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바로 보고 싶어요
권정수
노령산맥(전북산맥)이 뻗어내려 내장산 백양산 추월산 강천산 등으로 둘러싸여 분지를 이루었
고 추령천이 마을의 중심을 흐르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을 전북 순창군 복흥면 하리 마을에서 병
기는 1964년 생으로 태어났다.
병기는 열 살 이전에는 움직이지도 못하는 극심한 장애인으로 태어났다. 대소변도 못 가리고 스스로 음식도 먹지 못하는 가족들에게는 근심거리였고 천덕꾸러기였다. 여드름이 듬성듬성 생기고 턱밑 수염이 까칠까칠해지는 청소년시기가 되어서야 겨우 목발 딛고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했다. 말은 더듬거려 알아듣기 힘들었고 눈동자는 사팔이어서 항상 곁눈질하고 목엔 힘이 없어 머리는 흔들거렸다.
병기는 항상 혼자였다. 엄마 아빠가 농사일에 바빠 들에 나간 후에는 간신히 마루 끝으로 나와 뭉게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바라보고 이름 모를 철새들이 날갯짓을 바라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엄마아빠가 들일을 마치고 어둠이 깔리는 무렵에 들어와서 챙겨주는 식사가 점심이자 저녁식사인 것이다. 18살이 되자 키는 175cm정도로 커졌고 얼굴에 피었던 여드름은 누구하나 손 대 주는 사람이 없어서 거뭇거뭇한 반점이 되었다. 언어는 듣기에 답답하지만 되새겨보면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육체는 훌쩍 자라 청년의 모습이 되었지만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고 목발을 딛고 간신히 일어설 수 있는 정도였다. 복흥면 면사무소에서 10살 때 보내준 목발은 세월이 흐르자 너무 작아져서 사용할 때면 허리를 굽혀 우스꽝스런 모습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걷는 연습을 하여 조금씩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있게 되었다. 집밖으로 나가니 졸졸거리는 작은 시냇물을 볼 수 가 있었고 들길에 피어있는 예쁜 이름 모를 꽃들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얼마 후엔 목발이 부러져서 못질하고 철사로 동여매어 겨우 다시 사용할 수가 있었다.
우리가 명절 때가 되어 고향에 가게 되면 안타까워서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면 너무도 고마워했고 작은 선물이라도 해주면 신세를 꼭 갚는 성격이었다. 일 년에 한 두번 고향을 찾게 되면 병기는 구부정한 모습으로 목발을 딛고 찾아와서 인사를 한다. “형아, 형수는 잘 있었능가? 아그들도 잘 인능가? 오니라고 얼메나 고생 핸능가?” 병기는 우리가 주는 약간의 사랑에도 감사해하고 고마워하는 심성을 지녔다.
어느 날 1km쯤 떨어진 건넛마을 답동에 교회가 생겼다. 답동성결교회라는 작은 교회가 세워졌고 병기는 교회에 등록을 하게 된다. 1km쯤 되는 교회를 가는데도 1시간30분쯤 걸리는 데도 너무너무 즐거워하였다. 교회에 들어서면 담임목사님, 사모님, 성도들이 “어서 오세요.” “참 잘 오셨어요.” “힘들었죠.” 하며 반가워 해주기 때문이다. 나처럼 못난 사람에게도 반가워해주는 친절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신실한 신앙인이 되었다. 주일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모습은 천사 같았다.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일찍부터 일어나야 했고 가는 도중에 목발이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한 날에는 지나가는 사람을 만나야 일어설 수 있었으나 예수님을 만나고 목사님을 만나고 성도들 만나는 즐거움에 주일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하였다.
1988년 제 24회 서울올림픽이 열렸다. 온 세계인들이 열광하는 올림픽대회가 끝난 후에는 장애인 올림픽이 열리는데 이때에 장애인 올림픽을 TV를 통해 보면서 장애인도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어머님께 장애인 재활원에 보내주기를 간곡히 부탁하게 되었다. 교회에 오신 어떤 권사님께서 인천십정동에 가면 성린 재활원이 있는데 장애인 훈련 교육 등을 시켜서 직업도 알선해 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성린 재활원에 연락을 하였고 한번 올라와 면담하기로 약속이 되었다. 병기는 그해 겨울 난생 처음으로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전철을 타서 인천이라는 곳을 오게 되었다. 병기에게는 참으로 험난한 여행이다. 계단을 오르기도 어렵고 버스를 타기도 어렵고 택시를 타기도 어려웠다. 10살 때 면사무소에서 준 목발에 27살 청년이 키를 맞추고 구부정하게 서 있는 장애인에게 택시는 멈춰주지를 않았다. 몇 시간씩 기다려 택시를 잡게 되고 오르내리는데 시간이 걸리므로 인내심이 많은 택시기사도 버럭 화를 내곤 하였다. 어렵게 인천 십정동에 성경이네 집을 찾아 왔다. 이때가 구정전날 이었는데 재활원에 3일간 휴무여서 성경이네 집에서 3일간 머물게 되었다. 성경이네 집에서 함께한 3일간은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어린 성경이와 윤성이가 삼촌! 삼촌! 하며 따라주었고 성경이 엄마도 “도련님, 도련님”하고 친절히 대해주는 등 모든 가족이 잘 해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항상 무관심과 수모와 멸시를 받았던 병기는 처음 받은 인격적인 대접이 그렇게 좋았던가 보다. 그동안 모아 둔 꼬깃꼬깃한 돈을 가지고 슈퍼에 가서 과자도 껌도 사 주곤 하였다. 애들이 다 먹고 난 후 에 또 사달라고 조르면 사주고는 애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바라보았다. “병기야. 이제 너도 좀 먹으렴”하고 권하면 “나는 아그들이 묵는 것만 봐두 좋땅께라우.”
