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77) 명종 10
- 봉사십조(封事十條)와 명종의 죽음.
명종으로부터 거사의 정당성을 인정받은 최충헌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번 거사의 정당성을 대내외에 보다 확고히 인식시키기 위해 “봉사십조" 를 명종에게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조는 왕에게 정전(正殿: 조회를 하던 궁전. 즉 延慶宮을 말함)으로 환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1171년(명종 1)에 연경궁(延慶宮)이 불에 타자 수창궁(壽昌宮)으로 옮겼는데, 연경궁이 복구된 뒤에도 복구가 불길하다는 설을 믿고 환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삼소궁(三蘇宮)을 경영하면서 국력만 소모하고 있었으므로, 최충헌의 이러한 요구는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제2조는 필요 이상의 관원, 즉 용관(冗官)을 도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무신정권 성립 후 무신들의 압력으로 양부(兩府: 宰樞) 이하 여러 관직의 인원을 늘리어 인사행정의 난맥상을 드러냈었는데 이를 시정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말로는 작은 정부.
제3조는 토지의 점유를 시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권세를 잡은 무신들이 대토지를 점유했는데, 주(州)에서 군(郡)에 걸치고 산천(山川)으로 경계를 삼을 정도였습니다. 이에 토지제도가 붕괴되고 민생고와 국가의 재정난이 심각하였습니다.
제4조는 조부(租賦)를 공평히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치기강이 문란했던 무신정권 초기에 중앙권력을 배경으로 한 지방관의 탐학과 횡포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사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먼저 세금과 부역을 공평히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제5조는 왕실에 공상(供上)을 금지하라는 것이다. 당시 지방을 시찰하는 사신들이 왕에게 바친다는 구실로 재물을 수탈하여 역(驛: 또는 驛傳)으로 운반해 사복을 채우는 자가 많아 폐단이 컸었습니다.
제6조는 승려를 단속하고, 왕실의 고리대업을 금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승려들이 궁중을 출입해 왕을 현혹시키거나, 무신정권에 도전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최충헌으로서 그를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였겠지요. 또 왕실을 비롯해 귀족, 사원들이 민간을 대상으로 고리대업을 행하여 폐단이 컸던 것입니다.
제7조는 청렴한 주·군(州郡)의 관리를 등용하라는 것이엇습니다. 탐학과 횡포를 일삼던 지방관 아래의 향리들 또한 지방관을 믿고 횡포를 자행해 백성들이 겪는 고통은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렴한 향리를 등용하고 썩어빠진 향리를 물리치라는 청은 너무나 당연하였습니다.
제8조는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사치를 금하고 검소, 절약을 숭상케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거대한 저택을 경영하고, 화려한 복장에 귀중한 보배를 장식하던 귀족들의 사치풍조에 쐐기를 박은 것은 시의에 적합하다 하겠습니다.
제9조는 비보사찰(裨補寺刹: 나라의 운명을 돕는다는 설에 의해 세워진 사찰) 이외의 사찰을 없애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 왕실·귀족들은 원당(願堂)이라 하여 사원을 남설하였고, 승려는 승려대로 사원을 남설하여 폐단이 컸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최충헌에게 불교를 억압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이 엿보입니다.
제10조는 관리들이 아부함은 물론, 언론을 맡은 성대(省臺)의 관리까지도 아부를 한다고 지적하고, 인물을 가리어 등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상의 내용은 시의에 적절한 것이었고 폐정을 시정하려는 충정이 담겨 있는 것이었습니다.
최충헌은 왕의 측근을 지키는 50여명을 추방하고 나서 독재정치의 발판을 마련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더니 명종이 봉사십조를 지키지 않는다는 구실을 내세워, 1197년 66세나 된 당시로서는 고령에 고령의 명종을 협박하여 단신으로 향성문을 나서게 하여 창락궁에 감금해버리고 태자 도(徒)는 강화도로 추방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명종의 아우 평량공(平凉公) 민(旼)을 새로운 왕(신종)으로 세우고 그의 아들 연(淵)을 태자로 삼습니다.
