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장된 참여
한국에서 자료를 통해 알게 된 쿠바의 선거 제도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사람들 대부분이 “거기 사회주의 국가 아니야? 독재인데 무슨 선거를 해?“ 하는 반응이었다. 많은 이가 사회주의를 정치적 억압, 독단적 지배와 유사한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피델 카스트로는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오랫동안 집권했고, 건강이 악화되자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그리고 공산당은 쿠바의 유일한 정당이다. 하지만 쿠바인들이 선거와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방식을 이해한다면, 쿠바가 정말로 독재 국가일까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244
시의원, 도의원, 국회의원은 직접 비밀 투표로
쿠바는 1902년 헌법 제정 이후 다당제 시스템에서 열네 차례의 선거를 했지만 선거권 제한이 많아서 극소수만 투표를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글을 읽고 쓸 줄 알며 250달러 이상의 재산을 보유한 21세 이상 남성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했다. 그 결과 157만여 인구의 9.6%에 불과한 15만648명만이 선거권을 가질 수 있었다. 게다가 부정부패가 만연해 선거 결과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었다.245
피델 카스트로는 집권 후 공개석상에서 국민들에게 투표를 제안했지만 국민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후 1972년 헌법 개정을 통해 선거권을 보장하는 장치가 마련되기는 했으나 한계가 많았고, 보편·평등·직접·비밀 선거가 시행된 것은 20년 후였다. 1992년에 비로소 국민이 시의원, 도의원, 국회의원을 직접 뽑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각 의회 의장과 부의장, 국가평의회 의장 등은 의원들이 뽑는다. 16세 이상으로 2년 이상 쿠바에 거주한 사람이면 선거권이 있다. 또한 16세 이상이면 시의회와 도의회 의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고, 18세 이상이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수 있다.245
복잡하지만 민주적인 선거 과정
쿠바의 선거는 시의원 선출부터 시작된다. 시의원 선출을 위해 하나의 선거구를 150명 내외의 후보자 추천 구역으로 분리한다. 주민들은 대개 일요일 저녁 시간에 모여 후보자를 추천하고 거수투표로 후보자를 선출한다. 각 선거구에서는 2~8명의 후보자를 낼 수 있고, 시선거위원회는 추천된 후보자들의 이력서와 사진을 받아 공공장소에 게시한다. 한국과 같은 선거 운동이나 선거 자금 사용은 금지되어 있다. 홍보 기간이 지나면 주민들은 한두 블록 내에 설치된 투표소에 방문해 다수의 후보자 중 한 명을 선택하는 비밀 투표를 한다.245-246
시의원이 선출되면 시후보자위원회가 시의회 의장과 부의장 후보 명단을 작성해 시의회에 제안하고 시의원들이 의장과 부의장을 선출한다. 선출된 시의원은 2년 6개월의 임기 동안 자신의 직업을 유지하면서 자원봉사의 형태로 시의원 역할을 한다. 2012년 선거에서 선출된 시의원은 총 1만 4,537명이다.246
*후보자의원회는 시후보자위원회, 도후보자위원회, 전국후보자위원회 3개 수준에서 구성된다. 후보자의원회는 대중 조직 대표들로 구성되는데, 후보자위원회에 참여하는 대중 조직에는 쿠바노동자총연맹CTC, 쿠바여성연맹FMC, 전국소농연합ANAP, 대학생연맹FEU, 중고등학생연맹FEEM, 혁명수호위원회CDR 등이 있다. 노동자, 농민, 여성, 학생, 지역을 중심으로 한 주민 조직의 대표들이 모여 국회의원 후보자를 추천하는 것이다.
