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는 '콜럼비아 유성기 원반(2) 판소리 명창 김창룡, 그 손녀 김차돈(고수:한성준)' 음반 (명인기획/엘지미디어 LGM-AK002, 1CD, 1931/1934년 녹음, 1995년 제작, 노재명 기획/고증/해설/사설 채록) 해설서 1~8쪽에 실린 글입니다. * 상기 사진 자료: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자료. 김창룡 명창의 모습.
김창룡과 중고제 판소리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김창룡(金昌龍, 1872∼1943.2.24)은 충남 서천군 횡산리(現 장항읍 성주리)에서 태어났다. 김창룡은 7세부터 부친 김정근에게 판소리를 공부하기 시작하여 13세에 이르러 다소 향방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이날치에게 1년간 판소리를 배웠고 박기홍, 김창환 등 선배와 종유하여 견문을 넓혔다. 32세 무렵에 경성으로 올라갔고, 연흥사를 창립하는 데 공헌한 바 크다. 이동백, 송만갑, 정정렬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에 참가하여 후배를 양성했다. 자가전래의 법제를 계승하여 고곡미(古曲美)가 있고, 성대가 좋아서 며칠 동안 계속 소리를 하더라도 목이 상하지 않는 장점이 있다. 심청가 중 <꽃타령>과 적벽가 중 <삼고초려>가 특장이다.(정노식, 『조선창극사』 서울:조선일보사, 1940, 210∼211쪽) 다음은 1935년 1월 25일자 『매일신보』에 실려있는 김창룡의 약력이다. "金昌龍: 역시 충청도 태생으로 그의 특장은 적벽가(赤壁歌)이다. 쾌활한 적벽가의 우렁찬 목소리가 아즉도 원긔 왕성함을 말하고 잇다." "며칠을 계속하더라도 상하지 않는 점이 장하다"고 한 『조선창극사』와 "우렁찬 목소리"라고 한 『매일신보』의 기록대로, 김창룡은 목을 아주 잘 타고 났다. 판소리를 가업으로 삼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의 음반을 들어보면 그가 참으로 좋은 목을 타고 났음을 실감할 수 있다. 김창룡의 성음은 냉면 맛처럼 시원하여 마치 서도소리를 듣는 것 같다. 그래서 충청, 경기 지역뿐 아니라 이북 지역에서도 인기가 대단했다. 김창룡의 조부는 진양조의 창시자 김성옥이며, 부친은 상궁접의 창시자 김정근이다.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의하면 김창룡의 조부 되는 김성옥이 송흥록의 매부라 하므로 김창룡과 송만갑은 친척이 된다.(송만갑은 송흥록의 후손) 중고제의 대표격인 김성옥 집안과 동편제의 대표격인 송흥록 집안 사이에 혼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당시 관습으로 보아 양가 모두 무속 집안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갖게 하며, 중고제와 동편제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중고제는 비교적 동편제에 가깝다"고 한 『조선창극사』의 기록이 중고제와 동편제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 주는 삽화라 하겠다. 그러고 보면 충청도 사람이 동편제 명창 이선유의 『오가전집』(서울:대동인쇄소, 1933)을 발행한 것도 우연은 아니라 하겠다. 1930년 11월 26일자 『매일신보』에 기록된 김창룡의 증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송광록은 김성옥의 고수로 활동했다. 진양조는 김성옥이 창시했고 송광록이 진양조로 범피중류를 지어 세상에 내놓아 진양조가 유명해졌다. 황호통, 최승학, 이동백은 김정근의 제자이다." 