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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시감상
선죽교 / 이개
善竹橋 李塏
繁華往事已成空(번화왕사이성공) 번화했던 지난 일은 이미 헛것이 돼 버린 채
舞館歌臺野草中(무관가대야초중) 춤추던 집이나 노래하던 무대 들풀 속에 묻혔네
惟有斷橋名善竹(유유단교명선죽) 오직 남은 잘린 다리 그 이름은 선죽교로
半千王業一文忠(반천왕업일문충) 반 천 년의 왕업은 한 사람의 문충뿐이구나
〈감상〉
이 시는 선죽교에서 지은 것으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충절(忠節)을 기리는 회고시(懷古詩)이다.
지난 고려의 역사를 생각해 보니, 번화했던 수도 개성(開城)은 이미 사라지고 헛된 것이 되어 버려, 기생들이 춤추던 집이나 노래하던 무대가 모두 들풀 속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오직 선죽교만이 남아 있는데, 그것도 한편이 잘려 버리고 이름만 남아 있다. 그 선죽교에는 고려 500년 왕조의 업적이 한 사람 정몽주(鄭夢周)의 충절(忠節)만이 흔적을 남겨 두고 있다.
이개는 기개(氣槪)가 매우 높았는데, 이와 관련하여 『동각잡기(東閣雜記)』에 다음과 같은 일화(逸話)가 실려 있다.
“이개(李塏)는 목은(牧隱)의 증손인데, 시(詩)와 문(文)이 뛰어나 세상에서 중망을 받았다. 세종이 온양(溫陽)에 갈 적에 이개가 성삼문 등과 함께 편복(便服)으로 행차를 따라가 고문(顧問)이 되니,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겼다. 성삼문의 모사에 참여하였는데, 사람됨이 몸이 파리하고 약하나 곤장 아래에서도 안색이 변하지 아니하므로, 보는 사람들이 장하게 여겼다. 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이개의 숙부 이계전(李季甸)이 매우 친밀하게 출입하므로 이개가 경계한 적이 있었다. 이때서야 세조가 말하기를, ‘일찍이 이개가 제 숙부에게 그런 말이 있었다는 것을 듣고, 마음에 못된 놈이라 여겼더니, 과연 다른 마음이 있어 그러하였던 것이로구나.’ 하였다.
이개가 수레에 실려 형장(刑場)으로 나갈 때에 시를 짓기를, ‘우의 솥처럼 중할 때엔 삶도 또한 크거니와, 기러기 털처럼 가벼운 데선 죽음 또한 영광일세. 일찍이 일어나 자지 않고 문을 나가니, 현릉(문종(文宗))의 송백이 꿈속에 푸르구나.’ 하였다
(李塏牧隱之曾孫也(이개목은지증손야) 詩文淸絶(시문청절) 爲世所重(위세소중) 英廟幸溫陽(영묘행온양) 塏與三問等(개여삼문등) 便服隨駕(편복수가) 備顧問(비고문) 人皆榮之(인개영지) 預三問之謀(예삼문지모) 爲人瘦弱(위인수약) 而杖下顏色不變(이장하안색불변) 見者壯之(견자장지) 光廟在潛邸(광묘재잠저) 塏之叔父季甸(개지숙부계전) 出入甚密(출입심밀) 塏戒之(개계지) 及是光廟曰(급시광묘왈) 曾聞有此言(증문유차언) 心以爲不肖(심이위불초) 果有異心而然耶(과유이심이연야) 塏載車有詩曰(개재차유시왈) 禹鼎重時生亦大(우정중시생역대) 鴻毛輕處死猶榮(홍모경처사유영) 明發未寐出門去(명발미매출문거) 顯陵松柏夢中靑(현릉송백몽중청)).”
〈주석〉
〖文忠(문충)〗 정몽주(鄭夢周)의 시호.
