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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하는 감리교회의 제6,7대 류형기 감독, 호헌파 김응태 감독
1950년 6월 25일은 주일이었다. 만물이 고요하게 잠든 이 날 새벽에 북한 공산당은 한반도 적화통일의 목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그 후 휴전이 되기까지 3년 동안 사회와 교회가 받은 피해는 가히 엄청났다. 한국감리교회는 전쟁으로 인해 김유순 감독과 총리원 임원들을 상실했기에 1950년 7월 10일에 피난지 부산에서 임시 이사회를 소집하고 류형기 박사를 총리원장에 추대하고 응급수습책을 세웠다. 1951년 11월 1일에 부산시 장로교 중앙예배당에서 전쟁으로 무너진 총회와 연회를 조직하기 위하여 기독교대한감리회 특별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특별총회는 무어 감독이 사회를 맡았다.
아더 제임스 무어(Arthur James Moore) 감독은 1888년 12월 26일에 조지아(Georgia) 주 웨이크로스(Waycross)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아일랜드 사람이었다. 그의 증조부는 북캐롤라이나 출신이었지만 할아버지는 조지아로 이주했고 1862년에 개인스 밀(Gains' Mill)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아더 무어는 21세 때 놀라운 회심을 체험하고 즉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일했다. 1909년 남조지아연회에 허입하여 목사로 봉직하였다. 1930년에 남 감리회에서 감독으로 피선되어 활동하다가 한국 감리회 총회에도 참석하였다. 아더 무어 감독은 1974년 7월 30일에 별세하였다.
전쟁 중의 감리교회와 류형기 감독
아더 무어 감독이 사회로 시작된 특별총회에서는 임시 조치규정과 서부연회장 이진구 목사가 제안한 서부연회 대표 연회 참가 청원의 건을 가결하고 폐회하였다. 이어 오후 3시에는 기독교 대한감리회 중부․동부․서부연합연회가 류형기 목사의 사회로 열렸다. 이 날 중부연회장에는 류형기 목사, 동부연회장에는 조신일 목사, 서부연회장에는 이진구 목사가 연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1월 2일에는 기독교 대한감리회 제6회 총회가 무어 감독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이 날 총회에서 2차 투표한 끝에 류형기 목사가 김유순 감독 후임으로 제6대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전도국 총무엔 조신일 목사가, 교육국 총무엔 김광우 목사가 피선되어 피난지 부산에서 새 총리원 행정기구를 발족시켰다.
류형기(柳瀅基) 감독은 1897년 11월 17일 평안북도 영변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 영변 숭덕학교에 입학하고 1914년에 평양 숭실중학교에 진학하였다가 1916년 졸업하였다. 1917년 숭실대학에 입학한 후 1학년만 마치고 1918년 3월 일본 아오야마(靑山) 학원 고등부에서 공부하고 웰치 감독의 주선으로 1923년 오하이오 주 웨슬리안 대학 문학부를 졸업, 1926년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과 1927년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27년 8월 25일에 가평 출신 신형숙(신 Julia)과 결혼하고 귀국하였다. 신형숙은 1898년 12월 23일 경기도 가평에서 출생하였으며 1927년 김활란보다 이화하교를 1년 먼저 졸업하고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3ㆍ1 운동에 연루되어 1년 징역에 3년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출감한 독립투사였다.
1927년 겨울에 귀국한 류형기 목사는 곧바로 총리원 교육국 청년부 간사로 일하였고 1933년 교육국 총무로 일했다. 구가 교육국 총무로 일할 때 교단 커리큘럼과 교재 준비 및 제공, 프로그램 작성 등 다방면에 걸친 종교교육사업을 전개하였다. 1934년 선교 50주년을 기념하여 「단권 성경주석」을 출판하였다. 류형기 목사는 교육국에서 14년 동안 열과 성을 다하여 일하여 젊음을 다 보냈다. 그러나 1941년 10월 정춘수 감독이 혁신 교단을 만들고 총리원 기구를 개편할 때 이 혁신안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목사직 파면을 당한 후 동대문 부인병원과 회계과장으로 일했다.
해방 후 류형기 목사는 미군정청으로부터 국내 가장 큰 인쇄소인 조선인쇄주식회자의 관리책임을 맡기로 하고 운영하면서 출판 사업에 전념했다. 교육국에 14년 동안 있으면서 번역 또는 저술하였던 도서를 재판, 삼판 출판하여 해방 후 기독교 서적의 성황을 이루어 놓았다. 이때 홍현설, 송정률, 안병무, 마경일 등의 젊은 목사들과 한신영의 협조를 얻어 「한영사전」, 「영한사전」, 「철학사전」등을 출판하였다.