시의회가 구성되고 나면 다음으로 도의회와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가 이어진다. 국회의원 예비후보 명단 작성 작업은 약 2개월에 걸쳐 이루어진다. 대중 조직 대표들로 구성된 시후보자위원회는 시의회 의원 중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한 후보자를 추천하는 데 주력한다. 도 단위 대중 조직으로 구성된 도후보자위원회는 이미 시의회 대의원으로 선출된 사람을 제외한 일반 시민 중 국회의원 후보자를 추천하는데, 최대 3배수의 추천이 가능하다. 전국후보자위원회는 시후보자위원회와 도후보자위원회가 추천한 후보를 취합해 지역, 피부, 나이, 학력, 직업 등을 고려해 후보를 추린다. 2012년 총선거 때는 5,457명이 추천되었는데 전국후보자위원회는 피추천자의 직장이나 거주지 등을 방문 조사하여 최종614명의 후보를 결정한다.246
최종 명단은 시의회로 보내는데, 각 시를 대표할 국회의원 후보를 시의회가 승인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만약 시의회가 거부하면 다른 예비후보가 다시 추천된다. 시의회가 후보자를 승인하면 ‘친밀화 시기’를 갖는다. 게시물만 보고는 후보자를 충분히 파악할 수 없고, 후보자를 충분히 알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문제 제기가 있어서 이를 개선하기 위해 약 한 달간의 친밀화 시기를 갖도록 했다. 특히 도의원과 국회의원 후보자는 그 지역 출신이 아닌 경우도 있고, 가까이 접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후보자와 주민 간의 의사소통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개인적 접촉은 불가능하고 유권자 집단과 후보 간 공식적 회합을 가즌 방식으로 진행한다. 선거일이 되면 유권자는 자기 지역에 추천된 한 명의 후보자에 대해 찬성이나 반대 의사를 표시할 수 있고, 후보자는 50% 이상의 찬성을 받으면 당선된다. 당선된 도의원과 국회의원의 임기는 5년이다.247
국회의원 선출이 완료되면 국회의 임원 선출과 국가평의회 평의원 선출을 위한 비밀 투표가 진행된다. 모든 선거 과정은 2월 24일까지 완료되어 새로운 임기를 시작하는데, 2월 24일은 호세 마르티를 중심으로 한 3차 독립 전쟁이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쿠바 선거 제도의 특징
첫째, 쿠바의 선거는 주민의 후보 추천으로 시작된다. 시의원 선출은 150명 내외의 작은 단위의 지역에서 주민들이 후보자를 추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유권자의 80% 이상이 참여한 가운데 지역 주민들끼리 후보자를 추천한다. 추천할 때는 그 사람을 추천하는 이유도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따라서 평소 지역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활동한 사람이 추천될 가능성이 높다. 추천받은 사람은 추천을 수용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결정한다. 이러한 방식의 장점은 일단 잘 아는 사람들끼리 추천하기 때문에 추천받은 사람에 대한 검증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웃 간의 관계가 매우 친밀하고, 선거구역이 주민 150명 내외의 소단위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지역 주민의 추천으로 시작되는 쿠바 선거야말로 다운업down-up 방식의 의사결정 모델이다.248-249
둘째, 접근성이 높다. 후보를 추천하기 위해 가야 하는 곳, 투표하기 위해 가는 하는 곳이 가깝다. 유권자들이 후보자에 대해 충분히 잘 알 수 있는 작은 단위에서 선거가 이루어지고, 투표소가 두 블록 이내에 설치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투표소는 매우 가깝다. 또한 이동이 어려운 유권자는 선거관리위원이 두 명의 학생과 함께 자택으로 방문해 투표를 돕는다. 투표가 일요일에 진행되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도 투표 참여가 부담되지 않는다. 물론 일요일에도 일하는 사람이 있지만 대부분이 쉬는 일요일에 투표를 진행함으로써 투표 참여율을 높이고 있다.249
셋째, 선거 운동이 없다. 후보자로 추천되어 선거위원회에 이력서와 사진을 제출하면, 선거위원회에서 이를 적절한 장소에 게시하는데, 이것이 선거 운동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이력서이기 때문에 후보자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겠다고 공약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오로지 그 후보자가 그동안 어떤 활동을 했고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판단의 근거가 된다. 알 수 없는 미래를 담보로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과거의 사실을 근거로 투표하는 것이다. 이런 특징 때문에 쿠바에서는 선거 자금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249-250
쿠바인과 선거 제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한국에서는 정치인이 되려면 상당한 돈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물었다. “선거할 때 필요한 것이라고는 투표용지뿐인데, 너희 나라에서는 그걸 국가가 주지 않고 후보자가 그 비용을 부담해야 해? 그게 그렇게 비싸?”250
