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그 현장과 활동 및
전망(1901)
-“Korea: The Field, Our Work and
Opportunity”-
헨리
아펜젤러/ 노종해 역
(역자 주)-이 글은 아펜젤러(Rev, H.G. Appenzeller)가 1901년 1월 21일 필라델피아에서 모인 전도자 모임에서 강연한 원고이다. 그는 10월에 다시 내한하여 1902년 6월 11일에 순직하였으므로 이 글은 그의 한국선교에 대한 마지막 강연이 되었다. 여기에서 그의 거침없는 한국선교의 열정을 느낄 수 있고, 한국사회와 문화에 대한 애정과 이해와 한국선교 회고와 현황, 전망 등이 한국 감리교뿐만 아니라 한극근대사 이해에도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보아 번역하였다. 이 자료는 비공개 “아펜젤러 친필문서” 중에 포함된 것 중에서 발굴한 것이다. |
*아펜젤러 부부/ 아펜젤러 가족(1901년)
한국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먼저, 이 나라의 이름은 “코리아”도 아니고 “조선”도 아니고
“대한”이다. 왕이 제국의 칭호를 쓰기로 하면서 국호가 바뀌었다. 그리고 왕실의 자색이 제국의 황색으로 바뀌었다.
(중략)---
인구는 분명치 않으나 750만이 넘는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서는 매주일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대한 이천만
동포”를 위하여 기도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정확인 수자는 1,000만에서 1,200만 정도인 것 같다. 이 나라는 13개의 도와 364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11마일 정도는 러시아와 접하고 있다. 작고 얕은 강인 두만강이 동쪽에서 러시아와 한국 사이를 흐르고 있고,
압록강이 서쪽에서 한국과 중국을 갈라놓고 있다.(중략)---
서울(Seoul)은 수도 즉 “통치자가 거주하는 곳”이란
뜻이다. 서울은 왕국에서 가장 큰 도시로, 한강에서 3마일, 제물포에서 26마일 된는 곳에 있다.---도시 서쪽의 한 언덕 위에 우리 학교가 서
있다. 베란다에서 내다보이는 경치는 매혹적이다. 해태와 그 북쪽 왼편에 있는 삼각산과 오른쪽의 남산 그리고 이러한 산들 사이에 분지를 이루고
있는 인구 196,898(지난해 통계)명의 도시를 보노라면 방문객들은 종종 시편 기자의 말, “산들이 예루살렘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니”를 생각해
내어 이 도시의 아름다움에 부치는 찬사로 되풀이하곤 한다.
진달래와 철쭉이 온 산을 뒤덮고 복숭아와 배 사과나무에 꽃이
만발하는 봄이 되면 서울 북문 밖의 산골짜기를 거니는 맛과 그 즐거움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한국인은 자연의 아들이며 자연을
사랑한다. 그들은 시를 좋아한다. 그래서 봄이 되면, 다른 나라 젊은이들은 생각이 온통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될 때인데, 이 나라 젊은이들은
종이와 붓과 먹을 가지고 시원하고 외딴 골짜기를 찾아 거기서 떠오르는 새싹과 피어오르는 꽃에게서 영감을 받아 영혼의 아름다운 정취를 노래한다.
그런데 한국의 시는 사실적이기보다는 상징적이다. 모양과 상징과 형상을 소재로 한다. 우리는 완벽하고 세밀한 것을 원하나 한국인들은 아주 암시적인
것을 더 좋아한다.(중략)---
한국에는 불교와 샤마니즘과 유교가 성행한다.(중략)---, 샤마니즘은 조상숭배와 함께
존속한다.(중략)----, 유교는 윤지체계이다. 더 높은 존재에 대한 인간의 의무를 말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인들에게 “의무의 개념과 도덕의 기준”을 주었다.(중략)---. 유교가 500년간 한국에서 판치는 바람에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억압적이고
가장 보잘것없는 통치체계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
정치적으로 한국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갈라져 있다. 한국인이 지은 한문고전이며, 학생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조그만 책 “동몽선습”(Youth Primer)에는 왕이 가장 으뜸이고 선을 명령하고 모범을 보이되 죄악을 퇴치하는 분이라고
되어 있다. 귀족들도 그것을 인정한다. 왕은 과오가 없으며 “왕이 잘못됐다고 한 사람은 적으로 간주된다.” 이것은 확고한 교의가 되고 있으며
오늘날도 반도의 정치형태를 결정하고 있다. 왕이 그를 알고 있다는 구실로 드러나지 않는 강도질이 자행되고 있다. 강탈이 자행될 때 흔히 쓰는
말이 “어명이 내리셨다”는 말이다.(중략)---
한국인들이 게으르다는 얘기, 한국에 기업이 없고 공장도 매우 드물거나 없다는
얘기가 있다. 한국인들이 가난하고 게으르고 무관심 한 것은 그들이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산업을 일으킬 동기를 정부에서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적절한 자극을 주고 보호해 주고 지켜 준다면 그들은 검소하고 발전성 있는 백성임이 드러날
것이다.