각주
1 이개(李塏, 1417, 태종 17~1456, 세조 2):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청보(淸甫)·백고(伯高), 호는 백옥헌(白玉軒). 1436년(세종 1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1441년 훈민정음 창제에 관여했으며 『동국정운(東國正韻)』의 번역·편찬작업에도 참여했다. 1447년 문과중시에 급제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450년(문종 즉위) 왕세자를 위해 서연(書筵)을 열었을 때 좌문학(左文學)으로 『소학』을 강의하여 문종에게 칭찬을 받았다. 1456년(세조 2) 2월 집현전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 김질(金礩)의 밀고로 체포되어 국문을 당했다. 숙부 계전(季甸)이 세조와 친교가 두터워 회유를 받았으나 거절하고, 의연하게 관련자들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다. 시문(詩文)이 절묘했고, 글씨에도 능했다. 시호는 의열(義烈)이었다가 충간(忠簡)으로 고쳐졌다.
임사절명시 / 성삼문
臨死絶命詩 成三問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북을 울리며 사람의 목숨 재촉하는데
回頭日欲斜(회두일욕사) 머리를 돌리니 해가 지려고 한다
黃泉無一店(황천무일점) 황천길에는 주막 하나 없다는데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오늘밤은 누구 집에서 잘까?
〈감상〉
이 시는 세조(世祖)의 회유(懷柔)에 응하지 않아 죽음에 임하여 목숨이 끊어지기 전 형장(刑場)에서 지은 시이다.
둥둥 북을 울리며 망나니가 사람의 목숨을 거두기를 재촉하는데, 조금 있으면 이승에서의 마지막이기 때문에 하직(下直)이나 하려고 머리를 들어 산천을 돌아다보니, 태양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서산(西山)으로 지려고 하고 있다. 저승으로 가는 길에는 주막이 하나도 없다고 들었는데, 오늘밤은 누구 집에서 자고 갈까?
이 시 외에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는 성삼문이 지은 시에 대한 일화(逸話)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승지 성삼문의 「이제묘」 시에, ‘초목 또한 주나라 이슬비에 컸으니, 그대들이 오히려 수양산 고사리 먹은 것 부끄럽네’ 하였다. 유준(劉峻, 자는 효표(孝標), 시호는 현정선생(玄靖先生))의 「변명론(辨命論)」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숙원(淑媛, 여인을 말함)의 말 때문에 죽었다’ 하고, 그 주석에 ‘백이와 숙제가 고사리를 캐다 어떤 여자가 〈당신들이 의리상 주나라 곡식을 먹지 못한다고 하는데, 고사리도 주나라의 초목이다〉 하자, 그대로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했으니, 성삼문의 시가 우연히 그와 부합된 것일까? 혹 그대로 이 일을 따다 쓴 것일까?
(成承旨三問夷齊廟詩(성승지삼문이제묘시) 草木亦霑周雨露(초목역점주우로) 愧君猶食首陽薇(괴군유식수양미) 劉峻辨命論云(유준변명론운) 夷齊斃淑媛之言(이제폐숙원지언) 注夷齊采薇(주이제채미) 有女子謂之曰(유녀자위지왈) 子義不食周粟(자의불식주속) 此亦周之草木也(차역주지초목야) 因饑首陽成詩偶然符合耶(인기수양성시우연부합야) 或因用此事歟(혹인용차사여))”
〈주석〉
〖催〗 재촉하다 최, 〖黃泉(황천)〗 저승. 〖店〗 가게 점
각주
1 성삼문(成三問, 1418, 태종 18~1456, 세조 2):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死六臣)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 꼽힌다. 본관은 창녕. 자는 근보(謹甫)·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외가인 홍주(洪州) 노은골에서 출생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하고 묻는 소리가 3번 들려서 삼문(三問)이라 이름을 지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 식년시에 응시하여 뒷날 생사를 같이한 하위지와 함께 급제했다. 집현전학사로 뽑힌 뒤 수찬·집현전을 지냈다. 1442년 박팽년·신죽주·하위지·이석형 등과 더불어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편찬했다. 세종이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을 만들 때 정인지·신숙주·최항·박팽년·이개(李塏) 등과 더불어 이를 도왔다. 1447년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1453년 좌사간, 1454년 집현전부제학·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 예방승지가 되었다. 1456년 단종복위 운동이 발각되어 혹독한 고문에도 결코 굴하지 아니하여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다.