류형기 목사는 이 출판 사업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미국 유학 중인 젊은 목사들을 도왔다. 감리교 신학교 경비와 연회 모일 때 비용 등 자신보다 남을 위하여 사용했다. 1948년 제9대 감리교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1953년까지 임기를 다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김유순 감독의 납북으로 인해 공석 중인 감독을 선임하여 전란의 감리교회를 수습하여야 했다. 류형기 목사는 1950년 11월에 기독교 대한감리회 총리원 운영위원장을 맡았다. 이듬해 1951년 11월에 부산에서 피난 중에 개최된 특별총회에서 제6대 감독으로 당선되었다. 그런데 류형기 감독은 이때의 목사직 파면으로 인해 감독에 당선되었기 때문에 감독자격에 논란이 생겨 문제가 제기되었다. 장정 105단에는 감독 자격이 ‘연회에서 정회원으로 6년 이상 계속 시무한 이’로 명시된 조항 때문이다. 양측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또 한 차례의 위기가 찾아왔지만 무어 감독이 중재안을 내면서 일단락되었다. 무어 감독의 중재안은 다음과 같다.
“한국감리교회가 겪어야 했던 어려운 시기가 있어 ‘6년 이상 계속 시무하는’ 규정은 문자적으로 저용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따라서 이 조항은 이번 총회 기간만 적용하지 않기로 법적 기록을 남기고 넘어갑시다. 이번 총회에서만 이 조항을 보류한다는 임시조치법을 제정합시다.”
장정 상으로는 류형기 목사가 감독 자격에 맞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는 전시 상황이고 모든 것이 비상시국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예외 조항으로 두는 데 무리가 없었다. 이에 회원들이 모두 중재안을 받아들여 류형기 감독은 무난하게 당선되었다.
1951년 감독이 되고 피난민 구제사업, 교회복구사업에 전력투구하였고 감독추천기금으로 400여 교회를 재건하였다. 그는 재임 7년 동안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감리교회를 재건하여 한국감리교회 중흥의 시기를 마련해 놓았다. 또한 그는 많은 책을 저술하고 출판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의 삶은 책으로 일관된 삶이었다.
1954년 3월 16일에 중부․동부 연합연회가 모여 총회를 준비하였다. 제7회 총회는 3월 18일에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되었으며 해방 후 제3회 총회였다. 이 총회에서는 감독의 임기를 2년에서 4년으로 하자는 제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류형기 감독의 임기가 끝났기에 이 총회에서는 새로운 감독을 선출해야 했다. 투표 결과 류형기 감독이 총 투표수 75표 중 62표를 얻어 대다수의 지원을 받아 당선되어 4년 임기의 감독으로 재선되었다. 이 결과에 대해서 법을 지키자는 호헌파(護憲派) 목사와 평신도 대표들이 류 감독의 지난 1951년 총회에서 자격문제를 거론하여 ‘이번 총회만 보류하자고’했던 사항에 위배된다고 자격문제를 또 들고 나왔다. 그러자 류 감독은 사의를 표명하였고 무어 감독이 유권해석을 내려 류형기 감독의 재선을 정당화하였다. 이에 류형기 감독은 김활란 박사, 황치헌 목사 등의 특별교섭위원의 감독 번의(翻意)를 받아들여 사회석에 오르자 총회원들의 기립 박수로 지지를 표명했고 류형기 목사는 기독교 대한감리회 제7대 감독이 되었다.
또 다시 분열되는 감리교회 호헌파 김응태 감독
그러나 이번 조처에 불만을 품고 총회장을 퇴장한 엄재희, 정등운, 박설봉, 조화철 목사 등은 1954년 중앙교회에서 ‘기독교대한감리회 수습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법을 지켜야 한다는 취지의 취지로 세를 규합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생긴 호헌이지만 속으로는 류형기 감독의 이북 출신 목회자 우대정책에 대한 불만이었다. 결국 호헌파는 독자적인 총회와 연회를 조직할 것을 밝혔다. 1955년 3월 1일 천안에서 전국신도대회를 열고 비상조치법을 채택하였으며 이 법에 의거하여 3월 3일에 총회와 연회를 소집하고 김응태 목사를 감독에 추대하고 다음과 같이 총회 부서를 조직하였다. 신학교장에 신사훈, 전도국 총무에 엄재희, 교육국 총무에 조화철, 사회국 총무에 이강훈, 이사에 한기모, 신광현, 허숙일, 허영준이다. 이에 김응태 감독은 취임사에서 한 조직 안에서 불편한 마음으로 싸우느니 서로 나누어지는 것이 오히려 불행을 적게 하는 것이라고 믿고 부득이 새로이 총회를 조직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호헌 총회의 영속성을 명시했다. 별도의 총리원과 신학교를 서울중앙교회에 설치했다. 이로써 호헌파 감리교회가 생겨나 감리교회는 분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수적으로 보면 호헌파로 나간 교회는 30곳, 목회자는 40명 정도, 전체 감리교회 10% 밖에 안 되었지만 그 파급 효과는 매우 컸다. 해방 후 재건과 복흥으로 분열되었던 감리교회가 1949년 어렵게 통합된 지 5년 만에 일어나 두 번째 분열이다.