1. 우리의 활동
* 한국선교의 아버지 Rev, Dr.J.F.가우쳐 박사와 초기 선교사들
우리
교회는 이 나라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선교의 아버지는 볼티모어의 가우쳐 목사(Rev. Dr. John F. Goucher)이다. 그는 처음으로
이 은둔의 나라에 선교사업 펼 것을 제안하였고, 그 목적을 위해 3,00달러를 내놓았다. 그리하여 미 해군의 슈벨트 제독이 그 나라의 문을 연지
1년 후인 1883년에 선교사업을 제안하였고 그 제안은 1884년에 재개되어 2,000달러가 더 보태졌다.
1884년에 일본
선교부의 감리사(Superintendent)인 맥클레이 목사(Rev. R.S. Maclay)가 선교본부(Board of Manager)의 지시에
따라 한국을 방문하였다. 당시 그는 권세를 쥐고 있던 개화파로부터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는 교육과 의료사업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가졌으나 곧바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지 못했다. 맥클레이 박사(Dr. Maclay)는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의 시작을 권면하였고, 위원회가 그
권면을 받아들여 1884년 늦게 파울러(Fowler) 감독이 스크랜튼(Scranton)과 나를 한국선교사로 임명했다.
우리는
1885년 2월 3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났다. 일본에 도착하자 우리는 반도의 상황에 대한 보고가 진실된 것도 있고 거짓된 것, 과장된 것도 있음을
알아냈다. 이미 1884년 12월 반란이 일어나 서울에 있는 친일파들이 습격되고 죽거나 추방되었으며, 중국군과 일본군이 충돌해 있었고 한국의
고위 관료들이 살해되고-내각의 변화가 있었다-왕궁이 습격당했다. 한 달 후 팀을 나누어서 전도인과 그 부인이 먼저 답사를 떠나는 것이 가장
낫겠다고 생각했다.
*아펜젤러 촬영-"제물포 항구"(앨범에서)/제물포 포구
*제물포 전경(1890년-모펫 촬영)
우리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주일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날씨는 흐리고 음산했다. 기관사는 외곽에
닻을 내렸다. 우리 앞 1마일쯤 떨어진 곳에 오두막집들이 보일 듯 말 듯 하였다. 왼쪽에는 한강어귀의 황량한 섬이 보였다. 오른쪽으로는 파도치는
해안이 보였다. 환영의 인사말이란 찾아 볼 수 없었다. 우리는 지구의 끝은 아니라 할지라도 정말 먼 곳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뒤를 돌아다보니
“U.S.S. Ossipee"호에 달린 국기 속의 별과 줄들이 펄럭이는 것을 보았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만큼 내 나라 국기를
보면서 기뻐한 날은 없었다. 그것이 동방에서 휘날리는 한, 우리는 사역하고 기도할 곳을 갖게 될 것이다.
입항지는 황량했다.
