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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1 주일 설교
사정이 있을 겁니다
여호수아 22:10
서울 대치동에 사는 황대익목사님은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종종 남한산성에 물을 뜨러 간다고 합니다. 황목사님은 스스로 입맛이 까다롭다고 하는데 마셔본 물 중에 남한산성 물이 가장 맛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낮에 물을 뜨러 가면 줄을 길게 서야 하고 종종 물통을 여러 개 가지고 오는 분 때문에 기다리다가 마음이 불편할 때도 있지만 밤에는 줄을 설 필요도 없어서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물을 길어서 오다가 보면 종종 여자분들 서너 명이 길에 서서 차를 태워달라고 손을 든답니다. 여자들이 늦은 밤까지 모여서 놀다가 차를 태워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 황목사님은 절대로 태워주지 않았답니다. 저렇게 늦은 밤까지 모여서 놀러 다니는 여자들의 남편들은 뼈 빠지게 일하느라 고생하겠지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도대체 저 여자들은 이 밤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놀았을지 궁금증이 생겼답니다. 그래서 차를 세워주었는데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깜짝 놀랐답니다. 그 여자들은 모여서 놀러 다니는 분들이 아니고 남한산성의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인데 밤이 깊어 버스도 끊기고 택시를 타려면 차비가 비싸서 그렇게 차를 얻어 타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혼자서 차를 얻어 타면 위험할까봐 서너 명씩 모여서 차를 얻어 타고 시내까지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친절한 사장님이 한번 만에 차를 태워주어서 운이 좋은 날이라고 ‘하하 호호’ 하더랍니다. 황목사님은 앞으로 남한산성에 물을 뜨러 가면 일부러 그런 종업원 아줌마들이 있는지 찾아서 태워주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남의 사정을 모를 때는 자기 생각으로 판단을 합니다. 물론 내 기준과 판단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정을 알고 보면 상상도 하지 못한 깜짝 놀랄만한 사정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꼭 황목사님의 경험 같은 반전이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는 알고 보면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성도라면 저 사람은 왜 저 모양이냐고 말하기 전에 무슨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사이 우리나라에 유행하는 사자성어 중에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흔히 사자성어는 고사성어와 같은 말이고 한자로 이루어졌지만 내로남불은 한글, 영어, 한자까지 다 들어가서 비빔밥 같은 사자성어입니다.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은 좋은 동기로 평가하지만 남의 행동에 대해 불순한 동기라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인간들의 죄성의 발로(發露) 때문에 자칫하면 교회에 어려움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얼마 전 우리 총회에도 그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지난 9월에 있었던 총회는 코로나 상황에서 한 자리에 모일 수 없어서 3일간 총회로 모이는 대신 4시간 동안의 영상회의로 바꾸었습니다. 그랬더니 서울의 한 노회는 총회가 불법이라며 총회를 보이콧하는 슬픈 사건이 생겼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우리 노회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내일(10월 12일)은 수원노회가 제98회 정기노회로 모입니다. 우리 행복한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수원노회 소속인 것을 여러분이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회는 매년 4월과 10월에 정기노회로 모입니다. 저는 올해 봄에 노회장으로 선출되어 내년 4월까지 노회장으로 섬기게 됩니다. 내일 저는 노회 개회 예배를 인도하고 회의를 이끌고 또 목사 안수식 집례도 하게 됩니다. 어떤 노회에는 목사로 안수 받는 분이 한 명도 없다는데 우리 수원노회는 금번에 무려 7명이 목사 안수를 받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시대에 노회가 한 곳에 모일 수 없어서 다섯 군데로 분산하여 영상회의로 모이는데 영상회의는 대면 회의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물론 최선을 다해 준비했지만 제가 노회장으로서 중요한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상대방의 행동을 불순한 동기로 평가하는 바람에 문제가 발생하는 이런 일은 총회나 노회, 교회와 가정, 어디에서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발생할 때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지혜로우며 하나님 앞에서 옳은지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광야에서 40년간 지나고 요단 동편까지 왔을 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의 나라를 점령했습니다. 그 지역은 평지가 넓고 목초지가 많았으므로 가축을 기르기 좋은 환경입니다. 그래서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지파의 절반이 요단강 동쪽에서 땅을 분배받고 싶다고 요청하자 모세는 그들의 요청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위해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요단강 동쪽에 미리 땅을 분배 받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가나안 정복전쟁의 선봉에 설 것을 명했습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의 용사들이 자기 처자식과 가축을 두고 강을 건너가서 가나안 정복 전쟁에 앞장 서는 것은 위험부담이 매우 큰일입니다. 그 사이에 어떤 민족이 와서 처자식과 가축을 사로잡아 가버리면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수아의 말에 기꺼이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여태까지 지켜주시며 승리를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기에 여호수아의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에게도 목사가 교회를 위해 헌신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의 용사들이 믿음으로 순종한 것처럼 개인적인 일을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께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헌신할 때 여러분의 일들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줄 믿는 그런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은 수년간 계속되었습니다. 드디어 가나안 정복전쟁이 끝나자 여호수아는 두 지파 반의 용사들을 가족이 있는 요단강 동쪽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 용사들은 요단강을 건너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요단강 동편에 큰 제단을 쌓았습니다. 2.5 지파가 요단강 건너편에 큰 제단을 쌓았다는 소식을 들은 서쪽의 9.5 지파의 백성들은 그것을 이스라엘 공동체를 둘로 분열시키는 행동으로 판단했습니다.