김응태(金應泰) 감독은 1890년에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하였다. 장지학교와 보흥학교에서 공부했다. 이후 일본에 건너가 요코하마의 기독교청년회관 내 삼류(三留) 의숙중학교와 국민중학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수원 삼일학교와 논산 진광학교의 교사로 재직했다. 1919년 교역자 견습을 받고 1921년 10월 2일에 집사목사 안수, 1925년 6월 21일에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9년 충북 음성교회, 1920년 진천교회, 1922년 만주길림교회, 1923년 하얼빈교회를 담임하였다. 1925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동대문교회를 1926년부터 1931년까지 담임했다. 1931년에는 일본에 파송되어 도쿄에서 목회하다가 1934년 공주에서 순회목회, 1937년에 대전에서 목회했다. 1938년부터 1941년까지 인천 내리교회, 1941년에 인천 창영교회를 담임했다. 1941년 조직된 기독교조선감리교단에서 경기남교구장을 맡았고 1943년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에서는 전도국장, 해방 직전 조직된 조선기독교단에서는 부통리자로 임명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인천창영, 화도, 숭의, 주안교회를 담임했다. 1954년 3월에 호헌파가 형성되고 1955년 별도로 조직된 호헌총회에서 감독으로 추대되었다. 1959년 은퇴하여 인천 자택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71년 5월 2일 별세하여 율목교회 김용욱 목사의 주례로 장례식을 갖고 경기도 화성군 장안면 수촌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남부연회 조직
1954년 제7회 총회는 충남, 전남, 전북, 경남, 경북, 부산, 제주 지역을 관할할 연회의 조직과 농촌 교역자 양성을 위해서 지방 교역자의 양성을 목적으로 대전에 신학전수과를 설치할 것을 결의하였다. 감리교대전신학교는 그해 바로 5월 하순에 남자 46명, 여자 16명의 학생을 모집하여 대전제일교회에서 개교하였다. 남부연회는 그 이듬해 1955년 3월 24일 대전제일교회에서 유형기 감독의 사회로 개최되어 제1회 남부연회의 첫 발 내디뎠다. 남부연회가 이렇게 조직되기까지는 한국전쟁 이후에 피난 내려온 교역자들이 노력이 있었다. 이들이 영호남 지역에 교회를 개척함으로써 이 지역에서의 감리교회의 성장이 급속도로 이루어진 것이다. 1950년 제2회 연합연회에서 마산중앙교회 담임목사 김창호를 감리사로 영남지방이, 1951년에는 호남지방이, 1953년에 대구․부산․마산․전라․제주선교지방이 속속 조직되었고 이에 1951년 부산특별총회에서 남부연회 조직을 결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전시 상황이었기에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마침내 남부연회가 1955년 3월 24일에 대전제일교회에서 개최되어 그동안의 물밑 작업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조직 당시 지방은 호서, 충서, 천안, 마산, 부산, 논산, 대전지방으로 모두 7개 지방으로 되었다. 그러나 남부연회가 출발하던 그 해 유형기 감독의 재선에 불만을 품고 남부연회 지역인 천안에서 호헌 측 연회를 개최하여 천안 호헌파 목회자들이 1959년 다시 합치기 전까지 두 개의 연회를 조직되어 있었다.
류형기 감독은 1958년 10월에 감독 임기를 마치고 은퇴하였다. 이후에 미국으로 건너가 「성경사전」, 「성경주해」(전 4권)를 집필하였고 별세할 때까지 ‘양서를 헐값에’라는 표어 밑에 교회 서적을 번역 출판하는데 총력을 쏟다가 그 붓을 잡은 채 1989년 6월 2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별세했다.
유형기 감독은 재임시절 제11회 중부연회(1951년 11월 4일~4일, 부산중앙장로교회 개최), 제12회 중부연회 (1953년 3월 18일~22일, 대전제일교회 개최), 제13회 중부연회 (1954년 3월 16일~21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14회 중부연회(1955년 3월 21일~25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15회 중부연회(1956년 3월 21일~25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16회 중부연회(1957년 3월 27일~4월 1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17회 중부연회(1958년 3월 19일~23일, 정동제일교회 개최)를 주재하였다.
그리고 제3회 동부연회(1951년 11월 1일~4일, 부산중앙장로교회), 제4회 동부연회(1953년 3월 18일~22일, 대전제일교회 개최), 제5회 동부연회(1954년 3월 16일~21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6회 동부연회(1955년 3월 14일~18일, 동대문교회 개최), 제7회 동부연회(1956년 3월 14일~18일, 동대문교회 개최), 제8회 동부연회(1957년 3월 27일~4월 1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9회 동부연회(1958년 3월 12일~16일, 동대문교회 개최)를 주재하였다.
또한 남부연회는 4회를 주재했는데 제1회(1955년 3월 24일, 대전제일교회 개최), 제2회(1956년 3월 7일, 대전제일교회 개최), 제3회(1957년 3월 27일~4월 1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4회(1958년 3월 5일, 대전 목산교회 개최)를 맡았다.
한국전쟁에 부산장로교회당에서 열린 중부 동부 서부 연합 연회(1951년)
마지막 서부연회를 개최한 후 회원들(1951년)
감리교 대전신학교(현재 목원대학교) 학생들(1954년 개교)
감리교 대전신학교 신학관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