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7 주일설교
보는 자가 가지는 자이다
히브리서 11:1~3
여러분, 잠깐만 눈을 감아 보세요. 눈을 감으니까 답답하시죠. 모든 장애인들이 다 불편하지만 시각 장애인들은 특히 답답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몸이 천 냥이면 몸은 구백 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먹어보자, 들어보자, 느껴보자, 가 보자, 두고 보자 등 여러 곳에 본다는 말을 붙입니다. 이제 눈을 떠 보세요. 잠깐만 눈을 감아서 다행이지 평생 못 보고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그런데 보는 것은 시력도 좋아야겠지만 시대를 읽는 안목은 더욱 중요합니다. 미래의 세상은 어떻게 돌아갈지 읽는 눈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 안목이 있는 사람은 지도자가 됩니다.
그런데, 현시대를 파악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안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잠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살펴보던 히브리서는 11장에 와서 큰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이제까지는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해 왔는데 이제는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설명을 시작합니다. 많은 신실한 신자들이 히브리서 11장 1~3절을 외우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번 주간에는 매일 한 번씩 외워 보시기 바랍니다.
1~3절의 서론적 선포 후에는 4절부터 40절까지는 믿음으로 인정받은 사람들 16명을 열거합니다. 그리고 12장에 가서 이 사람들 외에도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1~3절에는 두 번씩 반복해서 사용하는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이라는 말이고 둘째는 본다는 단어입니다(1절과 3절). 증거라는 단어도 두 번 나오지만, 헬라어로 보면 다른 단어입니다. 1절의 증거는 확신, 확증이라는 뜻이고 2절에서 증거를 얻었다는 말은 증명되었다, 인정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믿음이라는 말과 본다는 말을 연결하면 이 말씀의 핵심 주제가 나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은 보는 것이 다릅니다. 보는 것이 다르면 판단도 다르고 결정도 다르고 행동도 다릅니다. 그리고 미래가 달라집니다.
좀 전에 제가 시대를 파악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안목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돈에 비유해서 이야기하면 여러분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정치와 경제가 돌아가는 것을 보는 안목을 가진 사람은 어느 회사의 주식에 투자해야 하는지 보는 눈이 있습니다. 혹은 어떤 사업을 시작해야 성공하는지도 내다봅니다. 이처럼 시대를 읽고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은 주식도 잘 되고 사업도 성공합니다. 그래서 보는 자가 가지는 자입니다.
그런데, 미래를 예측하는 안목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믿음의 눈입니다. 믿음의 눈은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믿음의 눈이 있으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말씀으로 들어가 봅시다.
첫째,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의 확증입니다.
제가 부산에 가려면 동탄역에서 SRT 열차를 탑니다. 그리고 부산에 있는 사람에게 전화해서 몇 시 몇 분에 도착한다고 전화합니다. 기차에서 책을 보다가 졸리면 의자를 젖히고 편히 잠을 잡니다. 그러다 보면 기차는 대전과 대구를 지나서 부산에 도착합니다.
제가 기차를 탔을 때 한 번도 기차가 다른 곳으로 갈까 봐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시간에 도착하지 못할까 봐 걱정해본 적도 없습니다. 기차를 탈 때 부산에 분명히 도착한다는 믿음이 없으면 기차를 탈 수 없을 것입니다.
한번은 SRT 열차의 특실에 시골 할머니가 탔습니다. 차장이 검표를 해보니 할머니의 표는 일반실 표입니다. 그래서 여기 타면 안 된다고 말해도 비어 있는 자리인데 좀 앉아가면 어떠냐고 막무가내였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신사가 차장을 불러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할머니 귀에 뭐라고 한마디를 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얼른 일어나서 일반실로 가 버렸습니다. 차장이 궁금해서 뭐라고 했는지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답니다.
“할머니, 부산 가시죠? 여기는 광주 가는 사람들만 타는 곳입니다.”