일본식 호텔은 좁고 허술했다. 음식은 맛이 없었다. 침대와 담요와 식탁이 똑같이 분배되어져 있는 것 같았다. 정치적 상황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일 없는 것 같았으나 어둡고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았다. 서울에 있는 미군함의 선장은 서울로 가는 일과, 자기 배의 승객들을 상륙시켜
한국인들의 분노와 폭력이 한창인 곳에 그들을 떨어뜨려 놓는 일을 정중하게 한사코 반대하였다. 현지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은 왜 그렇게 빨리,
그것도 부적당한 때에 선교를 서두르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전에 나는 이렇게 배웠다. 영사관 직원들과 가깝고
사교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며, 해군을 추켜 주고 군함 장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항상 예절 바르며, 그들이 내 아내를 높이
평가할 때는 오후 커피가 특별히 뜨겁고 진하고 케이크는 특별히 가볍고 달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들에게 조언을 구할 때는 구체적인 사례에
국한해서 묻고 반드시 공적인 영역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 등을 배웠는데 당시의 젊은 선교사로서 나는 그런 것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감리교회 선교본부 서울 서쪽방면(아펜젤러 앨범에서)
서울에 들어간 것은 1885년 5월 3일이다. 선교부는 부동산을 구입하여 서울 서쪽에 자리 잡았다. 할 일은 많고
같이 일할 사람은 없었다. 집과 병원과 학교를 지어야 했고, 어려운 언어를 공부해야 했고 지방순회도 해야 했다. 우리는 사람들을 회심시키려
지방을 다녔지만 먼저 우리가 우리의 언어를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안 뒤에는 멀리 가지 않았다. 우리가 사용할 한국어 성서가 없었다. 나눠 줄
소책자도 없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한국 사람도 우리의 선생이 될 만큼 자기 나라 말을 잘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나
현명한 선생이 우리가 아는 것부터 시작해서 모르는 것으로 점차 가르쳤으므로 우리는 알아야 될 것, 알기 원했던 것을 배우게
되었다.
우리는 15년간이나 한국어 공부를 했고 지금도 계속 배우고 있다. 의료활동은 찾아온 환자를 치료함으로써 시작되었고,
학교는 공부를 지망한 첫 한국인을 가르침으로써 시작되었다.
첫 연례회(Annual Meeting)가 1885년 8월 17일에
열렸다. 보고내용은 회고보다는 앞날의 전망에 대한 것이었다. 추운 날씨가 닥치기 전에 우리는 집에 머무르며-꼭 그것은 아니다- 언어공부를 했다.
첫 세례는 1887년 여름에 거행되었고, 그 해 성탄절에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내가 감리교 설교자로서 최초로 한국말로 설교를 했다. 그
설교는 “그 이름 예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해 내시는 분입니다.”-아름다운 본문이다-로 시작하였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교활동의 성공도 바로 이 구절 말씀에 근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옛 복음을 설교하고
있다.
*배재학당 현판(1887년)과 한복입은 아페젤러 선교사
2. 교육사업과
전망
* 초기의 배배학당과 학생들(사진: 아펜젤러의 앨범)
지난 5월 연회(Annual Meeting)에서 우리 학교의 필요성을 설명해
달라는 부탁을 내게 하였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좀 자세히 말하려고 한다.
1885년 가을, 나는 모르고 있었는데, 서울
공사관에서 일하고 있던 젊고 총명한 해군장교가 왕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내가 서울에 있다는 사실과 교육사업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말했다.
고맙게도 왕께서 나를 환영하였고, 우리 대표부에서 배우기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 가르쳐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교육사업에 대한 이처럼
우호적인 태도는 큰 도움이 되었다. 더욱이 왕은 1887년에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심으로 학교에 대한 관심을 보여 주었다. 그 말은 필요한
사람을 길러내는 곳이라는 뜻인데 “대학”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1894년 일본과 중국이 불화 끝에 전쟁을 벌였다. 일본이
승리한 후, 그들은 전혀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이 은둔의 나라를 안전하고 평탄한 세계에서 끌어내어 자유와 문명의 세계로 인도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곧이어 개혁의 시대가 밀어닥쳤다. 진보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요청되었다. 그들은 왕궁의 회의석상에서나 정치막사에서, 또 법정에서 필요하게
되었다. 정치가들은 빠른 시일 내에 진보사상을 습득해야 했다.
정부에서는 학교를 세워야 했지만 필요한 지식을 가르칠 교사가
없었다. 우리가 학생들을 맡을 수 있는지를 알아 보기 위해 학무국(Education Department)의 관리들이 우리를 찾아왔다. 몇 개월을
끈 후에 한국정부와 우리 학교 교사 사이에 계약이 체결되었고, 그 에 따라 200명의 학생들이 우리 학교에 들어오게 되었다.