재박다도 차운기인수백옥중장근보청보산거 / 신숙주
在博多島 次韵寄仁叟伯玉仲章謹甫淸甫山居 申叔舟
半歲天涯已倦遊(반세천애이권유) 하늘 끝에 노닌 지 반년 이미 노닐기 지쳤는데
歸心日夕故山秋(귀심일석고산추) 밤낮 돌아갈 마음 고국산천에 있다오
山中舊友靑燈夜(산중구우청등야) 산속에서 등불 아래 글 읽던 옛 벗들이여
閒話應憐海外舟(한화응련해외주) 한담하다 해외의 숙주(叔舟)를 애처로워하겠지
一任東西自在遊(일임동서자재유) 동서를 책임져서 어느 곳이나 다녔더니
滄溟萬里海天秋(창명만리해천추) 푸른 바다 만 리 밖 하늘가에서 가을을 보내네
翻思有命應先定(번사유명응선정) 아무리 생각하여도 팔자에 정해졌나니
字是泛翁名叔舟(자시범옹명숙주) 자는 범옹이요, 이름 또한 숙주일세
〈감상〉
이 시는 일본의 박다도에 있으면서 차운하여 산중에 있는 박팽년·이석형·하위지·성삼문·이개에게 보낸 시이다.
하늘 끝 일본에 온 지도 벌써 반년이 지나 지쳐 가는데, 언제쯤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까? 예전에 산속에서 불을 밝혀 놓고 함께 글을 읽던 옛 벗들,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멀리 일본에 와 있는 내 처지를 애처로워할 것이다. 이전에도 나라의 일을 맡아 천하를 주유(周遊)하였는데, 지금은 푸른 바다를 만 리나 건너 일본에서 가을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된 자신의 처지는 바다나 물을 떠다니는 노인이라는 ‘범옹(泛翁)’이라는 자(字)와 배가 들어간 ‘숙주(叔舟)’라는 이름 때문으로, 이미 정해진 운명인 것이다.
김안로(金安老)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
“신숙주가 집현전에 들어가 장서각(藏書閣)에서 평소에 보지 못한 책들을 가져다 보며 밤을 새웠다. 하루저녁에는 삼경(三更)이 되었을 때 세종이 환관 하나를 보내어 보고 오라고 하였다. 공(公)은 여전히 촛불을 켜고 독서하였는데, 3, 4차례 가서 보아도 여전히 그치지 않고 독서하다가, 닭이 운 뒤에야 잠을 잤다. 주상께서 담비 가죽옷을 벗어 푹 잠든 틈을 타서 덮어 주도록 하였다. 신숙주가 아침에 일어나 비로소 알았다. 사림에서 이 말을 듣고 힘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申叔舟入集賢殿(신숙주입집현전) 取藏書閣平昔所未見之書(취장서각평석소미견지서) 讀之(독지) 通宵不寐(통소불매) 一夕漏下三鼓(일석루하삼고) 我英廟遣小宦往覘之(아영묘견소환왕첨지) 公猶燃燭讀書(공유연촉독서) 往覘數四(왕첨수사) 讀猶不輟(독유불철) 雞鳴後始寢(계명후시침) 上解貂裘(상해초구) 令乘睡熟覆其上(영승수숙복기상) 叔舟朝起方覺之(숙주조기방각지) 士林聞之(사림문지) 莫不勸勵(막불권려)).”
라 하여, 학문에 정진한 신숙주의 일화(逸話)가 실려 있다.