창락궁에 갇힌 명종은 1202년(신종5) 9월에 이질에 걸렸는데 신종이 의원과 약을 보내려 하였으나 본인은 28년간이나 왕위에 있었고 나이가 72세 이니 어찌 더 살기를 바라겠느냐고 하며 거절하고 결국 11월 무오일에 운명하게 됩니다.
고려왕조실록(78) 신종 1
- 신종(神宗)의 등극
명종에게는 무신들을 일거에 제거하고 왕권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유흥과 일신의 안일에 사로 잡혀서, 자신의 친형인 의종의 허리를 꺾어 참혹하게 죽인 이의민에게 오히려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어주고 그의 눈치나 보면서 살다가 결국은 또 다른 무력에 의해 비참한 생을 살다가 마감하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고 하겠습니다.
명종을 쫓아낸 최충수 일당은 누구를 왕으로 내세울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서로 엇갈렸는데, 동생 최충수는 “사공(司空) 왕진(王縝)은 경전과 사서에 널리 통달하고 총명하며 도량이 있으니, 그를 왕으로 옹립한다면 국가의 중흥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사촌인 진(縝)을 왕을 시키자고 하였는데, 이는 최충수가 왕진의 여종을 총애한 나머지 왕진을 왕으로 세우고자 한데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최충헌은, “평량공(平凉公) 왕민(王旼)은 임금의 친동생이며 지략이 깊고 도량이 넓어서 제왕의 국량을 가지고 있다. 또 그의 아들 왕연(王淵)도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태자로 삼을 만하다.”고 민(旼)을 왕을 시키자고 주장했기 때문에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박진재가 “왕진과 왕민은 둘 다 임금이 될 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금나라에서 왕진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하므로, 만약 왕진을 옹립한다면 저들이 반드시 왕위를 찬탈하였다고 생각할 것이니 왕민을 옹립하는 것이 낫습니다. 옛날 의종의 경우처럼 동생으로 뒤를 잇게 한 것이라고 보고한다면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하여 왕민을 옹립하기로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한마디로 자기들끼리 마음대로 왕을 정한 것이지요.
그리하여 1197년 9월 명종의 동모제(同母弟)인 민(旼)을 왕으로 내세우니 그가 바로 고려 20대왕인 신종입니다. 이름은 왕탁(王晫)으로 원래 이름은 왕민(王旼)이었으며 자는 지화(至華)였습니다. 신종은 1197년 10월에 이름을 탁으로 고쳤는데, 이는 금나라 임금의 이름과 같아 탁으로 개명을 한 것인데, 이 때문에 왕의 이름을 피하기 위하여 탁자 성을 가진 고려의 백성들은 외가의 성을 따르게 되었고, 본가와 외가의 성이 같을 경우에는 친조모나 외조모의 성을 따르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성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인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명종의 친동생인 신종은 인종 22년 갑자년 7월 경신에 태어났고, 장성한 후 평량공(平凉公)으로 책봉되었다가 명종 27년 9월 계해일에 54세의 나이로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이 군왕이지 신하들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의 비위나 맞추어 주어야하는 왕 신종은 6년4개월여의 재위 기간 동안 힘과 권위를 잃은 왕의 비애를 통감하며 한숨으로 오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눈 한번 꿈쩍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왕을 폐위시킬 수 있었던 최충헌 일파는 더 이상 신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궁궐을 손바닥 위의 공깃돌처럼 임금을 마음대로 움직였습니다. 최충헌 일파가 무언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억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면 그뿐인 왕,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그들이 쥐고 있기에 앉으나 서나 가시 방석이었고, 행여 그들의 뜻에 거슬려 해코지나 당하지 않을까 가슴을 조이는 나날이었습니다.
상황이 그러하니 왕권의 회복을 위한 노력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왕실의 권위와 성스러움을 내팽개친 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데 급급할 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