동편제의 시조 송흥록과 그 동생 송광록 모두 매부인 김성옥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동편제가 중고제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송흥록이 김성옥을 자주 찾아갔다 하며, 김성옥은 이전에 없던 진양조를 만들어 송흥록을 놀라게 하였고, 김성옥의 고수 송광록은 당연히 중고제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김성옥은 30여세에 일찍 병사하였기 때문에 송흥록의 소리를 받아들여 중고제를 만들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송흥록이 김성옥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중고제를 기초로 하여 동편제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김성옥의 가문에서 판소리가 거의 다 되다시피 하였다고 한 정노식의 말이 과언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전승이 끊어져 낯설게 느껴지는 김창룡의 중고제(中古制)란 무엇인가. 중고제를 비롯한 판소리 대가닥의 생성 과정은 이보형이 발표한 여러 편의 논문으로 이미 대강이 밝혀진 바 있다. 이선유의 『오가전집』에는 고 중고 신 제(조)라는 구별이 있으므로 중고제는 고제와 신제 중간 시기에 불리워진 소리제를 지칭하는 말로 붙여진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즉, 신제가 생기고 난 후에 신세와의 구별을 위해 고제, 중고제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조금이라도 전승되고 있는 동편제와 서편제가 신제라고 하겠다. 그래서 김창룡의 소리는 이선유의 동편제 소리보다, 김창환의 서편제 소리보다 더 고풍스러운 맛이 난다. 그런 김창룡의 소리를 정노식은 『조선창극사』에서 "고곡미(古曲美)가 다소 있다"고 평했다. 고곡미가 있는 김창룡의 소리는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판소리와 비교하면 사설이나 창법이 판이하게 다르다. 요즘 소리가 쌀밥에 고기 반찬으로 현란하게 꾸민 밥상이라면, 김창룡의 소리는 보리밥에 김치뿐이나 정성들여 차린 단아한 밥상이라고 하겠다. 윤기가 흐르는 요즘 소리에 비하면 김창룡의 소리는 촌스러울 정도로 덜 세련된 느낌이 있어서 현대인에게는 외면당하기 쉬운 소리이다. 그러나 옛 소리의 담백한 맛을 찾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입맛에 맞는 소리라 하겠다. 한승호의 말에 따르면, 조선성악연구회 시절에 박봉술과 한승호가 김창룡의 소리를 듣고 "소리 참 희한하게 한다"며 웃은 일이 있다 한다. 일제 때 전라도 소리가 득세한 후 경기 충청도 소리는 웃음거리가 된 모양이다. 박팔괘의 제자로서 충청도 산조 가락을 연주했던 박상근은 전라도 산조가 득세하자 자신이 산조를 연주하면 사람들이 충청도 가락의 맛을 알지 못하고 비웃는 것 같아 산조를 잘 연주하지 않았다 한다. 이런 사실들은 전라도 명창들의 신제 소리가 나온 후 중고제 소리가 차츰 도태되었음을 말해준다. 송만갑이 가문의 동편제 소리에 서편제 맛을 가미하여 소리를 변질시켰다고 집에서 쫓겨난 일화는 유명하다. 송만갑 외에 최승학도 처음에는 김정근에게 중고제를 배웠다가 나중에 서편제로 바꾼 것으로 짐작된다. 그 외에도 여러 중고제 명창들이 고제 소리를 하다가 나중에 신제 소리를 따랐다는 기록이 많이 있다. 옛 소리는 도태되고 자꾸 새로운 소리가 나왔을 것이고 신식 소리를 따르지 않으면 외면당했을 것이다. 송만갑이 신 동편제를 내놓자 옛 동편제 소리가 도태되었고 정정렬이 신 서편제를 내놓자 옛 서편제 소리가 도태된 것처럼, 고제 소리를 고수한 명창들의 소리는 전승이 끊어졌다. 그래서 김창룡도 가문의 중고제 소리를 배우다가 나중에 이날치에게 서편제를 배웠다. 김창룡이 잠시 이날치에게 서편제를 배운 일이 있지만 그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중고제이다. 김창룡은 서편제가 잘 맞지 않았던지 중고제를 고수했고 결국 그의 소리는 신식 소리에 밀려 전승이 끊어지고 말았다. 