방금 정복 전쟁을 마친 이스라엘은 싸우는 것에 익숙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났다 싶으면 당장 쳐부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9.5 지파는 당장 동쪽 2.5 지파들과 싸우러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싸우기 전에 먼저 대표단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대표단의 책임자는 하나님을 특별히 사랑하는 비느하스 제사장이었습니다. 또 각 지파에서 열 명씩 대표자를 뽑아서 함께 갔습니다. 비느하스와 서쪽 9.5 지파의 대표자는 동쪽 지파들에게 제단을 쌓은 의도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독립하기 위함이냐고 물었습니다. 너희들이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벗어나는 것은 멸망하는 짓인 줄 모르느냐고 책망했습니다.
그러자 동쪽 2.5 지파의 사람들은 요단강 건너편에 제단을 쌓은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에서 독립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과 화합하기 위해서라고 답했습니다. 동쪽의 제단은 따로 제사를 드리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에 만일 서쪽 9.5 지파의 후손들이 동쪽 2.5 지파 후손을 이방인으로 취급한다면 그때 우리도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로 이 제단을 보여주기 위해서 제단을 쌓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대답을 들은 비느하스 제사장과 지도자들은 기쁜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또한 이 보고를 받은 서쪽 9.5 지파 백성들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모두 즐거워했습니다(33절).
서쪽 지파의 입장에서는 요단강 동쪽에 제단을 쌓은 것은 분리 독립하자는 의도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사자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상상도 못했던 좋은 의도가 있었습니다. 상대방의 동기를 알고 보니 그것은 미워하고 싸울 일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해줄 일이었고 함께 기뻐할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상대방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에 대해 선한 동기를 알면 싸울 일이 함께 기뻐할 일로 바뀔 수 있습니다. 화를 내고 싸우는 것은 그렇게 급한 것도 아니고 지혜로운 것도 아닙니다. 상대방의 이유와 동기를 충분히 알아보고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말이 되지 않을 때 그때 화를 내어도 늦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혜의 왕 솔로몬은 이렇게 말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잠 14:29)
3500년 전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오늘날도 상대방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먼저 나쁜 의도라고 속단하기는 보다는 무슨 이유와 사정이 있는지 먼저 확인해보는 너그러움이 필요합니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들 마음이 피곤하고 짜증스럽습니다. 벌써 9개월째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 자체가 짜증납니다. 사람도 못 만나고 직장 생활도 어렵고 사업도 안 되고 예배도 자유롭게 못 드리는 상황에서 추석에 고향을 방문하면 불효자라니 얼마나 속이 상하십니까? 그래서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참고 있던 울분이 터질 것 같습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도 감정이 있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으며 힘들고 불편하면 짜증이 납니다. 하지만 상대방의 동기와 이유를 알아보지 않고 화부터 낸다면 나에게나 상대방에게나 유익이 없습니다. 감사하게도 성숙한 성도는 환경의 지배보다 더 강력한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환경을 다스릴 수 있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족이나 성도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먼저 속단한고 화를 내고 싸우려고 하기 보다는 무슨 사정이 있는지, 무슨 동기로 그랬는지 알아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습니다.
만일 물어볼 수 없는 상황이라면 가급적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듯이 저 사람 속에도 같은 성령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인정해주고 믿어주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가족끼리 안 믿어주고, 교인들끼리 못 믿고, 목사와 성도가 서로 의심하면 우리가 누굴 믿고 살겠습니까? 아군끼리는 서로 총질하면 자멸할 수밖에 없지요.
가족이나 성도의 언행이 이해가 잘 안 될 때에는 이렇게 생각하세요. “뭔지 몰라도 사정이 있을 거야.” 우리가 상대방의 사정과 동기를 알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해하기 좋은 상황을 이해로 바꾸어 다 함께 기뻐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유의할 부분이 남았습니다.
본문에 보면 제사장과 백성의 대표단이 요단 동편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거역하고 신앙 공동체를 훼손하는 행동을 했다고 책망하면서 일장 연설을 합니다. 예전에 싯딤에서 있었던 바알브올 사건을 잊었느냐고 했습니다. 그때 비느하스 제사장이 나서서 하나님의 재앙을 멈추게 했습니다. 또 여리고에서 아간인 지은 죄 때문에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했던 일을 잊었느냐고 했습니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너희들도 그 사람들처럼 죄를 지었다는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2.5 지파는 사실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들은 나쁜 의도로 한 것도 아닌데 그런 범죄 행위와 같이 취급하면 화가 날 수도 있습니다. 몇 년 동안 처자식 버려두고 강을 건너가서 정복전쟁을 돕고 방금 돌아왔는데 이런 취급을 받아서 속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오해를 살 행동을 한 것은 자기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가 뭘 어쨌다고 마음대로 오해하느냐고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나쁜 의도로 한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적극적으로 해명을 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상대방의 언행이 이해가 잘 안 될 때에는 “뭔지 몰라도 사정이 있을 거야.” 라고 생각하라고 했지만 오해받을 행동을 한 사람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내 언행이 가족이나 성도에게 오해를 살만한 행동은 아닌지 살펴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남의 참외 밭에서는 구두끈을 고쳐 매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다수의 사람이 나를 오해한다면 내 행동에 오해받을 소지가 있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럴 때는 나한테만 왜 그러냐고 화를 낼 일이 아니라 오해를 풀기 위해 적극적으로 해명하는 노력이 소중합니다. 그래서 서로 화합하고 하나가 될 때 가정도 화목하고 교회도 화평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어려운 시대에 서로 이해해 주고 격려해주고 혹 오해를 받으면 겸손하게 해명해 줌으로 사탄이 우리 사이에 비집고 들어올 틈을 주지 말고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는 화평한 공동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