넷째, 선거 관리는 투표권이 없는 학생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투표소마다 다섯 명의 자원봉사자가 파견되어 선거 과정을 관리하는데, 실제로는 더 많은 학생이 투표소에 나가 선거 과정을 지켜본다. 이동이 불편한 유권자는 선거관리위원이 집에 직접 방문해 투표에 참여하도록 하는데, 공정한 선거가 될 수 있도록 선거관리위원과 동행하는 것도 학생들의 역할이다.250
다섯째, 투표율이 매우 높다. 1976년 첫 국민투표 실시 이후 투표율이 95% 미만으로 떨어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선거에 관심이 많고 일요일에 가까운 투표소에 다녀오는 것이 큰 부담이 없기 때문일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투표 참여 결정이 자유임에도 95%가 넘는 투표일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쿠바의 높은 투표율이 놀라워서 혹시 투표가 의무는 아닌지, 정말로 비밀 투표이기는 한지 쿠바인들에게 물었다. 대부분 쿠바인의 대답은 “투표가 의무라고? 그건 권리야!”였다.250-251
한번은 좀 더 솔직한 대답도 들었다. “솔직히 귀찮고 하기 싫을 때도 있는데 안 할 수가 없어요. 투표를 안 하고 있으면 엄마가 투표할 때까지 계속 ‘투표했어? 투표했어?’ 물어봐요. 그리고 혁명수호위원회가 어느 집 누가 투표를 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 있으니까 집으로 찾아와 투표하라고 얘기하기도 하고요. 투표가 자기 선택이기는 하지만 쿠바에서는 안 하기가 어려워요. 하지만 선택은 자유예요.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요. 한번은 아무 표시 안 하고 투표함에 넣은 적도 있어요. 그러면 무효표가 되거든요.”251
다른 쿠바인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쿠바 사람들은 무언가에 참여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걸 좋아해. 그리고 주변 일에 관심이 많고, 자신만 투표하지 않으면 심리적 압박감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투표를 하고 안 하고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이야.”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쿠바에서는 선택 사항임에도 안 하기 어려운 게 있어. 바로 예방 접종과 투표야.”251
여섯째, 선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 모니터링도 이루어진다. 어느 날 대문에 붙은 모임 안내문을 보았다. 시간과 장소는 알겠는데 정확히 무엇을 위한 모임인지 가늠할 수가 없어서 이웃에게 물어봤더니 우리 지역 시의원과 대화를 나누는 모임이라고 했다. 공지된 날짜까지 기다렸다가 모임 장소로 갔다.251
그날 모임은 시의원이 그동안 지역 주민들이 토로한 불편 사항을 개선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으며,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주민들에게 보고하기 위한 자리였다. 또한 주민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런 모임은 한두 블록 단위의 소규모로 이루어진다. 많은 주민이 모일 수 있도록 퇴근 이후 저녁 시간대에 모임을 진행한다. 그날도 내가 살던 구역 모임이 끝나자 시의원은 다음 모임을 위해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런 모임은 1년에 두세 차례 열린다. 이렇다 보니 시의원들이 무언가 하지 않을 수 없다. 의정 활동을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251-252
쿠바의 의원은 주민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고 도와주는 사람이다. 활동에 대한 물질적 보상이 전혀 없이 직장 생활과 병행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주민과 지역 사회를 아끼는 사명감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 그런 사람을 지역 주민이 직접 추천하고 뽑는다. 우리 나라 대통령에 해당하는 국가평의회 의장을 국민이 직접 뽑을 수 없다는 점은 분명 쿠바 선거 제도의 한계이다. 하지만 그 외 선거 과정을 살펴보면 쿠바야말로 참여민주주의와 주민 참여의 모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252-253
93.8%의 노동자가 85, 301번 회의해 만든 사회보장법
쿠바에서 체류하며 쿠바가 아래로부터의 정책 제안을 수렴하기 위해 노력하는 국가임을 느낄 수 있었다. 쿠바에 도착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때에 제7차 공산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그 전당대회에서 ‘경제 및 사회 발전을 위한 계획 2030’이 발표되었는데, 이 계획은 다음의 과정을 거쳐 수립되었다.253-254
먼저 계획 초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주민, 시의회, 도의회, 국회의 단계로 의견을 수렴한다. 의견 수렴 과정에서 공통적인 내용을 담아 계획서 초안을 작성하고, 이를 32쪽짜리 타블로이드판으로 인쇄해 1세우세에 판매한다. 쿠바 주민들은 이 계획서 초안을 읽고 지역별, 직종별, 대중 조직별로 모여 토론한다. 이런 의견 수렴 과정이 6개월 가까이 이어지고, 매일 뉴스와 신문에 보도된다. 토론 과정에서 계획이 삭제되거나 수정·추가되기도 하며, 취합이 완료되면 최종 계획이 수립되고 이행된다.254