판소리 발생 초창기에 서민을 상대로 해서 고제 소리를 불렀던 명창들의 이름은 지금 거의 전해지지 않으며, 양반층이 판소리를 즐긴 이후에 활동한 명창들의 이름이 많이 전해진다. 『게우사』의 기록을 보면 우춘대, 서덕염, 최석황, 권오성, 하은담, 손등명, 방덕희, 김한득, 고수관, 조관국, 조포옥, 권삼득과 같은 명창들의 이름이 나온다. 이들은 오늘날까지 이름이 전해지고 있는 가장 오래 전의 명창들로서 양반들이 서서히 판소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때 활동했던 명창들이라 생각된다. 이들의 소리가 고제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마이크나 스피커 같은 시설이 없던 옛날에는 소리를 멀리까지 힘차게 내질러야 했기 때문에 잔기교는 부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옛날 호걸제나 덜렁제와 같이 힘차게 질러대는 소리가 나왔을 것이고, 그런 소리제가 야외 소리판에서 인기를 끌었을 것이다. 따라서 옛 명창들은 붙임새나 장단 공부보다는 소리를 우렁차게 내지를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하는 데 가장 주력했을 것이다. "권오성의 원담소리, 방덕희의 우레목통, 조관국의 한거성"이라고 한 『게우사』의 기록과 "모흥갑의 덜미소리는 십리 밖까지 들렸다"는 『조선창극사』의 기록이 그런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정노식은 『조선창극사』에서 고제 명창 권삼득의소리를 일러, "곡조가 단순하고 그 제작이 그리 출중한 것이 없으나 세마치 장단으로 일호차착이 없이 소리 한 바탕을 마치는 것이 타인의 미치지 못할 점"이라고 했다. 김명환은 전도성과 이선유의 옛 동편제 소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도성 씨 소리는 우리는 재미없어요. 이선유 목에서는 무엇이 나올 중 알았지마는 한달 이상 별 조가 없어. 모흥갑 더늠이라구 허는디 별 것이 아니드란 말이여."(김명환 구술, 『내 북에 앵길 소리가 없어요』, 뿌리깊은나무, 1991) 정노식과 김명환의 말을 종합해 보면, 옛 명창들은 우렁찬 소리를 내기 위해 발성 연습에 주로 공력을 들인 만큼 잔기교는 거의 부리지 않고 담백하게 소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정노식은 박기홍의 소리에 대해 『조선창극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처음에는 담담히 아무 흥미가 없는 태도로 하여 소리가 싱겁기 짝이 없다. 청중은 염증이 나서 하품과 졸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리하여 중판쯤 이르더니 소리는 점점 흥미있게 되어 간다. 난데없는 다른 청이 튀어나오기 시작하고 하픔하며 졸던 간관들은 귀를 번쩍 들고 지수는 소리 좌우에서 쏟아져 나온다. 그리 하다가 소리는 다시 점점 담박무미하게 된다. 이러한 제작으로 조종하면서 달야토록 계속하였다 한다. 담담연 냉수적으로 탄탄연 대로적으로 하다가 어느 지경에 이르러서 그 어떤 특조를 발휘하는 식이다." 이런 정노식의 말은 고제 소리의 특징에 대한 설명으로도 볼 수 있다. 근대 명창들은 한 대목 안에서도 여러 잔기교를 부리는 데 비해, 고제 명창들은 판소리 한 바탕을 염두에 두고 큰 기교를 위주로 소리를 전개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담박무미한 김창룡의 소리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겠다. 송만갑이 전통적인 동편제 소리를 변질시키고 통속화된 소리를 부르자, 박기홍은 송만갑에게 "장타령 아니면 염불"이라 했고 "패려자손"이라는 말까지 서슴치 않았다. 또, 그 후대에 임방울이 단가를 계면조로 부르자 귀명창들은 "이제 판소리는 끝났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런 통속화된 소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그러고 보면 모든 문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극적으로 변하는 것인지 모른다. 