외국인 교사와 한국인 교사를 뽑는 일, 학생들을 받아들이고 내 보내는 일, 교육과정 등이 모두 우리에게로 넘겨졌다. 이 계약으로 선교부는 일
년에 약 1천 달러의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계약기간은 3년이었다. 1898년 계약이 만기가 되었을 때 왕은 재계약을 지시하였다.
1896년 2월, 내가 평상시처럼 학교 일을 보고 있을 때 내각의 관리가 아침에 찾아와 그 날 오후 러시아 공사관-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당시
왕은 거기서 피신해 있었다-으로 와 줄 것을 요청하였다.
나는 정시에 갔다. 거기에 외무대신이 나와 장로교 선교부의
언더우드를 왕과 왕세자에게 소개하였다. 또 매우 영광스럽게도 왕은 우리의 교육사업이 백성들을 유익하게 하였고, 당시도 그렇게 하고 있는 데 대해
내게 개인적인 감사를 표했다. 지난 가을 서울을 떠날 때 황제폐하께서는 황공하게도 내 귀국여행의 안전과 즐거움을 비는 따뜻한 작별인사를
해주셨다. 형제들이여, 개인적인 얘기한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그러나 교회는 서울에 있는 우리의 학교가 15년 동안 황제의 사랑을 받았고, 지금 현재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알 권리가 있다. 우리는 어디서나 기독교 학교로 널리 알려져 있고 채플 참석이 의무적이며, 주일 교회
예배참석도 의무화되어 있다. 만일 한국정부 일각에서 우리의 기독교적인 규준을 약화하려 한다거나, 우리의 종교적 가르침의 자유를 박탈하려 한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우리는 그러한 시도에 저항할 것이다.
비숍 여사가 그의 훌륭한 책 "Korea and Her
Neighbors"의 자료를 얻으려고 서울에 왔을 때 학교를 방문했다. 그녀는 한 장(章)을 할애하면서 교육과 부역을 다루고 있다. 서울에 있는
모든 학교에 대해 언급하는 가운데 388면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재론할 여지없이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교육적, 도덕적, 지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고, 지금도 행사하고 있는 기관은 1887년 왕이 이름을 하사한 배재학교이다. 이 학교는 아주 강력한
인상을 심어 주고 있다. 이 학교는 자유로운 교육, 폭넓은 지적 사유, 심오한 윤리관 등을 제공하고 있는데, 바로 이런 것들이 한국을 구원하는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것은 정당한 근거를 가진 찬사의 말이다. 내가 이 말을 인용하는 것은 이 말이 관대하고 성실하게
학교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 학교에서 우리의 임무를 되돌아 보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학교와
신학교(Seminary) 건물이 필요하다. 이 일을 위해 2만5천($25,000) 달러가 필요하다. 우리가 그것을 들판에 세울 수는 없는데,
선교위원회(General Missionary Committee)는 전용할 돈이 없으므로 여러분의 협력이 매우 요청된다.
지금이 황금 같은 기회이다. 무대는 열려 있다. 우리의 지도력도 인정되었다. 전방에서 우리의 현 지위를 유지하려면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 남
감리회 형제들은 우리와 함께 신학작업을 펼쳐가기로 약속했다.(생략)....
수년 전에 나는 일본어학교-일본어를 배운
한국인들-의 첫 졸업반의 시범훈련에 초대되었다. 왕과 학무국장(Minister of Education)과 관리들이 참석했다. 다른 정부학교의
교사와 친구들도 참석했다. 학생들과 방문객들의 연설이 있었는데, 그들은 완전히 이교도들이어서 하나님의 존재나 우리와 그 분과의 관계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우리 교육사업의 바탕인 기독교 정신을 계속 우리 학교에서 확장해 나가야겠다는 강한 충격과 영감을 받은 것은 바로 그 연설을
들으면서였다. 그들은 잘 훈련된 영리한 사람들이었지만 마음의 훈련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도외시하였다. 그 모임에서 나오며 나는 주께서 이
도시와 이 나라에 학교를 세우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예수께서 스승 되시고, 성령이 인도하고 도우시는 그런 학교 말이다. 너무 큰 요구일까?