처음에는 이런 설명을 들었을 때 정말 사실인지, 가능한 일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아널드 오거스트가 연구한 쿠바의 사회보장법 입법 과정을 살펴보면 쿠바에서는 정책 결정 과정에서 광범위한 국민의 의견 수렴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254
사회보장법 개정의 첫 단계는 전문가와 노동자로 팀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연금 제도는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매우 중요한 제도이므로 쿠바노동자총연맹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세미나를 거친 후 이들은 노동자의 의견을 수렴해나갔다. 이러한 의견 수렴을 통해 마련한 법률 초안은 2008년 7월 국회에 처음 발의되어 채택되었다.254
8월 5일에는 법률 초안이 타블로이드판으로 인쇄되어 공개되었다. 전국 노동자들의 의견을 수렴할 노동위원, 전문가, 국회의원들은 세미나를 거쳐 노동자들의 의견을 다시 수렴했다. 수렴된 의견을 반영해 2차 법률안을 마련하고 이를 경제 문제 상임위원회와 헌법 및 법률 문제 상임위원회 대의원들, 국회의장과 서기, 노동사회보장부 장관이 참석한 상임위원회 연석회의에 제출했다. 이 회의에서 위원들은 법안을 검토하고 내용을 수정하고, 12월 27일 의회 전원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그리고 이듬해 2009년 1월 22일 ‘사회보장에 관한 법률 105호’가 공포되었다.255-256
이 과정에서 쿠바 노동자의 93.8%에 해당하는 308만 5,798명이 총8만5,301번의 회의를 거쳤다. 이처럼 쿠바는 입법 과정에 풀뿌리 민중이 참여한다. 이에 대해 한 쿠바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모든 쿠바인은 정치가가 아니라도 어떤 경로로든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256
쿠바 사회보장법 개정 과정
사회보장법 개정을 위한 팀 구성(쿠바노동자총연맹(CTC), 경제 문제 상임위원회, 헌법 및 법률 문제 상임위원회, 노동사회보장부) → 세미나 → 노동자 의견 수렴 → 개정안 초안 작성(국회 정기 입법 회의에 제출) → 개정안 초안 인쇄물 작성 및 배포 → 전문가 세미나, 노동자 및 국민 내용 파악 → 노동자 의견 수렴(2개월) → 수정 개정안 의회 상임위원회 연석회의에 제출, 상임위 논의·수정 → 의회 입법회의, 법률안 채택 → 법률 공포
투표함을 지키는 쿠바 학생들
어떤 이들에게는 선거일이 예정에 없던 ‘쉬는 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쿠바 초등학생들에게는 정반대 상황이다. 쉬어야 할 일요일에 쉬지 못하고 투표함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쿠바에서는 선거를 일요일에 진행하는데, 선거관리위원회가 구성되기는 하지만 투표함을 지키는 일은 선거권이 없는 학생들 몫이다. 2017년 쿠바 방문 당시 마침 시의원 선거가 있어서 쿠바인들이 투표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투표소에는 교복을 입은 초등학생들이 여럿 있었는데, 고학년으로 보이는 학생들은 두 명씩 짝을 지어 투표함 옆에 서 있다가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으면 오른손을 들어올리며 구호를 외쳤다. 저학년 학생들은 의자에 앉아 투표 과정을 참관했다. 곧고 바른 자세로 투표함 옆에 줄곧 서 있는 일도, 의자에 가만히 앉아 참관하는 일도 초등학생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자세가 흐트러지기도 하고 친구와 장난치기도 하면서 어른들의 투표를 보고 배우고 있었다.
선거가 있고 며칠 후 초등학교에 방문해 선거일에 투표함 지키는 일을 한 학생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더니 대부분 학생이 손을 들었다.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묻자 “쿠바 혁명을 지키는 일에 참여해 기분이 좋았어요”라는 무척 어른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어릴 때부터 철저한 정치의식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추측해볼 수 있었다. 그런가하면 “투표함 지키는 활동을 하면 상장을 줘요”라는 초등학생다운 대답도 있었다.257-258
지금은 20~30대가 되어 교복 입고 선거일에 투표함 지키는 일을 할 수 없게 된 쿠바인들에게 학생들의 선거일 활동에 대해 묻곤 했다. 다들 선거일이면 투표소에 가서 투표함 옆에 서 있다가 어른들이 투표할 때마다 “투표Voto!”라고 구호를 외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활동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투표는 모두가 참여해야 하는 중요한 행사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보고 배워야 해. 그래서 일부 학생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학생이 그 활동에 참여하도록 해. 우리 지역에서는 2인 1조로 한 시간씩 활동했어.”
어른들에게는 선거권을 행사하는 날이지만 선거권이 없는 학생들에게는 그저 휴일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쿠바의 높은 투표율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것도 아니고 그냥 저절로 생겨난 현상도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보고 듣고 배운 결과이다.258
[출처] 거꾸로 가는 쿠바는 행복하다 - 저성장 고복지, 쿠바 패러독스의 비밀을 찾다
배진희, 시대의창 2019.