이러한 결과 신숙주는 일본과 중국에도 명성을 날렸는데, 그의 「비문(碑文)」에,
“서장관으로 일본에 사신 갔었을 때 왜인(倭人)이 다투어 그의 시를 요구하자 붓을 쥐고 곧 지으니 모두들 탄복하였다. 떠나서 돌아오기까지 무릇 9개월 걸렸다. 이전의 통신사행은 이만큼 완전하고 또 빠른 적이 없었다. 매번 사신들이 올 때마다 왜인이 반드시 그의 안부를 물었다
(以書狀聘日本(이서상빙일본) 倭人爭求其詩(왜인쟁구기시) 操筆立就(조필립취) 衆皆嘆服(중개탄복) 自發曁還凡九箇月(자발기환범구개월) 前此通信之行(전차통신지행) 未有若此之完且速者(미유약차지완차속자) 每使价來(매사개래) 倭人必問其寒暄(왜인필문기한훤))”
라 하였고, 『황화집(皇華集)』에는, “경태(景泰) 초 한림학사(翰林學士) 예겸이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을 때 태평루(太平樓)에 올라 시를 지었다.
신숙주가 그 운(韻)을 써서 화답하니, 학사(學士)가 탄복하고 돌아갈 때 시를 지어 보내기를,
‘시 솜씨는 일찍 굴원(屈原)과 그의 제자 송옥(宋玉)의 단(壇)에 올랐으니, 그 명성 전하여져 조정 끝까지 가득 찼네’ 하고, 동방의 최고라 칭찬하였다
(景泰初(경태초) 翰林學士倪謙奉使東來(한림학사예겸봉사동래) 登太平樓賦詩(등태평루부시) 叔舟步其韻和之(숙주보기운화지) 學士嘆服(학사탄복) 旣還寄詩云(기환기시운) 詞賦曾乘屈宋壇(사부증승굴송단) 爲傳聲譽滿朝端(위전성예만조단) 稱爲東方巨擘(칭위동방거벽)).”
라 하여, 그의 시명(詩名)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주석〉
〖仁叟伯玉仲章謹甫淸甫(인수백옥중장근보청보)〗 인수(仁叟)는 박팽년(朴彭年)의 자(字), 백옥(伯玉)은 이석형(李石亨)의 자, 중장(仲章)은 하위지(河緯地)의 자, 근보(謹甫)는 성삼문(成三問)의 자, 청보(淸甫)는 이개(李塏)의 자.
〖倦〗 피로하다 권, 〖滄〗 푸르다 창, 〖溟〗 바다 명, 〖翻〗 뒤집다 번
각주
1 신숙주(申叔舟, 1417, 태종 17~1475, 성종 6): 본관은 고령.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보한재(保閑齋). 1438년(세종 20) 생원시·진사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전농사직장(典農寺直長)을 지냈다. 입직할 때마다 장서각에 파묻혀서 귀중한 서책들을 읽었으며, 자청하여 숙직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 이러한 학문에 대한 열성이 왕에게까지 알려져 세종으로부터 어의를 받기도 했다. 1443년 통신사 변효문(卞孝文)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가서 우리의 학문과 문화를 과시하는 한편 가는 곳마다 산천의 경계와 요해지(要害地)를 살펴 지도를 작성하고 그들의 제도·풍속, 각지 영주들의 강약 등을 기록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집현전수찬을 지내면서 세종의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 창제에 심혈을 기울였다. 1452년(문종 2)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수행하면서 그와 깊은 유대를 맺었다.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을 때 중용되어 수충협책정난공신(輸忠協策靖難功臣) 1등에 오르고, 이듬해 도승지로 승진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 1등에 고령군(高靈君)으로 봉해지고 예문관대제학으로 임명되었다. 서장관으로 일본에 갔던 경험을 바탕으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지어 일본과의 교류에 도움을 주고, 오랫동안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명과의 외교관계를 맡는 등 외교정책의 입안·책임자로서도 활약했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를 잘 썼다고 한다. 저서로는 문집인 『보한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제비해당 사십팔영 / 신숙주
題匪懈堂 四十八詠 申叔舟
「熟睡海棠(숙수해당)」
高人睡起掩朱扉(고인수기엄주비) 고인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붉은 사립문을 닫으니
月轉長廊香霧霏(월전장랑향무비) 달빛은 긴 회랑을 돌고 꽃향기 어린 안개는 내리네
獨繞芳叢燒短燭(독요방총소단촉) 홀로 꽃떨기에 둘러싸여 작은 촛불 켜 두고
沈吟夜久更忘歸(침음야구갱망귀) 밤늦도록 읊조리며 다시 돌아가길 잊네
〈감상〉
이 시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저택과 그 주변의 사물들을 제재로 하여 지은 시 가운데 깊은 잠에서 깨어 해당화를 보고 노래한 것이다.