우리가 부산이나 광주로 가는 기차를 타고 혹시 이 기차가 평양으로 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절대로 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을 절대로 의심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한번 영접한 예수님이 언제나 나와 계시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여인이 젖먹이는 잊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나는 너희를 잊어버리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자기 주머니에 신용카드가 있고 은행 잔고(殘高)가 넉넉한 사람은 배가 고파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옷이 초라해도 풀이 죽지 않습니다. 누가 무시하면 오히려 그 사람을 비웃어 버립니다. 하물며 자기 속에 전능하신 하나님과 사랑의 예수님이 계시는 사람은 절대로 실패한 인생이 될 수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선진들은 믿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사람은 무슨 힘으로 살아갈까요? 이렇게 묻으면 여러 가지 답을 할 수 있지만 저는 “인정받는 힘으로” 산다고 생각합니다. 인정을 받지 못하면 돈이 있고 밥이 있고 옷이 있고 건강이 있고 집이 있어도 사람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어린 자녀는 부모의 인정이 필요합니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의 인정이 필요합니다. 또 친구들의 인정이 필요합니다. 친구들의 인정을 받지 못해서 따돌림을 당하면 살기 힘듭니다. 대학을 졸업하면 입사하고 싶은 회사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취직을 하면 상사와 동료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장사를 하면 고객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카페를 운영하면 커피가 맛있고 분위기가 좋다는 인정을 받아야 성공하죠. 스마트폰을 만들면 전 세계인의 인정을 받아야 팔립니다. 유튜브 영상을 올리면 인정을 받아야 조회 수가 올라갑니다. 요즘은 농사를 지어도 농산물에 자기 이름을 붙여서 파는데 역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정해주는 것에 매우 야박합니다. 맛있다고 다니던 식당도 약간 맛이 변하면 발길을 끊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기도 어렵고 그 인정을 지속해서 받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인정을 받고 인기가 올라가면 오히려 점점 불안해집니다. 언제 무슨 일로 그 인기가 추락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일명 스타들은 금지된 약물을 탐하기도 합니다. 떨어지는 인기를 감당하지 못해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주변의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으로는 켤코 만족함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정입니다. 왜냐하면 언젠가 내 인생은 끝나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인정받은 선배들의 모습을 보면 선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어두운 밤에 가로등도 없는 시골길에서 운전을 안전하게 하는 방법은 속된 말로 호구를 하나 잡으면 됩니다. 그 동네에 익숙한 노련한 운전자 한 명을 만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면 매우 안전합니다.
인생길을 안전하게 사는 방법, 천국까지 가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방법은 이미 성공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을 보고 따라가면 됩니다. 그 사람이 한 그대로 하면 됩니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2절의 말씀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옛날 사람들도 믿음으로 인정받았습니다.(쉬운성경)”
“선조들은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으로 증언되었습니다(새번역)”
이처럼 믿음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방법이며,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이며,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안목입니다.
셋째, 믿음으로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물질계는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서양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탈레스(Θαλής)는 만물이 물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 후에 탈레스의 제자 아낙시만드로스(Ἀναξίμανδρος)와 아리스토텔레스(Ἀριστοτέλης)는 만물은 물/불/흙/공기의 4원소에서 나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후에 데모크리토스(Δημόκριτος)는 모든 물질은 더 이상 쪼개어질 수 없는 원자에서 나왔다고 하는 고대 원자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데모크리토스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만일 제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을 만날 수 있다면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탈레스 선생님, 물은 어디에서 나왔나요? 아리스토텔레스 선생님, 물/불/흙/공기 4원소는 어디에서 나왔나요? 데모크리토스 선생님, 원자는 어디에서 나왔나요? 그분들은 답을 할 수 없겠죠.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누가 지은 것이 아니라 영원무궁토록 자존하십니다. 그러면 누군가 제게 물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서 나왔나요? 하나님이 세계를 말씀으로 지을 때에 누가 봤나요? 하나님이 원래부터 스스로 계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그것을 아는 방법은 딱 한 가지입니다. 바로 믿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 믿음을 선물로 받을 분들입니다. 다만 성경이 말씀하는 것, 제가 여러분에게 부탁드리는 것은 믿음을 소중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생명보다 더 귀한 선물인데 그 믿음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 돈과 건강과 외모와 명예와 실력과 기타 모든 것들은 다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보이는 것들은 보이는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모두는 보이지 않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서 지어졌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3절에서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알 수 있다.”
이제 여러분은 무엇을 보십니까?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모든 물질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이 보입니까? 그것이 보이지 않는 자는 하나님과 말씀과 천국과 믿음을 하찮은 것으로 여겨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보는 자는 가지는 자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는 사람은 그것을 취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이 없는 에게 목사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면 ‘아멘’하지 않고 불편하게 여깁니다. 목사님은 내 사정을 뻔히 알면서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의 눈이 없는 분에게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면 싫어합니다. 그런 분에게 목사가 헌신하고 헌금하라고 하면 목사에게 화를 냅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는 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목사를 하나님 대하듯이 귀중히 여깁니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보고도 절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설교자를 좋아하고 고마워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이 목사를 귀히 여기는 것은 여러분의 믿음의 표현입니다.
맺는 말
여러분은 무엇을 보십니까? 믿음의 눈, 영적인 안목은 없으면서 세상과 물질만 보는 것은 아닌지요?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
그리고 또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 3:17~18)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입니다. 또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세상만 보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