외국의 경우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비트가 강하고 자극적인 음악들이 유행한다. 그리고 자극적인 문화가 시들해지고 나면 다시 복고풍으로 돌아가서 소박하고 덜 자극적인 문화가 유행을 하게 마련이다. 이런 면에서 앞으로 판소리도 복고풍으로 돌아가, 고제가 유행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김창룡은 서울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서인지 음반을 들어보면 충청도 사투리는 거의 쓰지 않는다. 사투리는 쓰지 않지만 충청도 출신인 만큼 충청도 억양으로 아니리를 한다. 그리고 김창룡은 창법에 있어서 경기소리의 영향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충청도 출신인 만큼 지리적으로 전라도 명창들보다 경기소리를 많이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김창룡은 비교적 젊은 나이인 32세 무렵부터 서울에서 활동하였는데, 서울을 활동 무대로 삼으면서 경기 청중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판소리에 경기소리를 수용하여 불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서울에서 활약했던 송만갑도 경기소리를 수용하여 판소리를 했다. 그러니 김창룡이 염계달, 이석순과 같은 옛 경기 명창들의 더늠을 음반에 남긴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겠다. 김창룡은 중고제 소리를 전공했기 때문에 중고제 이전의 고제 소리에 매우 능통했던 것 같다. 그런 까닭에 김창룡은 옛 명창들의 고제 더늠을 음반으로 남겼고, 『조선창극사』와 신문에 고제 명창들에 대한 회고담도 남길 수 있었다. 충청도 출신의 중고제 명창 중에 김창룡, 이동백, 방진관, 그리고 서산 청송 심씨 일가인 심정순, 심상건, 심매향, 심재덕, 심화영이 녹음을 한 바 있다. 이 충청도 명창들의 소리는 공통적으로 충청도의 내포제 시조와 비슷한 면이 있다. 이 점이 충청도 중고제의 한 특징이 될 수 있겠다. 『게우사』에 "최석황의 내포제"라는 중요한 기록이 있다. 내포제란 충청도 제란 말로 풀이할 수 있기 때문에, 최석황은 충청도 출신이거나 충청도 지역의 판소리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최석황의 내포제를 충청도의 시조라는 말로 풀이한다면 충청도의 내포제 시조를 바탕으로 한 판소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최석황은 『게우사』의 기록으로 보아 하은담과 동시대에 활동한 명창으로 추정된다. 『조선창극사』에 하은담(하한담)과 함께 판소리의 효시로 기록되어 있는 충남 결성의 최선달과 최석황이 동일 인물이거나 같은 집안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판소리에서 제라는 말이 붙은 단어 가운데 문헌에 남아있는 기록으로는 『게우사』에 적혀있는 ‘내포제’가 가장 오래 전에 쓰인 말이다. 숙종 무렵인 최석황, 하은담 시대에 이미 지역별로 여러 스타일의 판소리가 있었기에 다른 제와 구별하여 내포제라는 말을 썼을 것이다. 따라서 충청도 지역의 음악 문화를 바탕으로 한 판소리가 오래 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창극사』에 의하면, 김창룡의 부친 김정근은 "시조와 음률에 한숙했고 상궁접을 창시했다" 한다. 김정근의 부친 김성옥이 진양조를 개발하였기 때문에, 김정근이 만든 상궁접은 지금 연주되는 삼공잽이(느린 진양조) 장단과 다른 것이라고 생각된다. 상궁접은 중고제가 전승이 끊어진 후 사라진 용어이기 때문에 상궁접은 중고제에서 주로 쓰이고 다른 유파에서는 별로 쓰이지 않았을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 상궁접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필자는 혹시나 하여 성우향에게 상궁접이라는 말을 아느냐고 물었다. 