 같았다.
세 걸음이 아니라 좀더 가까이 있었더라면 사매는 그를 놓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하나 모든 것이 부질없었다.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가 없는 것이다.
'세 걸음이..'
소운비는 희미해져 가는 의식의 마지막을 붙잡고 한탄했다.
'천리(千里)가 되는구나!'
그는 죽음보다 깊은 잠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가 잠들어 있는 동안,
다섯 명의 색마들은 자기들끼리 소운비를 뺏기 위해 화려한 싸움을 벌였다.
정신을 잃고 늘어진 소운비의 몸은
혼음사의에게서 용양도인의 손으로,
다시 취화비도에게로,
탐서랑에게로..
폭풍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그 종착점은 소운비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청년 소운비의 길고도 긴 악몽은 시작되었다.
그날.
귀회루에서 있었던 오대색마와의 일전을
강절행성 개방 분타는 낙양의 총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천인공노할 다섯 색마가 저희 분타의 영역 안에 있는
귀회루에 집결해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히 인원을 모아 총력을 기울여 쳤으나,
그들은 사이한 색술로 눈을 어지럽히고 달아났습니다.
이 와중에 한 사람이 그들에게 납치되었는데, 생사는 불분명합니다.
제자들을 풀어 색마들의 종적을 뒤쫓고 있으나,
다섯이 모두 갈라져 쫓기가 쉽지 않습니다.
총타에서 사람을 보내시어 직접 추적을 해보신다면,
한 놈이라도 꼬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첫댓글 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