구정이 지나고 사흘째 되던 날 어렵게 택시를 타고 재활원으로 갔다. 원장선생님을 만나고 면담한 후에 원장님은 고개를 흔들면서 “유감스럽게도 본 재활원에서는 도움을 줄 수 가 없네요.” 재활원에서는 장애인들의 직업훈련을 통해 재활의 길을 열어주고 직업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인데 병기는 장애가 너무 심하여 훈련과 교육을 통해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병기의 꿈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서야만 했다. 하루를 더 머물고 시골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집으로 돌아와서 병기는 문방구에 가더니 아이들의 장난감과 싸구려 귀걸이를 사와서 “형수님, 이 귀걸이가 이쁜디 추석에 내려올 때 이 귀걸이를 하고 내려 오시라우”하며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약속을 청하였다. “도련님, 도련님이 무슨 돈이 있다고 이런 것을 다 사 주세요?” “우리 시골에서는 돈이 필요 없지라우. 친척들이 와서 준 돈인디 보람 있게 쓰는 것이 지라우.”
우리사회에서는 어떤 곳에서도 받아 줄 곳이 없는 병기는 다시 시골로 내려갔다. 살을 에는 듯 한 추위도 물러가고 새들이 노래하는 봄날에 전화가 왔다. “여보시오. 나 병기인디 성경이 엄마 좀 바꿔주시라우. 지난번에 신세를 많이 졌는디. 고맙구만이라우.” “도련님 전화는 어떻게 알고 했어요?” “지가 옆집에 국민학생에게 부탁했당께라우.”
그해 봄이 한창 무르익어갈 즈음에 들판 다랭이 논밭에 경지정리가 시작되었다. 농촌 근대화의 일환으로 경지정리를 하게 되었고 덩치 큰 덤프트럭이 흙을 실어 나르고 불도저가 굉음을 내면서 흙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1989년 5월 28일 주일이 되자 병기는 자신을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 말은 없으시지만 위로하시는 예수님, 반갑게 맞아 주시는 목사님을 만나고 예배드리기 위해 아침부터 목발을 챙기고 허리는 구부정하여 맨살이 들어 났지만 설렘으로 교회로 향하고 있었다. 예배시간에는 찬양도 열심히 따라 불렀다. 말이 어눌하고 느려서 찬양을 제대로 부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부르려고 입을 열면 지난 후에 나온 가사가 어색했고 맞추려고 애를 쓰다보면 시작하지도 않은 가사가 튀어나오곤 했지만 열심히 따라 불렀다. 이날도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로 찬송가도 부르고 복음성가도 부르면서 기쁜 마음으로 교회로 향하고 있었다.
서쪽하늘 붉을노을 영문밖에 비취누나
연약하온 두어깨에 십자가를 생각하니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 옷
힘없이 걸어가신 영문밖의 길이라네
한발자국 두발자국 걸어가신 자국마다
뜨거운 눈물, 붉은 피 가득하게 고였구나
간악한 유대병정 포악한 로마병정
걸음마다 자욱마다 갖은포박 지셨구나
눈물없이 못가는길 피없이 못가는길
영문밖의 좁은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복락 얻으려면 이길만은 걸어야해
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
아픈다리 싸매주고 저는다리 고쳐주사
보지못할 눈을열어 영생길을 보여주니
칠전팔기 할지라도 제십자가 바로지고
골고다의 높은고개 나도가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고개턱이 제아무리 어려워도
주님가신 길이오니 내가어찌 못가오랴
주님제자 베드로는 거꾸로도 갔사오니
고생이라 못가오며 죽음이라 못가오리
영문 밖의 길을 두 번쯤 부르고 자신의 애창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님 온전한 눈빛으로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님 곁눈질 하긴 싫어요.
하지만 내모 습은 온전치 않아 세상이 보는 눈은
마치 날 죄인처럼 멀리하며 외면을 하네요.
주님.. 이 낮을 나를 통하여 어디에 쓰시려고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만들어 놓으셨나요..
당신께 드릴 것은 사모하는 이 마음뿐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가식뿐인 세상 속에 밀알로 썩게 하소서..
이때 덩치 큰 덤프트럭이 흙을 가득 실은 채 후진을 하고 있었다. 병기는 트럭을 발견하곤 큰 소리를 쳤다. 하지만 잘 돌아가지 않는 혀 때문에.. 온전치 못한 몸 때문에.. 피할 수 없어 트럭에 치고 말았다.. 목발은 다시 부러졌고 하체가 뒷바퀴에 치어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발견하고 정읍 아산병원으로 이송했지만 출혈이 심하여 혼수상태였고 더 큰 병원인 전북대 의대병원으로 옮기는 중 뜨거운 피가 계속 쏟아져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병기는 그가 그리던 천국으로 갔다.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님. 온전한 눈빛으로.”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님. 곁눈질 하긴 싫어요.”
병기는 소원대로 똑바로 볼 수 있고 행복만이 넘치는 곳 아무도 외면하지 않는 곳,
눈물이 없으며 아픔이 없는 곳, 예수님이 계시는 곳, 하나님이 계신 곳, 그가 그리워하던
그 곳으로 돌아갔다..
첫댓글 감동! 감동입니다.
격려해주시니 제가 더 감동입니다!
권 장로님!
첫째 줄에 감천산은 '강천산' 입니다...... 권 장로님도 저에겐 친구이십니다...맞죠?
사랑하는 목사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