성우향은 고제 판소리를 두루 섭렵했던 정응민의 수제자이며, 판소리 사전으로 잘 알려진 명고수 김명환과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성우향이 김명환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상궁접은 중모리(12박)를 반으로 잘라서 6박으로 나가는 장단으로서 엇중모리와 비슷하며 옛 명창들이 단가를 할 때 쓰던 장단"이라고 한다.(1995.5.17. 성우향 증언) 김명환이 성우향에게 설명한 상궁접은 다음과 같은 김명환의 말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전에 워녀니 단가라고 하는 것은 처음에 시작되기럴 육박으로 되았어요. 나중에 중중머리가 되었답니다. 중중머리로 단가럴 했어. 그러다 나중에 인자 중머리로, 육박얼 둘로 합쳐 갖고 십이박으로 해서. 인제 중머리로 단가가 된 지는 얼매 안된대요. 그러니까 인자 박봉술이 저 육박으로 단가 허는 것 안 있습디여. 사창화류, 엇중머리제. 정 선생 아버지(정응민)도 그러구. 장판개 선생도 그러고. 단가는 워녀니 육박으로 했대요."(김명환 구술, 『내 북에 앵길 소리가 없어요』) 김명환의 말을 종합해 보면, 김정근이 창시했다는 상궁접은 엇중모리 장단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판소리 하는 사람이 웬 시조며 가곡"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시조를 비롯한 정가가 판소리 하는 데 발성의 기초가 된다고 하는 명창들이 있다. 심화영의 말에 따르면, 판소리를 배우기 전에 시조를 먼저 배워서 성악의 기초를 닦고 난 후 판소리 학습에 들어가는 것이 원칙이라 한다.(1995.5.19. 심화영 증언) 명창 김여란도 심화영의 말처럼 학습을 했다. 김정근이 시조에 능했다는 것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성우향은 상궁접 장단이 가곡 풍이라 하며, 김창룡의 단가 <대장부한>, 방진관의 적벽가 중 <삼고초려>를 듣더니 가곡을 듣는 듯한 느낌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시조에 능통했던 김정근이 정가를 판소리에 수용한 흔적이 상궁접일 수 있다. 판소리가 양반에게 인기를 끌게 되면서 양반층의 기호에 맞추기 위해 정가를 판소리에 수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판소리에 정가를 수용하는 일은 주로 양반 출신의 비가비들이 주도했을 것이다. 김창룡의 조부 김성옥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김용운도 정가에 능했던 것으로 보이며, 김용운도 정가를 판소리에 수용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유원의 『임하필기』에 "김용운은 창조가 가사와 유사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정가 풍의 창법이 고제 판소리의 특징 중에 하나라 할 수 있겠다. 성우향은 "김창룡과 방진관의 소리는 평조로 평탄하게 나가는 대목이 많다"고 한다. "중고제는 평평하게 시작한다"고 한 박헌봉의 말과 통하는 면이 있다. 그리고 성우향은 김창룡의 소리를 듣고 느낌을 이렇게 말했다. "김창룡은 목이 아주 좋아서 성음에 기름이 잘잘 흐른다. 목을 되게 쓰지 않으며 쉽고 자연스럽게 발성한다. 그래서 느낌이 껄끄럽지 않고 좋다. 억지로 기교를 부려서 감정을 안넣어도 성음에 감정이 실려있다. 그리고 김창룡은 보성소리와 마찬가지로 진양조 대목을 대개 세마치(자진 진양)로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일제 때의 유성기음반을 들어보면 옛 소리는 지금보다 아니리가 짧고 장단이 대체로 빠르다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유성기음반이 지닌 시간 제약 때문에 빠르게 불렀다고 볼 수도 있다. 