안평대군을 중심으로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김수온(金守溫)·서거정(徐居正) 등은 유미적(唯美的) 성향의 시를 짓는다. 최항(崔恒)의 「산곡정수서(山谷精粹序)」에, “비해당은 학문이 해박하고 견식이 높은데, 평소 황산곡의 시를 좋아하여 늘 읊조리며 감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단편 가운데 좋은 작품을 뽑고 뛰어난 것을 모아서 평론을 더하고 『산곡정수』라 하였다. ······뒤에 시를 배우는 자들이 만일 이 한 질의 시집에 나아가 숙독하여 깊이 체득할 수 있다면 고인들이 깨달은 법도를 마땅히 이로부터 얻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천근하고 비루한 기운을 제거하여 청신하고 기묘한 골수로 바꿀 수 있을 것이고, 고장 난 거문고 소리가 남의 귀를 거스르는 일을 걱정하지 않게 될 것이며, 사광과 종자기(鍾子期)가 잠깐 사이에 얼굴빛을 바꾸고 음식 맛을 잃게 될 것이다. 재덕(才德)을 겸비한 군자가 오묘하게 살펴보고 정밀하게 모았으니, 정성을 다해 선인들을 빛나게 하고 후진들을 이끌어 주려는 아름다운 뜻이 이에 다소 실현될 것이다
(匪懈堂學該識高(비해당학해식고) 雅愛涪翁詩(아애부옹시) 每詠玩不置(매영완불치) 遂采其短章之佳者(수채기단장지가자) 粹而彙之(수이휘지) 就加評論(취가평론) 名曰山谷精粹(명왈산곡정수) ······後之學詩者(후지학시자) 苟能卽此一帙(구능즉차일질) 熟讀而深體之(숙독이심체지) 則古人悟入之法(칙고인오입지법) 當自此得之(당자차득지) 祛淺易鄙陋之氣(거천역비루지기) 換淸新奇巧之髓(환청신기교지수) 枯絃弊軫(고현폐진) 不患其不滿人耳(불환기불만인이) 而師曠鍾期俄爲之改容忘味(이사광종기아위지개용망미) 大雅君子妙覽精輟(대아군자묘람정철) 惓惓焉發輝前英(권권언발휘전영) 啓迪後進之美意(계적후진지미의) 於是乎少酬矣(어시호소수의)).”
라 하였는데, 이를 통해 안평대군의 후원 아래 기존의 시풍(詩風)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음을 볼 수 있다.
조선 전기의 서거정·강희맹·이승소(李承召)·신숙주 등의 관각문인(館閣文人)들은 화려한 수사와 세련된 감성을 위주로 시를 창작하였다. 문학에 있어 실용적인 측면을 강조했던 이들이 유미주의적(唯美主義的)인 취향을 드러내는 것은, 왕정(王政)의 분식(粉飾)과 대명(對明) 외교의 필요성으로 인해 기교적인 시문(詩文)의 창작이 요구되었고, 한미(寒微)한 출신에서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어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사람으로서의 엘리트 의식이 귀족적인 성향으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위의 시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주석〉
〖匪懈堂(비해당)〗 세종대왕의 3남인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호(號)이다. 당대의 명필(名筆)로서 시문(詩文)에 뛰어나 중국 사신들이 올 때마다 그의 필적을 얻어 가곤 하였다. 단종(端宗) 즉위 후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과 제휴하고 문신들을 포섭하여 수양대군(首陽大君)의 무신 측과 맞서다 단종 1년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몰락하여 사사(賜死)되었음.
〖睡〗 자다 수, 〖高人(고인)〗 평범하지 않은 사람. 〖扉〗 문짝 비, 〖廊〗 행랑 랑, 〖霏〗 오다 비,
〖繞〗 둘러싸다 요, 〖沈吟(침음)〗 낮은 소리로 읊조림.
