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당 김은호 선생이 이왕직에서 설립한 서화미술회에 들어갔을 때는 일곱 분의 선생님이 있었다.
서과書科에 청운 강진희菁雲 姜璡熙、우향 又香 정대유丁大有、
화과畵科에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晉、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위사渭士 강필주姜弼周、관재貫齋 이도영李道榮、소호小湖 김응원金應元선생 등이었다.
소호(小湖) 김응원(金應元. 1855~1921년)
김응원은 1911년 근대적 미술학원인 서화미술관(書畵美術館) 강습소가 개설되면서 안중식(安中植, 1861~1919) · 조석진(趙錫晉, 1853~1920) 과 함께 지도 교사진으로 묵란법(墨蘭法)을 가르쳤다. 또한 서화협회(書畵協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측근에서 대필화가로도 활동하였으며, 조선 말기를 풍미했던 흥선대원군의 석파란법을 직접 계승한 묵란 화가이기도 도 한다.
이 작품은 바위 사이에 피어난 난초를 그린 것으로 김응원은 이와 같은 석란도를 즐겨 그렸다. 난잎의 유연한 운동감과 파격적인 꺽임, 먹을 덧칠하여 변화를 주는 방식과 먹물이 번지게 하는 기법 등을 이용한 괴석의 표현에서 김응원 묵란도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석란도(石蘭圖)> _ 소호(小湖) 김응원(金應元. 1855~1921년)
석란도(石蘭圖)> _ 소호(小湖) 김응원(金應元. 1855~1921년)
석란도(石蘭圖)> _ 소호(小湖) 김응원(金應元. 1855~1921년)
관재 (貫齋) 이도영(李道榮) (1884~1931)
일제강점기 「고색찬연」·「나려기완」·「석굴암 관음상」 등을 그린 서화가. 시사만화가·삽화가·교육자.
관재(貫齋), 면소(芇巢), 벽허자(碧虛子), 중일(仲一)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중일(仲一), 호는 관재(貫齋) · 면소(芇巢) · 벽허자(碧虛子)이며 이도영(李鞱穎)이라고도 불린다. 안중식에게서 서화를 배웠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84년 서울 연건동에서 출생하였다. 1898년 10월 전환국(典圜局)에 입학하여 분석학을 배웠고, 1901년 11월 전환국 과정을 마친 뒤 안중식의 문하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905년 11월 국민교육회의 편찬업무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1906년 대한자강회 간사원과 보성관 편집사무원, 1907년 대한협회 교육부원과 공업전습소 기수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이도영은 다양한 단체 활동을 통해 계몽운동가들과 교유하면서 시사만화, 교과서의 삽화, 신소설 삽화 등 인쇄 및 출판과 관련된 미술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06년 국민교육회에서 발행한 『초등소학(初等小學)』을 비롯하여, 보성관의 『초등소학(初等小學)』, 『몽학필독(蒙學必讀)』 등의 교과서 삽화를 제작하였다. 1909년 6월 『대한민보(大韓民報)』가 창간되자 1910년 8월 폐간 때까지 1면의 시사만화를 그렸다. 1908년 유원표의 소설 『몽견제갈량(夢見諸葛亮)』을 시작으로 이해조의 『홍도화(紅桃花)』(1908), 최병헌의 『성산명경(聖山明鏡)』(1909), 쥘 베른(Jules Verne, 1828~1905)의 『십오소호걸(十五小豪傑)』(1912) 등의 신소설 · 번안소설에 삽화와 표지화를 그렸다.
또 1906년부터 휘문의숙과 보성중학교 도화교사로 10년 이상 교직생활을 하였고 1915년에는 근대적인 미술교과서인 『연필화임본(鉛筆畵臨本)』과 『모필화임본(毛筆畵臨本)』을 저술하였다. 1911년 3월 서화미술회가 설립되자 안중식, 조석진, 김응원, 정대유 등과 함께 교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18년 6월 서화협회(書畵協會)가 창설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23년에는 고희동과 함께 서화협회 부설 서화학원의 개설을 추진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1921년에는 서화협회 재정비의 일환으로 서화협회 전람회 개설, 『서화협회보』 발간을 주도하였고, 1923년과 1928년에는 간사장을 역임하면서 서화협회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1922년 5월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가 창설되자 1회부터 6회까지 동양화부 심사원을 역임하였다. 1929년 고금서화전람회(古今書畵展覽會), 1930년 고서화진장품전람회(古書畵珍藏品展覽會), 1931년 조선명화전람회(朝鮮名畵展覽會) 등 고서화전람회의 운영에 관여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병을 얻어 곤궁한 생활을 하였고 결국 같은 해 1931년 9월 21일 원남동 자택에서 5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도영은 산수 · 인물 · 영모(翎毛) · 기명절지(器皿折枝) 등 다양한 화목(畵目)에 걸쳐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화조화와 기명절지화에서 당대의 호평을 받았고 예서와 행서에도 뛰어났다. 안중식의 화풍을 이어받아 온건하면서도 유려한 필력을 발휘하였으며, 「고색찬연(古色燦然)」(1922), 「나려기완(羅麗器玩)」(1930), 「석굴수서(石窟授書)」(1922), 「석굴암 관음상」(1929) 등 조선의 기물과 역사를 주제로 한 그림을 제작하여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도영은 전통회화 뿐만 시사만평과 미술교과서 제작, 소설삽화 등 인쇄 · 출판과 관련된 미술활동에도 참여하여 서화가로서의 지평을 확장하였고, 서양의 역사화와 정물화, 도안화, 만평 등 새로운 장르를 수용하였다. 또, 서화미술회, 서화협회 전람회, 조선명화전람회 등 근대적인 미술교육 제도와 전람회 제도의 도입과 운영에 있어서도 선구적인 역할을 한 미술가로 평가된다.
상훈과 추모
1934년 11월 16일 서화협회 주최로 1주기 추도회가 열렸으며, 이듬해 10월 16일에는 휘문고에서 열린 제11회 서화협회전에서 2주기 추모 모임과 유작전이 열렸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