그렇지 않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교육사업에 있어서 실험적인 단계를 지났다. 우리의 좋은 소년들, 매우 성실한 그들은
기독교인이다. 학교에 오래 있는 학생들은 거의 예외 없이 기독교인들이다. 또 그래야만 한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우리 마음이 편할 수 없고, 또
편해서도 안 된다. 학교는 직접적인 복음전파자가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기독교인 소년들을 교육할
학교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들을 한국학교에 마음놓고 맡길 수 없다. 교회는 현명한 한국기독교인들이 그의 자녀들을 외국으로 보내지 않고 자유로운
교육을 시킬 수 있는 학교를 제공해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다.(노종해 역
* 정동-감리교 선교
본부 남쪽 건물들 (아펜젤러의 앨범에서)
여러분들이 원한다면 여기 통계 숫자가 있다.
*
감리교출판사(삼문,좌측), 배재학당(우측) / * 첫 본처 지방회-전도인들
우리 미국교회는 6년간 8명을 한국에
파송하였고, 1884-1900의 7년간 평균 14,927달러를 썼다. 파송 받은 18명 가운데 7명은 죽거나 옮겨가서 현재 11명이 있다. 이들
중 둘은 의사 평신도이다. 넷은 아직도 언어를 배우고 있다.
여섯 개의 순회구역(Circuits))과 여섯 곳의
설교처(Preaching Places), 한 개의 남자고등학교, 출판사, 병원들이 있다. 두 명이 성서번역위원회 위원이다. 하나님께서구원과
봉사를 위해 먹이고 훈련시켜야 할 4,000명의 영혼을 주셨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치 않는다. 감독께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장래성 있는 선교지라고 했다. 우리의 오랜 동안의 큰 부르짖음을 받아들여 총선교위원회(General Missionary Committee)는
지난 11월 충분치는 않으나 17,000달러를 활보했다. 이 돈으로 우리는 11명의 선교사와 가족들의 봉급을 지급하고 두 병원과 남자고등학교와
인쇄소를 경영하고, 40,000명에게 영적 양식을 먹이고 새로운 개척지를 찾게된다.
지난 5월에 열린 선교연회(Annual
Meeting)에서 선교부가 귀국하는 나에게 “본부”(Board)와 감리교회에서 가능하면 우리를 위한 일 년 예산을 올려 주어 급증하는 일을
완수해 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모임에서는 또 배재학교의 이득금을 제시할 것을 요구하기로 결정하고,
제물포에 새로운 교회를 완성하는데 1,500달러가, 평양의 한 교회를 위해 2,000달러가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또 세
사람의 선교사와 의사 한 사람이 필요한데, 한 선교사는 평양 순회구역에, 한 사람은 제물포 순회구역에, 의사 한 사람과 선교사 한 사람은 공주
순회구역에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내가 그 나라에 있는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를 돕지 않겠는가? 이
전도자(Preacher) 모임의 형제들에게 내가 지금 호소한다. 우리 선교사들의 힘을 복돋을 수 없다면 내버려 두지 말라. (비중 있는 선교
협의회(Conference of Mission)가 우리를 빨리 구출하러 오기를 바란다. 나는 해외분야에서 그 위원회의 유일한
대표이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자금과 인력을 부탁한다. 우리는 자금을 필요로 하는데 우선 30,000달러가 필요하고 그
다음에 매년 최소한 20,000달러가 필요하다. 사람은 회심한 사람, 신앙이 있고 경건하며 정직한 사람이 필요하다. 이스라엘의 백성들이여
도우라.
한국에서의 우리의 기회는 지금이다. 문은 활짝 열렸다. 한국은 독립국이며, 한국인들은 미국을 제일로 여긴다. 그들은
우리가 사심이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다른 나라는 못 믿어도 우리를 믿는다. 영국은 우리 다음이다. 일본은 빚을 갚는다고 5년 전 대신과 그
일행이 왕비의 살해를 지시함으로써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래서 일본은 정치적 주도권을 잃고 러시아가 끼어들었다. 러시아가 행세하는 건 잠시였다.
그 대표부의 거동이 너무 오만하고 잔인하고 코사크인의 특성대로 감정적이고 너무 공격적이고 무모해서 국민들이 그들을 싫어한다. 반면에 황제는
그들과의 곤계를 완전히 끊지 않고 있다.(생략)---
자,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가 그 나라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자. 지금이 좋은 기회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