기중서제군 / 신숙주
寄中書諸君 申叔舟
豆滿春江繞塞山(두만춘강요새산) 두만의 봄강이 변방산을 둘렀는데
客來歸夢五雲間(객래귀몽오운간) 나그네의 돌아가는 꿈은 오색구름 사이에 있네
中書醉後應無事(중서취후응무사) 중서들은 취한 뒤에 아마 일이 없으리니
明月梨花不怕寒(명월리화불파한) 밝은 달 배꽃에 추위를 겁내지 않으리라
〈감상〉
이 시는 함경도에 노닐다가 중서(中書)의 여러 사람들에게 보낸 시이다.
이 시에 대해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보한재 신숙주·이락당 신용개·기재 신광한 조손 세 사람은 모두 문장에 뛰어나 대제학을 지냈으니, 위대한 일이다. 보한재가 일찍이 함경도를 노닐다가 중서 여러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부쳤다. ······위에 든 여러 시는 당시(唐詩)에 양보할 것이 없다(保閑齋申叔舟二樂堂用漑企齋光漢(보한재신숙주이락당용개기재광한) 祖孫三人(조손삼인) 皆以文章典文衡(개이문장전문형) 偉哉(위재) 保閑嘗北遊(보한상북유) 寄中書諸君詩曰(기중서제군시왈) ······諸詩何讓唐人(제시하양당인)).”라는 평을 남기고 있다.
정조(正祖)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보한재 신숙주와 같은 경우는 논설도 잘하고 행동도 잘하였다고 할 만하다. 널리 섭렵한 재주로 국가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문장을 지어 내어 깊은 운용과 막힘없는 조치로 우리 성조(聖祖)를 도와서 다스리는 도구를 마련하였기 때문에 그 문장이 넓으면서도 잡되지 않고 분석적이면서도 정직하여 한 시대의 법도가 환하게 갖추어 전해지게 하였으니, 평생토록 쩔쩔매면서 쓸데없는 데 마음을 쓰는 문필가들과는 다르다. 세상의 고사(故事)에 관심을 가진 자들은 읽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若保閒齋(약보한재) 可謂能說能做也(가위능설능주야) 以其彌綸之才(이기미륜지재) 發爲經濟之文(발위경제지문) 淵乎其運用(연호기운용) 沛乎其注措(패호기주조) 翼我聖祖(익아성조) 畢張治具(필장치구) 是故其文博而不雜(시고기문박이부잡) 辨而不詭(변이불궤) 一代典章(일대전장) 賁然可述(분연가술) 非若操觚家終歲矻矻(비약조고가종세골골) 卒用心於無用之地也(졸용심어무용지지야) 世之留意掌故者(세지류의장고자) 不可不讀(불가부독)).”
〈주석〉
〖中書(중서)〗 본디 궁궐의 문서 출납을 관장하는 한(漢)·당(唐) 시대 관제(官制)의 하나인데, 흔히 우리나라의 의정부(議政府)에 견주어 말함.
〖繞〗 두르다 요, 〖怕〗 두려워하다 파
춘일 / 서거정
春日 徐居正
金入垂楊玉謝梅(금입수양옥사매) 금빛은 실버들에 들고 옥빛은 매화를 떠나는데
小池新水碧於苔(소지신수벽어태) 작은 못의 새로운 물은 이끼보다 푸르다
春愁春興誰深淺(춘수춘흥수심천) 봄 시름과 봄 흥취 어느 것이 깊고 옅은가?
燕子不來花未開(연자불래화미개) 제비가 오지 않아 꽃이 피지 않았네
〈감상〉
이 시는 봄 경치를 읊은 시로, 역대 선집(選集)에 거의 모두 선재(選載)되어 있으며 중국의 전겸익(錢謙益)이 편찬한 『열조시집(列朝詩集)』에도 수록되어 서거정의 시명(詩名)이 해외에도 떨치게 한 작품이다.