심화영의 말에 따르면 "옛날에는 지금보다 소리를 빠르게 했다"고 한다. 즉, 유성기음반이 지닌 시간 제약 때문에 빨리 부른 것이 아니다. 중고제 명창 김창룡, 이동백, 심정순의 소리를 들어보면 장단을 달아놓고 창조 도섭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노래라기 보다 마치 글 빨리 읽기 대회라도 참가한 듯 급히 몰아간다. 오늘날 중고제 맛을 거의 유일하게 간직하고 있는 심화영(심정순 딸)은 춘향가 초입을 아니리로 하지 않고 처음부터 다짜고짜 휘모리 장단으로 급하게 내두른다. 옛 소리는 아니리보다 소리 위주로, 그리고 이야기를 빨리 전개해 나가는 데 중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중고제의 특징 중에 하나라 하겠다. 김창룡은 술, 담배는 전혀 하지 않았고 대신에 떡, 과자 같은 군것질을 많이 했다 한다. 그리고 김창룡은 그의 소리에서 느껴지듯 고집불통의 성격을 지녔었다 한다. 이런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가 있다. 1935년 가을, 조선성악연구회의 창극 심청전 공연에서 심봉사 역을 맡은 김창룡이 물에 빠져 추위에 떨고 있는 연기를 해야 하는데 판소리를 할 때처럼 부채질을 했다 하며, 심청 역의 박록주가 부채를 놓으라고 했으나 괜찮아 하면서 끝까지 태연하게 부채질을 하여 관중석을 웃음 바다로 만들었다 한다. 김창룡은 1925년에 처음 음반 취입을 했다. 김창룡은 1925년에 일축조선소리반에서 16장의 유성기음반을, 제비표조선레코드에서 11장 가량의 유성기음반을 취입했다. 그리고 1931년에 콜럼비아에서 5장의 유성기음반을, 1934년에 콜럼비아에서 창극 춘향전 음반을, 1935년에 폴리도르에서 창극 심청전(23장) 적벽가(18장) 전집 음반과 1장의 독집 음반을 취입했다. 『조선창극사』에 의하면, 김창룡은 1904년 무렵부터 서울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신문 기록을 보면, 김창룡은 서울에서 활동을 개시하자마자 인기가 대단했던 것 같다.(1909.10.6.『황성신문』, 1910.6.26.『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그렇다면 김창룡은 음반 취입 제의도 많이 받았을 것인데, 왜 서울에서 활동을 한지 20여년 후인 1925년에야 첫 음반을 냈는가. 김창환과 이동백은 이미 1910년 무렵에 음반을 취입했고 송만갑도 1913년에 첫 음반을 취입했다. 정정렬은 목이 궂어서 중년 때까지 수 십년 동안 독공을 하느라고 뒤늦게 서울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여 1931년에 첫 음반을 취입했다. 5명창 가운데 김창룡은 서울에서 일찍부터 성공한 편이었는데 녹음은 무척 늦게 한 셈이다. 그것은 아마도 고집불통, 고지식한 사람으로 통했던 김창룡의 성품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 음악을 담은 첫 음반이 1907년에 나왔고 음반이 비교적 대중화된 시기는 대략 1930년대이다. 음반이 보편화 되기 전에는, 소리를 넣고 나면 기가 빠져서 단명한다는 등의 소문이 나돌아서 녹음을 기피하는 음악인들이 꽤 많았다. 김창룡은 결국 녹음을 남기긴 했지만 음반이 낯설은 문물로 여겨지던 시절에는 완강하게 녹음을 거절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성품이 있었기에 그는 중고제 소리를 고수했다고 볼 수 있다. 심화영의 증언에 의하면, 충남 서산군 태안에 이고창이라는 벼슬한 갑부가 있었는데 풍류를 좋아해서 이고창의 집에 국악인이 많이 드나들었다 한다. 당시 명창 심정순의 집안은 서산에서 식당을 했는데, 여러 명인 명창들이 이고창의 집으로 가다가 그 근방에 있는 심정순의 집에 자주 들렸다 한다. 김창룡과 심정순, 이동백, 한성준은 가까운 사이였다 한다. 