노란 버들에 금빛이 반짝이고 추운 겨울에 피었다 봄이 오자 흰 매화가 지고 있다. 겨우내 얼었던 눈이 녹아 작은 못에 고였는데 이끼보다 푸르다. 나른하고 무료한 봄의 시름과 봄이 와서 느끼는 봄의 흥취는 어느 것이 더 깊은가? 봄이 오지 않아 꽃이 피지 않은 것이 시름이니, 머지않아 제비가 오면 꽃은 필 것이요, 그러면 시름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며, 흥이 일 것이다.
평탄한 벼슬살이를 했던 서거정(徐居正)이기에 다가오는 봄은 고울 것이요, 그러한 봄의 여유로움 또한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는 특이하게도 근체시(近體詩)에서 꺼리는 반복된 글자를 사용하고 있으며, 하나의 구(句)에서 대(對)를 이루는 구중대(句中對)를 활용하기도 하였다(금입수양(金入垂楊)과 옥사매(玉謝梅), 연자불래(燕子不來)와 화미개(花未開)).
조선 전기의 서거정·강희맹·이승소(李承召) 등의 관각문인(館閣文人)들은 화려한 수사와 세련된 감성을 위주로 시를 창작하였다. 문학에 있어 실용적(實用的)인 측면을 강조했던 이들이 유미주의적(唯美主義的)인 취향을 드러내는 것은, 왕정(王政)의 분식(粉飾)과 대명(對明) 외교의 필요성으로 인해 기교적(技巧的)인 시문(詩文)의 창작이 요구되었고, 한미한 출신에서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어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사람으로서의 엘리트 의식이 귀족적인 성향으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저작이 위의 시이다.
이에 대해 홍만종은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사가 서거정은 대제학 자리를 오래도록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명성이 누구보다 성대했다. 그러나 평자들이 그를 중시하지 않은 것은 그의 재주가 화려하고 넉넉한 데만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徐四佳久典文衡(서사가구전문형) 聲名最盛(성명최성) 而不爲評家所重(이불위평가소중) 蓋以才止於華贍而已(개이재지어화섬이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서거정(徐居正)은 관각체(館閣體)를 풍미한 사람으로 정조(正祖)의 『홍재전서(弘齋全書)』 「일성록(日省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우리나라의 관각체는 양촌(陽村) 권근(權近)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그 이후 춘정(春亭) 변계량(卞季亮),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 등이 역시 이 문체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근고(近古)에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 서하(西河) 이민서(李敏敍) 등이 또 그 뒤를 이어 각체가 갖추어졌다
(我國館閣體(아국관각체) 肇自權陽村(조자권양촌) 而伊後如卞春亭徐四佳輩(이이후여변춘정서사가배) 亦以此雄視一世(역이차웅시일세) 近古則李月沙南壺谷李西河(근고칙이월사남호곡이서하) 又相繼踵武(우상계종무) 各體俱備(각체구비)).”
〈주석〉
〖謝〗 물러나다 사, 〖苔〗 이끼 태
각주
1 서거정(徐居正, 1420, 세종 2~1488, 성종 19):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 권근(權近)의 외손자.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년간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文風)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단종(端宗) 폐위와 사육신(死六臣)의 희생 등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의 혹독한 비평가였던 김시습(金時習)과도 미묘한 친분관계를 맺은 것으로 유명하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그 자신도 뛰어난 문학저술을 남겨 조선시대 관각문학이 절정을 이루었던 목릉성세(穆陵盛世)의 디딤돌을 이루었다. 그의 저술서로는 객관적 비평태도와 주체적 비평안(批評眼)을 확립하여 후대의 시화(詩話)에 큰 영향을 끼친 『동인시화(東人詩話)』, 간추린 역사·제도·풍속 등을 서술한 『필원잡기(筆苑雜記)』, 설화·수필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이 있으며, 관인(官人)의 부려호방(富麗豪放)한 시문이 다수 실린 『사가집(四佳集)』 등이 있다. 명나라 사신 기순(祁順)과의 시 대결에서 우수한 재능을 보였으며 그를 통한 『황화집(皇華集)』의 편찬으로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