김창룡은 사람이 구수하며 점잖고 말이 별로 없었다 하며, 이동백은 풍채가 좋았고 좀 거만했다 한다. 심화영은 김창룡의 유성기음반을 듣고, "말하는 거하고 다르게 소리는 뾰쪽하게 잘 하네유"라고 했다.(1995.5.15 19. 심화영 증언) 김창룡의 동생 김창진도 판소리 명창이었다. 박동진의 증언에 의하면, 김창룡의 동생 김창진은 1880년 무렵에 출생하였는데 가문의 소리를 따르지 않고 중고제에 서편제 맛을 가미해서 불렀다 한다. 그리고 김창진이 일제 때 아편을 했기 때문에 김창룡이 김창진을 서울에 못오게 했다 한다.(1995.5.17. 박동진 증언) 나성엽의 증언에 의하면, 김창룡과 그 동생 김창진은 충남 서산 빗그뫼(횡산리, 現 장항읍 성주리)에서 태어났다 한다. 김창룡과 김창진은 처음에 모두 아버지에게 소리를 배웠으나 뒤에 선생이 달라서 그랬던지 소리를 다르게 했다 한다. 김창룡은 산골 장작 패는 식으로 소리를 했고, 김창진은 이쁜 각시 바느질하는 것 같이 소리했다 한다. 김창진은 아편으로 폐인이 되어 동가숙 서가식(東家宿 西家食) 하다가 작고하였다 한다. 나성엽은 김창룡의 조부 김성옥이 강경(江景)에서 살았다는 말을 들은 바 있다 한다. 강경 분토거리 출신으로 논산에서 살았던 명창 이준표가 김창룡과 비슷하게 소리를 했었다 한다.(이보형, 『판소리 유파』 서울:문화재연구소, 1992) 김창룡의 동생 김창진이 가문의 중고제 소리를 하지 않고 서편제를 했다면, 김창진에게 서편제 소리를 가르쳐준 사람이 있을 것이다. 정노식은 『조선창극사』에서, "김창룡이 이날치(서편제)에게 소리를 배운 바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김창진도 형 김창룡과 함께 이날치에게 서편제 소리를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 1931년에 일본 콜럼비아 음반회사에서 발간한 『정선 조선가요집』에 김창진의 사진이 실려있다. 『정선 조선가요집』에 실린 사진이 실려있는 명창들은 거의 대부분 콜럼비아에서 음반을 취입했으나 이상하게 김창진은 음반을 취입하지 않았다. 김창진은 아편을 하다 형 김창룡에게 혼나고 서울에서 활동을 못하게 되어, 계획했던 음반을 취입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득수의 증언에 의하면 김창룡은 김세준, 김대준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한다. 1934년 무렵에 김창룡이 박종기와 심하게 다툰 일이 있다 하며 그 일로 김창룡 아들이 박종기를 구타하였다 한다. 김득수가 김창룡 작고 후 시신을 거두어 서울 홍제동에서 화장하고 산에 뿌렸다 한다.(이보형, 『판소리 유파』) 김창룡은 1943년에 타계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김창룡이 1935년에 작고한 것으로 추정해 왔었다. 박황의 『판소리 소사』(서울:신구문화사, 1974) 83쪽에 김창룡이 1935년에 작고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박황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였고 그 기록이 정설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김창룡이 작고한 시기가 1935년이 아니라는 것은 일제 때의 신문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김창룡이 타계한 시기로 알려진 1935년 이후인 1936∼1942년의 신문을 보면 김창룡의 활동 기록을 많이 찾을 수 있다. 따라서 1935년에 김창룡이 타계했다는 『판소리 소사』의 기록은 분명 잘못된 것이고 1942년 이후에 작고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김창룡이 1943년에 타계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1943년 2월 25일자 『매일신보』를 보면, 김창룡이 1943년 2월 24일 오전 1시 25분에 타계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